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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4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곧 당신이 우리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사랑하여 방문하려고 하시니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은 성령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당신의 인사말과 함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가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 마니피캇을 부르며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초월자이십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을 초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준에 있으면서 천상의 분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분께서 그러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계속 거름을 줄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에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지 않아 하느님의 계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원할 때, 초월자의 도움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분을 뵈옵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는 마치 공포영화에서 인형이 움직이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인형 안에 배터리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초월자는 사랑이신 하느님입니다.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게 됩니다.
노숙인들의 친구 김하종 신부가 『사랑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1992년 맑고 화창한 계절의 어느 날 당시 30대 초반의 신부님은 성남 상대원동과 은행동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빈민 사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며 집에 찾아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였습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있는 오십 대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아저씨는 이십 대 시절,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이웃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고 아니면 굶는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고 했습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요강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우선 요강부터 닦았습니다.
방 청소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신부님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어떤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사실 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지만, 그 일을 하려고 할 때 용서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 행복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를 청했습니다.
그럴 때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4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유한하며 속절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내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며, 언젠가 맞이하게 될 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부질없습니다.
한때 목숨바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불같은 사랑도, 매력적이고 찬란하게만 비춰지던 선망의 대상들도,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떠나갑니다.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가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목말라하는 영원성, 불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복음 14장 16~17절)
10년, 30년, 50년이 아닙니다. ‘영원히!’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곧 떠나 가시지만 당신과 하나이신 분, 당신과 일심동체이신 분,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그분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때로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외치지만 실상 우리는 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울고 있는 우리를 위해, 때로 어머니처럼 우리 곁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보살펴주시며, 우리를 양육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파견되신 분,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누차 강조하신 바지만 조만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제자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성찬례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곧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머무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아무래도 스승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신 후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서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제자들끼리 더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떠나보냄으로써 또 다른 예수님이자, 예수님의 분신과도 같은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분이 주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각자가 충만하게 살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일>
(2023. 5. 14.)(요한 14,15-21)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15-21).”
여기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고아’ 라는 말은, 부모가 없는 자녀들, 스승이 없는 제자들, 목자가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부터 부활하셔서 제자들(신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제자들(신자들)은 실제로 고아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런 막막한 처지에서 금방 벗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뒤의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이 말씀들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인들의 ‘큰 슬픔’을 ‘큰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을 행복으로 바꿔 주신 일입니다.
<박해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좋아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사도 2,43).
예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 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는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기쁨을 거부하고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그 일 자체가 곧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반대로, 그 ‘큰 기쁨’에 동참해서 함께 기뻐하는 것은구원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몹시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서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 라는믿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손길이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롭게 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그 외로움에서 건져 줍니다.>
또 반대로, 누군가가 몹시 외로운 처지에 있음을 본다면, 그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를 도와주실 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바치는 기도와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곧 그 외로운 사람을 지켜 주는 주님의 보호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아 같은 처지를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함께 사는 방법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여기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입니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라는 말은,
“진짜 사랑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다.” 라는 뜻입니다.
<‘보호자’ 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증명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복음 선포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