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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세계한글작가대회 사전 세미나 및 문학기행
일시:2016년 3월 4일 금요일~5일 토요일
장소:전라남도 순천, 구례
2016년 3월 4일 금요일 순천만 국가정원 탐방, 세계한글작가대회 세미나
* 순천만 국가정원 탐방
여의도 국제펜한국본부 앞에서 9시 30분에 출발한 버스가 순천만 국가정원에 도착했다. 정원 안으로 입장하여 이곳 컨퍼런스 홀에서 세미나를 개최한다. 약간의 시간이 있어 잠시 정원을 둘러보았다. 서문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정원을 보듬는 드넓은 연못이다. 그리고 바로 곁에 순천만국제습지센터라는 우람한 2층 건물이 서 있다. 우리는 정원을 잠시 탐방한 후 저 건물 2층 컨퍼런스 홀에서 세미나를 개최한다. 건물을 지나 위로 올라가니 하늘 정원이 있다. 건물 지붕 위에 조성한 잔디 공원이다. 아직은 겨울이 끝나지 않아 파랗지는 않지만 웅장한 풍경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우리나라 제1호 국가 정원이다. 전남 순천시 오천동 일대 111만 m2에 조성된 인공 정원이다. 2015년 9월 5일 대한민국 제1호 국가 정원으로 지정됐다. 바닷가 쪽으로 5km 떨어진 생태계 보고인 순천만을 보호하기 위해 2013년 조성했다. 92ha의 면적에 56개 주제 정원을 보유한 국내 최초의 종합 정원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 정원이다. 500종이 넘는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밖에 23만 6,000여m2 규모의 잔디밭, 철 따라 조성하는 꽃단지, 국제 습지센터 등을 갖추고 있다.한편,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로 2003년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했고, 2006년 람사르협약 등록했고, 2008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41호 등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연간 3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리면서 생태환경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순천시는 도시가 팽창해 습지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천만과 도시 사이 공간에 정원을 조성했다. 순천시는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이후 정원박람회장의 사후 활용 방안으로 2014년 4월부터 순천만 정원을 영구 개장한 뒤 국가 정원 지정을 추진해 왔으며 2015년 9월 국가 정원으로 지정됐다. 외부를 관람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 꽃정원이 장관이다. 난을 비롯한 여러가지 꽃들이 고운 풍경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그 명칭만큼이나 열정과 정성이 깃든 훌륭한 명소다.
* 국제펜 세계한글작가대회 사전 세미나
순천만 국가정원 안에 있는 국제습지센터 건물의 2층 컨퍼런스 홀에서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100여 명의 회원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했다. 주제는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사전 세미나다. 작년에 이어 금년 9월에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개최하는데 그에 대하여 미리 준비히는 절차상의 행사다. 오늘 주제발표는 허형만, 최현주, 김슬옹, 이 세 분의 교수님들이 한다. 먼저 이상문 국제펜 이사장님의 개회사가 있고, 다음으로는 금년 4월 이곳 순천 지역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예정인 새누리당 이정현 국회의원의 축사가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 본격적으로 주제 발표를 시작했다. 먼저 전 목포대 교수였던 허형만 시인은 '한글이 품고 있는 남도 시인의 향토성과 서정'이라는 제목으로 고산 윤선도, 영랑 김윤식, 심호 이동주의 시를 가지고 많은 문학적 양식을 전해 주셨다. 허형만 교수님은 한국시인협회에서도 종종 뵙는 시인님이어서 나는 매우 반갑고 흐뭇했다. 다음으로 순천대 교수인 최현주 소설가는 '근대에 대응하는 소설의 두 가지 존재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이청준과 송기숙의 소설을 중심으로 문학적 양식을 채워 주셨다. 끝으로 한글학자인 김슬옹 선생님은 '한글 발전의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28대 사건을 통해 본 훈민정음 사용의 의미를 중심으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깊은 한글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모두 매우 뜻깊고 보람된 주제 발표였다. 세 분께 감사하였다. 마지막으로 기념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세미나 행사를 마쳤다.
* 순천만 국가정원 한국정원
세미나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기 전 잠시 한국정원을 관람했다. 약간의 비가 오는 날씨여서 화사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한국 정서가 배인 정원이다. 입구의 산언덕에는 날아가는 학 모양을 조성해 놓았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 한국의 초가집이 있어 옛스런 풍경이다. 나무도감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니 한국정원으로 이어진다. 출입구에 세워진 연휘문은 경복궁 교태전 뒤뜰에 있는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연휘문을 들어서니 왼편에 아미산 굴뚝, 정면에 창덕궁 후원인 부용지와 부용정, 어수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의 어수문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이곳에서는 계단을 지나서만 오를 수 있다. 이 밖에도 아름다운 경북 영양의 서석지, 담양을 대표하는 별서정원인 소쇄원 광풍각, 남명 조식 선생을 기리는 덕천서원 앞 세심정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오래 머물진 못하고 한국정원 안으로 입장하여 연못과 정자 등을 간단히 둘러보고 나왔다. 반대 쪽으로 가서 다리를 건너면 프랑스, 중국, 네덜란드, 미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일본, 태국 의 국가별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은 다음 기회에 가 보기로 하고 순천만 국가정원을 떠나왔다.
2016년 3월 5일 토요일 순천만 에코촌유스호스텔, 구례 운조루, 구례 화엄사
* 순천만 에코촌유스호스텔
우리가 유숙한 숙소다. 에코촌유스호스텔은 순천만 안에 소재한 숙박지로 모두 한옥이다. 넓은 자리에 길게 앉아 있다. 우리는 지난 밤 국제펜 회원 모두 한 방에 2명씩 방을 배정받아 편안한 숙명을 취했다. 한식 온돌방 같은 고전적인 정취가 서린 숙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하기 전 문우님들과 함께 주변을 산책했다. 남도의 멋진 낭만 풍경이 아름답다. 2층 식당으로 가서 한식 뷔페로 맛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운조루로 이동한다.
* 구례 운조루
오늘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이곳 운조루에 하차 하자 비가 제법 많이 온다. 버스가 큰 길에서 작은 길로 진입하면서부터 주변에는 기와지붕의 전통적인 한국 가옥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운조루를 탐방한다. 운조루雲鳥樓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다. 지리산의 구름과 새가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출신의 문화 유씨인 유이주가 99칸 집을 지었다. 운조루라고 불리는 사랑채를 비롯한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는데,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 따르면, 오미리 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상이다. 이런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 있다. 중간 지대의 명당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환낙지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1918년 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4년 만에 148호에 744명으로 불어났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 칸)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대한제국 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저택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몇십 명에 이르렀으며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될 무렵에는 3백여 채가 들어섰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하였던 곳)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싸여있는 기와집(박 부잣집) 한 채뿐이다. 무라야마 지준은 '이 꽃이 떨어지면 모든 사람이 애석하게 되니 이 땅은 모든 사람에게 애석함을 주는 인물을 낼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한편 운조루 근처에 있는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어떤 기인에게 풍수지리를 배울 때 모래를 이용하여 산세도山勢圖를 만들어 익혔다고 해서 사도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타인능해다. 곡식을 담아두는 뒤주가 놓여 있고, 그곳에 양식을 넣어 놓고는 언제든지 배고픈 사람들이 퍼 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훈훈하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래서 운조루가 더욱 훌륭하게 오늘날까지 보존 유지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운조루에서 나오니 우람한 지리산이 보인다. 구름이 하얗게 걸쳐 있어 운조루라는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고운 풍경이다.
* 구례 화엄사
우리 부부는 이곳에 두 번째 오는 곳이다. 2005년 11월 수필문학 세미나 행사 때에도 들렀던 곳이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아주 웅장한 사찰이다. 버스가 화엄사 가장 가까운 곳까지 올라가서 내려주었다. 화엄사는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건축된 사찰이다. 천은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찰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있는 초입이라 언제나 만원이다. 들목에는 여관과 기념품가게들이 밀집하여 집단시설지구를 이루고 있지만, 일단 긴 계곡길을 따라 화엄사로 들어서면 경내의 장엄함이 초입의 분주함을 말끔히 씻어준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1)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 만인 인조 8년(1630) 벽암 각성, 1575~1660)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 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절집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며,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 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산문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동오층석탑 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그러나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 보물 제299호로 지정될 만큼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인데도, 거대한 규모에 안정된 비례를 갖춘 뛰어난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안정감 있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노주露柱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세운 석조물인지 알 수 없다. 원통전 창방 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산신·동자·나한상 같은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시기인 조선 중기 때 그린 것이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효대이다. 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사사자삼층석탑 주변의 동백숲과 반송은 화엄사 경치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치이다. 반송과 동백나무 외에 화엄사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이다. 수령 3백 년쯤 되는 높이 15m의 나무로, 80년 전까지만 해도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썼다고 한다. 그때 베어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장으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대단히 큰 나무였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창과 칼의 자루 등 무기의 재료로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한 바 있는데,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절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올벚나무도 그 무렵에 심은 것 가운데 살아남은 한 그루일 것이다. 화엄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을 의식한 듯 곳곳에 새로 조성한 석등이 눈에 띈다.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기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 있다. 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덕에 부도밭이 있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절대 위의 부처님인 법신불로 보고 노사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은 비로자나불의 분신으로 본다. 이러한 점은 세 부처가 각각 엄연히 구별된다는 법상종이라든지, 삼신불은 구별할 수 없고 대등하며 유파에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절대 우위로 보고 다른 불을 석가의 분신불로 보는 천태종, 또는 비로자나불만을 절대적인 부처로 모시는 밀교 들과는 구별되는 종파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화엄사는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당이니 대적광전이나 대명광전이라 해야 옳다. 다른 사찰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불가의 법식의 엄정성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아주 넓게 자리한 화엄사를 1시간 정도 돌아보았다. 눈앞에 우뚝 솟은 지리산이 화엄사를 보듬고 있다. 오늘은 비가 내려 운무까지 드리운 아름다운 서정이다. 곳곳을 살펴보고 절을 나와 하산하였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친 후 상경하여 귀가하였다. 이번 문학행사는 3월 날씨로는 아주 포근하여서 비는 조금 내렸지만, 아주 흐뭇하고 행복한 문학 나들이였다. 다음을 기약하며 문우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국제펜 정기총회-2016년 3월 9일 오후4시~여의도 중소기업은행중앙회 그랜드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