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지르밟다 2
입동이 지난 지 나흘째 되는 십일월 둘째 일요일이었다. 간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제법 불었다. 이른 아침 산행을 가려는데 날씨가 가로막았다. 아침나절까지 비가 예보되어 산길이 미끄럽지 싶어 마음을 돌렸다. 집사람이 들리는 서부경찰서 곁 천태종단 절을 찾아 법당의 부처를 뵈었다. 도계동 거리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보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북면 마금산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더니 한참 만에 12번이 왔다. 12번은 온천장으로 바로 가질 않고 구석구석 마을을 들렸다가 가는 버스였다. 소답동에서 온천장행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 예닐곱 분이 탔다. 기사가 둘러가는 버스니까 바로 뒤에 따라오는 다음 버스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온천장까지 가기만 가면 된다면서 왁자하게 버스로 올라탔다.
마산 어디쯤인지, 진영 어디쯤에서 온 할머니들로 창원 사정은 어두웠다. 굴현고개를 넘은 버스는 외감으로 들어가 중방과 내감을 거쳐 동전으로 갔다. 할머니들은 감계와 무동지구에 신도시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음에 놀라워했다. 온천장 가는 시내버스를 탔는데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 기분이라고 했다. 기사 양반도 할머니들의 심정을 헤아려 뽕짝을 틀어 흥을 돋워주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혼자 조용히 사색에 잠겨 보려던 생각은 접어버렸다. 무동고개를 넘은 버스는 산음과 양촌을 지나 신동마을로 나왔다. 이어 북면사무소가 있는 마금산온천에 닿았다. 여러 온천 가운데 내가 즐겨 가는 온천을 찾아들었다. 그 온천은 외양은 허름해도 온천수가 마음에 들고 덜 복잡해 가끔 들린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많지 않았고 온천수는 그런대로 깨끗했다.
느긋하게 온천욕을 끝내고 나와도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온천장 맞은편 국수집에 들어 간단한 요기를 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 살짝 졸다 깨고 나니 운동장 근처였다. 시청 부근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가질 않고 들릴 데가 있었다. 간밤 비가 내렸고 바람까지 불었으니 낙엽은 제대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어디 멀리 갈 것도 없이 도심에서 가을의 운치를 물씬 느껴보고 싶었다.
시청광장에서 성산아트홀로 갔다. 절정을 지나 하강하는 단풍은 낙엽으로 쌓여갔다. KBS방송국에서 용지문화공원으로 건너갔다. 공원을 한 바퀴 거닐면서 대암산과 비음산의 갈색 단풍을 바라보았다. 날개봉에서 정병산으로 이어진 풍경도 놓치지 않았다. 용지호수 주변은 늦가을 정취가 완연했다. 보도에 쌓인 낙엽은 아침나절까지 내린 비에 젖어 발바닥은 폭신한 촉감이 와 닿았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한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단 3행이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떠해야하는지 준엄하게 지적해주는 시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안시인 시를 패러디해 거리의 낙엽에다 대입하고 싶다. 알록달록 물든 단풍잎을 함부로 밟지 말라고 하고 싶다. 단풍은 눈물겨운 생존의 몸부림이 아닌가?
흔히 기계공업도시로 여기는 창원이지만 곳곳에 공원이고 거리는 가로수가 빽빽하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이어 신록이 싱그럽다. 느티나무 메타스퀘어 은행나무 등 가로수 수령은 계획도시 출범과 같이 나이테를 둘러간다. 가로수의 짙푸른 여름 녹음은 가을이 되면 겨울나기 준비를 서두른다. 벚나무가 제일 먼저 나목이 된다. 이어 다른 가로수들도 하나 둘 엽록소는 색이 바래갔다.
바로 앞 두 문단은 내가 지난해 이맘때 ‘낙엽, 지르밟다’라는 제목으로 남긴 글의 일부다. 창원의 가을을 스케치한 내용이다. 글 꼭지 제목으로 뽑은 ‘지르밟다’는 위에서 살짝 내려 눌러 밟는다는 뜻이다. 잘 알려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가시는 걸음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에 나오는 ‘즈려밟다’는 ‘지르밟다’를 평안도 토박이말로 쓴 것이라 보면 된다. 1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