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 산이초치요 카페에서 참조함)
만촌2동주민센터-형제봉-제봉-동대사-모봉-연호산-
모봉(149.3m)과 연호산(129.6m)은 대구남부주차장에서 경산 넘어가는
담티고개 왼쪽에 위치한 산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2군사령부 뒷산인 형제봉(192.5m)과도 연결되어 있다. 담티고개 오른쪽의
두리봉(212.8m) 능선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모봉(149.3m)은 국가기관, 연호산(129.6m)은 군부대 시설이 산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만촌역 4번출구 를 빠져 나온후횡단보도를 건너면 타이어뱅크 를 만나 왼쪽으로
약50m 정도 진행하다보면
만촌2동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나고 도로 따라 약 100m 정도 걸어가면
형제봉 들머리 안내도를 만난다
들머리 안내도
산길로 들어서면 걷기좋은 편안한 숲길을 만나고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산불초소를 지나서
그늘진 숲속길이 이어진다
잠시 가파른 오르막길
철조망 옆길을 따라서 오른쪽 방향으로 우회해서 걸어가면
운동기구가 놓여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형제봉을 가기 위해서는 왼편 군부대 철조망 따라서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진행하다보면 왼편으로 높은곳에 위치한 형제봉(192.5m) 은
군부대 때문에 그냥 지나쳐야한다.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
안부에 내려선후
제봉 450m 방향 으로
편안한 능선길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서면 능선에 올라선다
능선에 올라선후 왼쪽 방향으로
제봉 (170.9m ) 정상에 세워진 안내판 동대사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고모 건강쉼터 방향 (오른편) 으로
소나무 숲길
사각정자 쉼터를 지나고
잠시뒤 내려가야할 동대사가 내려다 보인다.
계속 능선길 따르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 돌탑이 보이는 오른쪽방향으로
돌탑을 지나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간다
하천을 건너서 올라서면
서당지 앞에 올라선후에 오른쪽 동대사 방향으로
포장길 따라 잠시 걸어갑니다
동대사 입구 도착
무료커피 한잔씩 뽑아먹고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후에
다음에 올라야할 모봉을 가기위해서는
화살표 방향으로
약 100m 정도 포장길 걸어가다가
오른편으로 모봉 입구를 만난다
모봉 440m 방향으로
잠시 오르막길
능선길 따르다가
100m 정도 가파르게 올라서면
헬기장이 있는 모봉 정상에 올라선다
모봉 (149.3m) 정상
▼ .모명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만촌동 715-1)에 세워져 있는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으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된 뒤 귀화한 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에서 살다가 계산동으로 옮겼으나,
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 밑으로 주거지를 다시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다.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다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모명재
고모령
박시춘에 의해 작곡되어 가수 현인에 의해 1946년에 불린 “비내리는 고모령”은 일본제국주의 시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슬픔을 담은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유행가였다.
고모령은 대구시 동촌 유원지 부근에 있는 인터불고 호텔과 만촌 자전거 경기장 사이의 길을 통해서 고모리와
고모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이곳에 전해지는 전설은 유행가의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다. 고모령과 관련이 있는
전설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제국주의 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식과 어머니의 일화를 간직한 전설이 그것이다.
고모령에 얽힌 전설 중 “오누이 힘겨루기” 는 전국에 걸쳐 전승되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이 마을에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남매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나라에서 그 힘을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특히 누이동생은 여자였지만 오빠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대단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누이동생을 더 칭찬하고 아끼는 것을 본 오빠는 점점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흥, 계집애 주제에 남자인 나보다 힘이 셀 리가 없는데, 사람들은 왜 동생만 이뻐하지? 그렇지, 내가 누이와
힘겨루기 시합을 해서 내가 이기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져먹은 오빠는
어머니가 외출한 날을 골라 시합을 하리라 작정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볼일을 보러 외출한 틈을 타서 오빠는 누이동생을 들판으로 불러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남매가 사는 마을 주변에는 산이 없고 평지만 있었다.
들판으로 불려나온 누이동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오빠는 누이동생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 살살 약을 올렸다. “내가 요즘 보니까 네 힘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런다.” 약이 오른 누이동생은 오빠의 계획에 말려들어 그만 자신의 힘이 줄어들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빠와 힘겨루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오빠는 못이기는 척 하고 동생과 내기를 시작했다. 들판에 있는 흙을 파다가 산을 쌓는 것인데,
해질 때까지 누가 높게 쌓는가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흙을 퍼날라다가 산을 쌓기 시작했다.
오빠는 저고리의 앞섶으로 흙을 날라다 산을 쌓았고, 누이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다 쌓았는데,
해가 질 때 서로 비교를 해보니까 누이동생이 쌓은 산이 훨씬 더 높았다. 이에 심술이 난 오빠는 누이동생이
쌓은 산을 발로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두 개의 봉우리 중에 뭉툭하게 된 것이 누이동생이 쌓았던 봉우리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이 두 봉우리는 형제봉, 혹은 남매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남매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에 집을 나와 버렸다. 마을을 나와서 작은 고갯길을 넘어가던 어머니는 차마 그냥 갈 수 없어서 그곳에서
고개를 돌려 남매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고 하여 고모[ 顧:돌아볼(고), 母:어미(모) ] 그래서 이 고개를
고모령(顧母領)이라고 하고 동네 이름을 고모동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고모령 옆에 있는 형제봉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줄기가 북쪽으로는 낙동강에 닿아 있고,
동쪽은 경산벌판이며, 서쪽은 대구가 되는데, 이곳에서 대구시 전체가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전략상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모봉에서, 좌 형봉. 우 제봉 (지도상에 고모령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고모령은 대구 파크호텔 뒤편에서 팔현마을로 가는 조그만한 고개마루다)
한편 이 고모동은 경부선이 지나는 곳으로 팔(八)자 모양으로 된 고갯길이 있어 팔현 마을 또는
조선초기 전백영이라는 선비의 후손이 산소 부근에 향나무를 심었는데 그 향나무가 팔(八)자 모양으로
자란다고 하여 팔현이라해서 팔현 마을이 있으며 그리고 고모역에는 6·25 사변때
전방에서 부상병을 실은 병원차 3대 중 2대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김해와 대구에 있는 육군 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하며 이때 다니던 기차는 독립호와 해방호 라는 증기 기관차였다 합니다.
또 대구에서 고모령을 넘어 영천쪽으로 가려는 피난민과 영천에서 대구쪽으로 가려는 피난민이 뒤엉켜
큰 혼잡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고 그때의 철길만은 아직도 열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가수 현인씨가 대중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 을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으며 고모령은 대구시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경부선 열차가 지나는 고모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