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껍데기와 알맹이
고시조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고시조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람선생이 <시조는 혁신하자> 고 외친 후 지금까지도 시조는 민족시로서의 역할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대의 사람들의 소유하던 모든 것이 옛것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시조는 당대 사람들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시조가 역사적 장르로서는 죽었지만 시대적 양식으로서의 지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평론가 유성호씨는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시조시인들은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현대시조 100인선을 출간하여 (태학사) 시조의 모델을 삼으려하기도 하고 현대시조 100주년행사도 몇 년 전에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시조집을 많이 상재하고 있고, 시조사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많은 젊은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젊은 시인을 발굴하기 위하여 신춘문예는 물론 시조시인들만 발표하는 잡지가 아닌 전 장르를 망라하는 계간지, 연간지, 2연간지 등을 발간하여 좋은 시조를 널리 알리려 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출판사가 있고, 신인상 제도며 백일장을 여는 등 여러모로 시조저변확대에도 고심하고 있다. 대학 강단에 선 젊은 교수 시조시인들이 현대시조에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신작을 발표 하고 있어 시조시단에 젊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시조라는 형식의 껍데기에 유연하게 꿈틀거릴 알맹이가 문제이다.
시조를 국민 문학으로 키워나가는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는 일이며, 그렇게 하기위하여 교과서에 시조가 대폭 수록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절실하다. 우리의 고시조는 태교 때부터 가르치고 유아기 유년기에는 다 외어 몸과 정신에 새겨 율격을 저절로 익히게 하여, 유녀기 말과 소년기 청소년기에는 창작 할 수 있도록 교과서를 편성한다면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럴게 될 날을 위해 오늘의 시조시인들이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유시를 능가하는 시조를 써야하며 시조저변확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 매력 없는 시조의 매력을 찾아서 우리는 얼마나 무참한 마음으로 일어나야 할 것인가.
전후 일본을 지킨 정신은 아홉 명의 시인들이 결성한 하이꾸 보급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꾸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자긍심과 정신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외국의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올 때 하이꾸로 정신무장한 일본이다.
우리는 허례허식 사대주의 사상에 너무 젖어 왔다. 우리 문화를 너무 많이 버려왔다. 버린 문화가 우리를 오히려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고시조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고시조를 이용하여 시조의 율격을 알게 하고, 태교 및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적이고 정서적인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민족시를 몸에 익히기는 물론 국민정신 함양의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시조 율격으로 낭창낭창 몸부림치다.
시조란 시다. 시가 우리말의 보법에 따른 정형률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 시조이다. 시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인간의 정서를 짧은 글로 나타낸 것이 시라면 그것을 정형의 율격으로 쓰면 시조이다. 고시조는 고시조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고시조와 다르다. 우선 시대가 다르니 쓰는 사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다. 현대시조는 고시조의 유교정신인 관조가 아니고, 동양사상도, 훈민가도 아니다.
현대는 고시조를 쓰던 농경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복잡다단한 현세의 일을 관조하고 동양적인 사고로 느긋하게 바라보며 도가적인 사상이나 펴는 고시조의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생각하고 부딪히며 고민하며 개인의 정서와 삶을 시조의 율격과 보법으로 써 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식에 맞는 글, 말의 길이와 느낌을 살려 내며 좋은 시조를 쓸 수 있을까, 자유로운 생각들을 음보율에 의해 참신하게 나타내볼까 고심하고 있다. 고시조를 답습하자는 것은 아니다. 고시조의 정형(定型)이라는 것은 정형(整形)으로 하자고 일찍이 가람이 <시조는 혁신 하자>고 한 논지에서 이미 말했다. 고시조형식도 3444 3444 3543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시조가 무엇인가?>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별 다르지 않다. 시란 무엇인가? 수많은 시인들이 정의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나타내기란 어려운 것이 시다. 자수만 맞춰 놓고 알맹이는 고루한 시조, 안이하게 형식만 맞추는 시조, 이것이 시조다. 라고 고집해서는 시조는 발전이 없다. 시조, 몸부림쳐야한다.
3. 걷다 보면 율에 따라 보법도 자연이고.
①.시조는 3 장 6구 12음보의 율격(律格)을 가진다. 자수율(3,4,4,4,//3.4.4.4.//3.5.4.3,//)이 정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수율에만 의존하여 시상을 꺾지 않으며, 음보율을 허용하여 1,2~ 3,4자 가감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종장 첫 구는 절대불변의 3자를 고수 하고, 2구는 5자 이상 8자 이내로 하도록 한다.(되도록이면 5,6자 이내 정격을 고수함이 시조의 맛과 멋이다)
②. 연시조---시인의 복잡한 사상을 단수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연시조를 쓴다. 연시조는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독립된 단수로서 상호 유기성을 띄고 있어야한다. 2,3,4...연수 등으로 쓸 수 있다.
③. 시의 소재는 개인의 다양한 정서를 자유자재로 취한다. 참신한 소재 참신한 글이 된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시사성이 강한 소재로 참신하게 쓸 수 있다.
④. 제목이 있다.(내용 축약, 암시) 제목을 쓰고 짓거나, 지은 후 쓰거나 한다. 주제가 또렷한 글을 써야 한다. 제목이 차지하는 것. 시가 되게 하라.
*하늘에다 밑줄이나 긋고 (박기섭)
*연대기적 몽타주 -이재창
*죽은 나무를 심는 부자(父子) -정수자
*밤의 배꼽 -이달균
* 기중기에 걸린 달-정해송
⑤. 시행의 배열--- 시적 효과를 살릴 수 있다.
3장 6구 배행, 3장 배행, 2열 배행. 연, 장, 구분 없는 배행, 문자의 형상화로 시각적 묘미를 살릴 수도 있다.
⑥. 상투어를 쓰지 않고 참신한 시어를 골라 쓴다. ‘ 두어라’ ‘아마도’ ‘아희야’ 등등은 투어다 . ‘하노라’ ‘가노라’ 등 옛말이나 현대에 잘 쓰지 않는 낱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시인은 모국어를 아름답게 써서 갈고 닦아야 한다. 은어나 비속어는 시조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
⑦. 남의 시를 모방하지 말라. 모방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다. 또 시에 분칠을 하지 말라
⑧. 새로운 표현, 감각적 표현으로 참신하게 쓰는 것이 좋다. 비슷한 내용으로 많이 써도 습작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참신한 소재로 개성있게 쓴 시조 한편이 시인의 역량을 알려준다.
⑨. 메타포metaphor를 적절히 사용하여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등 은유법, 상징, 상상력을 동원하여 좋은 시로 나타내야 하고 언어 나열이나 일상어 서술 직설법을 피하는 것이 좋다.
⑩. 시조는 3장6구로 지어야하는 것이지만 글자의 나열이 아니고 작희도 아니다. 시조 속에 지은이의 투철한 인생관과 시 정신, 즉 시혼이 살아 숨 쉴 때 그 시조는 독자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4. 눈에 번쩍 띄는 시, 마음도 번쩍 들어 올린다.
재주 곧 실력이다. 그러나 재주만 있어서는 안 된다. 글은 곧 사람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사람다우면 좋은 시조를 쓸 수 있는 필요 요건이 된다. 시인이야 말로 진실한 품성을 가져야 한다. 그의 진실한 글이 타인을 감동시킬 것이다. 겸손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오만과 자기 편견에 따라 글을 쓰고 좋아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정화시키지도 못하고 타인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듣고 지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말자. 그것이 작품을 빚는 자산이 될 것이다.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명철해져야 한다. 눈은 아래로 향하고 이상은 높게 가지며 사랑으로 충만해지자. 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눈에 번쩍 띄는 시는 마음도 번쩍 들어올린다.
가. 좋은 글을 쓰려면
①. 우선 좋은 시조를 많이 읽어서 시조의 율격을 몸에 익히자. 좋은 시조를 찾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기르자. 어떤 점이 나를 끌어당기는가 소리 내어 읽어보자.
②. 매사에 생각이 깊어야 한다. 깊이 생각하고 사물을 주의 깊게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특징을 찾아내어 친교를 맺어라. 관심 있는 사물과 교우하되 진실 되게 하라.
③. 보고 느낀 것을 아! 좋다 하고 감탄만 말고 그 순간을 메모하라. 무엇이 어째서 왜?(생각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느낌을 솔직하게 써 둔다. 일시에 시가 되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영감으로 확 날아오기도 한다.
④. 많이 써야한다. 쓴 후엔 소리 내어 읽어 고치기를 마음에 들 때까지 해야 한다. 고친 뒤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글이 되기도 한다. 한두 번 해보고 실망하지 말자.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명 문장가의 뒤에는 파지 독이 있었다.)
⑤. 다른 사람이 발표한 글과 비슷한 것을 쓰지 않는다. 같은 생각을 타인이 먼저 쓴 경우라면 자신의 글을 뒤집어보라. 발상전환을 하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상을 과감하게 뒤집어보자.
⑥. 나를 감동시키는 글은 우선 성공이다. 타인을 감동시킨다면 그 글은 명작이다. 감동이 없는 글은 죽은 글이다. 소녀적 감상은 금물이다.
⑦. 동인활동에서 발표하기를 두려워 말라. 발표함으로서 실력이 늘어간다. 글을 처음 발표하는 것은 타인들 앞에서 나신으로 서는 것과 같다. 철없는 아이들이 회화를 더 빨리 익히는 경우와 같다. 그리고 몇 번의 과정을 거쳐 퇴고 한 후에 문예지에 발표하라.
⑧. 공부하라. 독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익히자. 나무나 풀들 벌레들의 이름까지도 알려고 애를 써라. ‘이름 모를 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식을 폭로하는 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세상은 나날이 변하고 있다. 새로운 것에 둔감하다면 생각도 참신해 질수가 없다.
⑨. 고독이 자산이 되는 것은 예술뿐이다. 고독은 우울증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고독을 친구 삼아 예술의 길로 초대받는 행운을 잡아라. 고독해서 술을 친구로 삼으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예술을 벗으로 삼는다면 예인이 될 것이다.
⑩. 고통이나 고난을 원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회피 하지 말고 적극 수용하라. 그것은 쉽지 않지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고통이 인생의 시야와 폭을 넓혀줄 것이다. 모든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름이 된다.
5.좋은 시조를 찾아서(단수, 연수)
-작품을 중심으로
가. 시조 한수가 나의 희망이 될 때까지
단시조는 우리시조의 본향이다.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의 정형시 단수. 그러나 그것도 꼭이 지키자고 한 약속이 있다. 종장의 첫 3자. 둘째구의 5자 이상 8자 내외로 하자는 것.
단아한 시형에 들어가 숨죽이는 시조를 쓰기보다는 생동감 있고 난출 대는 멋있는 시조의 율격을 살려내자는 것이다. 단수를 살려내어 세계화 시키자는 말은 가능성이 높다. 외국어로 우리의 운율을 살려나가기가 힘든 점이 있지만 최근의 경우 희망적인 일로도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미 시조작가들이 영어로 시조쓰기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러하고. 각 대학 교수, 시인들이 시조집을 발간하고, 외국의 대학교수들이 시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미미하나마 싹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는 것은 단시조를 여하히 잘 쓰는 가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단ㄴㄴ수를 잘 쓰면 연수도 잘 쓸 수 있다.
<예시를 보며 좋은 글과 아닌 글을 알아보자.>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밴 양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비 (이영도)----①
어머니는 나를 정말 제일 좋아 하신다
부지런히 일하고 옷도 잘 만드신다
어머니 사랑보다도 큰사랑은 없지요.
-일반 독자의 시조---②
시가 찾아오기를 백년 쯤 기다리다
학이 되어버린 내가 긴 목을 뽑았을 때
바람의
손가락 사이로
백년이 지나갔다
- <연(鳶)> 박권숙----③
위의 시조 ①은 이영도의 <비> 이다. ② 의 시조는 독자의 <어머니>이다, ③은 박권숙의 연이다. 1은 장지문밖에 내리는 비소리를 듣는 여인 의 고즈넉한 그리움이 젖어드는 아름다운 시조이다. ②는 시조의 율격은 정형이지만 시적 느낌이 없는 글의 나열일 뿐이다. 글자 수를 맞춘다고 해서 시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글이다. ③은 연이라는 물체를 통하여 시를 형상화시키는 품격 높은, 아름다운 메타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참신하고 생동감이 있는 글이다. 단수 시조는 어떤 사물에서 느끼는 생각을 한순간에 움직이는 찌를 낚아채 듯 벼락같은 건져 낸 싱싱한 어족 같기도 하다.
나. 좋은 단시조를 찾아서
난(蘭)있는 방이든가, 마음귀도 밝아온다
얼마를 닦았기에 눈빛마저 심심한고
흰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뵈인다.
-난 있는 방 (김상옥)
구름이
흰 시름을
하늘에 풀어 씻고
담 아래
다소곳 앉아
꽃소식 접는다
피는 듯
사위는 자태
소복처럼 애처롭다
<목련 곡哭>한분순
아 허방 허방이니라 네발이 움켜 쥔, 움켜 쥔
한 평 땅 네 소유도 허방이니라, 소유란 가벼운
두발로 물위를 걷는 법.
소금쟁이 <박옥위>
서로를 제대로 눈여겨볼 틈도 없이
버겁고 숨 가쁘게
부대끼며 사는 동안
나뭇잎
한 장의 잎맥
섬세하게 뻗는다
-<그 동안> 이 정 환
저 외진 데로 가
혼자 밥 먹는 친구를 보고
일곱 사람이 식판 들고 그쪽으로 몰려가네
산나리
긴 목을 휘어 물끄러미 보고 있네
-<포살(布薩)식당>홍성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모란> 이우걸
편지 배달 나간 봄빛은 오지 않고
별정 우체국 나직한 창틈으로
바람난 아래윗각단 복사꽃만 환한 날
ㅡ<별정 우체국의 봄> 박기섭
어메가 남기고 간 봄 배꽃 뚝뚝 진다
사랑니 쿡쿡 쑤시던 열두 발 굴레 속에서
한나절 울어도 좋을 등성이 햇빛 속으로
-<어머니의 봄> 양점숙
숨 쉬다 가는 날까지
너에게 주려했던
한줌이 채 못 되는
이 사랑 불씨를
이른 봄 들판에 풀면
자운영 꽃이 핀다.
-<자운영>전일희
살구꽃 피는 마을
피는 꽃이 저리 곱다
피는 꽃 그 아래로
지는 꽃도 어여쁘다
목숨도 오가는 날이
저리 꽃길이고저
-<행화촌>김상훈
선 길게
거기 긋고
푸르게 날 부르네
참 희고 푸르다 내 천형의 쓰라린 길
칼금에
베어져 나오는
내 피가
푸르다
-수평선 <박옥위>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꽃 또는 절벽> 박시교
소금쟁이
함께 찍힌
옛 사진
어느 여름
뒤꿈치가
참 예쁜
물총새
그 아이는
종종종
돌다리 건너
지금도 오고있다
-<지금도>유재영
산으로 난 오솔길
간밤에 내린 첫눈
노루도 밟지 않은
새로 펼친 화선지
붓 한 점 댈 곳 없어라
가슴속의 네 모습.
-<첫눈> 장순하
살아
푸르게 끓던
피와 살은
다 빠지고
깨진
유리조각 같은
저 투명한
물의 뼈가
마지막
지상에 남아
혼의 불로
타고 있다.
-<소금>조주환
사 계절
하루 같이
한 자리에
곧추서서
변화의 물결에도 지킬 것 지켜야 한다며
굴절된
세상을 향해
쏘고 있는
저 화살.
-장명웅 '이정표' 전문 (크리스천 문학 16집, 2008)
이정표는 정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 시인은 아예 이정표를 화살표로 표기하고 있다. 한 치의 잘못도 없어야 하는 이정표를 말하기 위해서 시의 몸을 화살표로 세웠다. '굴절된 세상을 향해 쏘'아야 할 화살! 변화를 수용하지만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준엄한 꾸짖음이 있다. 철학이 없고 정의가 상실된 시대에 쏘는 시인의 화살! 과녁은 부지기수인데 명궁은 어딨는가?
다. 읽히는 연시조를 만나러
시인의 복잡한 사상을 단수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연시조를 쓴다. 연시조는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독립된 단수로서 상호 유기성을 띄고 있어야한다. 2,3,4...연수 등을 쓸 수 있다.
시든 시조든 감동이 없으면 죽은 글이다. 가슴을 탁 치는 표현이 있는가?
[그윽하다 시조] 꽃 너울/김강호 왈츠 음계에 따라
봄을 향해 가는 길
동백나무 잎사귀에
얹혀 있던 부신 햇살
바람이 가볍게 흔들자
은전같이 쏟아진다
종달새만 울어도
출렁여 가는 하늘
기나긴 밤 산고에
수척해진 나무마다
눈을 뜬 꽃몽오리들
옹알이가 한창이다
기꺼울 감당 못해
자지러지는 산비알
고혹한 향 흘러드는
어스름 강어귀엔
뭇별들 산란하느라
물빛이 분주하다
-김강호 '꽃 너울' 전문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입춘대길! 봄이 왈츠음계를 밟고 오자 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은전처럼 쏟아지고 꽃망울들의 옹알이가 활기차다. 봄은 마음 귀 맑은 이에게 먼저 봄소식을 전한다. 겨울을 견뎌내고 새 꽃망울을 준비하는 나무들!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저마다 부지런히 살아가는 우리의 삶! 서로 닮아 있지 않은가! 경제가 어렵다고 절망만 할 일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나의 봄을 만들어 가자. 봄에 꽃피우지 않고는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꽃들의 경구가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가슴을 펴고 봄의 숨결을 마셔보자. 아, 어디만치 알싸한 매화향이 밀려오지 않가!
언제였나 간이역 앞 삐걱대는 목조 이층찻잔에 잠긴 침묵 들었다 다시 놓고조용히 바라본 창밖 속절없이 흔들리던멀리서 바라보면 는개 속 등불 같은청음도 탁음도 아닌 수더분한 목소리로해질녘 삭은 바람결 불러 앉힌 보랏빛
누구 삶이 저리 모가 나지 않았던가자름한 고, 어깨를 툭 치면 울먹일 듯오디새 울다간 자리 등 돌리고 피는 꽃 유재영 '오동꽃' 전문 (시조시학 2008년 봄호
유재영 시인의 눈을 스치는 사물은 전혀 새로운 옷을 입는다. 봄날 간이역에서 만난 오동꽃 심상을 4B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한 시. '는개 속 등불' '해질녘 삭은 바람결을 불러 앉힌 보랏빛' '자름한 고 어깨를 툭 치면 울먹일 듯' '오디새 울다간 자리에서 등 돌리고 피는 꽃'. 수더분하고 따스한 삶의 철학이 묻어나는 중년여인의 단아한 모습이 엿보인다. 어디선가 페르귄트를 그리는 솔베이지의 노래가 들려올 듯하다. 박옥위/시조시인
슬픔도 발이 빠져 차라리 결이 삭으면누구도 꺾지 못한 한 송이 꽃이 되나하이얀 그리움너머 흔들리는 빈집 같은아무데나 피면서도 함부로는 피지 않아읽을수록 멀어지는 경전(經典)의 마른 숲가만히 가부좌 풀고 바람에 길을 버리네하루 이틀 사흘, 제 몸에 불을 붙이네자신이 갚아야 할 잘못도 아니면서저토록 뼈를 태우나니, 온 세상이 환하게
민병도 '백련' 전문 (한국시조 2008년 가을호)
민병도 시인의 백련이 벙근다. '슬픔에 발이 빠져 결이 삭'아 어느 뉘도 꺾지 못하며, 경전 속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번뇌를 사르는 소신공양의 경지에서 핀다. 백련은 '하이얀 그리움 너머 흔들리는 빈집'이며, 형식인 '가부좌 풀고 바람에 길을 버리'는 자유자재에로 나아가는 불성에 닿아 있다. 자신을 태우며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한 송이의 반야심경! 그렇게 번뇌를 사르며, 촛불을 밝히듯, 백련은 피는 것이다. 박옥위
강도 한 번 숨 고르고 바다에 드는 새벽펄 같은 한 시대를 지나던 숨결처럼누군가 찍고 간 고독 느낌표로 돋아 있다길 하나 보태고 또 지우며 흘러온 봄화개를 지났다고 기슭에 뺨을 대면물그늘 아래에서도 진달래가 피는가발자국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수장된 꽃잎 같은 제 발자국 건져내며저 애써 붉어지려는 마음 감춘 산이 된다- 박권숙 '발로 읽는 봄' 전문 ('우리시조' 2009년 3월호)'발로 읽는 봄'이란 제목부터가 시의 진행형이다. 깊다. 봄을 만나는 시인의 시선과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봄의 느낌표는 그윽하고 경이롭다. 펄 같은 한 시대, 길 하나 보태고 또 지우며, 기슭에 뺨을 대며, 물 아래 진달래꽃, 수장된 꽃잎 같은 발자국을 건져내며 뜨거운 감동을 산처럼 감추며 봄을 걷고 있는 시인의 다정함이란! 건강한 행보와 활달한 사유가 아름답고 웅숭깊다. 시인의 봄이여! 시를 분출시켜라.박옥위/시조시인
수없이 무너졌던 너에 대한 그리움이아직도 마음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이만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자고한때는 짐짓 거리를 두기도 하였지만간절한 바람 그마저 허물 수는 없었기 때문이제 이러면 되겠느냐, 내가 다시 꽃으로잎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서면은,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 -박시교 '봄산에 가서' 전문 (시집 '독작', 도서출판 작가, 2004)봄은 숲에 희망을 연다. 봄산은 젊음, 일터, 희망이 아닐까. 나무도 무성한 꽃과 잎으로 열매 맺어 나무의 역할을 다하던 때가 그립다.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바라다보는 봄산에의 그리움! 아직도 나무처럼 자라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허물 수는 없어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고 절규한다. 우리는 봄산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절망이란 어두운 쉼터를 박차고 일어나, 봄산으로나 가 볼 일이다. 박옥위/시조시인
내가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 되자는 것은내가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 되자는 것은
숲길을 걷다보면 길만이 길이 아니라
숨어있는 모든 것이
길이고 눈물이구나머리를하늘에 둔 나무들 외롭게 감춘 뿌리까지.하늘이 길러낸 나뭇잎들 바스라져고단히 길을 덮고길 아닌 길마저 덮어우리가 함께 한 길이지상에서 문득,외롭다.-백이운 '지상에서, 문득' 전문 ('유심' 2009년 1월호) 길! 주어진 우리의 희망이자 한계다. 우리가 가는 길은 숲길이더라도 숨어있는 모든 길이 '눈물'이다. 산다는 것은 '머리를 하늘에 둔' 것이나 '뿌리'를 감춘 것까지 고단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그래서 종교가 있고 신앙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한 길이라도 결국은 외로운 것이 인생의 노정(路程)이다. 하여 우리의 현재는 더 밝고 따뜻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길에서 길의 사랑을 나누며. 박옥위/시조시인
봄볕이 물어내는 찻잎이 곱습니다.
우전(雨前)에 따낸 잎을 찌고 또 말리느니,마음도 그렇게 덖으면찻잎 아니오리까분청(粉靑) 귀얄 병에 꽃가지를 물려 놓고그저 한두 마디 실금 같은 안부 속에설핏한 구름 그렁지 격자창에 어립니다햇차 햇봉지를 꽃잎마냥 열어봅니다찻물이 끓는 동안 마음 따라 끓느니,세월도 그렇게 뎁히면찻물 아니오리까.-박기섭 '꽃가지를 물려 놓고' ('대구시조' 10호, 2006년)시인의 눈은 참 예리하다. 봄볕이 찻잎을 물어내는 것을 본다. 햇차를 꽃잎처럼 열어보고, 마음도 덖어보고, 세월도 뎁히면서 시를 쓰는 시인. 실금 같은 안부가 구름 그렁지(그림자)로 격자창에 어릴 때 분청 귀얄 병에는 매화꽃을 꽂았을까. 산마을 어디쯤에 우전 차 덖는 냄새가 파르스럼한 봄이다. 그렁지라는 사투리가 감칠맛이다. 봄 강물에 복사꽃 흐르듯 시인의 우전 차 잔에 매화꽃을 띄워 볼까. 박옥위/시조시인
봄날 보리밭
정희경
짧은 해를 묻어둔 땅 속이 분주하다
심지에 불 켜는 손 깊이를 저울질해
밟혀서 더 강한 신호
봄날을 당긴다
폭설의 무게보다 더디 오는 하루하루
얼레빗에 걸러지는 생채기 둔덕 위를
갈맷빛 서러운 날들
바람이 훑고 갔다
말랑한 햇살 펴고 일어나 펄럭여라
쓰러지면 함께 누워 어깨 맞댄 깃발들
마침내 무릎을 세워
걷는 소리 또 보인다
-<우리詩> 2010년 5월호
봄날 보리밭. 그 분주함에는 이유가 있다. 싹이 나자 크기도 전에 서리 맞고 얼고 솟고 눈을 맞고 밟히는 과정을 겪어 봄을 맞는 보리의 생태에서 끈질기게 일어서는 자유에의 갈망을 바라본다. ‘짧은 해를 묻어둔 땅속이 분주하다’ ‘심지에 불 켜는 손’ 밟혀서 더 강하게 봄날을 당기는 보리는 ‘얼레빗에 걸러지는 폭설의 무게’ ‘생채기 둔덕 위’ ‘갈맷빛 서러운 날’을 살았다. 밟힐수록 서로 어깨를 걸고 마침내 무릎을 세워 함께 걷는 보리에는 푸름과 평화가 있다. 보리의 생태처럼 시의 전개가 치밀하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보리밭 같은 평화의 봄은 언제쯤에나 오나!
이승현 시집, - 빛, 소리 그리고, 알토란, 2009
‘자전거는 인력을 추진력으로 전환하도록 고안된 교통수단 중 현재까지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이승현 시인은 자전거에 인생길을 그려놓는다. 힘들게 오를수록 쉽게 내려오는 자전거타기 같은 인생길, 하여 힘든 고갯길도 쭉 펴놓으면 굽이침이 없다는 여유를 갖는다. 생은 만만치 않아 피부에 닿아 오는 삶의 무게가 한결같지 않을 때도 그러려니 하고 낮은 삶에 자족하며 바퀴살에 실개천 물소리가 감기는 산뜻한 여유를 가지려하는 것이다. 추운 새벽 하얀 입김을 뿜으며 일터로 달려가는 시인, 자전거 바퀴에 감겨 잘게 부서지는 햇살이 경쾌하다. 생은 늘 고만고만하게 힘들어도 아침 햇살을 등에 받으며 힘차게 달려가는 시인의 가슴엔 희망이 함께 달리고 있을 것이다.
양지쪽에 남아 붙은 추위마냥 인부 서넛'도시가스 공사 중' 형광 띠를 둘러놓고배달된 짬뽕그릇을 흙손으로 받쳐 든다 그들 곁에 쌓여 있는 한 무더기 벌건 흙덩이그 빛깔로 식은 국물 얼큰히 들이켠다목젖에 엉기는 한기도 햇살 말아 넘긴다으스스 몸이 풀리며 허기가 채워지자보장된 일당만큼 부푸는 어깻죽지봄이다 ,선진조국의 크게 한번 좋을 봄! 입춘대길(立春大吉) /이승은 ,시조시학·2009 겨울''입춘대길'이란 고풍스런 제목의 대길(大吉)이라는 문안으로 들어서니 '도시가스 공사 중'이란 형광 띠를 둘러놓고 양지쪽에서 인부들은 바야흐로 성찬이 한창이다. 일하던 흙손으로 그냥 짬뽕을 먹는데 그 국물이 곁에 퍼놓은 벌건 흙빛이다. 참으로 실감 실정이다. 얼큰한 짬뽕으로 추위와 허기를 면하더라도 보장된 일당이 있는 이상 대길은 대길인가? '목젖에 엉기는 한기도 햇살 말아 넘긴다'. 이승은 시인의 가슴이 예리하게 바라보는 장면이다. '봄이다, 선진조국의 크게 한번 좋을 봄!' 이 반어(反語)라니! 허나 고만고만한 봄을 만들다가 크게 좋을 봄도 한 번 만들고 싶은 큰 열망이 누구에겐들 없으랴!희망을 쓰고 싶다. 추울수록 어려울수록. 도처에서 희망은 작은 불이라도 켜고 있어야 한다. 어려운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맑은 감성, 시인의 감성은 삶의 수위(水位)를 재는 잣대이다. 먼 산 너머 봄의 입김이 연달래 빛으로 가물거리는 요즘 골짜기엔 얼음새꽃이 피고 있겠다. 봄, 새 봄, 입춘대길! 박옥위·시조시인
아무튼,다랑쉬오름 바듯 건넌 종소리가송당 마을 더덕 밭 그 너머 올레 긴 집간간이 흘러 들어와 연둣빛 물들인다"계란 삽서어 계란~,독세기 삽서 독세기"4.3 소개령 같은 먼 동네 확성기 소리할머니 치매기 아쓱 밥상머리 도져난다세월이야 이승에 두고사람이 가는 거다무덤은 또 한생애 징검다리 같은 거세상에 잠시 왔다가한눈 팔린
이
봄날
오승철, 더덕밭 너머'유심' 2010년. 7·8월호송당 마을에 봄이 왔다. 그 봄은 다랑쉬오름을 건너온 종소리가 더덕밭 너머 올레 긴 집을 연두빛으로 물들인 봄이다. 그 고요하고도 적막하기조차 한 봄날 정오쯤엔가 먼 곳서 날아오는 확성기 소리가 삶의 순간을 확 일깨운다. "계란 삽서어 계란~" 그 때 공교롭게도 밥상머리에 앉던 할머니가 그 소리를 4·3 항쟁 때의 소개령으로 착각하고 치매 도지듯 까무러친다.'세월이야 이승에 두고 사람이 가는 거다' '무덤은 한 생애 징검다리 같은 거'. 사람들은 왜 이 세상에 와서 피지 못하고 서리를 맞는가? 그 절절한 아픔과 허무가 오 시인의 시적 무대가 된지 오래다. 봄은 꽃피어 흐드러지지만 '천안함'의 일로 또다시 아픔을 겪고 있는 오늘 우리 현실이 쓰라리다. "독세기 삽서 독세기" 더덕밭 너머 먼 호객소리가 차라리 평화롭다. 박옥위·시조시인
젖은 가슴으로 바람이 기어든다만선을 꿈꾸다 선잠 깬 이 새벽은오래 전 걸었던 그 길 아직도 걷고 있는밤새 풀고 맺던 저 등 푸른 이야기들깨어나면 언제나 저만치 물러앉고예각의, 모서리만 남아서 아침이 더뎌왔다열릴 듯 아득한 심연 그물을 끌어낸다흔들리는 수면 위 불빛이 몰려가고
집어등 환한 뱃전엔 넘실대는 바람소리 뿐잡힐 듯 달아나는 등 푸른 오랜 길이물 잔뜩 머금은 채 껍질로 떠다녀도화인火印의 첫 새벽녘이다 꿈꾸는 출항이다
아직은 푸르다, 박지현 '시조시학' 2009 겨울호 꿈꾸는 출항! 오래 걸었던 힘든 화인의 길로 배를 띄운다. 힘들게 걸어온 길, 또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다. 우리의 등 푸른 이야기(희망)는 현실적인 예각의 모서리(좌절)에 걸려 집어등 아래 바람소리만 남거나 물 잔뜩 먹은 껍질로 떠다니지만 '아직은 푸르다'고 젊은 시인은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소통의 '등 푸른 길'로 가는 '등 푸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여! 미래의 꿈을 푸르게 쏘아 올려라! 희망 찬 2010년 호의 출항이다! 박옥위·시조시인
[
오랫동안 한 몸처럼 서로를 간수했지얄팍한 속사정을 꿰뚫어 보아오며내 심장 가까이에서 숨죽인 채 지내던 너보낼 때 지난 듯한 해진 너를 대신할새 지갑 생기고도 달갑지만 않은 속내정 떼고 정 붙이는 일 숙제인 양 미룬다내 마음 주머니도 손때 묻은 지갑 있어꺼내 써도 줄지 않는 그리움이 꼬깃꼬깃계좌로 송금 못하는 사랑 통장이 하나- '시조월드' 2008년 상반기호시인의 지갑은 심장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듯하다. 낡고 헤져 웬만하면 버려도 될 지갑이지만 얄팍한 속사정까지 아는 한 몸 같은 지갑이니 차마 버리지 못한다. 아마 명품지갑이기보다는 추억지갑이거나, 부모님 향기 서린 유품지갑이 아닐까. '꺼내 써도 줄지 않는 그리움이 꼬깃꼬깃' 접혀있는, 도무지 '계좌로 송금 못하는 사랑통장'이란 표현이 그것을 말한다. 시의 샘이 되기에 충분한 징표인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시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지갑이란 뭐니 해도 머니이다. 지갑-머니-경제. 지갑이 두둑하다면 안 먹어도 배짱이 두둑해지고 지갑이 얄팍하면 겉모습까지 추워진다. 돈의 위력이다. 그래저래 돈은 소중하다. 허나, 더 소중한 것은 인간의 사랑. 꺼내 써도 줄지 않는 그리움과 사랑이 꼬깃꼬깃 자꾸만 풀려나는 지갑 하나 갖고 싶다. 박옥위·시조시인
바람 부는 강물에서는 댓잎 부딪는 소리가 난다
햇빛에 반짝이는 도포자락 펄럭이며큰 기침 뜨거운 숨결로 퍼렇게 살아 흐른다
깊은 밤 이슬에 젖는 길섶 풀잎들 사이로반딧불 외롭게 달고 앞서간 고운님들은뒷동뫼 낮은 자락에 동그랗게 엎드렸는데
여윈 목줄띠로 살아 닫는 시퍼런 江을막막한 들녘에 서서 불면으로 일렁이며쟁쟁쟁 가슴을 울리는 청대바람이 일어난다 -댓잎 물이랑, 서태수 '부산시조'. 통권20호·2006 겨울호
낙동강! 강은 역사다. '댓잎 물이랑'에서 강의 숨결을 듣는다. 어릴 적부터 강가에서 살아온 시인에겐 강은 어머니요, 아버지요, 삶의 요람이다. 하여 강의 속성, 그 희비애락을 죄 알고 있다. 이때 강은 댓잎 같은 잔결로, 햇볕에 반짝이는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청렬한 자존으로, 뜨거운 민족의 숨결로 흐른다. 허나 시간은 비정한 것, 역사의 현실 속에 건재하던 이들은 가고 강마을의 삶은 여전히 여윈 목줄띠로 시퍼렇게 살아 막막한 들녘에 서서 불면으로 일렁이는 고뇌를 안고 있다. 시인의 청렬한 생각이 쟁쟁쟁 청대바람을 일으킨다.강은 우리 생활 속으로 흐른다. 고대 가락국의 빛나는 유적지, 민족의 역사와 애환을 맞고 보내며 면면히 흐른 낙동강! 60년 전, 나라의 위기엔 최후의 방위선이었고, 젊은 목숨들이 꽃같이 진 역사의 강이자 을숙도를 품은 사랑스런 강이다. 4대 강 중의 하나인 낙동강! 이 강이 아름다운 서정으로, 강 그 본연의 청음청류(淸音淸流)를 찾아 도도히 흐르길 바란다.
생면부지도집 지으면 한 골목 권솔이 되어배추는 버러지 키우고나비는 배추꽃 어루고징그런 목숨이 없다껴안고 살아간다겨워도 죽는 날까지 서로서로 돌보겠노라목숨과 목숨끼리 반지를 나눠 낀 듯길마다 옥시글옥시글이야기 새끼를 친다시집 '무엇이 들어 있을까'(고요아침·2007)봄이 무르익는다. 배추밭에 버러지가 한참 배춧잎을 갉아 먹고 우화하는 봄날이다. 배추는 벌레에게 먹히고 나비는 배추꽃의 꿀을 취하되 씨앗을 맺게 도와주는, 서로 깍지 끼고 돌아가는 생태계의 상생을 본다. '징그런 목숨이 없다, 껴안고 살아간다.' '목숨과 목숨끼리 반지를 나눠 낀 듯' 서로 아끼며 씨를 맺고 새끼를 치며 상생하는 봄날의 활기찬 자연 속에서 시인은 우리 삶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상생으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생을 영위하는 세상사도 다름이 아니다. 나비와 배추처럼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서 삶은 아름답고 건강하게 유지된다. 나눔의 행복! 진정한 삶의 가치는 부의 축적인가, 봉사와 희생인가. 지금 이 자리, 이 시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하며 살라는 톨스토이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살 일이다. 박옥위·시조시인
1.
창문들 꼭꼭 닫힌도심 속에 교보 빌딩오래된 거울처럼풍경만을 비추다아가미, 숨을 내쉬듯열리는 들창 하나2.
새벽 네 시 아파트 숲, 잠 못 든 먼 불빛겹의 문과 주름 커튼 거두어진 타인의 방들려진 비늘이 뜯겨씀벅이는 상처 같다.
이 한편의 시조] 逆鱗(역린) /선안영 2009 '시조세계' 여름호)시인이 교보빌딩의 열린 들창을 역린(逆鱗)으로 보는 상상력은 놀랍다. 만일 교보빌딩이 인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양 만점의 거대한 물고기라면 들창은 숨을 내쉬는 아가미, 과식한 물고기는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있는가, 소통을 꿈꾸고 있는가. 오래된 풍경만을 비추는 거울에서 탈피를 시도하는 시인의 마음 또한 역린이다. 새벽 네 시 아파트 숲, 잠 못 든 먼 불빛, 들려진 비늘이 뜯긴 그 곳은 심상치 않다. 부조리한 삶의 아픔이 도처에서 상처처럼 씀벅이고 있는 세상, 역린이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한 사상 감정이 맞물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지만 결국 사람을 위한 세상이 아닌가. 자본을 위한, 자본을 향한 곳에만 시간과 정신을 투자하는 잘못된 세태를 시인은 역린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보다 인간, 돈보다 목숨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도 창밖으로 추락하는 자가 있다. 누가 용의 턱밑 거꾸로 선 비늘을 건드렸단 말인가! 박옥위·시조시인
귀에 대어보면
선사先史의 소리 들려온다
야성의 눈빛은
몇몇 천년 잠 들었어도
저물녘 칼 가는 소리
아직도 쟁쟁하다
볼에 대어보면
선사의 체온 스며온다
무쇠보다 억센 손에
무지개 그리던 손
박물관 조명등 아래
아직은 따스하다
-손영자, 돌칼. 부산시조 2007 겨울호
야성의 눈빛은 수수 천 년 전에 잠이 들었지만 돌칼에서 선사시대의 소리를 듣고 저물녘 칼 가는 소리를 쟁쟁 하게 듣는 시인이 있다. 또한 그 돌을 볼에 대면 선사의 체온이 스며올 듯 느끼는 예리한 감성의 시인! 시인은 지금 박물관 조명등아래 놓인 유물을 만나 무쇠보다 억센 손이 그리던 무지개 꿈을 그리며 옛날과 따뜻한 조우를 하는 것이다.
언젠가 김해 대성고분군 발굴현장에서 집터와 유물을 본 기억이 있다.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물은 옛 사람의 쓰던 물건. 그것으로 선인들의 생활방식을 알 수 있게 된다. 기록할 수 없는 시대의 유물은 과거의 삶과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언젠가는 우리 삶도 과거로 남게 될 터! -흙속에서 집이 따스하게 일어났다. 뻐꾸긴 울고 꽃은 피고 사람들은 사랑하였으리. 그 때 사랑 따뜻하였으니 오늘 우리사랑도 따뜻하리.
해운대 마린시티* '포세이돈' 모퉁이새벽마다 공사현장 해무 서린 방파제에서사내들 일렬로 늘어서 아랫도릴 벗는다잘 직조된 물너울에 파도의 워싱 가공안전모는 방파제 탈의실의 드레스 코드이곳에 헌사된 미명(微明)만이 인력시장의 미명(美名)두 다리가 일식(日蝕))처럼 희미하게 스친다스위트홈 '골든스위트' 에이치빔 세우느라바다를 송두리째 벗어둔 사내들이 거기 있다 * 마린시티 : 해운대 동백섬 서쪽 매립지 일대의 최고급 아파트 단지.
계속 신축 중이다. 거대한 청바지 , 이민아 '시조시학' 2009 겨울호
바다를 '거대한 청바지'로 보는 시인의 시선이 발랄하고도 새롭다. 청바지는 처음 미국 노동자들이 입던 옷. 노동의 옷은 청바지를 제칠 것은 없다. 미명의 바다, 인력시장(人力市場)에 뽑힌 사내들이 일렬로 서서 청바지를 입는다. 거기에는 이미 거대한 메커니즘의 도구로 변신한 인부들만 있다. 하여 그들은 일식처럼 희미해지는 것이다. 정작 구축하는 스위트홈은 인부들에게도 효용가치가 높을 것인가? 그들에게도 스위트홈의 꿈을 가져다 줄 것인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노동을 끝내고 바다를 벗듯 청바지를 벗는 사내들. 하루의 품삯은 그 노동만큼 돈독했으면…!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도 하다'. 느닷없이 롱펠로우의 시가 떠오른다. '세상의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시대에도 결코 절망하지 말자. 가장 어두운 때에 해는 떠오를 테니까! 불투명한 삶의 현장, 실직자들의 애환이 뭉클 가슴을 친다. 박옥위·시조시인
새우깡 하나에도 퍼덕이며 몰려들어뻔뻔한 비둘기 떼 살찌는 용두산 공원노인들 지친 하루해 벤치에서 야윈다장이야 멍이야 목청 높인 장기판도흑백이 엉겨 붙어 버둥거린 바둑판도파장엔 꼬리도 없이 어스름에 묻히는데저물어 깊어지는 자갈치 비린 바람제 몸 하나 못 벗은 질긴 밥줄 친친 감고용두산 오르내리며 저리 붉게 울고 있다.-용두산 공원. 손증호 '화중련' 2010 상반기호용두산 공원에는 비둘기와 노인들이 동거한다. 비둘기는 공원의 주인격이고 노인은 더부살이를 하는 격이다. 관광객들이 뿌려주는 먹이에 뒤룩뒤룩 살이 쪄 뒤뚱거리는 비둘기와 해질녘까지 꽃샘추위에 덜덜 떨면서 바둑과 장기로 소일하시는 노인들의 빛바랜 모습. 참 기가 막히고 가슴 서늘한 대비다. 노인들은 차라리 비둘기가 부러운지 모른다.인생의 황혼을 누가 맞지 않으랴! 한때 활기찬 젊은 날, 그들은 나라발전의 큰 역군이었는데, 노후란 왜 이리도 대책이 없는 것인지? 오늘날 노인문제는 심각하다. 무료급식소의 전경도 바라보기 민망한 지경이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됐다. 어디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는가? 누군들 노인이 되지 않겠는가. 복지사회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니…. 박옥위·시조시인
귀에 대어보면
선사先史의 소리 들려온다
야성의 눈빛은
몇몇 천년 잠 들었어도
저물녘 칼 가는 소리
아직도 쟁쟁하다
볼에 대어보면
선사의 체온 스며온다
무쇠보다 억센 손에
무지개 그리던 손
박물관 조명등 아래
아직은 따스하다
-돌칼. 손영자, 부산시조 2007 겨울호
야성의 눈빛은 수수 천 년 전에 잠이 들었지만 돌칼에서 선사시대의 소리를 듣고 저물녘 칼 가는 소리를 쟁쟁 하게 듣는 시인이 있다. 또한 그 돌을 볼에 대면 선사의 체온이 스며올 듯 느끼는 예리한 감성의 시인! 시인은 지금 박물관 조명등아래 놓인 유물을 만나 무쇠보다 억센 손이 그리던 무지개 꿈을 그리며 옛날과 따뜻한 조우를 하는 것이다.
언젠가 김해 대성고분군 발굴현장에서 집터와 유물을 본 기억이 있다. 신기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물은 옛 사람의 쓰던 물건. 그것으로 선인들의 생활방식을 알 수 있게 된다. 기록할 수 없는 시대의 유물은 과거의 삶과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언젠가는 우리 삶도 과거로 남게 될 터! -흙속에서 집이 따스하게 일어났다. 뻐꾸긴 울고 꽃은 피고 사람들은 사랑하였으리. 그 때 사랑 따뜻하였으니 오늘 우리사랑도 따뜻하리.
봄날 보리밭
정희경
짧은 해를 묻어둔 땅 속이 분주하다
심지에 불 켜는 손 깊이를 저울질해
밟혀서 더 강한 신호
봄날을 당긴다
폭설의 무게보다 더디 오는 하루하루
얼레빗에 걸러지는 생채기 둔덕 위를
갈맷빛 서러운 날들
바람이 훑고 갔다
말랑한 햇살 펴고 일어나 펄럭여라
쓰러지면 함께 누워 어깨 맞댄 깃발들
마침내 무릎을 세워
걷는 소리 또 보인다
-<우리詩> 2010년 5월호
봄날 보리밭. 그 분주함에는 이유가 있다. 싹이 나자 크기도 전에 서리 맞고 얼고 솟고 눈을 맞고 밟히는 과정을 겪어 봄을 맞는 보리의 생태에서 끈질기게 일어서는 자유에의 갈망을 바라본다. ‘짧은 해를 묻어둔 땅속이 분주하다’ ‘심지에 불 켜는 손’ 밟혀서 더 강하게 봄날을 당기는 보리는 ‘얼레빗에 걸러지는 폭설의 무게’ ‘생채기 둔덕 위’ ‘갈맷빛 서러운 날’을 살았다. 밟힐수록 서로 어깨를 걸고 마침내 무릎을 세워 함께 걷는 보리에는 푸름과 평화가 있다. 보리의 생태처럼 시의 전개가 치밀하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보리밭 같은 평화의 봄은 언제쯤에나 오나!
아찔한 날 선 삶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날아갈 듯 살아오신 아버지의 팔순 생애
등 굽어 푹 패인 가슴 허연 뼈로 누웠다
균형을 잘 잡아야 날이 안 넘는 겨
갈무린 기도문 인양 깃을 치며 솟는 햇살
하늘빛 흥건한 뼛가루 목숨인 양 뜨겁다
가슴 마구 들이치던 내 유년의 마른 바람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
촉촉한 귓전의 말씀 눈물 속에 날이 선다
-숫돌, 권갑하『외등의 시간』 (2009, 동학사)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듯한 어릴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父子像> 정완영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한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쌓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한 일이다
하르르 하르르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이별노래>박시교
숲길을 걷다보면 길만이 길이 아니라
숨어있는 모든 것이
길이고 눈물이구나
머리를
하늘에 둔 나무들
외롭게 감춘 뿌리까지.
하늘이 길러낸 나뭇잎들 바스라져
고단히 길을 덮고
길 아닌 길마저 덮어
우리가 함께 한 길이
지상에서 문득,
외롭다.
-<길>백이운
잠든 땅 일깨워
생령(生靈)을 불러오는
사월에는 여행을 가자 민들레 꽃씨처럼
산 벚꽃 번지는 산을 눈이 시도록 보러가자
한 생명 이 땅에 와서
꽃처럼 진실하게
짧은 삶 황홀하게 살아
꽃보다 아름답게
하르르 바람에 쓸리면
미련 없이 흩어지게
저마다 하얀 이야기 나누는 꽃잎 꽃잎
얼마나 더 나를 버리면 내 언어를 들을까
절실한 기도의 무릎이면
네게 닿을 수 있을까
눈부신 사월에는 젊은 꽃 가슴에 심자
기별 없이 둥지 트는 사념(邪念)을 잘라내고
울울울 산 벚꽃 번지는 산을 한 채 앉히자
-<산 벚꽃 번지는 산을>리강룡
중년의 나이 앞에 툭!하고 떨어지는
신갈나무 열매 하나 가만히 주워본다
화두란 바로 이런 것 쓸쓸한 화답 같은,
마른 꽃 흔들다가 혼자 가는 바람처럼
등 뒤로 들리는 가랑잎 밟는 소리
가벼운 이승의 한때, 문득 느낀 허기여
ㅡ<쓸쓸한 화답> 유재영
십이월 중앙선 길은 온통 추위만 남아
치악을 넘을 때쯤 인적도 수척해지고
칠흑의 어둠 속으로 눈발만 자욱했다.
서울을 이기지 못해 돌아선 천리 먼 길
막소주 한잔에 가려 분함도 흐트러지고
숨죽여 우는 산야만 차창을 따라왔다
-<辛酉年 겨울>조영일
어디선가 그대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언제나 설레임일 수 있었다
천천히 다가왔다가 돌아가는 너의 低音.
갈잎이 서걱일 때면 안부를 묻고 싶어서
밤 내내 접어서 띄우던 종이배
지금은 어느 강가의 풀꽃으로 피었을까.
내가 훔쳐 가진 너의 이쁜 열쇠 하나
그러나 열어보지 못한 그대 가슴의 이야기
복사꽃 화안히 필 때면 못견디게 그리워라.
먼 기억 속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
윤회의 좁은 길을 오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꾸만 눈에 밟히어 돌아 돌아 보인다.
-<복사꽃 필 때면>전원범
연필을 깎아주시던 아버지가 계셨다
밤늦
도록 군복을 다리던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엔 흑연빛 어둠을 벼리는 별이 내렸다
총알 스치는 소리가 꼭 저렇다 하셨다
물뱀이 연못에 들어 소스라치는 고요
단정한 필통 속처럼 누운 가족이 있었다
-<별>김일연
궂은 일들은 다 물알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가지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수양 散調> 박재삼
한 시대 협기 서린 수평선을 가늠하며
오랜 해를 담금질로 벼린 끝에 혼이 섰다.
서정을 엮은 달빛도 이 날 아랜 갈라진다.
머리맡에 걸어두면 가을 물 소리 높다.
굽은 목을 치려는 살의에 찬 저 눈빛
깊은 밤 칼을 뽑으면 한 秘史가 잠을 깬다
당대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혼불이여
어둠을 겨냥하며 서릿발 한이 울고
그날의 쓰러진 함성이 섬광으로 일어선다
- < 검> 정해송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조오현 시인
점원인가 하고 마네킹을 바라본다
마네킹인가 하고 점원을 바라본다
누군가 날 바라본다 사람인가 하고
점원인가 하고 마네킹에게 말을 건다
마네킹인가 하고 점원을 지나친다
인생이 날 지나친다 마네킹인가 하고
-<옷가게에서> 김일연(1955~ ) '
허옇게 배를 뒤집고 쥐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동네 누렁이 오줌으로 돌담은 늘 젖었고
한 켠엔 개망초꽃이 멋모르고 피곤 했다
검은 굴뚝 위로 초저녁 별 뜰 때면
바람은 한 차례 은빛 연기를 몰고 갔다
개망초 철없는 꽃잎도 휩쓸렸다가 돌아왔다
장사 마친 아버지는 그 무렵 들어섰다
참외 한 봉지가 리어카에서 흔들렸고
어린 난 귀 기울이다 서둘러 외등을 켰다
-<그리운 골목> 강현덕
이대로 끝장났다 아직은 말하지 마라
대가리에서 지느러미, 또 탱탱 알 밴 창자까지
한 소절 제주사투리, 그마저 삭았다 해도
자리라면 보목리 자리, 한 일년 푹 절여도
바다의 야성 같은 왕가시는 살아 있다
딱 한 번 내뱉지 않고 통째로는 못 삼킨다.
그렇다. 자리가 녹아 물이 되지 못하고
온 몸을 그냥 그대로 온전히 내놓는 것은
아직은 그리운 이름 못 빼냇기 때문이다
-<자리젓 >오승철
돌쩌귀 환하도록 가을빛이 깊은 날은
벌겋게 녹이 슬은 세월도 벗겨내고
내 천근 삶의 무게도 잠시 내려놓습니다
지울 수 없었던 어둡고 먼 기억들이
오늘은 아로새긴 무늬로 떠오고
낱낱이 맨살에 기는 나의 죄도 보입니다
용서와 참회로 내 마음의 絃을 고뤄
이름 하지 않아도 오롯한 사랑을 위해
내 남은 욕심의 습기 오래오래 말립니다
-<가을에 쓰는 詩> 서숙희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풍경> 김제현
그늘이 지나간다
비슬산의
하오 서너 시
하늘가는 길이
희고 꾸불텅하다
산 넘는
구름 그리메,
한 생애가 지나간다
텅 빈 안 골짝이
쿨럭,
기침을 하는
하오 서너 시쯤의
이른 해거름을
개울에
흙삽을 씻는
사람의 소리 들린다
-<각북角北 - 山役을 마치고> 박기섭
외종 아니면 재종쯤의 피붙이로 묵내기 화투판에 개평은 무슨
개평, 뜯어서 논마지라도 부친다면 또 모를까
아무려면, 남의말도 들을 땐 들어야지 묵밭 부쳐 밥술이나 뜨는갑다
싶더니만 풍각장 뜬계집이랑 정분날 건 또 뭐꼬?
묵내기 화투판도 시들하면 어떡하노 비슬산 안 골짜기 산가재나 건지는
게지 꽃지짐 곁들여 놓고 시장기를 달래면서
-<묵내기 화투판’-허튼 가락 ‧ 셋 > 박기섭
불꽃 일렁이는 벽난로 앞에서
멜로드라마의 입술이 거대하다,
도구처럼
그들만 지상에 남는다
오직 그들 그림자만
하루 세 번 밥때가 무섭게 돌아오는
산비탈에 겨우 붙은 따개비 셋방들도
한여름 쏘시개놀음에
불티를 뒤집어쓴다
지진해일의 일상을 호수로 위장시킨 채
장미향 미사여구로 내가 날 속인 나날
허망한 그 꿈 깨느라 긴긴 밤을 아프다
깨뜨려진 조각들은
귀 없는 바늘이다
헝클어진 타래실 빈손에 들고 서서
어디를 먼저 꿰맬까
찔린 데를 보는 새벽.
-<회복기>서연정
물렁한 뼈들이 차가운 몸을 섞는 밤
맨 처음 내 울음을 기억한 별 하나가
하늘 숲 어둠을 젖히고
내 안에 눕는다
몸속에 남아 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매 순간 덧대며 조심스레 문지르고
통증을 걸러낸 뒤에
새 살 돋듯 만난다
마개를 여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
너무 오래 두어서 다 삭은 마음을
겨울 밤, 물구나무 세워
시원하게 쏟고 싶다.
-<물병자리 > 이송희
꽃뱀이 허물 벗듯 세속 도회를 지나
국화꽃 치장하고 먼 길 떠날 날이
청하늘 먹구름 일 듯
예사롭지 않은 지금,
마른 꽃잎일랑 책갈피에 접어 넣고
상처를 어루만지듯 삶의 흔적 포장하는
마지막 무대의 연출
저문 날이 설렌다
세월을 덧칠해 온 아내의 갈색 머리
새하얀 가르마가 훈장처럼 빛나는 시간
조용한 안착을 꿈꾸며
신발끈을 고쳐 맨다
-<이사> 김연동
녹슨 레일, 모로 누운 무개차 수레바퀴
이마에 등불 달고
추운 밤 밝히던 그날
잔기침 도진 바람이 억새풀을 베고 있다.
발목 부러진 버팀목 여기저기 나뒹굴고
죽은 사내의 울음이
입구를 막고 섰다
갱도는 와르르 무너질 듯 세월 버티며 서 있고….
풀풀 풀 탄가루에 눈만 빠끔 열어놓은,
삶은 늘 비탈져서
끓어오르던 가래소리
요란한 기적소리도 막장 깊이 갇혔다.
아직 허파꽈리에 남아도는 돌가루, 화산재
기우뚱 폐광 막사엔
사람 자취 묘연하다
가시뼈 겨울나무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저 어둔 배경에도 둥지 트는 텃새 두엇
정수리 다 젖도록
알을 까고 새끼 치고…
연초록 예감의 봄을 자꾸 숲에 매달고 있다
-<고한리 시편> 박지현
늦도록
밤 늦도록
바느질을 하신다
여섯 남매
꾸는 꿈을
바늘귀에 실로 꿰어
밤새내
손을 놀리신다
여섯 빛깔 색실로.
꼬박 밤 새우신 일
자다가 깬
나는 알지
도마질
소리듣고
부엌으로 들어서면
함박꽃
꽃빛 미소로
덥석 끌어안으신다.
-<어머니> 하순희
깨어진 장독이 연출을 시도한 걸
뒤란에 들기까진 누구도 몰랐다.
달개비 꽃을 부여안고 진풍경으로 앉았다.
금이 간 가슴에 누수처럼 스며들어
귀뚜린 왜 자꾸만 달빛을 퍼내는지
생각도 귀퉁이가 열려 쪽빛으로 젖는다.
다시 거울 앞에서 거울과 마주하다
목숨이 부싯돌을 칼칼하게 부시면서
정좌한 물컹한 그릇을 툭 퉁기어 본다
-<정좌(定座)를 풀다> 박옥위
주루룩 면발처럼 작달비가 내린다 바람은 날을 세워 빗줄기를 자르고 지하방, 몸을 일으켜 물빛 냄새 맡는다
첫차 타고 눈 감으니 섬들이 꿈틀댄다 잠 덜 깬 바다 속으로 물김 되어 가라앉아 저 너른 새벽 어장에 먹물 풀어 편지 쓴다
사철 내내 요란한 엔진소리 끌고 간 아버지의 낡은 배는 걸쭉한 노래 뽑았다 그 절창 섬을 휘감아 해를 집어 올린다
-<완도를 가다> 박현덕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애월 바다> 이정환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 삽 한 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 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땀 한땀 기워낸다
-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이민아
솔 아래 바위에 앉아 그를 우러른다
큰 바위 두어 덩이 버선처럼 덮여 있고
구불텅 한 굽이 휘고 또 한 굽이 틀고 있다.
구불텅 두어 굽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해일까 달일까 아니면 바람일까
걸칠 것 하나 없는데 솔은 왜 돌아갈까.
내 모를 까닭이사 없지야 않겠지만
달빛에 짓눌리고 햇살에 눈 감다보면
헛디뎌 그도 한번씩 휘청거린 것 아닐까.
-<구불텅 소나무 > 문무학
군말이나 수사 따위 버린 지 오래인 듯
뼛속까지 곧게 섰는 서슬 푸른 직립들
하늘의 깊이를 잴 뿐 곁을 두지 않는다
꽃다발 같은 것은 너럭바위나 받는 것
눈꽃 그 가벼움의 무거움을 안 뒤부터
설봉의 흰 이마들과 오직 깊게 마주설 뿐
조락 이후 충천하는 개골의 결기 같은
팔을 다 잘라낸 후 건져 올린 골법 같은
붉은 저! 금강 직필들! 허공이 움찔 솟는다
-<금강송> 정수자
잔 물결 이랑 내고 땀방울 씨를 뿌려
바닷가 해수 밭을 일구는 저 염부의
짓무른 두 손바닥에 옹이 꽃이 필 무렵
맨살로 뙤약볕을 견뎌온 밭이랑이
다비하듯 밭아져 사라질 즈음에야
안개꽃 피어오르듯 돋아나는 흰 사리
-<소금꽃>김창근(현대시학 09. 6월호)
찬밥을 물에 말아 신김치를 걸쳐 먹어도
이제는 식욕을 나눌 연륜이 되었다고
생일날 눈발처럼 날아와 녹아든 몇 마디 발,
나다닐 때 떨지 말고 제때 챙겨 먹으라며
마음에 녹슨 못을 빼내주듯 덧붙인 말,
은발의 억새밭 길도 둘이라서 환하다고.
-<쪽지>이승은 <화중련> 09. 상반기호
갈매빛 풀밭 하나 수틀로 받쳐들고
밤하늘 성좌만큼이나 난만한 풀꽃들을
땀땀이 투명한 손들이 떠올리는 것을 보았다.
골에서 등성이에서 시나브로 이는 구름
열두 폭 흰 무명베로 이불홑청 시쳐 내듯
마침내 큰 구름바다를 만드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먼 먼 남녘 나부끼는 능선 사이
얼핏 눈만 주어도 느꺼운 내 산하의
풀어진 옷고름 같은 섬진강도 나는 보았다.
-<노고단 가서>조동화
한 짐 풀어놓은 넝마를 헤집으며
반짝, 골라 닦아보는 은박지 몇 마디를
앞섶에 여미지 못해 헤맨 길이 얼마던가
턱 높은 문지방을 넘어 봐도 넘지 못한
그 마음, 팔작 지붕 처마 끝에 매달려서
풍경이 우는 몸짓만 따라하곤 하던 것을
길눈도 어둔 것이 해찰한 죄인가요
몇 번을, 헤아려도 낯선 타관 산 번지라
문밖을 나설라치면 발길 먼저 묶이니...
-이승은 <현대시학> 09. 4월호, 계간 <시선> 09. 여름호 리뷰.
한 30년 함께 사니 그대는 나의 분신
만 리를 떠나 있어도 손끝에 와 닿더니
이제는 내 속에 들어 사철 우는 뻐꾸기
그대의 손을 잡고 어디인들 못 갈까
슬픔도 노여움도 꼭꼭 묶어 수습하고
벙어리 귀머거리로 남은 길을 나서리
-<노처(老妻)>유자효
시도 때도 없는 갈증 열병으로 혼절하다
그예 뼈와 살 무르고 형체 없이 곰삭다
버릴 것 다 버리고도 난해한 너의 문법
떫은 세포 숙성되면 외곳 사랑 이룰까
그래 어는 때든지 기다리고 기다리리
끝끝내 풀리지 않는 설익은 꿈, 헛꿈들
예감보다 더디 오는 막차를 기다리다
스스로 삭힌 울음 깊은 향기 우러나올 제
어둡던 유예의 시간들 환하게 떠오른다.
-<시간의 세포>진순분
갓 구운 식빵을 뜯어먹다 탄성(歎聲) 지른다
빵 속에 모서리 하나 없는 수많은 방들
살짜기 세들고 싶어
생각이 말랑해진다
초록 밀밭 지나가는 바람의 발자국과
그 발자국에 고여 있던 설레는 달빛까지
유년의 기억이 번지며
푸른 꿈을 잉태한다
살 비비듯 잎과 잎 은근살짝 결 맞추고
빗방울 떨어져 실뿌리에 물 적시던
살가운 반짝임의 시절
부풀어 산란하는 방
흙먼지 한 톨마저 아늑하게 잠재워줄
요람 같은, 내 안 가득 출렁이는 방 짓고 싶다
헐벗은 맨발이 꿈꾸는
따스한 탄성(彈性)의 방
-<말랑한 방> 선안영
담배를 배울 걸 그랬다
성냥골 그어 당기게
누가 봐도 일없이 불장난한다 하지 않게
성냥골 확 그어 당기면 당긴 이유 보이게.
촛불을 켤 걸 그랬다
어둠에 등롱빛 번지게
어둠
가운데
어둠으로 앉은
몸
등롱빛 불꽃은 번져 네 몸 환히 스미게
-<저녁>홍성란
각주도 나보다 팔자가 낫다고
뒷 페이지에 앉아서 투덜 거릴 때가 있다.
세상이 그런 투정을
받아 주진 않지만.
서언처럼 유려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고
결론처럼 화끈하게 주장을 펼 수 없다는
카니발 뒷좌석에 앉은
부록들의
불만을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전세집을 옮기고
아들의 고집으로 전학을 시키면서
김씨는 어쩌면 자기가
부록 같은 생이라고?
-<부록, 부록같은> 이우걸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 井戶茶碗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고려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雜器)라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한 것 아니라 백성의 밥그릇이었거늘
-<잡기雜器> 김영재
아버지 당신 몸에서 나를 꺼내실 때는
청보리 술렁임 뒤로 늦은 봄이 가던 날
온 들판 흔들어대며 그 봄 배웅하던 날
썩어야 사람 되제
잘 썩어야 사람 되제
두엄에 날 버무리다 당신은 가버리고
몇 알의 보리씨만 남기고 너무 일찍 가버리고
흙이 된 당신이 밀어올린 보릿대에
이제는 내 아이들 올려다 앉히셨네
잘 여문 이삭 되어야제
찬 알곡 되어야제
ㅡ<청보리밭> 강현덕
많은 글을 인용하여 보았지만 시조쓰기란 왕도가 없다. 그러나 공부하며 고뇌하며 시조를 사랑하다보면 어느 날 시조도 그의 가슴을 열어 깊은 속내를 보여주지 않을까?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날이 얼마나 지나면 길이 열릴까? 길이 열리지 않더라도 자신을 위로하고 다스릴 수 있다면 그 경지에 드는 것이나 될까? 어림없다. 누가 알아주나마나 하고픈 이길 가다보면 꽃도 보고 열매도 보고 구름도 소나기도 보고 푸른 하늘을 보게 되리라. 날마다 일기를 쓰듯이 시조를 써 보자.
참고자료
1.오세영 시인 저 [20세기 한국시의 표정]에서
시는 상상력으로 쓴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시는 상상력으로 쓴다.
사물이나 세계를 지적이고 이성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상상력으로 파악하는 것은 '시적인 것(포에지)'이다.
훌륭한 시는 훌륭한 상상력으로 쓰여진 시다.
*훌륭한 상상력이란
-참신하면서도 독창적인 상상력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상상력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끼도록 만드는 상상력
-정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주는 상상력
*훌륭하지 못한 시란
-상상력이 거의 없는 시
-상상력이 있다하더라도 진부하고 통속적인 시
-그 상상력이 인간의 삶을 병적으로 만드는 시
-그 상상력이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일깨우는 시
-그 상상력이 자충수를 두는 시
*상상력에는 핵심적인 상상력과 주변적 상상력이 있다.
-핵심적인 상상력이란//중심은유 즉 시에서 사적 상징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詩作은 대상이 지닌 일상적 의미를 시적인 의미로 상승시키는 중심은유를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예컨대 '새'의 일상적인 의미는 '날짐승'이다. 그러므로 새를 대상으로 하여 시를 쓸 경우 그가 제시하는 의미는 최소한 날짐승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어야 한다. 새를 '물고기' 혹은 '사과'로 보고 쓰면 시가 되지만 '새는 물고기이다'라고 쓰면 시가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새를 시로 쓰면서 '물고기'나 '사과'를 이야기하게 된다. 즉 시인의 새에 관한 시는 '물고기' 혹은 '사과'라는 큰 틀 안에서 쓰여진다. 이 때 우리는 '새'를 '물고기' 혹은 '사과'라고 보는 시인의 상상력을 핵심적인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주변적인 상상력이란//파생은유(혹은 이미지) 즉 시 자체의 내용을 말한다. 시의 내용은 발상에서 비롯하는 詩想의 전개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핵심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중심은유를 얻게 되면, 다음 차례로 시인은 그 詩想의 전개에 따라 중심은유에 관련된 파생은유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중심은유는 시의 발상 혹은 토대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물고기'라는 중심은유는 이차적으로 조약돌, 수초, 폭포, 강물에 버린 오염물질 등 물고기와 관련된 사물들 속에 중심은유와 관계를 지닌 파생은유들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말한다.
-이렇게 시는 핵심적인 상상력과 주변적인 상상력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다.
2.「현대시조 개론」(동아백과)에서
현대시조는 이미 있어온 잠재적 시조의 보편적 질서와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개인적 질서가 함께 실현된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질서와 보편적 질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개인적 질서는 보편적 질서에 의하여 안정을 얻고, 보편적 질서는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변형된다. 이때 보편적 질서란 물론 한국시가 전체가 나누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질서이다.
한국시가사상 오직 시조의 형식만이 시형으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시조의 형식이 한국시가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하는 민족적 동일성과 깊은 연관성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같은 보편적 질서는 시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보편적 질서를 통하여 개인적 경험을 표출하는 것이 시조라고 하는 전통양식인 것이다.
그것은 곧 보편적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되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는 실감실지의 눈이다. 실감실지의 눈은 이미 있어온 관습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저항은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완성된다. 곧 개인적 질서를 통하여 보편적 질서가 갱신될 때 현대시조에서는 새로운 시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曺雲의 石榴)
이 시조는 시어로 보나 율조로 보나 개화기시조와 비교하여 상당히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시조와 같은 단조로움이 극복되어 시조가 단형 서정시로 변모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변모가 가능한 것은 보편적 질서에 근거하면서도 개인적 질서로 재구성되고 있는 ‘실감실지’의 눈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감실지의 눈은 무엇보다도 이미 있어온 시조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개성적인 질서에 충실하였을 때에 재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있어온 시조의 틀 안에서도 현대시조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신축성과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이은상이 1925년 4월 18일에 발표한 〈봄처녀〉, 이병기가 같은해 7월 1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봉천행 9장 奉天行九章〉에서 잘 나타난다. 이어 주요한·변영로·조운·정인보 등을 거쳐 ≪문장 文章≫지의 추천을 거친 김상옥(金相沃)·이호우(李鎬雨)로 이어지면서 시조의 근대적 변화가 꾸준히 추구되었다.
현대시조의 과제라면 시조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시조는 보편적 질서와 함께 개인적 질서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보편적 질서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시조야말로 우리 고유의 전통시라고 하면서 시조가 지닌 미덕이나 그에 대한 향수에 무조건 집착하려 한다.
시조가 이미 주어진 형식이고 전통적이라는 말은 실상 시조시인들의 일방적 주장이지, 학문적으로 검토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전통적이라고 하면, 시조의 형식체험을 깊이 의식하고 시조가 현실에서 존재하여야 할 역사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시조가 전통적이라는 것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조가 과거에 지녔던 그 의의 때문에 무조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고적이며 민족적 감상주의에 그칠 우려가 많다. 그러한 생각은 시조의 형식체험을 단순히 외형적인 형식의 차원에서만 파악하고 있을 뿐, 시조 특유의 내재적 원리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서경·영탄·회억·감상 일변도로 머무는 것이다. 나아가 시조가 그것이 하나의 의미있는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앞서 안이한 발상에서 오는 기계적 반복이나 자수맞추기놀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조가 단조롭고 기계적이며 또한 복고적이라는 오해는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
살아 있는 경험과의 부딪침에서 나온 것이 아닌 관념적인 발상법이나, 개성적 질서가 무시된 형식을 고수하는 것은 고시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조를 유형화시키는 길을 걷게 되고 생명없는 시를 양산(量産)할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읽어보아도 자유시와 구별되지 않는 명목상의 시조들도 존재한다. 이는 보편적 질서를 무시하고 개인적 질서에만 치중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조의 질서란 그 자체로서 굳어진 자족적 질서는 아니다.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보편적 질서의 변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변형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순전히 개인적 질서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이미 시조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이미 시조가 아닌 것이다.
시조가 아무리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보편적 질서의 반영이며, 그 질서를 통하여 삶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의 질서는 의도적인 작위의 결과가 아니고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삶의 현실과 부딪쳐서 얻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미적 감수성과 사고의 양식, 여기에 창이라는 음악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형성된 민족시의 가장 정제된 형식인 것이다.
따라서, 시조형식에 대한 맹목적인 고수나 무조건적인 파괴는 어느 것이나 현대시조가 취할 길이 아니다. 보편적 질서와 개인적 질서의 발전적인 종합을 통해서만 현대시조는 존재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조는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고, 자유시이면서 정형시가 되어야 한다.
현대시조가 과거의 시조와 다른 점은 정형이라는 틀에 구속받지 않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시조가 자유시가 되지도 않는다는 데 그 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이병기는 ‘시조는 정형(定型)이 아니라 정형(整形)’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좌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동아 백과사전)
3.시조, 세계문학사에 빛나는 우리 민족문학의 시형
오세영 (시인, 서울대 교수)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나 여타 동물과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간 수없는 논자들의 수없는 논의가 있어 무엇이라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정신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 이외의 그 어떤 동물이 자신만의 정신문화를 창조 혹은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옛 선구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혹은 ‘지적 호기심을 가진 동물’이라 하고, 혹은 ‘기호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homo symbolicum)’이라 하고, 혹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동물’이라 규정했을지도 모른다. 지성이나 언어(기호)나 도덕성은 모두 고차원의 정신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학명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생각하는 흙(존재)’이라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지닌 이 정신문화의 핵심에는 종교와 예술이 있다. 아니 이 양자의 구분이 아직 있기 이전의 어떤 정신 행위가 있었다. 그것은 선사시대의 인류 삶을 돌이켜보면 안다. 이 시기 인류가 최초로 보여 준 정신행위가 바로 제천의식(祭天儀式)이었고 이 제천 의식 속에 오늘날의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이 내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의 핵심에는 문화가 있고 문화의 핵심에는 예술이 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그 예술의 핵심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두말할 것 없이 언어로 표현되는 ‘문학’이 있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고고한 정신적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학의 핵심에 바로 ‘시’가 있는 것이니 시가 소리로 표현되면 음악이 되고, 색채로 표현되면 회화가 되고, 몸짓으로 표현되면 무용이 되고, 물질로 표현되면 조각이나 건축이 되는 것이다. 즉 시는 인간 정신활동의 핵심 가운데서도 핵심에 위치한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감히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삶의 꽃은 문화이며, 문화의 꽃은 예술이며, 예술의 꽃은 문학이며, 문학의 꽃이 바로 시라고…….
그러므로 어느 시대나 위대한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위대한 문학이 있었다. 위대한 민족 유산에는 항상 위대한 시가 있었다. 위대한 민족은 바로 위대한 민족문학과 위대한 민족시인을 가진 민족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그렇고, 프랑스의 유고가 그렇고, 독일의 괴테가 그렇고, 인도의 타골이 그렇고, 중국의 두보나 이백이 그러했다. 우리 한국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정신사에 월명이나 황진이, 이규보나 김시습, 정철이나 윤선도와 같이 우리의 조국을 찬란하게 빛낸 문학과 시인이 있어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인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것을 우리 문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대의 향가를 보라. 요즘 서구 문학을 배운 사람들은 흔히 베르렌느나 랭보를 논하지만 나는 월명이 지은 〈제망매가〉 한 편이 〈가을의 노래〉는 물론 이를 포함한 베르렌느의 모든 시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정주의 시가 보들레르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구인들이 그들의 민족 시형으로 소네트를 자랑하고, 일본인들이 단가(短歌)를 자랑하고, 중국인들이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를 자랑하지만(그러나 실상 한시의 이 절구나 율시는 중국만의 민족시형은 아니다. 동아시아인들이 문어로서 한문을 공유한 것과 똑같이 이들 시형 역시 동아시아 민족이 공동으로 창작하고 공유한 공동 시형이기 때문이다.) 칠팔 백 년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우리의 시조 시형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세계적 문화 유산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시조는 세계 문학사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형이자 우리 민족의 숨결과 혼과 언어가 한 가지로 용해하여 이룩한 가장 한국적인 정형시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것이 천년에 가까운 명맥을 유지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 감정, 세계관, 인생관과 이념을 이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있었겠는가. 설령 그것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하고 어느 누가 이 시조처럼 천년에 가까운 정형시형을 이 세계 다른 민족의 문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이 한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시조가 세계 정신문화의 영역에 우뚝 서서 큰 나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시는 발생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형시를 지향하였다. 그 정형시가 오늘날과 같은 자유시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어느 민족문학에서든 정형시는 자유시의 모태이자 자유시의 출발이며 그 지주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시를 포함한 그 어떤 시의 경우에도 훌륭한 시는 정형시에 대한 이해, 감상과 수용, 모방과 수정, 반영과 전용 없이 쓰여진 예란 결단코 없다. 설령 시인이 정형시에 대한 의식 없이 자유시의 창작을 수행했다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시인이 과거에 체험했던 어떤 정형시에 대한 의식을 무의식 속에서 표출한 결과일 따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훌륭한 시가 쓰여질 수 없는 것이다. 언어의 해방이란 언어의 구속을 전제한 말이며, 무형식이란 형식의 안티테제를 일컫는 말이며, 실험이란 정통의 대타개념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형시 의식을 가장 첨예하게 체험한 사람일수록 가장 훌륭한 자유시 창작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뎃상수업을 확실하게 이수한 사람이 훌륭한 화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훌륭한 구상화를 그릴 수 있는 사람만이 훌륭한 추상화를 그릴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비록 일시적으로 소수의 독자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는 훌륭한 시를 쓰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산문을 쓴 것을, 훌륭한 운문을 쓰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자유시를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서구의 초, 중등학교 문학 교육에 있어서 당국이 학생들에게 훌륭한 그들의 민족 문학 특히 민족의 정형시와 운문을 무작정 외우게 하는 방법은 매우 바람직한 교수법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즉 바칼로레아에 그들 민족문학의 훌륭한 고전―대부분 운문 형식―을 대거 외우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정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리 초·중등학교 문학교육도 서구의 그것처럼 학생들에게 민족의 고전은 무작정 외우도록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운문 문학인 시조가 그러하다. 그것은―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한 인간으로서의 정신적 성숙을 위해서, 완전한 인격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세계 속의 한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하다. 특히 시조가 더 그러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정신문화의 핵이라 할 ‘시’ 가운데서도 천년의 전통을 지닌 우리의 민족 시형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가 문학의 길로 나아갈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한민족의 민족 시형에 한 번도 감염되어 본 적 없는 사람이, 문학의 기초 뎃상이라 할 정형시 창작을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민족의 감성과 언어와 혼을 정교한 형식으로 다듬어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의 우리 시단이 이처럼 혼란과 야비와 타락 속에 빠진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가능한 시조를 많이 외워 보자. 한 편이라도 써 보자. 그리하여 그것이 전 국민의 교양이 되도록 노력해보자. 우리의 문학을 위해서, 문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자존을 위하여,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 나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 시조카드 놀이를 통해 수십 편의 시조를 낭독하고 생활했던 체험이 오늘의 시 창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여기서 고백한다. ■
-글쓴이 약력-
부산사범대학 졸업
방송통신대학교 졸업
1983년 현대시조, 시조문학으로 동시(同時)추천
부산문인협회부회장 부산시조시인협회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 국제펜클럽부산자문위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부의장,가톨릭문인협회 부회장,부산여성문학인회고문,부산여류시조문학회장
연대,석필동인
시집:플룻을 듣,다 한국현대시조 백인선겨울 풀, 지상의 따스한 순간 외 다수
이영도 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부산문학상, 부산여성문학상,부산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헥...헥 출력하는데도 한참 걸렸읍니다 얼추 40장이니 나오던걸요...놀래라...갠 적으로는 가운데 좋은 글을 쓰려면 에 깊이 동감 합니다
아이고 이제야 겨우 1/3 읽었네 헥...헥 ...정진 중 요기까지 읽다가 생각 난거 조기 조 위에 3번에 동그랑땡 4번 그건 등롱님이 많이 참고 하셔야 할 듯 하고 거기 동그랑땡 6번은 화산섬님이 참고 하셔야 할 듯 하고 큰 타이틀 4번에선 우리 모두 열공 해야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등롱님 화산섬님 꼭 찝어 말씀 드려 자존심 상하셨나요?? 아니시죠...그러셨다면 전화 주세요 제가 밥 사겠습니다 ... 먹는 거로 때우려 하는 나를 용서해 주3
벌써 파악 끝났습니까? 3-4번 말고도 제가 익혀야 할게 많은데 ... 꼭 집어 말씀하신건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걸로 받아 들일께요 조랑말님께 이쁜짓한게 있나 ㅋ
아니다 섭하다 해야겠네 그래야 바쁜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ㅋ 고맙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읽고 있네요 먹지 않아도 배부르네요 출력해서 빨간 색연필 옷 입혀 줘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도 갑자기 시조를 못 쓰는 것에 대해서 후회가 막급입니다 갑자기 시조 공부 막 하고 싶어 집니다 ""종달새만 울어도 출렁여 가는 하늘""" 이라니...캬.... 우리 산꿩님은 어디 가시니 허다보난 요기도 있고 쪼기도 있네요...ㅎㅎㅎ 시인의 봄이여! 시를 분출 시켜라....암 암 가을에도 시를 분출 시켜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 될것 같습니다...
착 착 감깁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촘지름 고튼 거.
촘지름 ㅋㅋㅋ 암튼 표현 리얼 하기가....여러분 읽다가 종이 넘기기가 뻑뻑 하거나 목이 살짝 칼칼 하면 챔지름을 살짝 쳐 주세요,,,뭐라고요...챔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