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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80
2월27일[사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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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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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VuowGnLYAY
[서울대교구 조성현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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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배척합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지도자 행세를 하지만, 구체적인 삶이나 인성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꽤 엄중합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말씀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조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주로 입고 다니는 옷은 명품 메이커와는 거리가 먼 태안 재래 시장표 만원짜리 작업복이나 추리닝입니다. 시골이다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피정 오시는 손님들을 가장 뷰가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저는 제일 구석 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가급적 앉아 있지 않고 하루종일 서서 돌아다닙니다. 식탁 세팅하고 주방에서 조리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주교품에 막 오르셨을 때, 당신의 가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교황님께서 저를 교황청의 고위 성직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매우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저는 사제 때와는 달리 저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수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복 색깔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인도된 영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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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H1fH_mBV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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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만해졌음을 알아보는 가장 빠른 법>
매리언 존스(Marion Jones): 미국의 유명한 육상 선수인 존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획득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로 인해 올림픽 메달이 박탈되고 명성이 손상되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암스트롱은 특히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에서 7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유명한 사이클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은 그가 장기 도핑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급락했고,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경력을 박탈당했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평생 프로 사이클 출전이 금지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생각과 행위가 가득했습니다. 위 인물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시며 스승이나 아버지란 소리를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사제가 되었을 때 어른들이 높여주는 것에 취해 교만을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겸손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은 제가 보좌신부 때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시장님이 와서 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체육복을 입었기에 시장님과 공손히 인사하였습니다. 당시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시장님은 겸손해지려 노력하였지만, 저와 같이 젊은 청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서 손만 내밀었습니다.
한참을 인사하며 가시다가 신자들에게 여기 신부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임 신부님은 오지 않으셨고 보좌 신부님만 오셨다며 신자들이 저를 지목하였습니다. 저에게 다가오더니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받아주었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 그만한 대접을 많이 받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않는 게 제일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부님이란 소리를 들어도 겸손해지려면 자신이 교만해졌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바로 솔직함입니다.
그런데 저도 어떤 사진에서 위 시장처럼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신자에게 한 손으로 뻣뻣하게 악수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 뒤에는 항상 감추는 죄가 존재합니다. 교만함의 시작은 위선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어떤 군인이 장군이 되어 사무실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너무 좋아서 뽐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어떤 사병이 들어오니까 전화기를 집어 들고 “예, 대통령 각하.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병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병은 대답했습니다. “전화선 연결하러 왔습니다….”
왜 위선과 거짓말이 교만일까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렁이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하느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명인들이 왜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질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이강인 선수도 워낙 인기를 많이 얻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 인기를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주장에게 대들기 전에 위선적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속이려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아, 내가 교만해져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롱런할 수 있습니다.
마약 중독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렇고, 과거의 빈곤과 학대, 그리고 임신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고백한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고, 성매매로 체포되었지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휴 그랜트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끝까지 감추려 하지 않고 겸손함을 지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위를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솔직해짐을 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용기에 더 크게 감탄합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속이며 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인기를 얻고 성공하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원인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교만해졌음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주교가 되고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어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를 불렀지만, 그는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짐짓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고 문을 열고는 바로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를 발로 밟으며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라고 세 번 반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자기의 위선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웃을 판단할 때 뉘우치면 많이 늦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두렁이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 먼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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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월 2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서품식 직후에 교구장님은 새 사제들에게 첫 임지를 발표합니다. 제가 아는 새 사제의 첫 임지를 보았습니다. 새 사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본당의 규모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사제가 함께 살아야 할 본당 주임 신부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지만 본당사목의 대부분은 첫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새 사제가 부임하는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잘 아는 후배 신부님입니다. 사목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분입니다.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분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새 사제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시작이 잘 되었으니, 새 사제의 앞날에도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3년 전에 저도 서품을 받고 새 사제로 첫 본당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으신 본당 신부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긍정의 마인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빈말이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식과 율법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교우들의 가게를 찾아보았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한번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저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젊은 사제가 더 필요하다면서 넉넉하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고기도 구워주었습니다. 신부님 사목의 모든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신부님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을 흘려서 작아졌습니다. 제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 흘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게 사목의 모범을 보여주신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청개구리처럼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 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믿음의 줄기에서 사랑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교만하고, 게으르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사목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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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절).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절) 나쁘게 처신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훌륭한 지도자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타락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8-9절)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절)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그리하여 사순시기가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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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생각과 말에 머무르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공허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해서 비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머리와 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해석 권한으로 권력을 쥐고, 외적으로 권위를 상징하는 옷차림새에 마음을 쏟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에 힘이 있으려면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식은 희생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은 어떤 유려한 연설과 글보다 세상에 더 큰 감동과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이 시대의 어른으로 여기는 이유는 단순히 그분께서 가지셨던, 시대를 바라보는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이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 이해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금언들 때문만이 아닙니다. 언제나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불의에 저항하시고,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헌신적인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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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혹시 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2-4)
회당의 집회 때에 신자들은 정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서 앉고, 율법학자들은 그 성경 보관소를 등지고 신자들을 향해 단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 의자를 ‘모세의 자리’ 라고 부릅니다.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는 말씀은,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하는 말 전체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들과 계명들만을 가리킵니다.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해석, 또 바리사이파의 규칙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 실행하고 지켜라.”라는 말씀은,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들과 계명들은 실행하고 지켜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들의 삶은 본받지 마라.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뜻인데, 여기서 ‘행실’은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가리키고, 그들이 말하는 개인 의견이나 주장도 포함됩니다.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말들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말에 현혹되면, ‘진실한 삶’과 ‘위선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듣는 사람들’까지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말’과 ‘삶’이 다른 것을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위선자가 안 되려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또 신앙인들은 기본적으로 복음 선포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아예 말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을 아예 안 하겠다고 하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인데, ‘말로’ 하는 증언과 ‘삶으로’ 하는 증언이 다르면, 그 증언은 거짓 증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하든지 삶으로 하든지 증언은 항상 똑같아야 합니다. 또 어제의 증언과 오늘의 증언도 똑같아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른 것도 위선이고, 상황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말을 바꾸는 것도 위선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정들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억압하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한 은총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계명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칙들과 규정들과 지침들을 실천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남들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들은 안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나 지키는 것이고, 나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특권의식, 우월감, 교만 등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더욱더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규칙이나 규정이나 지침 같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더 좋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5.11-12)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은 마약과 같고, 그것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쪽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자인데도 위선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눈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선자들이 교묘하게 자신을 잘 꾸미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선자들 자신들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고쳐서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인데,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겸손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거짓 섬김과 낮춤’은 그 자체로 위선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내가 혹시 교만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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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23장은 21-22장에서 소개된 적대자들과 맞선 충돌을 요약하고, 26-27장에서 다루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한 비판을 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에서 시작된 비판은 이어지는 23장 13-36절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유다교 안에서 합법적 교사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역할과 권한을 인정하십니다.(23,1-3 참조)
그러나 그들은 위선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23,3 참조) 그들은 권력자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짐을 지우고,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다니며 특권을 요구하고 대중 속에서 영예를 찾습니다.(23,4-7 참조)
예수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23,8-12 참조)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코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보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자들의 교육을 위한 부정적 본보기로 이용하십니다. 잘못된 행위와 태도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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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덮어서 방해를 합니다. 역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진실과 거짓이 치열하게 다투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빛으로 거짓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전체를 보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스핑크스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을 거대한 신상으로 만들어 섬기던 이집트의 우상숭배를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서도 뱀이나 물고기 같은 짐승의 상을 거대한 나무나 돌로 만들어서 숭배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직면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된 이들 주변 민족들의 문화는 이런 우상숭배 종교를 위해 화려하고 눈부시게 발달하였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종교는 역사상 징표를 드러내실 뿐 우상숭배 종교들의 화려한 문화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화려한 우상숭배 종교와 그 문화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사야는 동족을 향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두 도시의 이름을 소환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앙에 따른 윤리를 가르쳤는데, 그 윤리는 무미건조한 듯하지만 올바르고 깨끗한 길이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지배층과 민중을 다 함께 지배하고 있던 정신 풍조인 바리사이즘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마태 23,2)는 말이 그 서론입니다.
모세가 받들었던 하느님 신앙도 없이, 그 신앙 덕분에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만 취하고, 신앙 없는 윤리만 공허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내세운 형식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그 핵심을 찔러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논리는 율법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 자구(字句)대로 지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핵심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도 6백 가지도 넘은 규정들을 다 알지도 못해서 규정과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허구한 날 입씨름을 하기 바빴으며, 그러한 공리공론의 와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가?”를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소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 일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헌금한다고 자랑했고, 기도를 해도 성전이나 저자 거리에서 보란 듯이 길게 빈말을 늘어놓으며 기도 바쳤으며, 기도 중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축복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도,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말을 따라서 지키도록 힘쓰되, 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인간관계에 필요한 지혜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진정성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에서도 사랑의 최대한과 최소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먼저 그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연이나,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해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더 없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이 진실한 말로 한 약속이라면 행동으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목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흠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능한 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이웃이 될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으로써 그 관계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겪다 보면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날 경우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행동에 진정성이 없는 속물형 인간임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럴 때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처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엮여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에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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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는.”>
인간의 욕심은 이기적인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 많지요. 따지고 따져서 올라서 보면 '자기 욕심'이 웅크리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악행을 떨쳐버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결국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유황불에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을 겪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회개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진실을 외칩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예언서 1,18)
예수님께서 모처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오 23,2-3ㄱ)
그런데 주님께서 결국 그들의 행동은 닮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인자하신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그들은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어서 사람들 앞에 경건하고 신앙도 깊은 것으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경은 하느님이 말씀이기 때문에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표양은 따를 것이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에 겸손하였다면 문제는 좋은 것에서 선하고 좋은 결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항목만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그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느다고 비판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려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성구갑을 크게 만들어 이마나 팔에 붙이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트리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한다고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들의 드러내는 위선적인 행동을 반대하며 아예 스승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11-12)
사람이 겸손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을 아름답고 선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러나 그 반대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보기에도 사실 흉합니다.
한국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공직에 있었을 때 불렸던 칭호를 변하지 않고 쓴다는 것입니다.
어떤 직책에서 물러났어도 ‘회장’, ‘사장’, ‘위원장’ 심지어는 ‘국장’, ‘과장’까지 불러 주고 있습니다. 안 불러주면 섭섭한 마음이라는 것은 대접받으려는 심보를 못 고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호칭 중에서 ‘신부’라는 것만큼 영광스럽고 황송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총대리’, ‘사무총장’ 소리를 기대하는 얼빠진 사제도 있다고 하네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사회복지나 학교 계통에서 일하는 수도자가 ‘수사님’, ‘수녀님’이라는 고마운 칭호보다 ‘이사님’, ‘교무처장님’, ‘사무국장님’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또 다르게 얼빠진 수도자가 있다고 하네요.
물론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교우들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시부모의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만 있다면, 나이 많은 위치에서 조금만 젊은 나이로 내려 올 수 있다면 대접받는, 그리고 주인의 위치에서 종업원의 위치로 내려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겸손과 봉사하는 자리가 얼마나 기쁘고 자유롭고 주님의 평화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스스로 낮추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사순절의 복된 날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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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23,2~3.5)
君師父一體(=임금, 스승,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란 말을 듣고 성장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이런 사고는 한낱 낡은 구시대의 가치로만 치부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승, 아버지, 선생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예수님 당대의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어른답지 못한 행실을 빗대어 무엇이 진정한 어른스런 존재이며 어른다운 삶인가를 질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23,2~3) 살아온 세월만큼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늘어나지만 실행하는 것은 줄어드나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비례하지 않은 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합니다. 제대로 나이 든다는 것은 살아 온 삶을 통해 보고, 들으면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남의 무거운 삶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이지 남에게 무거운 짐을 더 올려놓은 존재여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른이란 존재와 어른으로 존경받는 삶이란 살아갈 길이 아직도 까마득한 먼 인생길을 걸어가는 손아랫사람들을 배려하고 지지해 주며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며 존중해 줄 때, 그런 그 어른의 모습을 보고 어른으로 존경하고 알아 모실 것입니다. 요즘엔 어른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참으로 큰 어르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거슬려서 악한 행실을 범하고 당신 앞에 죄를 지었음에도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1,18)라고 호소합니다. 당신께 되돌아온다면 더 이상 이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베푸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오직 한 분 우리의 크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보다 더 낮아지고 섬긴 분이 어디 있었습니까?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아버지를 향해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시50,23)
사제가 되기 전 그리고 서품 초기에 만난 수녀님들은 왜 교구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회 사제가 되었나요,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교구사제와 수도 사제 간의 우열을 가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예전엔 종종 교구 신부님들은 농담 속에 자신을 재속 신부라는 표현을 쓰시면서 수도사제가 성성(=거룩함)에 있어서는 우위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사제와 수도회 사제의 성성의 차이라기보다는 살고 있는 현실이나 상황에서 오는 삶의 태도나 적응 방식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자로 살아오다 보니 제 몸에 각인된 것은 높은 자리에 서고, 앉는 것이 별로 마음에 썩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저자신 내향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가 사제로서 혹은 수도자로서 해야 할 일들 곧 미사나 강론할 때는 두려움이나 긴장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서고 앉아서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이나 자리에 나설 때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교회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귀빈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소개할 때나 축일이나 다른 특별한 경우에 꽃다발을 받고, 옷에 꽃을 부착하는 것 등을 포함해서 윗자리에 앉는 게 사실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저희 수도회는 이런 면에서 참 편하고 단순합니다. 식사 자리는 장상이라고 해서 굳이 따로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입회 순서도 아니고 각자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됩니다. 그런데 수녀원이나 다른 수도원에 가면 손님 신부라 해서 굳이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할 때, 사실 거절하고 다른 곳에 고집스럽게 앉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제가 겸손해서라기보다는, 타고난 성향과 함께 제가 사는 이 공동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앞에 나서거나 높은 자리에, 그것도 선배이며 윗사람이라고 나설 여건이나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적응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구사제보다 성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단지 수도원에 살다 보니 이런 의식이나 행동 양식이 몸에 배었기에 그랬을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수도사제가 된 것이 참 좋고, 저를 자유롭게 편안하게 양성해 주었기에 제 공동체에 감사합니다. 쓰임이 다르고,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르다고 보면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저를 잘 아셔서 있어야 할 자리에 맞게 쓰셨다고 봅니다. 저는 성깔이 있는 남자이지만, 제가 맡았던 자리에서 제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 자리에서 교만이나 거들먹거리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물러날 줄을 알고 내려갈 줄을 배운 것은 저의 노력이라기보다 수도 생활의 체질화와 생활화 덕분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은 특히 교회 안에 봉사자로 불림 받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깊이 명심해서 들어야 할 뼈아픈 소리라고 봅니다. 어떤 존재가 책임 있는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 자리에 적합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이는 하느님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분과 관계되는 사람들의 기대이자 요구라고 느껴집니다. 어떤 존재가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에 걸맞은 삶의 내용 곧 말과 행동이 수반해야 함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지적하십니다. 사실 저 또한 사제나 수도자를 볼 때, 더욱 젊은 측에 드는 사제나 수도자가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 비위가 뒤틀리고 심기가 불편한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서품이나 서원은 그 존재를 드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앞에 낮아지게 만들고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본이 되고 모범이 되게 합니다. 사제 수품 미사의 경문을 보면 주례자인 주교는 새 사제에게 복음서를 수여하면서, “그대는 이제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으십시오.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의 사제나 수도자들이 이 전례 예식어가 말한 바대로 살아간다면 굳이 오늘 복음이 불편하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점은 어떤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게 마련인데, 문제는 바로 모세의 자리 곧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자신이 이 자리에 앉은 이유는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해서 불림 받고 선택된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자신의 존재가 숨을 것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선다면 굳이 높이거나 낮아지려고 하지 않아도, 어떤 자리에 착석하던지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자신답게 처신하리라 봅니다. 그런 모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낮은 곳(=장소가 아니라 직책에 있어서)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몸으로 느끼고 존경을 표현하리라 봅니다. 진정 오늘 교회에서 사람들이 보고 싶은 새로운 지도자들의 모습이란 그들이 섬기는 존재이고 섬기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책은 높은 자리이지만 존재하는 모습이 낮은 곳에 있는 듯싶으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해 기울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혹여 당신의 말씀을 뒷전으로 팽개치고 살았다면 저의 행실을 제 눈앞에 펼쳐 보이시고 나무라시고 꾸짖어 주십시오. 저를 흔들어 깨워주시어 당신께서 인도하신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오늘은 저희 수도회 <고통의 성모 성 가브리엘 포센티 축일>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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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행복 수준을 높여 줍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 계획에 대한 성취도가 높고, 꾸준함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늘 간직하고 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고 대신 도박과 유흥, 방탕한 생활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불안감을 없애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말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지난겨울 중고등부 캠프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등반하는데, 한 친구가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갑니다. 방금 지나갔던 등산객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떨어트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등산객이 놓고 간 검은색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 뛰어 내려가서 주고 왔습니다. 제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라고 물으니, “쓰레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야죠. 그래서 주고 왔어요.”
누가 내게 쓰레기를 넘겼습니다. 그 쓰레기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 쓰레기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그 쓰레기를 다시 넘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쓰레기들도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쓰레기들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옳고 자기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틀렸다면서 단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단죄를 받는 사람은 결국 죄인이 되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를 넘기는 위선자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해서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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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마태오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나>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5)
나 아닌
나로
보이려는
나는
나마저
버린
나를
미워하는
나 없는
나입니다
나인
나로
있으려는
나는
나만은
품은
나를
사랑하는
나 있는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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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백성을 위한 봉사자를 뽑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기득권을 유지하고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 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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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삶>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난다-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13,4-5)
국내 사정이 4월10일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천으로 참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공천 결과에 따른 반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드러납니다. 국민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 아름답게 잘 떠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온갖 추태를 부림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더불어 그동안 내적 삶이 어떠했는지 환히 드러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배은(背恩), 배신(背信), 배반(背叛)입니다. 문득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예화도 좋아 나눕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사기
사람이 진실, 고결(高潔)하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납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떠날 때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남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분열과 불화를 남깁니다. 늘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갈 때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을 것이며 떠날 때도 아름답게 향기처럼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참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19년전, 2005년 참으로 수도원이 어려운 일을 겪던 해 써놨던 “떠날 때는 이렇게” 라는 시(詩)를 주일에 이어 최초로 공개합니다.
“떠날 때는 이렇게
자연이 또 참 좋은 스승이다
잘 떠남이
아름다움의 극치다
얼마나
힘들고도 중요한 잘 떠남이냐
향기로 남는 떠남도 있고
악취를 풍기며 상처나 짐을 남기는 떠남도 있다
떠나기가 마냥 서운해
봄에다
흰 눈 가득 순결한 사랑 안겨 주고
말없이 떠나는 겨울
얼마나 아름다운 떠남이냐!”-2005.2.
얼마전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 내린 봄눈 내린 나무마다 설화(雪花)들 가득한 날에도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마침 주일 강론후 강론중 “봄이 되었다!”라는 시(詩)중에 나오는 “봄의 맑음”이라는 말마디가 자기 이름과 같다고 반색하던 ‘춘숙(春淑;봄춘, 맑을 숙) 도미니카’ 자매가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은 경청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떻게 잘 떠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떠날 때,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순1주간 화요일 마태복음과 제1독서 이사야서가 잘 떠남을 위한 답을 줍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밖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탄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전반부는 이들의 언행이 불일치 함을 지적하며 이들의 허영을 단연히 배격하라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며,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을 말끔히 일소하고 진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진실이 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생략이 불가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말마디가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자각에 투철한 이들이 정말 겸손한 이들입니다. 만민평등이요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스승님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내적자유와 내적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어머니는 교회이고, 모두는 형제다” 라는 말씀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답게”, 형제들간에는 우애좋은 “형제답게”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격조있는 삶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겸손한 자세가 나오고 이런 이들이 주님의 참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거듭 강조되는 섬김과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되는 우리 수도공동체이고 우리에게 직분이 있다면 ‘섬김의 직분’,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우리의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여정’,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여전히 초보자임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경신례와 참된경신례가 뚜렷이 대조됩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경청의 강조에 이어지는 거짓경신례를 얼마나 혐오하는 하느님인지 실감있게 표현되는 다음 내용은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향기도 역겹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눈을 가려버리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이라면 빈손으로 와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경신례의,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선행과 사랑, 정의가 통째로 사라진 헛된 경신례의 거부요, 이어 주님은 참된 경신례를 위해 필히 실천해야할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명령은 모두가 실천을 명하는 “하라”는 동사들입니다.
“1.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너희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도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의 방향전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회개는 실천의 열매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회개의 참 좋은 열매들이 경청, 진실, 겸손, 섬김, 선행, 사랑과 정의, 공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잘 살 때, 비로소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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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찰과 반성>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저를 두고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김찬선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자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말씀 나누기를 얼마나 했는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한 5년 정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2008년부터 했다고 정정해서 말씀드렸는데 이때 저의 마음 안에 제법 긴 기간 꾸준히 했다고 약간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이내 그런 저의 자세가 잘못된 자세라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의 육신의 누이가 요즘 강론이 영적으로 옛날만 못하니 더 깊이 묵상하고 나누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마침 주님께서도 이런 제가 들으라고 말씀하시어 다시 찔끔했습니다.
사실 16년 넘게 거의 매일 말씀을 나눴으니 그 기간과 말의 양이 엄청난데 그 성찰과 반성과 나눔이 10분의 1만 실천으로 갔어도 저는 성인이 되었을 겁니다.
전기 작가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이런 저와 달랐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빛을 받은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가고, 가슴으로 그치지 않고 손과 발까지 전 존재적으로 가 실천에 이르는 것은 기간과 횟수와 같이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제가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대로 여러분도 제 말을 실천의 말이라고 믿었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이나 저나 같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 것을 나눈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더 나아가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실천하시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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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돌아가자!>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할 때마다 늘 뜨끔합니다. 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 사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의 위치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치와 같기 때문이고, 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이 제게 하시는 책망으로도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보이려는 모습과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모습,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분노하신 모습은 위선자들을 대하실 때 드러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위선자들에 대한 책망'(마태23,1-36)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위선자들과 끝까지 싸우셨고, 끝끝내 위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위선에 대한 책망'은,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준엄한 말씀'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믿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되돌아봄(성찰)'을 통해 내 안에 자리 잡고 입는 '위선을 치우는 일'(회개)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이사1,10.16-20)는 타락한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재촉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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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GwVGQkjm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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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실행 없는
말만
무성합니다.
복음이
아무리
좋다 해도
구체적인 실천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공허한 반복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행하신 대로
말씀하십니다.
실천의 장(場)으로
초대받은
우리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탕발림의 영역에
갇혀있는 우리를
실행하는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십자가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현실 또한
구체적인
실천 없이는
시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의 실천
희망의
구원입니다.
앎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실행의 씨앗을
우리 삶에
뿌리십니다.
이 사순시기에
참된 실행이란
끊을 것을
끊는 것이며
지킬 것을
지켜나가는
바른 정신입니다.
잘못을 깨뜨려야
허위와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섬기고
간절함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실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꾸는
복음은
우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생각의 노예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는
복음의 실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으로
돌아가는
실천의 사순
잘못을 끊는
실행의 사순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간절한 실행이
간절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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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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