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 시인광장 2015년 7월호 신작시 (통호 제77호)
새의 데칼코마니
정혜선
노란 점박이 검정 찌르레기 한 마리
오래오래 걸어와서는
그렇게 천년을 지나온 듯
서두르지 않고 내 주위를 한 바퀴 돕니다
홀로 헤매는 그림자 다 몰고 와서
발자국마다 가득가득 채워 넣습니다
외로움이 수도 없이 바닥에 찍힙니다
하늘 가까이에서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새의 숙명
소나기 쏟아진 초여름
햇살이 반짝 얼굴을 내민 오후
새는 길게 늘어뜨린
제 그림자를 쪼기 시작합니다
그림자가 점점 짧아집니다
그림자를 버린 새들은
쉽게 풍화되지 않습니다
거대도시 인공 연못에는
빛의 대칭점들이 흥건하고
선명하게 빛나는
새의 날개도 젖어 있습니다
새는 제 그림자를 날개 깊숙이 감추고
왔던 길을 되짚어가듯
석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망각하지 않으려
쉬지 않고 걸어온 길에 찍어놓은
데칼코마니의 발자국
다시 마파람이 불어옵니다
물 위에서 오래 머뭇거리는 내 그림자도
동심원 속에서
같은 그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5년 7월호 발표
정혜선 시인
경남 진주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졸업. 2015년 계간 시 전문지 《포엠포엠》 여름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2013년 한일대역시선집 『바다꽃이 피었습니다』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린 나고야 한일문학교류회에서 참가시인의 시 일부를 번역. 2013년 10월 일본의 시문학지 《우추시진(宇宙詩人)》 19호에 문태준 시 「바위」 외 4편을 번역 소개, 같은 호에 본인의 시 「메두사호의 뗏목」을 일본어로 게제하며 일본 문학지에 데뷔. 현재 워싱턴에 거주하며 번역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