나는 대사관의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20대 중반의 미모의 시녀장에게 인사를 듣고 그녀의 미모에 한번 놀라고 그리고 내가 기억하던 시녀장이 아니란것에 한번더 놀라며 물었다.
"이렇게 마중나와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죤입니다."
"네, 여기 계시는 동안 에라드군이 곁에 있겠지만 지내시는 동안의 일들은 제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근방에 있는 성묘교회에 저녁 기도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랜만에 오신 김에 성묘 교회에 한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성묘교회에 가서 폐하를 뵙고 모시고 오겠습니다."
"네, 그러면 머무르실 방과 갈아입으실 옷, 목욕과 식사를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녀는 다정한 모습으로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미소에 나는 조금 망설이며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시녀장의 거취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혹시 엘라 할멈은 이제 은퇴하셨나요?"
"네, 마틸다 위체경 이후 오랫동안 폐하의 시녀장이자 왕자님의 유모로도 일해온 엘라 버틀러 시녀장은 작년 말에 은퇴했습니다. 런던에 계신 아드님께서 늦게 득남을 하셔서 손자를 안아달라는 요청을 하셨더군요. 따님이시던 안나 왕비님이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런던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시녀장님께서도 손주 얘기에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망설이다 폐하께 은퇴를 요청하셨고, 폐하는 흔쾌히 허락하시고 두둑한 퇴직금과 함께 돌아가는 뱃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아아… 그랬죠. 항상 안나 숙모의 얘기만 나오면 눈물지으셨던 게 기억나네요. 폐하께서 저에게만은 다른 일반 가정의 어머니들과 다름없이 직접 양육을 하셔서 유모로서의 추억은 저보단 동생들이 더 깊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저 역시 정도 많이 들었는데 중간에서 한번 만나뵈었으면 좋았을 것을… 뭐, 이미 지나쳐버렸으니 지금은 무사히 런던에 도달하시길 바라는 것 밖에 달리 할건 없겠군요. 루치아 시녀장님은 근데 예전에 폐하를 모시던 분은 아니셨나봐요. 10살때까지 폐하를 모셨던 시녀분들은 제가 대충 다 기억하는데 루치아 시녀장님은 처음 뵙는 것 같네요."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사실 폐하의 곁에서 그리 오랫동안 모시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시녀는 아니었고, 이베리아 종교 전쟁을 계기로 폐하의 은혜를 받아 목숨을 건지고, 곁에서 모실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경력이 너무 짧아 정식 시녀장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체제중 이곳에 파견된 시녀들중에서만 임시로 시녀장을 맡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말에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제국의 지존으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수 있는 어머니지만 저렇게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구해졌다는 얘기를 들을만한 일을 하신게 있었던가? 나는 조금 농담삼아 가볍게 물어봤다.
"폐하께서 시녀장님의 목숨을 구했다라. 잘 연상이 안되네요? 자기 목숨가지고 장난치시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으신 폐하인지라, 혹시나 사건에 휘말리시게 된걸 구해준걸로 오해하신거 아닌가요?"
그러나 나의 말에 루치아 시녀장은 조금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저를 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구원을 주지 않으셨고 인간들은 다들 외면하기 급급했던 그 지옥의 땅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멈추시고 저희들을 구하셨습니다."
그녀의 진지한 말에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고, 내 뒤에 서있던 멜리장드가 한걸음 나서며 물었다.
"설마… 시녀장님, 혹시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멜리장드의 말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멜리장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픈 기억을 들춰버린 것 같군요."
"아닙니다. 왕자님은 물론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니깐요.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되려 괜한 얘기를 해서 평화의 도시에 오신 귀빈들의 심경을 어지럽힌 것 같군요. 이제 해가 져가니 폐하를 뵈시려면 서둘러 성묘 교회로 가보심이 어떠실까요?"
멜리장드는 못내 송구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 옷자락을 잡아당겨 발걸음을 돌렸다. 성묘교회로 가는 길에 나는 멜리장드에게 물었다.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이 무슨 얘기지? 명칭을 보니 이베리아에서 있었던 일인가 본데, 왜 그렇게 당황해하면서 놀라는거야?"
나의 질문에 멜리장드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산타 카탈리나는 이베리아 종교 전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 중에 하나입니다. 사라고사에 위치한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은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유서깊은 전통과 역사를 가진 수녀원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수도원들이 교황의 아비뇽 유수 사태때 세속군주들의 영향으로 사재를 축적하는 등의 부정을 저지르는 시국에도 드물게 빈자들을 구하고, 청빈함과 엄숙함을 모범으로 삼고, 수사들의 출입이 없는 폐쇄수도원으로 머무르지 않고 지역의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존경받는 장소였지요. 그렇게 된 것은 당시 수녀원장이 이베리아에서는 드물게 앙리 쿠시 추기경이 주도한 교회 개혁의 지지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 수녀원은 전쟁이 터지면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하시려면 우선 이베리아 종교 전쟁에 대해서 우선 설명을 좀 드려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앙리 쿠시 추기경의 제자였던 신임 교황의 클레르몽 선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국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교회를 세속에서 분리하려던 경향에 반발하던 당시 세속군주들은 현직 교황을 공격하기 위해 교황이 곤경에 처할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고, 수많은 신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제들의 여론을 모아 교황을 압박했죠. 결국, 그들 보수파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요구에 견디지 못한듯 보였던 교황은 1차 십자군이 선포되었던 클레르몽에서 관련 입장 발표를 한다고 통보했고, 보수파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로 여겼죠. 하지만 신임교황이 그곳에서 선언한 것은 새로운 십자군이 아닌 그동안 성지에서 저지른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대한 무슬림과 유대인들에 대한 사과였습니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었던 대형사고였죠.
보수파들은 사탄의 졸개들에게 사과하는 교황은 물러나라고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움직였죠. 기존 교황을 무시한 대립 교황을 선출해버린 겁니다. 그 후로는 왕자님도 대략은 아실겁니다. 앙리 쿠시 추기경은 노구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수파들의 작당에 분노하여 방문하고 있던 비텐베르크 궁성교회의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서 그 사태에 기름을 끼얹어 버렸죠. 보수파는 개혁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유럽이 두동강이 나서 혈전이 벌어질꺼라는 초기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이베리아 지역의 국지전으로만 진행되었습니다. 북유럽의 왕들은 러시아와 리투아니아의 정교도와 몽골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처지라 강하게 보수파의 입장을 지지할수 없었고, 제국과 멀리 떨어진 헝가리와 폴란드는 교리적인 항의 서한을 보내기는 했지만 무력동원을 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죠. 사건의 중심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보다 드쎈 일부 선제후들이 되려 개혁파를 지지하며 황권을 실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되려 내전이 시작되었고, 오직 한심한 샤를 국왕이 영토를 반이나 털리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제국에 복수를 노리는 프랑스와 레콩키스타 운동으로 인해 이교도와의 협상을 받아들이는 걸 죽음과 동의어로 여기던 이베리아의 왕국들이 제국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내 기준으로도 어렸을 때의 일이었던 그 전쟁을 바로 눈앞에서 본것처럼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프랑스는 순식간에 끝났죠. 어리석은 샤를 국왕은 앙주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사실을 잊고 군사를 일으켰다 잉글랜드와 제국의 상비군에 전 국토가 포위된 후 고사되어 무너져버렸습니다. 멍청한 샤를은 개전 3개월만에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주해버렸죠. 그래서 결국 실질적으로 제국에 대항한 것은 이베리아의 기독교 연합뿐이었습니다. 각 기독교 왕국들은 그런 제국의 공세에 더 광신적으로 종교에 매달렸고, 그로 인해 이베리아에 살고 있던 상당히 많은 유대인, 무슬림, 그리고 개혁파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그들의 패인이 되었죠. 건축과 상업을 도맡아 하고 있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농작물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던 무슬림들의 박해는 그들의 군대가 도무지 정상적인 전투를 할수 없게 만들었죠.
그들의 병력은 제국보다 4배나 많았지만 장비는 철제무기가 아닌 돌도끼와 쇠테를 두른 클럽으로 무장해야 했고, 하루 식사는 제국군 일개 병사가 저녁에 스테이크와 치즈, 무화과, 포도주를 먹는 동안 연합군은 한줌의 귀리를 물에 불려 먹는게 하루 한끼, 그것도 장교들만 가능했다고 하더군요. 연합군의 연전연패가 이어졌습니다. 그런 가혹한 환경에 이어지는 패배는 연합군 병사들로 하여금 개혁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촉발하게 하였죠.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은 사라고사의 험한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아라곤의 어떤 패잔병 부대가 도주하다 그곳으로 몸을 피했고, 수녀원은 그런 패잔병들이 난입하는 것을 난처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계속된 패배에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패잔병들은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얘기하는 도중에 그곳이 성향적으로 개혁파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폭발해 버렸습니다.
병사들은 수녀원에 난입해서 그곳에 수녀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나이 많은 수녀들은 잔인하게 고문하고 불태워 죽였고, 젊은 수녀들에게는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그곳을 점거하고 의외로 방어의 거점이 될 입지에 주목하고 그곳을 요새화 시켜서 다가오는 제국군에 대항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점거한 넉달동안 그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감금된 젊은 수녀들은 일반인들이 들으면 구토할만큼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맙소사… 그러면 루치아 수녀님도 설마…"
"흔치 않은 그곳의 생존자이신듯 하군요. 그곳의 악몽은 넉달 후 패잔병을 추격하던 제국군 기병대가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야 끝났다고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그들을 물리치고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 생존자는 십여명을 넘기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폐하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전방에서 직접 달려가셔서 그곳을 방문하셔서 생존한 수녀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구출된 이후에도 후휴증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고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생존자분을 왕자님께서 이곳에서 뵈신겁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침착하게 안정을 취하고 있던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참혹한 사건이군. 폐하의 심정도 이해가 갈 것 같아. 그날의 생존자를 곁에 둠으로 해서 평생동안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겠다는 그분 나름의 각오인거였어. 너무 젊은 분이 시녀장을 맡은데는 그런 연유가 있었군."
"흐음… 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 왕자님의 말을 들으니 폐하라면 그럴법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녀의 말에 에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의외로 폐하의 생각을 읽는데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우리 엄마보다 나을때가 있다니깐."
"자당께서 첩보관 자격 실격이란 소리를 대놓고 하시면 창피하지 않으세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하! 울 엄마 이제 집에서 실업수당 타먹거나 내가 받은 월급으로 밥챙겨 드셔야 겠네."
에라드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멜리장드에게 나는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전쟁에서 제국이 승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군. 성전을 논하며 죄없는 수녀들을 학대한 그 사건이 소문으로 퍼지면 다들 보수파를 외면했겠군,"
그러나 나의 의문에 멜리장드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음… 그건 좀 사실과 다릅니다. 상당히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세간에 그 사건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어? 그래? 역시 생존자들의 충격을 고려해서 소문이 퍼지는걸 막은건가?"
"뭐…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가 싶습니다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건 이후 터진 이베리아 종교 전쟁의 가장 미스터리한 전투인 라만차 전투에 대해 관련 정보가 모두 체스에 의해 기밀로 묶인 탓에 관련 산타 카탈리나 사건의 후속조치도 같이 대외적으로 정보가 은닉된게 많았어요."
"응? 라만차 전투? 그게 왜 비밀이야? 세상 일에 무지한 나도 에라드 형의 부친인 에라드경이 그의 용맹스러운 부하들인 퀸스가드와 함께 아스투리어스의 배신자들을 박살낸 영광의 전투로 잘알고 있는데? 거기 어디에 기밀이 있다는거지?"
그러나 나의 의문에 대해 답을 한건 멜리장드가 아니었다.
"그 전투 말이야… 사실 좀 의문이기는 한건 사실이야. 내가 몸이 이래서 전장에서 활약하는 군인이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서 좀 찾아봤는데, 이상하게 관련 전투에 대한 자료가 이상하거나 앞뒤가 안맞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더라구. 그래서 자료를 수소문해보면 체스에 의해 파기되었거나 보안등급이 낮아서 열람할수 없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고…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해서 그 사건에 당사자인 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본적이 있거든."
"어? 그랬어? 에라드경이 뭐라고 했는데?"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에라드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고 침묵으로 술만 드셨어. 조금 우울한 표정과 함께…"
"아,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시는거지?"
"다만…"
"다만? 뭔가 말하신거야?"
"자리에 일어서서 주무시러 들어가실 때쯤에 지나가듯, 혼잣말인듯 나에게 도저히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마디 하고 가셨어."
에라드의 말에 관심을 가진건 멜리장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에라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에라드 경이 뭐라고 말했는데요?"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셨어. 라만차에는, 나도, 퀸스가드도, 둘다 없었다고."
"……"
"……"
나와 멜리장드는 에라드의 말에 말문이 막힐수 밖에 없었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라만차 전투, 항상 제국군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으로 유명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이베리아 종교 전쟁이 마무리 될 무렵 라만차에 모여있는 난민들을 위로하러 전방에서 훨씬 떨어진 안전한 후방으로 위치를 옮기셨을 때, 예상치 못하게 전쟁 초기 제국군에 협력하여 현지 동맹군으로 활약한 아스투리어스 공작의 군대가 배신하여 어머니가 있는 라만차에 기습을 가했고, 황제의 시신이 돌아오리라 절망하던 최전방, 알헤시라스 기지의 사령관들은 며칠 후 무사히 돌아온 황제가 전한, 1만의 아스투리어스군을 500명의 퀸스가드가 격파하고 무사히 돌아올수 있었다는 병력비로 볼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환호하며 기세를 몰아 알헤시라스의 연합군 최후의 부대를 그날 저녁에 굴복시켜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후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지켜주시는 어머니의 불사에 가까운 생존력과, 그 압도적인 병력차를 이겨내고 적을 궤멸시킨 에라드경의 초인적인 지휘력을 칭송하며 무너지지 않는 제국의 명성에 찬사를 보내고 스스로 복종하였다. 그건, 전쟁의 경위에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도 어느 정도 들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전투에 에라드경도, 퀸스가드도 없었다고? 그게 말이 돼?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진 멜리장드와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걸음을 걸었고, 어느새 성묘교회에 도착하였다.
성묘교회는 생각보다는 아담했다. 로마에서 성베드로 성당을 본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 정도로 되려, 오면서 본 무슬림들의 성소인 바위의 돔이 훨씬 더 웅장해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 아담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순례자들과 진심으로 기도하는 수사들, 그리고 건물 여기저기 배여있는 오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어 조금은 감탄하게 하였다. 나는 멜리장드와 에라드는 밖에 남겨두고 건물로 들어가는 순례자들과 함께 살며시 교회로 들어갔다.
어머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묘교회에서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기는 해도 나름 기세가 등등하여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퀸스가드의 호위를 받으며 기도하고 있는 여성이 눈에 띄지 않기는 어려운 법이니깐. 나는 조용히 어머니의 뒤에 조금 멀리서 떨어져서 나를 알아보는 퀸스가드들에게 인사를 조용히 건내고 어머니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후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웃으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를 알아본 어머니도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와아! 죤, 내 사랑스러운 아들… 이곳에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이게 얼마만이지? 어디 한번 안아보자꾸나. 어이쿠, 이제는 한손으로 안아들고 어딜 여행가지도 못하게 커버렸구나."
나는 웃으며 나를 살며시 안아주신 뒤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이제는 나보다 키가 작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무탈하신걸 보니 안심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누가 저만한 아들과 여섯 자식을 둔 어머니라고 볼까요? 몇 년만에 폐하를 뵈니 마음이 벅차는 것 같습니다."
"둘이서만 있을때는 폐하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라니깐. 하여간 이렇게 보니 좋구나. 이곳의 시국이 조금 어수선하고 오랫동안 전념해오던 일이 잘 안풀리고 있던 와중이라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는데 너를 보니 내가 한시름 놓는 것 같구나. 나가자꾸나."
어머니는 나에게 손등을 내밀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들고 호위하듯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성묘교회를 나오며 어머니는 조용히 말하셨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거라. 아버지는 너를 미워하셔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아니란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고, 한 집안의 아버지와, 한 국가의 국왕이 같은 입장으로 자식을 대할수 없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 나이도 이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만큼 어리지 않으니 어떤 형태로든 스스로 자립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 품을 벗어나자 마자 어머니 품에 들어오게 되는 것 예상 밖의 일이지만요."
"그렇구나. 오느라 고생이 많았지? 저기 에라드군과 함께 있는 작은 소녀가 너의 동행인이니?"
어느덧 교회를 빠져나오고 밖에서 기다리던 멜리장드와 에라드가 시야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나에게 물었고, 멜리장드는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말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멜리장드 카페입니다."
"일어나렴, 멜리장드. 만나서 반갑구나. 프로방스에 머물던 시절에 필립 재상이 조카 손녀가 태어났다는 말을 즐겁게 하던걸 기억하는데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서 이렇게 만나는구나. 죤을 도와서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줘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제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뿐 달리 칭찬받을 만한 건 없습니다."
천하의 멜리장드도 어머니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멜리장드의 이마에 축복의 키스를 해준뒤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죤. 지금 막 도착해서 이런 얘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 별다른 일이 없다면 바로 대사관에 오는 대신, 예루살렘 왕궁에 잠시 다녀오지 않겠니?"
어머니의 말에 영문을 모르고 있던 내 대신 에라드가 대답했다.
"아, 살라딘공을 뵙고 오는 건가요?"
"그렇단다, 에라드. 좀전에 이곳 성묘교회의 앞에서 우연히 순찰중이시던 살라딘공을 만나뵈었단다. 얼마전에 말한 죤이 도착한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가능하다면 너를 한번 뵙고 싶어하시더구나."
"저를요?"
"그래, 손님이 입장에서 이곳의 주인에게 인사를 먼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싶구나. 이곳에서 예루살렘 궁전을 그리 멀지 않으니 멜리장드와 함께 잠시 다녀오렴. 에라드가 안내할꺼야. 그는 살라딘공과 친하거든. 그분을 만나고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고 대추야자 와인을 마시며 그동안에 밀린 이야기를 밤새도록 하자꾸나. 너무 늦지 않은 시간이라면 오랜만에 네 노래를 들을수도 있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받겠습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쫓아 예루살렘궁으로 향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으며 나는 조금 이색적인 건축물에 흥미를 느꼈다. 과거 예루살렘 왕국이 왕궁으로 쓰던 건물, 그래서인지 곳곳에 기독교 색채의 장식들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살라딘은 맘루크의 더러운 술책으로 본의아니게 이곳을 손에 넣은 뒤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진 멜리장드 여왕과 함께 타버린 궁전을 복구하고, 이곳을 그대로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멜리장드가 알려주었다. 어느새 거대한 회랑이 끝나고 소박하지만 튼튼해보이는 철문이 눈에 들어오자 시종은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도착을 소리높여 알렸다.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거라."
안에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고, 나는 소박하지만 우아하게 장식된 방안으로 들어갔다. 4층 건물 높이에 독립된 공간으로 늘어선 석주의 옆에 작은 수영장 같은 연못이 있어 아름다운 식물들이 장식처럼 어울어져 있었고, 열주의 안쪽에는 카펫으로 깔린 방의 한가운데에 이미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침실로 보이는 방문과 그 곁에 놓인 책상에 우리를 초대한 이곳의 주인이 있었다.
"평화의 도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위대한 분의 자제시여. 살라딘입니다."
나는 조금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정체를 숨기고 기습적으로 만나게 된 케두스 왕자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조금 여윈 체격을 무슬림 전통적인 복장으로 두르고 책상에서 일어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정교하게 인면으로 조형된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 가면을 둘러싼 투구가 빈틈없이 머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죤이 이곳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리고 여기 동행한 사람은 제 수행인인 멜리장드입니다. 에라드경은 이미 아실듯하고…"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맞잡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이어서 멜리장드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투구속에서 조금 기묘한 울림으로 들려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프랑크의 작은 순례자여.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제 조부님께서 생전에 기독교인들중 가장 신뢰할만한 이라 말씀하신 필립 카페경의 손녀시지요? 그리고 멜리장드라는 이름이라… 조부님이 어떤 표정을 하시고 맞으실지 궁금해지는 군요."
"제 큰조부님을 기억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는 적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조부님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직 풋내기 학생에 불과하오니 고귀하신 분의 후예께서는 하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왠지 그가 웃었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저런 가면을 쓰고 있을까? 그도 혹시 옛날 이곳을 다스렸던 문둥이 왕 보두앵 4세처럼 얼굴이 많이 흉한걸까? 어, 아닌데… 분명히 에라드는 그가 미인이라는 말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살라딘은 에라드에게 말했다.
"모시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라드경. 당신에게는 늘 도움을 받는군요."
"별말씀을… 저희에게 보내주시는 호의가 얼마인데 이런 당연히 해야 할일을 가지고 칭찬을 받겠습니까.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제국은 살라딘공에게 항상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저번에 두신 나이트 K3을 한수만 물려주심이…"
"안됩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그들의 너머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장기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게 바로 고수들이 종종 한다는 서신을 통해서 몇 달에 걸쳐 두는 장고 체스인건가? 살라딘은 에라드의 단호한 거절에 어께를 으쓱이며 할수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아, 별수없이 비숍을 버려야겠군요. 킹 A2로 두겠습니다. 자아, 이제 다음수는 어떻게 두실건지요?"
"흐음… 확실히 비숍을 먹을 찬스로군요. 하지만 조금 장고해보도록 하죠. 당분간 왕자님의 방문으로 바쁠 듯 하오니 다음수는 다음달쯤에 서신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이런, 손님들을 모시고 너무 잡담만 했군요. 앉으시죠. 다과를 드시죠. 왕자님."
나는 그의 말에 카펫위에 앉으며 작은 호기심이 일었다.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는 저 가면을 쓰고 어떻게 음식을 먹을까? 입부분은 열리는 걸까? 아니면 아예 안먹을까? 그러나 내 하찮은 기대와는 달리 그는 상식적으로 자리에 앉더니 얼굴에 손을 가져가 가면을 벗고 차를 들며 말했다.
"제 가면이 좀 어색하셨지요? 죄송합니다. 손님들에게 무례를 저질렀군요. 요즘들어 이곳 평화의 도시에 시국이 불안정하여 제 목숨을 노린 사건이 몇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의아니게 이런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는 것을 임시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는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정말, 에라드의 말처럼 조금 가는 얼굴선에 짙고 검은 머리칼과 짧은 수염을 기르고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그는 상당히 미남이었다. 정말로 여자들이라면 빠져들 것 같은 미모와 독특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면은 벗었지만 여전히 두르고 있는 얼굴을 감싼 투구덕분에 단련된 무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운 손이 우아한 예술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짙고 검푸른 눈빛이 고명한 학자처럼 보이게도 하는 이색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차와 다과를 나에게 권하며 조용히 물었다.
"오신지 얼마되지도 않아 묻는 것이 좀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이곳 예루살렘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그는 가면을 벗고 조금 낮은 저음이지만 매력적인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응? 이 목소리는… 잠시 떠오른 생각을 무시하고, 나는 멜리장드를 살펴봤다. 그것은 외교적으로 뭔가 문제가 될만한 말들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멜리장드는 별수없다는 듯 마음대로 말하라는 듯 어께를 으쓱였고,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칼을 빼들고 서로를 죽이려고 하고 있을텐데, 이곳 성지에서만은 그런 다툼이 없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을 수호하시며 모든 이들을 조화롭게 이끄신 살라딘공의 역량에 찬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 만이 모든 것은 아니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이죠. 이곳 예루살렘의 평화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듯한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몇일전 카이로에서 아이유브의 마지막 주력부대가 행한 최후의 반격이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발각되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전해오더군요. 조만간… 오랜 평화의 끝을 선언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앞서가시는게 아닌지요. 예루살렘의 평화는 살라딘공뿐이 아닌 수많은 종교의 관련된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맘루크들이 아무리 무도하다고 해도 모든 세상과 싸우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겁니다."
그는 미소지으며 다과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각국이 이 상황에 대해 정치적, 종교적 정세 변화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그런 관심을 이곳으로 모아 이 도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용하기도 하였으니깐요. 하지만 그런 각국의 세력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종교적 명분과 이곳에 거주한 신자들의 안전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제국에서는 다소 범속한 인물들과는 달리 지존이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이곳에 체류하시며 현재의 정책을 지지해주시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후의 맘루크 정권이 행할 정책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관련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각 종교와 국가에서 이곳 예루살렘에 파견한 주요 인물들과 공동 대책회의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공동회의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보수파는 제국의 개혁파를 반대하며 폐하의 참석을 거부하고 있고, 곱트교의 지도자들은 비잔틴의 정교도가 자신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정교도 사제들은 그들의 교리에 문제를 지적하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소수의 근본주의자들이 대표성을 주장하며 모든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슬림들마저도 시아파들은 저를 맘루크와 같은 수니파라는 이유로 깊게 신뢰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먼곳에서 오신 귀한 분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서 송구스럽군요."
"아, 아닙니다. 귀한 분이라뇨. 그저 추방된 왕자에게 무슨 그런 과한 표현을… 그리고 그들 종교의 세력들이 뜻을 맞추기 어려운건 이미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라딘 공께서 자책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항상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도 책임을 져야 하고 자책을 느껴야 하죠. 조부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지도자의 신념으로 여기는 문구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운것도 사실이군요.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저를 즐겁게 해주는 건 에라드경과 두는 체스밖에 없었는데 왕자님을 뵙게 되니 조금 시름을 더는 듯 합니다."
그의 말에 에라드는 어께를 으쓱였다.
"처음에 이곳에 부임해서 맡은 임무인, 거류민 권리 협상 때문에 찾아뵈었을 때가 기억나는군요. 형평성에 맞지 않는 대우는 불가능하다며 시종들을 시켜 방에서 저를 내쫗으시던 공께 제가 다급하게 외친 '나이트 A3!, 3수 후에 체크메이트!'라는 말에 놀라서 저를 쫗아내는 걸 멈추시고 2시간을 체스판을 붙들고 고민하시더니, 결국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셨지요. 그리고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셨구요."
"네에, 그리고 뭔가 위체가에서 명성을 날리시고 있으신 자당의 명성처럼 그 체스실력이시면 범상치 않은 협상력을 보여주시리라 생각했지만 그냥 체스만 잘하신다는 걸 알게 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요."
"하하하… 뭐 그러면 어떻습니까? 다리 병신이 되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될수도 없었고, 체스를 뒷세계의 실전에서 써먹을 능력이 안돼 어머니처럼 첩보관이 되지도 못했지만, 대신 얄팍한 재주로 살라딘공을 만나 기쁘게 해드릴수 있었으니 이 또한 주님이 주신 행운이라면 또 행운이겠죠."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왠지 조금 씁쓸한 느낌을 주는 에라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살라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웃고 있는 에라드를 대신해 살라딘에게 말했다.
"뭐, 에라드형은 좋은 체스 친구이니 공에게 즐거움이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보고 시름을 놓으시다니… 과한 기대시군요. 저는 음유시인을 자처하기는 하지만 제 실력이 감히 예루살렘의 에미르를 흡족하게 할만한 실력이라고는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런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왕자님이랑 다르게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요. 왕자님이 오시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고민이 잘 해결될 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흔한, 자식 사랑이 과한 어머니의 허풍으로 여겨주시죠. 아니면 폐하께서 항상 그렇듯이 이곳에서 뭔가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드시고자 하려는 와중에, 불민한 자식이라도 제 존재가 어머님의 마음의 평화를 드릴 수 있어 그것에 기뻐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어찌되었건 저는 오늘 당신을 만나게 해주신 알라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 정하신 대로 이루어지듯이 당신께서 이곳에서 온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앞으로 있을 일들도 역시 당신의 주님과, 알라께서 정하신대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겠습니다. 몇일 후에 번번히 무산된 공동 대책회의를 다시 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항상 와주시니,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둔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싸구려 가수 한명을 추가하신걸 보니 이곳에서 광대가 필요한 일이 많을 듯 합니다. 부디 마음의 평온을 가지시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곳의 주인으로 서주십시오. 다음번에 폐하와 함께 뵐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초대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나는 예를 표하고 문앞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하는 살라딘공에게 인사를 하고 궁전을 빠져나왔다. 대사관에 돌아왔을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루치아 시녀장이 준비해준 목욕과 갈아입을 옷 그리고 저녁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말린 무화과와 각종 향초를 곁들인 닭요리, 잘 숙성된 포도주는 오랜 여독을 풀고 이곳에서 보내는 첫밤에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얼마후 어머니도 오셔서 우리 모자는 오랫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하프를 타드리며 노래를 불러드렸다.
평소와 다름없었던 어느날 너는 갑자기 일어나서는 우리들에게 말했지
「오늘밤 다같이 별을 보러 가자」가끔은 괜찮은 말도 하네
그러며 모두 다같이 웃으며 따라나섰어. 빛 하나도 없는 밤길을
바보같이 다들 즐겁게 걸었지 가슴속 끌어안고있는 고독과 불안에
다같이 눌리지 않도록 어두운 세상에서 올려다보는 저 넓은
밤하늘은 마치 별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모습에 깨닭았어
언제부터였을까 별을 보는 너를 뒤쫒고 있는 내가 있었어
제발 부탁할게 놀라지 말고 들어줘 나의 이 마음을
「저게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여름의 대삼각
기억하며 하늘을 봐. 겨우 찾아낸 베가 하지만 어디에 있는거지? 알타이르
이래서야 혼자잖아 즐거워 보이는 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사실은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찾아내봐도 마음이 닿지는 않겠지
울어서는 안돼. 그렇게 꾸짓었어 강한 척 하는 난 겁쟁이라서 관심 없는 척 했었어
하지만 가슴을 찌르는 아픔은 커져만 가 아아 그렇구나 좋아하게 되는건
이런 거구나 어떡할거야? 너의 소리가 들려 너의 옆에 있는게 좋아
현실은 잔혹하기에 말할 수 없었어. 두 번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그 여름 날
반짝거리던 별 지금도 떠올려. 웃는 얼굴도 화내던 얼굴도 정말 좋아했어
이상하지?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너는 모르는 나만의 비밀
밤을 넘어서 먼 추억 속의 네가 가리켜 다정한 목소리로 같이 가자고
나의 노래를 들은 어머니는 조금 취하신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하셨다.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나. 네가 들려주는 그 노래를… 저번에 들었을 때는 아직 어린아이가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아들이 남자다운 목소리가 담겨 있구나. 감회가 새로운데?"
"그런가요? 전 항상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들리나 보더군요. 어머니에겐 철없는 맏아들이 부르는 개구장이의 노래로, 아버지에게는 한심한 후계자의 흥청망청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동전이 아까운 좀 떨어지는 실력의 음유시인의 레파토리로 들리나 보더군요."
"하나 빠지지 않았니? 아름다운 아가씨, 노래는 원래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위해 불러줘야 하는 거잖니. 네가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러주고 유혹하려는 처녀는 네 노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하하… 그런 감미로운 이야기는 좀 이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가씨들도 나름 생각이 있는데, 왕가에서 쫓겨나서 제 앞가림도 못하고 어머니 밑에서 빌붙어 사는 나 같은 녀석의 노래를 좋아해줄까요?"
나의 손사래에 어머니는 아라비아풍 카펫과 쿠션에 뉘인 몸을 비스듬이 일으키며 나를 보며 말하셨다.
"네가 부르는 그 노래에서 나오는 베가와 알타이르는 저 너머 동방의 땅에서는 베짜는 아가씨와 소모는 청년의 별이라고 하더구나. 그리고 그 두사람은 연인이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지. 서로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던 두 사람의 마음은 까마귀에게 전해져 수많은 까마귀가 모여 두사람이 만날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단다. 그 까마귀가 바로 데네브지.
아들아, 마음의 그늘을 지워버리거라. 힘들수록 차라리 웃거라. 엄마는 너에게 엄마이기 이전에 황제로서 다가갈수 없는 입장이란다. 그래서, 네가 마주한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줄수가 없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단다. 나의 아들은 자신의 앞에 직면한 일에 도망치거나 무너져버리는 대신 웃으며 걸어나갈 것이라는 것을…
네가 이번 추방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크단건 알고 있단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원망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수록 담대해지길 바란단다. 너무 힘들면 차라리 네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부르렴. 그 노래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혼신을 다해 노래하면 너의 소리가 저 별에 닿고 그 마음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낼지도 모르지. 그게 너무 먼 이야기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거란다."
나는 조용히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하프를 바라보았다. 애써 미소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란듯 행동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내 마음을 다 파악해 버리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못 숨기겠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많이 떨쳐냈으니깐요. 애초에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되려 어머니에게 근심을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제는, 더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살기로 했어요. 당장은 어머니에게 신세를 지겠지만 조만간 저 스스로 살아갈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때는 아마도 말씀하신 것 처럼 노래 실력이 제 저녁식사의 질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 좀더 연습하고 갈고 닦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맘에 드는 아가씨를 꼬시기 위해서도 좀더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요."
어머니는 나의 말에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래, 나의 착한 죤… 넌 항상 엄마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었지. 근데, 맘에 드는 아가씨가 생겼니? 설마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성지순례를 온 순진무구한 처녀를 넘어뜨린거야? 나의 바람둥이 아드님?"
나는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문득 오늘 만났던 그 그리스 아가씨가 떠올랐다. 꽃들은 잘 가지고 돌아갔을까?
"하하하… 그럴리가요. 그 아가씨는 되려 순진무구한 순례자라기 보다는 성지를 위해 싸우는 신화속에 나오는 용감한 여기사님같던데요? 멋지게 꽃을 바치…진 못하고 그냥 꽃을 줬는데, 토라져서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하지만 꽃을 내팽겨치지도 않았고, 아직 내 노래를 들려주지도 못했으니 아직 기회는 있는거겠죠?"
"흐음, 등잔에 녹색등갓을 씌워야 하나? 잘해보렴. 할머니 소리 듣는 건 두렵지만 아들의 여자친구와 친구처럼 같이 사이좋게 쇼핑하는 건 나름 엄마가 꿈꾸는 로망이란다."
"하하하… 그 쇼핑에서 대화 주제는 나에 대한 험담이고, 저는 그 뒤에서 산더미 같은 가방들을 들고 따라다녀야 한다면 좀 거절하고 싶은데요."
첫댓글 1등이다!
카톨릭에 의한 공존이라... 과연 저 예루살렘의 평화와 번영은 유지될 수 있을지...
그보다 신생제국의 몰락이 이곳에서 시작되지 않을지...,
아악.. 3등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평온해서 좋지만 그렇다면 양이 많아지지 않았겠죠ㄷㄷㄷㄷ
사진 없이 진행되는 연재
딱 보고 k8086님이 다시 시작하신 것을 알아챘지요.
속편이라니 매우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