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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시기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합니다.
‘대림’(待臨)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입니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지요.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새롭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대림 첫 주일부터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됩니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해의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한편 대림 시기에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다립니다.
이런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납니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의 준비와
‘두 번째 오심’인 종말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에는 ‘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지만 ‘알렐루야’는 노래합니다.
대림 시기 역시 회개와 보속의 시기지만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례 때 사제는 속죄를 뜻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습니다.
그러나 대림 제3주일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 제의를 입기도 합니다.
- '굿뉴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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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이사야서의 말씀 63,16ㄹ-17.19ㄷ; 64,2ㄴ-7>
16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3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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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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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순도 높은 기다림>
또 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군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얼마나 힘겨웠던지, 얼마나 길었던지, 또 얼마나 지루했던지
눈만 뜨면 ‘이제 얼마 남았지?’ 하고 꼬박꼬박 날짜를 지워나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잠깐 동안 유학 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이꺼,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 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 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 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 시기,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 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 대림 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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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난 목요일에는 KBS 방송국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전철을 타고서 여의도역에 내렸는데 마침 지하철 공사 중이었어요.
그리고 친절하게도 KBS 방송국은 4번 출구로 나가라는 안내문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4번 출구로 나온 순간, ‘여기가 어디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라디오 출연 때문에 3년 동안 다녔던 길이었는데 불구하고 너무나도 낯선 거리였습니다.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길이 바뀌었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안내문에 4번 출구로 나가라고 했으니까 그 말만 믿고서 쭉 앞으로 갔습니다.
잠시 뒤 방송국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는 KBS 방송국 별관이었습니다.
제가 가야할 곳은 KBS 방송국 본관이었거든요.
결국 저는 제가 처음에 나왔던 지하철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판대에서 물건을 파시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으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KBS 방송국 가려면 어디로 가야지요?”
“요 앞이야.”
“아주머니, 요 앞이 어딘데요?”
“여의도 공원 앞.”
“그럼 여의도 공원은 어디 있는데요?”
“요 앞.”
솔직히 화가 좀 났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저와 조금도 시선을 맞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거든요.
만약 눈으로라도 요 앞을 가리켰으면 요 앞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지도 않고 요 앞이라고 하니 어딘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만약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이 길을 물어본다면 어떠할까요?
아마 밖으로 나와서 그 사람이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도록 친절히 가르쳐주겠지요.
그런데 자신과 상관없다는 이유로 또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다른 분에게 물어봐서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방송국에 갈 수 있었지만,
이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생각하면서 제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때로는 이렇게 불친절한 모습을 간직했었거든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등으로
사람들에게 불친절함을 보여준 적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현재에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께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뜻을 충실히 지키는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내 기분에 좌우될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에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기까지 전 생애를 통해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오늘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해서 교회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새해인 오늘 다시금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보면 어떨까요?
그래야 올 한 해를 보다 더 보람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날마다 퇴보한다.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자)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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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순결한 창녀>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가정 먼저 정복해야 했던 도시가 예리고였습니다.
예리고는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라 감히 쳐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 두 명의 정탐꾼은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라합만이 여호수아가 보낸 파견자들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예수’와 같은 이름이고 ‘해방자’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합이라는 창녀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옛 교부들은 하나같이 라합을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한 때는 다 이방의 신들에게 몸을 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는 속옷을 벗어 알몸을 드러내었고
내 눈에 역겨운 우상을 몸 바쳐 정부들과 놀아났으며
자식들의 피를 우상들에게 바쳤다.”
(에제 16,36)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신부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섬기면 성경에서는 매번 ‘간음’이나 ‘매춘’으로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라합은 죄의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 모두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구해주고 탈출시켜주며
예리고를 함락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여호수아는 라합의 약속대로 그녀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려줍니다.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시작되는 첫 대림주일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 새 해의 첫 날입니다.
며칠 전까지도 계속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복음이 나오더니
새해 시작하는 날부터 또 다시 깨어있으란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깨어있음이 영성의 시작과 끝인가 봅니다.
창녀 라합은 죄 속에서 살았지만
구원이 오는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과 가족들도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예리고의 한 창녀를 선택했고
그 창녀는 무엇을 했기에 그런 선택을 받게 된 것일까요?
창녀는 죄인 중에 죄인이고
하느님은 그 죄인을 택하셔서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라합은 사실 정말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니고
예리고에서 ‘스스로 가장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을 찾아 머무십니다.
태어나시자마자 여물통에 뉘이셨고
커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 당신이라 하시고
마지막 순간도 태어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해서 싸늘히 식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안에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비천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9)
성모님만큼 깨끗한 사람이 없었는데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함을 보시고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다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는 성서 말씀이 공연한 말씀인 줄 압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신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 4,5-6)
하느님은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되
겸손한 영혼을 더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비천하고 큰 죄인이라고 보는 것은
주님을 모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면 좀 위선적인 것같이 들릴 수 있지만 그들은 정말 그렇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빛에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까이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더러움을 더 크게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멀리 있을수록 ‘내가 잘못하는 게 뭐가 있어?’라고 하며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만족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은 그분이 들어 올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기도가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들어 올려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고도 자신의 비천함을 더 느끼고 더 겸손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는 잘못한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항상 기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대답 대신 "태양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인간인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는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다면 제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도 소용없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자네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그 분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꾸준한 기도로 내 안에 그 분의 자리를 마련해 놓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순결한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교부들이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해오던 말이었습니다.
“(신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검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에 두른 휘장처럼 아름답다.”
(아가 1,5)
우리들은 비록 죄로 검어졌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야만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교회도 모두 검은 죄와 영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순결한 창녀’입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기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습니다.
스스로 순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창녀처럼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겼음을 고백할 때만이
순결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회개하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결한 처녀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깨끗하신 성모님을 택하시어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대림이고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들,
이번 주도 깨어있으란 말을 듣습니다.
깨어있으란 말은 본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나의 비참한 처지를 보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빛으로 내 자신을 보아야
내 자신이 주님을 모시기에 얼마나 부당한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당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순결한 성체를 모시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호세아가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호세 1,2-3 참조) 그녀를 순결하게 한 것처럼
죄인들인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를 더 순결하게 하시기 위해 더러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비천함을 확실히 깨닫고 깨끗해지도록 노력합시다.
- 로마 유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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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전례력으로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오는 이 시점에서 제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리고 대림절을 맞이하는 저의 마음은 더욱 착잡합니다.
새 해가 올 것을 기다려 기꺼이 새 해를 맞이해야 하는데
한 해가 가니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새 해를 맞이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노처녀가 신랑도 없는데 나이만 자꾸 먹는 것과 같은 심정이랄까요.
이렇게 얘기하면 반발할 노처녀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구 많은 비유 중에 왜 노처녀 비유를 드느냐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 더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비유의 부적절성을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선 왜 내가 노처녀냐고 따질 것입니다.
나는 노처녀가 아니라 한 여자이고 여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굳이 여자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나는 처녀가 아니고 노처녀는 더더욱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처녀는 결혼을 전제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일컫고
결혼 상대자인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지요.
그중에서 노처녀는 기다리는 남자를 못 만나
아직도 기다리는 처량한 여자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처량하기는 하지만 노처녀입니다.
노처녀라고 하는 것이 너무 거북하면 오늘 복음에 비유처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무튼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제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신랑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는 종의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제가, 비유하자면,
노처녀가 아니고 아줌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줌마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이미 신랑을 만나 같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만나야 할 신랑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미 만났으니 정말 기다릴 필요가 없을까요?
그러면 신랑은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처녀에게로 가지 않을까요?
들은 얘기지만 결혼한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서방이 돌아올 때 아내가 기다리지 않는 것이랍니다.
잠자다가 운동복 차림의 부스스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것이지요.
진하게 화장하고 화려한 의상을 차려 입고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오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성숙한 사랑은 참으로 기묘한 줄타기이고 조화입니다.
새 옷을 입듯이 맞선을 보듯이 편치 않아서도 아니 되고
종이나 아랫사람 대하듯이 아무래도 되고 막 대해서도 아니 됩니다.
이미 만났고 이미 서로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면서도
늘 기다리고 늘 새롭게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편이면서 아직도 연인이고 친구이면서도 주인이게 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사랑의 관계이고
이것이 ‘이미 벌써,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기다림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아직 아니 만난 사람처럼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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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대림의 기쁨>
마침내 대림초에 불이 붙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대림초에 기쁨의 불이 붙었음을,
성탄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출발하셨음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특별 영성 훈련 기간인 기쁨의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대림초가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기쁜 마음을 대변합니다.
이 기쁨은 무슨 색깔일까요?
요즘 수도원 동녘 하늘, 태양 떠오르기 전의 햇빛에 물든 아침 붉은 노을에 이어
떠오르는 태양의 아름다움 역시 환상적입니다.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
우리 마음의 색깔도 이와 똑같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붉게 물들어 있습니까?
새벽 대림 1주 성무일도 때 역시
우리는 온통 오시는 주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대림의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 모두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대림시기를 맞이합시다.
주님을 기다립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성탄에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들이요,
마지막 종말의 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이요,
매일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오시는 주님께 대한 응답이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기다리는 행복을 사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정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기다리는 분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누구를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려야 활력 넘치는 삶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유일한 대상인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어 활력 없는 무기력한 삶입니다.
허무와 무의미한 삶에 길 잃어 방황입니다.
오늘 우리 수도자들은 ‘주님을 찬미하라.’ 목청껏 노래하며
주님을 기다렸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우리 영혼 주님을 더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상실한 자들을 보는 이사야의 연민의 마음에 저절로 공감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하십니까?
주님,
돌아오소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사라지면
마음은 저절로 무디어지고 하느님 경외하는 마음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어 우리 모두는 나뭇잎처럼 시들고,
우리의 죄악은 바람처럼 우리를 휩쓸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갈망하고 기다리는 주님은
바로 이사야가 고백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예로부터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이런 주님이신 아버지를 잊어버려 불행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기쁨의 대림 시기입니다.
하여 옛 초대교회 신자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기다릴 때 저절로 깨어있기 마련입니다.
반가운 사람을 기다리며 잠자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깨어있으라는 말이 무려 네 번 나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진정 영적 삶을 추구한다면 예외 없이 깨어 있는 삶을 삽니다.
대부분의 문제들 영혼이 깨어 있지 않을 때, 잠들어 있을 때 발생합니다.
이 세상에 진정 깨어 사는 사람들 얼마나 되겠는지요.
하루 중 얼마나 마음의 눈 환히 뜨고 깨어 지내는지요.
마음의 눈 환히 뜨고 깨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음입니다.
그러나 막연히 깨어 있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동기가 있을 때 깨어 기도합니다.
새삼 깨어 있음과 끊임없는 기도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이 기도할 때 늘 깨어있게 되고,
늘 깨어 있을 때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깨어 있음 자체가 최고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늘 깨어 있을 것을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책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막연히 깨어 기도만 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하여 여기 우리 수도자들은 항구히 주님을 기다리는 정주의 삶 중에도 늘 깨어 기도하면서 일합니다.
기도의 이상만 있고 노동의 현실이 없으면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가짜 영성 생활입니다.
각자 주어진 현실의 소임에 충실하면서
늘 깨어 기도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땅의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하늘의 이상을 향해 쭉쭉 뻗어가는 나무의 영성이 참 영성입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 깨어 기도하게 되고
깨어 기도할 때 비로소 환상은 걷혀 지금 여기 제자리를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허무와 무의미, 일상의 근심과 걱정의 환상의 안개 말끔히 걷힌
투명한 현실인 지금 여기를 살게 됩니다.
모든 나뭇잎들 다 떠나보내고 나목의 본질로 남은 수도원의 겨울 배나무들처럼
단순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분명히 깨어
자기 책임을 다하다 주님을 맞이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 와 너희가 잠자는 일이 없게 하여라.”
과연 주님이 오셨을 때 잠들어 있다면 얼마나 민망할까요.
그러니 늘 깨어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 충실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 어디도 아닌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책임의 자리 떠나면 그 어디에서도 주님을 못 만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우리 모두는 어느 모로 보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워졌습니다.
하여 이 은총의 대림 시기,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참 좋으신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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