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 드림팀의 성공 방정식
빙상연맹, 장기 비전 가지고 10여년간 121억원 지원해
일정기간 투자가 축적돼야 어느 순간 성과로 전환되는 '양질전환의 원리' 일깨워
오서 코치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표정한 연아를 웃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김연아에게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그녀 속에 잠재해 있던 예술 본능을 이끌어내 폭발하게 했다.… 다른 금메달리스트들도 한결같이 승리의 비결로 "부담 없이 즐기면서 한 것"을 꼽았다.
- ▲ 신화ㆍ뉴시스
그러나 자신감만으로 세계 최정상에 오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땀'이 중요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우리가 진정 동계올림픽 드림팀에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과연 어떻게 '좋은(good)' 선수를 '위대한(great)' 선수로 바꿀 수 있었는지, 보이지 않는 성공 법칙일 것이다.
역대 최고 성적을 일궈낸 올림픽 드림팀의 성공 방정식을 리더십과 경영학의 안경을 쓰고 들여다본다.
스티브 잡스는 "창조성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피아노 건반이 수동 타자기를 낳았고, 유원지의 놀이기구가 에스컬레이터로 발전한 것처럼 말이다.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김관규 감독이 거둔 비범한 성공의 비결 역시 '연결'에 있었다. 그는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스피드스케이팅과 전혀 무관한 종목들을 연구해 접목시켰다.
그는 체력이 뛰어난 서양 선수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곡선 주로(走路)에서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했고, 그 해답을 쇼트트랙 훈련에서 찾았다. 쇼트트랙은 곡선 주로가 길기 때문에 코너링을 많이 해야 하고 자연히 코너 라인에 딱 붙어 타는 기술이 앞서 있다. 김관규 감독은 작년 5월부터 4개월간 일주일에 세 번씩 실내 빙상장을 찾아가 선수들에게 쇼트트랙 훈련을 시켰다. 세계 어느 나라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도 시도하지 않은 우리 선수들만의 훈련이었다.
김관규 감독은 순발력과 중심 이동을 길러주기 위해 단거리 육상선수의 출발훈련이나 역도선수들의 근력운동을 도입하기도 했다. "단거리 레이스에서는 첫발을 얼마나 세게 밀치고 나가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육상선수가 스타트 때 무게중심을 어떻게 옮기는지, 역도선수가 바벨을 잡아당길 때 뿜어내는 폭발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를 배우려고 한 것이죠."
스포츠뿐 아니라 각 분야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이종(異種) 기술을 접목시키는 융합적 사고는 갈수록 중시되고 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소비자학)는 "이제는 어떤 기술이든 '양립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받은 사상 최고 점수의 비결도 연결에 있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존 마에다 총장은 정보와 기술의 격차가 줄어든 뒤 새로운 경쟁의 영역을 '포스트 디지털 르네상스'라고 칭하며 '예술과의 연결'을 강조했다. 정보와 기술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창조성과 예술성이야말로 기업들의 새로운 전장(戰場)이 됐다는 분석이다.
그의 말은 스포츠에서도 일맥상통한다. 김연아는 완벽한 기술에 예술성을 결합해 다른 선수와 확연히 차별화하는 '포스트 테크놀로지 르네상스'의 진수를 보여줬다.
브라이언 오서(Orser) 코치는 주니어 남자 선수 중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해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게다가 트리플 악셀은 김연아의 라이벌인 아사다 마오가 올림픽에 대비해 준비한 필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서 코치는 김연아에게 트리플 악셀을 주문하지 않았다. 김연아의 필살기는 트리플 악셀이 아니라 예술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 구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기술을 최적으로 구사했고, 그것을 예술과 연결해 마스터피스로 만들었다. 그 절묘한 '연결'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김관규 감독이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메달획득에 실패한 이규혁 선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다. 밴쿠버=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김관규 감독의 독창적인 훈련법은 "어떻게 하면 선수들의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까?"라는 끊임없는 자문(自問)으로부터 시작됐다. 그간 올림픽 메달 문턱까지 갔다가 번번이 좌절한 이유를 찾는 것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숙제였다.
김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단초(端初)를 관찰에서 찾았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좋은 소재를 찾기 위해 뭐든지 관심을 두고 집요하게 관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월드컵이나 세계선수권대회는 내게는 무엇보다 배우는 기회로서의 의미가 컸다"면서 "세계 톱 클래스 선수들의 자세는 물론 선수들이 어떻게 몸을 푸는지, 다른 종목 선수들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보고 배웠다"고 했다.
상대는 물론 우리 선수들의 훈련 모습도 꼼꼼히 관찰해야 한다. "같은 500m를 달려도 선수마다 장·단점이 달라요. 어떤 선수는 300m까지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 뒤로 속도가 뚝 떨어져요. 다른 선수는 출발이 느리고요. 이를 세밀하게 잡아내서 선수마다 훈련을 달리하는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은 스타트는 좋은데 지구력이 부족한 이강석과 이상화에게는 500m, 오래 달릴수록 속도가 점점 더 좋아지는 이승훈에게는 5000m와 1만m, 스타트와 지구력을 두루 갖춘 모태범에게는 1000m와 1500m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기본 훈련을 같이하고 나면 각자의 단점을 채워줄 수 있는 개인훈련 숙제를 내준 것이다.
③즐겨라
2006년 5월 캐나다 토론토의 크리켓클럽 빙상장. 오서 코치가 김연아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밝혔다. '연아는 무표정한, 아니 거의 화난 사람 같은 얼굴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불행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브라이언 오서의 책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 중에서)
그래서 오서 코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표정한 연아를 웃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안무 담당인 데이비드 윌슨 코치와 함께 김연아에게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래서 그녀 속에 잠재해 있던 예술 본능을 이끌어내 폭발하게 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김연아는 완벽한 예술성으로 '비상하는 점프와 천상의 우아함으로 구름 속으로 미끄러지는 듯했다'(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16일 밴쿠버 리치몬드 올림픽 오벌 경기장. 모태범 선수는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이 확정되자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두 손을 하늘로 콕콕 찔러대며 춤을 췄다. 자신의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연아·이상화를 비롯한 다른 금메달리스트들도 한결같이 승리의 비결로 '부담 없이 즐기면서 한 것'을 꼽았다.
적극적이고 자기 표현이 강한 'G세대'의 특징도 있겠지만,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코치들의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 김연아와의 훈련에서 "무엇보다 즐기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오서 코치는 경기 때마다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신이 두 차례나 올림픽 은메달에 머문 경험 등을 얘기해주면서 금메달에 대한 심적 부담을 풀어주는 데 주력했다.
스피드스케이팅의 김 감독은 대회 기간 내내 선수들 앞에선 메달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했다. 대신 이상화에게는 "(네가) 33초대를 뛰면 내가 스케이트 신고 들어가서 39초를 뛰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즐길 줄 아는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업부터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아이돌 그룹 '빅뱅' 멤버들은 무대에 오를 때 "자, 놀러 가자!"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렇게 무심한 듯한 분위기에서 배어나는 '시크(chic)함' 혹은 잘 연출된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요즘 아이돌 그룹들을 과거 아이돌 그룹과 차별화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 ▲ 지난 2006년 5월부터 김연아 선수와 호 흡을 맞춰온 브라이언 오서 코치. 그가 김연아 선수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스케이팅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 밴쿠버=권인하 기자 indyk@sportschosun.com
지난달 26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 김연아가 숨이 멎을 듯한 매혹적인 연기를 펼치는 동안 오서 코치는 링크 밖에서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김연아가 점프를 하면 함께 뛰어오르고, 회전을 하면 손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는 "연습 때 늘 연아와 함께 스케이트를 탄다. 매일 함께 훈련한 내가 밖에서 응원하는 게 연아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서 코치는 연기를 마친 김연아가 링크 밖으로 나오면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는 격려를 잊지 않는다. 스피드스케이팅팀 김 감독도 지난달 18일 남자 1000m 경기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이규혁 선수를 말 없이 끌어안았다. 이는 상사(上司)나 주변으로부터 관심을 받으면 작업 성과가 더 나아진다는 '호손효과(Hawthorne effect)'로도 이해할 수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은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일체감"이라며 "부하 직원을 단순히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구성원들이 마음으로 소통해 하나가 되는 유기적인 조직체를 만들 수 없다"고 조언했다.
김관규 감독은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비결을 묻자 "저희 팀이 태릉선수촌에서 분위기가 제일 좋아요"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내가 낮춰야 선수들 성적이 좋아지더라고요. 규혁이도 선배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주는 스타일이어서 후배들이 규혁이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어요."
리더가 자기만의 '틀' 안에서 부하를 조정하려는 권위적 리더십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성원의 능력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직이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려면 부하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는 '인내 비용(endurance cost)'이 필요하다"고 연세대 정동일 교수(경영학)는 말한다. 즉, 리더가 먼저 다가서고 눈높이를 맞추고 소통하면서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⑤멀리 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바위가 뚫리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지만, 그 찰나의 시간이 오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과 끊임없는 시도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처럼 단기적으로 성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 투자가 축적되면 어느 순간 성과로 전환되는 것을 '양질전환(量質轉換)의 원리'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이번 올림픽에서 거둔 결실도 이 원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대한빙상연맹은 1997년부터 매년 8억~12억원씩 총 121억원을 쏟아붓는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다. 이러한 투자는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비전(vision)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겨울스포츠의 기본인 빙상 종목에서 성적을 내야 동계올림픽 유치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은 올림픽을 앞두고 캐나다 전지훈련은 물론 월드컵·세계선수권 대회 등에 꾸준히 출전하며 실전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강한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대개 기업들은 단기적인 효율성 추구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명확한 비전을 설정해 긴 눈으로 보면서 투자하는 노력을 기업들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