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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
윤회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 상사라(samsara)이며 <대승보살장정법경>에 많이 표현되어 불교의 업인과보에 의하여 여섯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며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한다고 하며 이를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한다.
윤회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포함한 여섯 개의 세계[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끝없이 죽고 태어나면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세 가지의 세계[삼계(三界)],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어진 선정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도로, 천국에서 아귀도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 곧 육도의 세계에서 유한의 생을 번갈아 유지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관이다. 이 윤회는 철저하게 자기가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스로 착한 일을 하였으면 착한 결과를 받고, 악한 일을 하였으면 악한 결과를 받는(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 자기책임적인 것이다.
자기가 지은 바를 회피할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받을 수도 없다.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다른 세계로의 상향(上向)과 하향(下向)이 가능할 뿐이므로,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는 윤리도덕의 측면, 즉 권선징악적인 차원에서 특히 강조되어 왔으며,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이 윤회설이 강조되었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며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대한 관심보다, 현실의 삶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깊이 다스려서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세계나 불국토(佛國土)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점검하도록 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번뇌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 곧 지옥이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귀이며,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축생이라고 보는 등, 이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한다고 보았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는 윤회의 원인을 일심(一心)에 대한 미혹이라고 보았다. 그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 외에 다시 별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일심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파도를 일으켜서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였다. 곧 일심을 깨달을 때 윤회를 면하여 해탈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 육도 윤회는 현생에서 우리가 짓는 업에 따라 내생의 세계가 정해지는 것으로 선업을 쌓고 바른 수행을 통해 다음에 보다 나은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악업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운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이야말로 윤회의 원동력인 것이다.
한편 어떤 종교에서는 천상의 세계에는 신과 같은 존재들이 머무는 곳으로 내생에 그곳에 태어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불교는 천상의 세계도 윤회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천상이나 극락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金大城)은 전생에 가난한 집에 살았던 불심이 돈독한 아이였다. 몹시 가난하였지만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전답을 모두 법회에 보시(布施)한 뒤에 죽었다. 이 아이가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정승 김문량(金文亮)은 그 아이가 대성이라는 아기로 환생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 뒤 그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주먹 안에 ‘대성’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金簡子)를 쥐고 태어났다. 자라서 재상이 된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현재의 석굴암인 석불사(石佛寺)를 지었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에는 전생과 내생이 현세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윤회사상이 토착화되어 민중의 의식구조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왜구에 시달린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호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수중릉(水中陵)을 만들게 하였으며, 김유신은 죽어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이 되어 신라를 돌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윤회사상이 호국사상에까지 결부될 수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윤회사상은 고려시대에도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 공양왕 때 개성에 전염병이 크게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중에는 겨우 다섯 살 된 눈먼 아이만을 남겨놓고 부모가 죽어버린 집도 있었다. 그 집에서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부모가 죽어 아이가 굶주리게 되자, 이 개가 눈먼 아이에게 꼬리를 잡게 하여 마을의 집들을 다니면서 걸식할 수 있도록 하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샘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여주기까지 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어명으로 개에게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또한, 마을에서는 이 개가 자비로운 보살이 윤회 환생한 것이라고 하여 개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합장하여 절을 올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서민 대중들은 신라시대 이래의 뿌리 깊은 윤회설을 깊이 신봉하였다. 특히, 윤회전생의 시간적 계기가 되는 죽음에 관한 민속에는 윤회관이 큰 영향을 미쳤다. 육체는 현세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현세적 부속물이고, 윤회 전생하는 주체는 혼이다. 그러기에 숨이 끊어지면 가족들은 재빨리 망인의 저고리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그 저고리를 흔들며 육체를 떠나가는 혼, 윤회전생의 주체를 불러들여야 한다. 이를 초혼(招魂)이라 한다. 그 주체를 불러들여 보다 좋은 세상으로 전생(轉生)하게끔 공을 들일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이와 같은 초혼 습속이 생겨난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은 고전 소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심청전」이다.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심청은 용궁에 윤회전생을 한다. 용궁에서 호사스럽게 3년을 보내다가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인간계로 다시 윤회전생 한다. 한 송이 연꽃으로 인당수에 떠오르자 뱃사람들이 연꽃을 건져 송나라 황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왕비로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장화홍련전」에서도 계모의 간계로 장화와 홍련이 원한을 품고 죽게 되는데, 옥황상제가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있다. 장화와 홍련의 아버지가 꿈에서 그 윤회의 계시를 받고 부인에게 두 딸이 다시 태어날 조짐이라 하였으며, 그 뒤 딸 쌍둥이를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윤회전생과 관련된 설화는 수없이 많다. 불교의 대표적인 의식도 이 윤회설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수륙재(水陸齋)는 한 맺힌 고혼들을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의식이며, 예수재(豫修齋)는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을 살아 있을 때 미리 기원하는 의식이다. 특히, 사십구재(四十九齋)는 윤회사상에 의하여 생겨난 가장 대표적인 의식이다.
한편 우리가 불교의 윤회설을 공부할 때 반드시 염두 해야 할 가르침으로 무기설(無記說)이 있다. 무기설이란 부처님께서 존재의 본질에 관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하신 것을 말한다.
그 네 가지 질문이란
① 세계는 시간적으로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② 세계는 공간적으로 보아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③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일부는 같으면서도 다른 일부는 다른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④ 여래는 죽은 후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일부는 존속하고 다른 일부는 존속하지 않는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들 자체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부처님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들어 직접적인 답을 피하셨던 것이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말룽카라는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의 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노·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항상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항상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카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중아함경 전유경>
실제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도 결정적인 답을 줄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교는 죽은 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는 우리 마음의 세계를 보다 더 바르게 알고 깨닫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 정신적인 것들은 매순간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처님은 이러한 것을 무상이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과 몸도 삶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의 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
저희가 국민학교 시절에 국어 책에서 접하였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알고 보면 모두 불교의 윤회설이에요,
심청전, 장화홍련전, 흥부와 놀부 이야기 등이 불교 설화이었어요,
무진 전법사님의 글을 보고
윤회에 대한 접근이 그만큼 쉽게
다가갈 수 있네요,
고맙습니다,
공부 많이하고 갑니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