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대문입니다."
문간채 가운데 있는 대문을 들어섰다. 제법 넓은 마당 안쪽에 날아갈 듯 멋진 팔작지붕 기와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앞면 네 칸의 하얀 회칠한 벽면과 높직한 토방이며 일자집의 간결한 모습이 날아갈 듯 멋지다. 경기나 영남 등 다른 지역의 ㄷ자, ㄴ자 또는 ㅁ자 형태의 양반가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바깥주인의 거처인 사랑채였다. 그런데 그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또 하나의 쪽대문을 통과하도록 돼 있었다.
"하인들이나 외부인이 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곧바로 안채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을 가로막은 이 담장이 보이지요? 이 담장 안에서 큰소리로 안채에 아뢰어 들어오라는 안방마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비로소 안채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니 궁궐도 아니고... 그냥 양반댁에서 그렇게 까다롭게 출입을 통제한 이유가 뭡니까?"
일행이 안내인의 설명을 듣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묻는다. 그럴 만도 했다. 같은 울안에 있는 집인데, 아무리 양반댁이라지만 바깥 사랑채에서 안채 드나들기가 너무 까다롭지 않은가.
이리도 까다로운데 부부 생활은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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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대문 안족에 안채를 가리고 있는 가리개담장 |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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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평상시엔 사랑채에서 생활하는 바깥양반이 밤에 안채에 들어갈 때도 그런 절차를 거쳐야 했단 말입니까?"
또 다른 일행은 한 술 더 뜬다. 안채 드나들기가 그렇게 까다로워서야 어찌 가정생활, 아니 부부생활이 원만할 수 있겠는가. 일행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일 궁금했나 보다.
"하하. 아닙니다. 자 안쪽으로 들어오십시오. 저기 저쪽을 보십시오? 바깥양반은 저 문을 통해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안채에 드나들 수 있었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안채로 들어가는 쪽대문에서 안채를 가로막아 가리고 있던 담장을 돌아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놀라운 모습이 나타났다. 담장 끝부분에 사랑채에서 안채로 곧장 드나들 수 있는 중문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채의 끝, 안채에 있는 방문이었다. 방문 앞에는 드나들기 좋도록 방문을 열면 툇마루가 있고, 댓돌로 내려서면 토방, 그리고 바로 안마당으로 내려설 수 있도록 배려돼 있었다.
"그럼 그렇지. 바깥양반까지 안방 드나들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말이 안 되는 거지, 그건 그렇고, 호남지방 양반가옥이 참 은밀하고 멋지네 그려. 허허허."
일행이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지역의 양반가옥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성벽처럼 빙 둘러쳐진 흙돌담, 대문간을 들어서면 사랑채, 사랑채에서 쪽대문을 지나고, 다시 안채를 가로막고 있는 담장을 돌아 들어가야 안채의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구조였다.
은밀한 구조가 재미있는 호남 양반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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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에서 안마당으로 직접 통하는 중문 |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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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담장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 사랑채와 안채, 두 채의 가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채 동쪽에는 사각형의 운치 있는 연못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안채 옆에는 제법 넓은 텃밭과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 화장실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안마당 서쪽에 안채와 직각으로 곡식 저장용 광채를 배치했고, 안채 동북쪽에는 3칸의 식료창고를 뒀다. 광채는 일자형 5칸으로, 북쪽 1칸은 마루를 깔았으며 나머지는 흙바닥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맞배 지붕에 평대문인 문간채에는 행랑아범의 거처인 행랑방과 길손들이 쉬어가는 또 다른 방이 대문 좌우에 배치돼 있다. 그 옆으로 마소를 먹이던 외양간과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어 옛 농경사회의 양반가를 엿볼 수 있다. 마을 안에서 공개 되고 있는 고재선 가옥이었다.
소쇄원을 둘러보고 남면 향원당쪽으로 길을 돌아 상월정을 지나 창평 슬로시티를 향했다. 창평 슬로시티로 가는 길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구불구불 돌아가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를 넘어서 잠깐 달리자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평야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들이 나타난다. 외동마을과 유천리를 지나자 오른편 논 가운데 서있는 멋진 2층 정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향토유형문화제 3호인 남극루다.
흙돌담이 가지런한 슬로시티
남극루는 이 지역의 양반 문중인 고흥 고씨와 영남의 양반문중인 고성 이씨가 교류했던 장소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 집안은 선생과 아들들, 그리고 동생은 물론 딸과 며느리까지 왜구와 싸웠던 '1충 3효 2열 1절' 집안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고경명 집안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 등 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경북 안동의 고성 이씨 집안과 사돈지간이었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왕래하며 시문을 나누고 교류했던 장소가 바로 남극루라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외편에 있는 방문자 센터를 찾았다. 마침 이곳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슬로시티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던 대표를 만나 슬로시티 안내를 부탁했다. 그를 따라 마을로 들어서자 우선 흙돌담 사이로 뚫린 고샅길이 눈길을 확 붙잡는다. 황토흙과 돌을 섞어 쌓은 흙돌담에 기와를 얹은 담장 사이로 뚫린 고샅길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느 시골마을 고샅길과 달리 제법 넓다. 소달구지나 마차가 충분히 다닐 수 있는 넓이였다. 그 담장 안에는 옛날의 기와집 고택들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서있다. 마을 안길에서 둘러보는 풍경은 마치 세월을 거슬러 조선시대에 와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곳은 들이 넓고 농수도 풍부하여 예로부터 농사짓기 좋은 곡창지대였다. 이곳이 풍요로운 고장임을 보여주는 것들이 지금 남아 있는 옛 가옥들과 고샅길이다. 이 마을은 세 곳에서 물길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삼지내 마을'. 고재선 가옥에서 본 것처럼 이곳의 고택들은 넉넉한 크기의 곳간을 갖고 있었다. 그만큼 삶이 풍족했던 것이다.
인재의 고향
마을 안에 있는 춘강 고정주 고택은 이 지역 근대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영학숙과 창흥의숙의 모태였다. 또한 구한말 민족의 자각운동을 일으킨 근원지로 현대사적 의미도 갖고 있다. 남극루가 있는 들 건너 남쪽에 나지막하게 솟아있는 월봉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고만고만한 봉우리와 능선으로 완만한 산세를 갖고 있는 야산이다.
이 월봉산에는 상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상월정은 고려 경종 1년(916년)에 창건된 대자암의 절터다. 정자는 추제 김자수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해 세웠다고 한다. 후에 손자 사위였던 덕봉 이경이 자신의 사위 학봉 고인후에게 양도해줬다. 정자는 이런 연유로 김씨, 이씨, 고씨 3개 성씨가 연을 맺게 된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창흥의숙을 연 춘강 고정주, 신학문을 배운 고하 송진우,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와 취봉 고재호, 심강 고재욱, 전두환 정권 당시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한기, 군사정권 시절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고재필이 공부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대통령만 빼놓고 모두 배출한 인재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많다는 것이 안내원의 말이었다.
멋과 문화, 음식명인들은 이곳의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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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건너 월봉산이 바라보이는 풍경 |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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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배출과 상관없이 이곳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마을 뒤쪽인 서북쪽으로는 병풍산과 ·삼인산 그리고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인 추월산이 있고, 아직도 성채가 잘 보존된 금성산 등이 에워싸고 있다. 남쪽인 앞쪽으로는 드넓은 들 건너 나지막한 월봉산 너머로 명산 무등산이 아스라하다.
드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이 마을 집들은 대부분 부농의 양반가옥이다. 보통 시골 마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크고 멋스런 양반집 네댓 채가 아직도 남아 있어 이 지역의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계절이 추운 겨울철이기 때문일까? '슬로시티'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을답지 않게 너무 조용했다.
슬로시티란 전통을 지키며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슬로시티가 갖춰야 할 조건에는 전통문화와 가옥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음식이다. 요즘 개발된 새로운 음식이 아니라 전통방식으로 만든 음식이 있어야 하고, 지금도 그 방식을 고수하고 계승 유지해야 한다.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음식의 전통방식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의 슬로푸드로 알려진 것은 엿과 한과, 그리고 장류다.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대문 옆에 '창평 엿 판매'같은 간판이 붙어 있다. 한두 집이 아니다. 그 중 한집을 찾아들었다. 엿집이었다.
달라붙지 않는 엿... 단번에 반해버렸네
"이 지역은 예부터 들이 넓고 쌀이 풍족하여 요즘 같은 겨울에 쌀엿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쌀엿 맛을 한 번 보세요. 다른 쌀엿하곤 많이 다를 겁니다. 맛과 향도 다르지만 이나 입속에 달라붙질 않지요."
우리들에게 맛보기로 쌀엿 몇 개를 건네준다. 정말 맛이 좋았다. 그냥 달콤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향과 맛.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이와 입속에 달라붙질 않아 먹기가 좋았다. 일행 두 사람이 당장 엿 몇 상자를 주문했다. 맛보기 엿에 금방 반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명품 음식을 만드는 장인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나라 전국을 통틀어 35명에 불과한 '식품명인' 가운데 4명이 이곳 담양에서 배출됐다고 한다. 우선 '창평 쌀엿'의 유영군 명인, 댓잎술의 양대수 명인을 비롯하여 묵은 간장에 해마다 햇간장을 부어 만든 '진장'의 명인 기순도 명인, 그리고 엿강정의 박순애 명인이 이곳에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슬로시티 중 한 곳인 창평 슬로시티, 쌀쌀한 겨울철에 찾은 슬로시티는 고풍스런 옛 전통과 문화, 그리고 멋과 맛이 어우러진 멋진 삶이 겨울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