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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30~135)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30>공산당, 도시를 내주고 농민의 마음을 얻다 新중국 건국 전야 ① 동북해방 |제131호| 2009년 9월 13일
▲1948년 11월 2일 주더·마오쩌둥·린뱌오(왼쪽부터)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선양에 입성하는 동북야전군.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9일 소·만국경을 넘어 동북에 진입한 소련 홍군은 일본 관동군에 총공세를 퍼부어 15년간 일제 치하에 있던 동북3성을 해방시켰다. 대도시에 장제스와 함께 레닌·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아무리 해방군이라도 소련 홍군은 남의 나라 군대였다. 중국 영토에서 나가라는 시위가 대도시에서 연일 벌어졌다. 소련군의 철수는 시간문제였다.
국·공이 합작해 치른 8년간의 항일전쟁은 양당의 역량을 증강시켰다. 700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공산당도 항일전쟁 이전 3만 명에 불과하던 병력이 100만 명을 넘었다. 관할 구역의 인구도 1억 명을 돌파했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동북에 중공은 선수를 쳤다. 45년 9월부터 간부와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의 무기와 탄약을 몰수해 동북야전군(東北野戰軍)의 전신인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을 결성했다.
1946년 1월 소련 홍군은 국민당 정부의 선양(瀋陽) 접수에 동의했다. 국민당 군은 이 중국 최대의 공업도시에 최정예 30만 명을 집결시킨 후 민주연군의 선양 철수를 소련군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소련군이 창춘(長春)마저 국민당 측에 내주자 민주연군은 기습으로 창춘을 점령했다. 1개월 후 국민당 군은 쓰핑(四平)·번시(本溪)·창춘의 민주연군에 전면 공세를 가했다. 중공의 동북국 서기 겸 민주연군 총사령관 린뱌오(林彪)는 전군을 도시에서 철수시켰다. 용감과 패기 외에는 내놓을 게 없는 린뱌오의 부하들은 “예전의 린뱌오가 아니다. 8년간 소련에서 병치레하더니 총기가 사라졌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잠시지만 마오쩌둥도 린뱌오를 오해했다.
몇백 년 동안 민간에 떠돌던 “창춘을 먹는 자가 동북을 먹는다” “동북을 취한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쌍방의 통수권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5월 30일 국방부장을 대동하고 창춘을 방문한 장제스는 공산당 군대의 전술이 국공 합작 이전 유격전을 벌이던 시절에 비해 어떤지 궁금했다. 지휘관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신통치 않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게 없습니다.”
“공산당과 린뱌오의 부대가 고작 이 정도라면….” 장제스는 무력으로 중공과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1946년 6월 26일 내전이 폭발했다. 조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마셜 원수는 “미국인들이 낸 세금을 엉뚱한 곳에서 탕진하게 생겼다”는 묘한 말을 남기고 중국을 떠났다.
7월 7일 린뱌오는 동북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7·7 결의(七七決議)’를 통과시켰다. 부서기 천윈(陳雲)은 “도시에서 철수해야 한다. 자동차를 버리고 군화도 벗어 던지고 농민복으로 갈아입자. 문무와 남녀를 막론하고, 자격이 있건 없건,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이 공산당원의 품격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성패는 농민들에게 달렸다. 지위가 높을수록 너절한 일에 열중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근거지 옌안에서 철수해 촌구석을 전전하던 마오쩌둥도 미국인 기자에게 “혁명은 폭동이다. 농민들이 승패를 좌우한다. 국민당은 토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도시 몇 개를 얻는 것보다 농민 열 명의 지지가 더 중요하다”고 호언장담했다. 린뱌오에게 “우리 사이에 오해는 없다”는 전문을 발송했다.
농촌 경험이 풍부한 중국공산당은 농민들의 심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다. 토지개혁을 필두로 악질 지주와 일본에 부역한 한간들을 단호히 처단했다. 농민들은 현(縣)위원회 서기의 집무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공산당은 2년 만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장백산 언저리까지 철수했던 민주연군은 47년 4월부터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린뱌오의 대군은 추계 공세를 펼쳐 국민당 군을 선양 등 24개 도시에 몰아넣어 고립시켰다. 이듬해 3월부터 펼친 동계 공세에서는 선양·창춘·진저우(錦州)의 국민당 군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머무르면 죽고 나오면 산다”는 전단을 끊임없이 성 안에 살포했다. 3개의 대도시를 제외한 동북 전역은 순식간에 공산당의 천하로 변했다.
9월 12일 ‘랴오선(遼瀋) 전역(戰役)’이 폭발했다. 2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린뱌오의 대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31시간 만에 진저우 국민당 군 12만 명을 전멸시켰고 장군 43명을 포로로 잡았다. 병력도 230여만 명으로 증가했다. 창춘에 주둔하던 국민당 제60군 군단장과 동북지구 부사령관 겸 제1병단 사령관은 투항했다.
11월 2일 동북야전군의 선양 입성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의 전주곡이었다. 구경나온 시민들은 깜짝 놀랐다. 꽹과리 소리와 마오쩌둥·주더·린뱌오의 초상화만 없었다면 완벽한 미군들이었다. 탱크·차량·대포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제였다. “장제스가 우리의 보급대장”이라는 마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8일 후에는 국민당 최후의 기동부대를 전멸시키고 동북 전역을 장악했다. 린뱌오가 장제스의 오판을 유도한 지 2년6개월 만이었다.
<131>국민당 사령관 무장해제시킨 공산당원 딸 新중국 건국 전야 ② 베이핑 입성 |제132호| 2009년 9월 20일
▲1949년 3월 25일 시위안(西苑)비행장에서 민주당파 인사들이 베이핑으로 향하는 마오쩌둥(오른쪽에서 셋째)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베이핑(北平:현재의 베이징)과 톈진(天津) 지역 전투는 랴오선(遼瀋)·화이하이(淮海)와 함께 국공전쟁의 3대 전역(戰役)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의 국민당군 총사령관은 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푸쭤이(傅作義)였다. 그의 병력 50만이 베이핑과 톈진을 포함한 사방 500㎞에 포진해 있었다.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장자커우(張家口)까지 폭이 좁고 긴 지역들이었다.
중난하이(中南海)에 지휘부를 차리고 있던 푸쭤이는 동북을 점령한 후 방향을 튼 동북야전군과 화북야전군의 공격에 직면했다. 푸는 장제스의 직계가 아니었다. 한번 쓴 사람은 끝까지 믿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의심해서 크게 손해 본 적도 없다 보니 두 사람 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랴오선 전역에서 승리한 공비(당시 국민당 측에서는 인민해방군을 이렇게 불렀다)들이 휴식을 취하고 전력을 정비해 산하이관을 넘보려면 3개월은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화동(華東)과 중원(中原) 지역에서는 화이하이 전역이 진행 중이었지만 장은 푸의 병력을 화동 지역으로 이동시키지 않고 베이핑·톈진·장자커우 일대를 고수하게 했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허를 찔렀다. 동북 점령 2주 후인 11월 18일 동북야전군에게 탕산(唐山)·탕구(塘沽)·톈진을 포위해 국민당군이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동시에 신화사와 각 방송을 통해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뉴스를 계속 내보냈다.
◀1948년 10월 마지막 베이핑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장제스(가운데). 오른쪽은 푸쭤이.
동북야전군 80만 명과 화북야전군 13만 명 외에 참전이 가능한 지방부대를 동원해 공세를 퍼부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인민해방군은 승리를 거뒀다. 국민당의 지휘관들은 생포되거나 도주하거나 투항했다. 관문인 산하이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직접 지휘했지만 1949년 1월 3일부터 12일까지 톈진 외곽의 국민당 부대를 완전히 소탕한 후에는 모든 작전과 도시의 접수에 관한 권한을 린뱌오에게 일임했다.
1월 14일 해방군은 보병·포병·공병과 전차부대를 동원한 연합작전을 펼쳐 하루 만에 톈진을 점령했다. 국민당군 13만여 명을 괴멸시키고 톈진경비사령관 천창제(陳長捷)를 생포했다. 장제스는 탕구의 국민당군을 철수시켰다. 말이 좋아 철수지 실은 도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베이핑이었다. 해방군 대군은 베이핑을 포위해 국민당군 25만 명을 고립시켰다.
마오쩌둥이 화이하이 전역을 먼저 일으킨 것은 남쪽의 국민당 군대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할 기회를 차단하고 푸쭤이의 군대를 북쪽에 묶어두어야 베이핑 입성이 용이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베이핑은 고도(古都)였다. 국민정부가 난징을 수도로 정하는 바람에 원래의 명칭을 상실했지만 도시 전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었다. 어차피 이긴 전쟁, 포격이라도 가했다간 훗날 무슨 오명을 뒤집어 쓸지 몰랐다. 마오는 “적을 격리시키되 포위하지는 말고(隔而不圍), 포위하되 공격하지는 말라(圍而不打)”는 전략을 택했다. 평화적 입성을 위해 지하당원들을 총동원했다. 푸쭤이에 대한 공작을 펴나갔다. 푸의 딸도 공산당 지하당원이었다. “장제스는 자신을 돌볼 여력도 없다. 지원병은 오지 않는다. 공산당의 평화적인 담판 조건을 받아들여라. 전화(戰禍)를 면한 시민들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장제스는 차남 장웨이궈(蔣偉國)를 파견해 일부 병력이라도 칭다오로 공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또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고수하며 후원병이 오기를 기다려라. 성공하지 못하면 죽기라도 해서 혁명대업을 완수해라”는 친필 서신을 공중에서 투하해 지휘관들을 격려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1월 21일 인민해방군과 푸쭤이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다음날 국민당군 20만 명이 교외로 철수했다. 이들과 베이핑에 잔류한 5만 명은 해방군에 편입됐다. 1월 31일 해방군은 베이핑에 입성했다. 난징의 장제스는 ‘시력 악화’를 이유로 총통 직을 사직했다.
마오쩌둥·주더·류샤오치·저우언라이·런비스(任弼時) 등 5명의 서기들도 3월 23일 오후 중국공산당의 마지막 농촌 지휘부 시바이포(西柏坡)를 떠났다. 목적지는 베이핑이었다.
<132> 마오“자산계급이 만든 삼권분립, 염두 두지 마라” 新중국 건국 전야 ③ 新 정치협상회의 |제133호| 2009년 9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1949년 9월 21일부터 열흘간 열린 신정치협상회의에서 마오쩌둥이 개막사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김명호 제공
1949년 6월 15일 신(新)정치협상회의 구성을 위한 주비회의가 베이핑에서 열렸다. 중국공산당과 각 민주당파, 무소속, 사회단체 등 23개 단위를 대표해 134명이 참석했다. 6개 소조를 둬 신정협에 참가할 단위와 대표 명단을 작성하고 ‘공동강령’ 초안과 신중국의 국기, 국휘(國徽), 국가 선정 등을 토의했다.
마오쩌둥도 새로 만든 옷을 입고 참석했다. “우리가 새로운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한 것은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성숙됐기 때문이다. 전 중국의 인민들은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갈망한다. 회의는 이들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질질 끌 필요가 없다”는 개막 연설을 했다. 말미에 “중화민국은 이름은 멀쩡했지만 인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현재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명부기실한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중화인민민주공화국 만세, 민주연합정부 만세, 중국인민 대단결 만세”를 외치고 하단했다.
국가의 명칭은 마오가 만세를 불러버렸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한 참석자가 “민주와 공화는 동의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리가 있었다. 앞으로 만세 부를 일이 많을 것을 감안하면 한 글자라도 줄이는 게 좋았다. ‘공화’를 뺐다. 저우언라이는 쑨원의 추앙자인 민주 인사들의 정서를 감안해 중화인민공화국 옆에 괄호를 열고 (간칭 중화민국)을 첨가했다. 쓰투메이탕(司徒美堂)이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쑨원을 존경하지만 중화민국이라는 네 글자에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말이 민국이지 인민과는 무관했다.” 신해혁명에 참가한 미국 치공당 창시자의 한마디는 무게가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최종 확정했다.
◀개국 선언 하루 전인 1949년 9월 30일 정치협상회의 전체회의에서 주석단이 오성홍기를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다.
핵심은 신중국의 국체(國體)와 정체(政體)였다. 마오가 “자산계급들이 만들어낸 의회제도나 삼권분립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을 예전에 한 적이 있었다. 토론에 참석한 민주 인사들은 마오가 이미 제시했던 탁견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공산당 대표들은 발언 기회를 얻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마오쩌둥은 만면에 웃음을 가누지 못하며 발언자들의 의견마다 찬성을 표시했다. 사회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의 “의견이 일치했다. 논쟁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서구 사람들이 얘기하는 민주가 아닌 신민주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 방향은 사회주의다”라는 발언은 일품이었다. 의회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영국과 미국에서 오래 공부한 사람이라 뭐가 달라도 달랐다.
10여 차례 수정을 거쳐 대엿새 만에 후다닥 초안을 작성한 ‘공동강령’은 임시 헌법의 역할을 했다. “신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의미한다. 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정치협상회의가 직권을 대행한다”고 규정했다. 7월 1일은 중공 창당기념일이었다. 9개의 민주당파는 연명으로 중공 중앙에 축하전문을 보냈고 마오는 신정권 탄생의 역사적 필연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다.
7월 15일 인민일보는 신정협 주비회 명의로 국기와 국휘의 도안 및 국가를 전국에 공모한다는 공고를 내보냈다. 1개월 만에 주비위원회는 2992개의 국기 도안을 접수했다. 중국혁명이 계급혁명임을 분명히 하고 혁명과 중국인을 상징하는 홍색과 황색을 적절히 배치한 상하이의 청년 노동자 쩡롄쑹(曾聯松)의 도안이 채택됐다. 국가는 600여 곡이 접수됐지만 하나같이 신통치 않았다. 화가 쉬페이훙(徐飛鴻)이 ‘의용군 행진곡’을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1935년에 상영된 한 영화의 주제가였다. 톈한(田漢) 작사에 요절한 음악가 니에얼(聂耳)이 곡을 붙인 웅장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노래였다.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인 건축가 량쓰청(梁思成)도 “미국에 있을 때 누가 뒤에서 의용군 행진곡을 흥얼거리기에 돌아봤더니 미국 청년이더라”며 거들었다. 국휘는 천천히 만들기로 했다. 베이핑을 베이징(北京)으로 개명했다.
니에얼(聂耳)이 작곡한 중국국가 '의용대 행진곡을 들어 보시려면 상단 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中國國歌 義勇軍 行進曲
起來!不願做奴隸的人們!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여! 把我們的血肉,築成我們新的長城! 우리의 살과 피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中華民族到了最危險的時候, 중화민족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닥쳐올 때, 每個人被迫著發出最後的吼聲。 모든 인민들로부터 함성이 터져나오리! 起來!起來!起來!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我們萬眾一心,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冒著敵人的炮火,前進!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 冒著敵人的炮火,前進!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 前進!前進!進! 전진! 전진! 나가자!
회의기간 동안 민주 인사의 대표 격이었던 선쥔루(沈鈞儒)는 마오쩌둥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제의했다. 마오가 완곡하게 사절하자 선은 일동이 기립박수라도 치자고 했다. 마오는 두 번의 국궁례로 화답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1차 회의가 중난하이 안에 있는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열렸다. 10월 1일 오후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개국을 선언하고 열병식을 하기로 했다. 국토의 절반은 여전히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133>지도부 입주 앞서 1000명이 5개월간 대청소 新중국 건국 전야④ 중난하이 새 주인들
◀중난하이 8대 명소 중 하나인 자광각(紫光閣) 앞에서 담소하는 중난하이의 새로운 주인들. 왼쪽부터 주더, 마오쩌둥, 천윈, 저우언라이. 김명호 제공
베이징을 대표하는 맥주의 상호를 1200여 년 전에 만들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에 ‘서울 경(京)자’를 붙인 최초의 인물은 돌궐족의 후예 사사명(史思明)이었다.
당(唐) 현종(玄宗) 시절인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조정에 반기를 들자 그의 추천 덕에 병마사(兵馬使) 자리에 오른 사사명도 반란에 합류했다. 안록산은 범양(范陽)에서 황제에 즉위하며 범양을 대도(大都)라 개칭했다. 안록산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사사명은 투항했지만 1년 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대연(大燕) 황제를 칭하며 대도의 명칭을 연경(燕京)으로 바꿔버렸다.
연경(燕京)은 연산(燕山)산맥의 동남쪽에 위치한 호수와 늪지대였다. 수초가 우거지고 학이 서식하는 음산한 절경지였다. 송(宋) 왕조 시절 북방에서 흥기한 요(遼) 왕조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늪지대에 행궁(行宮)을 설치했다. 요를 멸망시킨 금(金)은 한술 더 떴다. 정식으로 연경에 천도해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강과 연못을 파고 호수와 늪을 정리해 황궁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이하이(北海) 공원과 중난하이(中南海) 일대였다.
1271년 원(元) 제국의 건설자 쿠빌라이(忽必烈)도 연경을 수도로 했다. 대도라고 개명한 후 사방 60리에 도성을 쌓았다. 요와 금이 축조한 황궁의 면적을 넓히고 호수를 파댔다. 건조한 초원에서 물을 찾아 다니던 유목민족들이다 보니 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보다 더 아름다웠다. 몽고인들은 ‘수(水)’를 정원을 의미하는 ‘해(海)’ 혹은 ‘해자(海子)’라고 불렀다. 도성 안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스차첸하이(什刹前海), 허우하이(後海), 베이하이(北海), 중하이(中海), 난하이(南海)라 명명했다. 몽고인들은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초원지대로 쫓겨났다.
베이징의 건설자는 한결같이 초원에서 출발해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들이었지만 본격적인 개발은 한족 정권인 명(明) 건국 이후였다.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난징(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대도를 베이핑(北平)으로 개명했지만 세 번째 황제 영락(永樂)은 베이핑으로 천도해 베이징을 탄생시켰다.
영락은 금·원의 황궁을 더 이상 확충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거대한 규모의 자금성(紫金城)을 건조하고 금·원대의 황궁은 시위안(西苑)으로, 인공호수는 시하이쯔(西海子)로 개칭해 피서행궁으로 사용했다.
17세기 중엽 산해관을 넘어와 청(淸) 왕조를 수립한 만주족들은 황궁을 계속 넓혀 나갔다.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호수를 깊이 파고 연꽃을 심었다. 인공산을 만들어 나무도 심었다. 5개 왕조가 700여 년에 걸쳐 건조한 시위안의 세 호수는 산, 물, 섬, 다리, 정자, 누각이 어우러진 별천지였다.
중난하이와 베이하이를 분리시킨 사람은 위안스카이였다. 1911년 발발한 혁명 덕에 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중하이와 난하이에 대총통부를 설치한 후 베이하이와 중하이의 경계선에 살벌한 담을 쌓았다. 안전이 이유였다. 베이하이는 서민들의 휴식 장소로 공개했다. 자금성과도 완전히 격리시키기 위해 사이에 길을 만들고 양쪽에 담을 쌓았다. 중난하이는 완전한 성역으로 자리 잡았다. 면적은 자금성의 3분의 1, 베이하이 공원의 두 배였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중난하이는 정객과 군벌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10년간 주마등처럼 거쳐간 군벌이 9명이었다. 마지막 주인은 동북 군벌 장쭤린(張作霖)이었다.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하고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자 베이징은 다시 베이핑이 됐다. 베이핑 시는 위안스카이가 쌓았던 담장을 허물고 중난하이도 일반에 공개했지만 정부가 파견한 대규모 병력이 중난하이에 주둔하면서 다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1937년 여름 일본군이 베이핑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괴뢰정부가 중난하이를 접수했고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다시 국민당 군대의 주둔지가 됐다. 국·공 간에 전면전이 발발한 후에도 중난하이는 푸쭤이(傅作義)가 지휘하는 화북지역 공산당 토벌 총사령부의 소재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완벽하게 보존된 황실 정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중난하이는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지저분하고 흉한 몰골로 변했다.
1949년 1월 마지막 날 화북야전군은 평화리에 베이핑을 접수했다. 신정권의 입주지를 물색하던 중 중난하이를 주목했지만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던 호수의 물빛은 검붉었고 도처에 쓰레기와 인분이 널려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1000여 명이 5개월간 불철주야한 후에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신중국 선언 4개월 전부터 당 중앙과 주요 간부들이 중난하이에 거처하며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베이징은 명칭이 바뀌고 변화가 무상했다. 그 과정에서 중난하이도 온전할 수 없었다. 중난하이를 온갖 유린을 당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고귀함을 더해간 여인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134>新중국에 맞장구 쳐준 ‘팔방미인’ 황제, 푸이(溥儀) |제135호| 2009년 10월 10일
◀ 자금성에서 쫓겨난 뒤 1925년 생부인 순친왕(醇親王)의 왕부에 머물던 시절의 푸이(가운데). 왼쪽은 생부인 순친왕 짜이펑. 김명호 제공
1959년 9월 중공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10주년을 앞두고 전쟁범죄자와 반혁명범에 대한 특사 요청안을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건의했다. 청(淸)의 마지막 황제이며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溥儀)도 10년 만에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서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감옥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학교였다. 10년 동안 옳고 그른 것과 운명이 뭔지를 배웠다. 인류에게 이익이 되며 인민의 운명과 함께할 수 있는 운명이 가장 아름다운 운명이다. 루룬샹(陸潤庠)과 천바오천(陳寶琛)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신선이나 관세음보살도 일깨워 줄 수 없었던 값진 것들이다”라며 감옥 예찬론을 폈다.
루룬샹은 내각대학사에 실록관 총재를 지낸 당대의 거유(巨儒)였고 중국 역사상 마지막 장원 출신 재상이었다. 천바오천은 21세에 전시(殿試)에 급제한 진사(進士)였다. 푸이의 어린 시절 스승들이었다. 관세음보살은 서태후(西太后)를 의미했다. 신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들 이미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아서 들었더라면 어처구니없어 할 내용들이었다.
푸이는 베이징식물원의 일자리를 배정받았다. 1년 후 동생 푸제(溥傑)도 풀려났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주는 밥이나 먹고 불평만 안 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평민처럼 편한 것도 없지만 푸이는 그렇지 못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방문한 서방세계 인사들에게 “푸이를 찾아가서 얘기를 나눠봐라. 우리는 그를 죽이지 않고 개조시켰다”며 만나볼 것을 수시로 권했다. ‘마지막 황제’의 근황에 대한 호기심과 신중국의 성취를 반신반의하던 외국인들은 다투듯이 푸이를 찾아갔다.
한 멕시코 기자가 “마지막 황제 푸이는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한 미국 언론의 오보를 상기시키자 “맞다. 마지막 황제이며 일본 침략자들의 괴뢰였던 푸이는 이미 죽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노동자다”라며 정부의 비위를 맞췄다. 친척이나 예전의 신하들, 식물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황상(皇上)”이라고 부르거나 재미 삼아 “어이, 황제”라며 웃을 때도 “나는 예전의 푸이가 아니다. 황제 푸이는 지은 죄가 많아 이미 죽었다. 나는 평민 푸이다”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남들이 까먹을 만하면 “오랜 기간 제왕 생활을 하다 보니 나쁜 습관이 몸에 뱄다. 아직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는 유의 말 을 반복했다. 소속이 베이징식물원이다 보니 화단에 물 주는 장면이 가끔 신문에 실렸다. 일반 중국인들은 푸이가 바느질하는 모습이나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도 화보 등을 통해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溥儀)는 1908년 12월 태어난 지 34개월 만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선통(宣統)이었다. 6세 때부터 황실교육을 받았다. 8세 때 천바오천에게 사언시(四言詩)를 선사해 스승을 기쁘게 했고 9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 혁명으로 퇴위한 후에도 자금성에서 황제 소리를 들으며 이커탄(伊克坦)·쉬팡(徐坊)·주이판(朱益藩)·량딩펀(梁鼎芬) 등으로부터 경전과 만주어·서화 등을 익혔다. 영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빼돌렸던 문물들을 보면 그의 감식안이 얼마나 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영어를 공부하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줄줄 외웠고 영문판 논어와 맹자를 즐겨 읽었다.
잡기에도 능했다. 골프와 테니스는 수준급이었고 사진기는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촬영을 즐겼다. 당시에는 귀했던 자전거도 잘 탔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자금성 안을 휘젓고 다녀도 넘어진 적이 없었다.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의 연기를 그대로 따라했고 권법은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독특한 풍격에 실전을 중요시했던 팔극권(八極拳)을 훠뎬거(霍殿閣)에게 직접 배웠다. 훠는 당대에 싸움을 제일 잘했다고 알려진 리수원(李書文)의 3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장제스의 그림자였던 류윈차오(劉雲樵)와 마오쩌둥의 근접 경호원 리젠우(李健吾)가 나머지 두 사람이었지만 훠뎬거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푸이는 황제 시절 괴팍한 행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동북으로 가던 도중 고서화 몇 점을 찐빵과 바꿔먹은 것을 빼고는 부득이했던 것이 많았다. 모두가 청 황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백일몽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신중국은 황제제도를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푸이의 교화에 성공했고, 푸이도 맞장구를 제대로 쳐줬다. 마지막 황제는 중국인의 인내를 상징하고도 남을 만한 행동을 7년간이나 하다 세상을 떠났다.
<135> 루쉰, 사망 22개월 만에 20권짜리 '전집'을 얻다 |제136호| 2009년 10월 18일
▲1932년 늦은 가을 베이징사범대 소운동장에서 강연하는 루쉰. 김명호 제공
루쉰(魯迅)은 생전에 전집(全集)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손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까지 했지만 출간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국민당 정권은 출판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다. 특히 개인의 전집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루쉰전집'의 출판에 대해 가타부타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자 쉬광핑(許廣平)은 남편의 육필 원고를 들고 이사했다. 가택 수색에 대비해 원고를 부엌의 석탄더미 속에 숨겨 놓고 전집의 출판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정부와의 소통을 위해 남편이 생전에 담을 쌓고 살았던 후스(胡適)에게 편지를 썼다. 후는 ‘루쉰기념위원회’ 위원직을 수락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원고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더욱 전집의 출판을 서둘렀다. 살기 싫은 세상을 억지로 살며, 울화통 터질 때마다 어찌나 써댔던지 그간 단행본으로 나온 것 외에 유고만 해도 양이 엄청났다. 인쇄비 마련을 위해 문화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를 짜냈다. 미국 다우링(Dowling)사의 최고급 지를 사용하고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제자(題字)를 한 정장기념본을 예약 받기로 했다. 정가는 200위안, 예약자에 한해서는 100위안이었다. 당시 시중에 나돌던 송(宋)대 판본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홍콩에 있던 쑨원(孫文)의 아들이 10질을 예약했고 팔로군(八路軍) 쪽에서도 예약권을 여러 장 구입했다.
후일 신중국의 초대 최고인민법원장에 취임하게 되는 선쥔루(沈鈞儒)는 예약권을 팔아주기 위해 다과회를 열었다. 국민당 인사들을 대량 초청했다. 이재에 소질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 돈 있는 국민당 추종자들을 몰고 나타나 10장을 구입했다. “투자가치가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경비문제가 해결되자 쉬광핑은 편집에 날밤을 새웠다. 루쉰의 제자들은 인쇄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4개월 만에 인쇄와 제본이 완성됐다. 1938년 8월 1일, 루쉰 사망 22개월 후였다.
전집은 모두 20권이었다. 보급판과 함께 정장본도 냈다. 일련 번호를 붙인 정장기념본은 200질을 만들었다. 남목(楠木)으로 상자를 만들어 문을 열면 위·아래 층으로 나누어진 아주 품위 있는 가구 형태였다. 나오자마자 문물 취급을 받았다. 60년대에 중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는 1938년판'루쉰전집' 정장기념본을 구하고 싶어 했다. 소문을 들은 저우언라이가 선물을 하려고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소장자들에게 눈치를 줘도 내놓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쉬광핑이 한 질을 보내주는 바람에 저우는 시아누크에게 체면이 섰다. 쉬는 3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한 질을 갖고 있었다. 출처는 불분명했지만 일련 번호 58번이 찍힌 진본이었다. 틈날 때마다 꺼내 보며 애지중지했다. 전쟁시절 여러 곳을 전전할 때도 '루쉰전집' 정장기념본만은 꼭 챙겼다. 중난하이 입주 후에도 여전했다.
한번은 전집을 뒤적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참 보관에 애먹은 책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면 노상에서 적과 교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사들이 등에 나눠 지고 행군하고 전쟁하고 그랬다. 아직까지 멀쩡한 게 기적이다. 나를 위해 등에 지고 다닌 전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며 '루쉰전집'을 쓰다듬었다.
중국의 중학생 교과서에 루쉰의 글 대신 량스치우(梁實秋)의 산문을 넣기로 했다는 보도가 최근에 있었다. 량도 후스처럼 루쉰과 생전에 각을 세웠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루쉰전집'과 '셰익스피어전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루쉰의 글이야말로 중국인들의 영혼이며 개개인의 살아있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와 역사, 특히 중국인을 이해하려면 '루쉰전집'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한 사람도 량스치우였다. 한글판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
첫댓글 목숨이 뭔지, 온갖 수모를 참아내고 영혼마저 버리며 부지하고자 했던 그 목숨.
일제에 의해 만주국 황제에 옹립되었으나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게다가 공산당 치하에서는 "감옥이 진정한 학교"라고 고백하며 모진 생을 이어가야 했던 푸이, 가련하기 짝이 없구나!!
중국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