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이야기
보티첼리 作, 동방박사의 경배(1475). 우피치미술관 소장.
르네상스의 ‘손’ 역할을 했던 여러 장인의 활약에 이어 이번 시간부터는 르네상스의 ‘머리’ 역할을 했던 이들은 누구이고 어떤 기여를 했는지와,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메디치 가문은 또 무슨 일들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르네상스의 머리는 그 뿌리를 인문주의 운동에 두고 있다. 13세기 후반부터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고대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고 수집하며 중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바 고대에 대한 붐이 일어난 것인데,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카발칸티와 같은 뛰어난 시인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다.
인문주의 운동에서 생겨난 르네상스의 ‘머리’
이러한 붐이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계기는 15세기 전반에 마련된다. 당시 피렌체에는 귀족 행세를 하는 가문들이 여럿 있었다. 14세기까지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바르디 가문이 백년 전쟁 때 몰락한 후 그 뒤를 이어 알비치, 스트로치, 파치 등의 가문이 연합해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양모산업으로 돈을 모아 고리대금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공통점이 있었다. 고리대금업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없었고 실제로도 돈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측면이 있었다. 이들 가문과 서민들과의 관계는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이들 가문은 자기들만의 피렌체를 만들고 저항하는 이들을 탄압했는데 그러다 보니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이때 피렌체에 등장한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지역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피렌체로 와서 무역과 금융업으로 갑자기 일어선 가문이었다.
14세기 말부터 교회가 혼란해져 여러 교황이 난립해 서로 싸울 때 어려움에 처한 교황 요한 23세를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준 것이 알려지면서 메디치 가문은 많은 이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신뢰를 지킨 인물은 조반니 디 비치였다. 그의 선택은 막대한 보상을 가져왔다. 교황청의 은행이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메디치 가문은 신흥 부호로서 피렌체에 등장하게 되었고 다른 가문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귀족 가문 득세하던 피렌체
여기에서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그림 한 점을 살펴보자. 우피치는 피렌체가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시뇨리아 광장 뒤로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과 더불어 회화를 위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으로는 첫 손에 꼽히는 미술관이다. 특히 르네상스 컬렉션으로는 단연 최고다. 이곳에서 만나볼 그림은 보티첼리 전시실에 있는 비교적 작은 그림이다. 제목은 <동방박사의 경배>.이 주제는 정말 많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주제이다. 성서에서 나오는 한 장면으로,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동쪽에서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자르라는 이름의 동방박사들이 밤하늘 별을 보고 또 물어물어 찾아와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고 갔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
왼편의 고대 로마 유적이 보이는 가운데 베들레헴 마구간 건물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하다. 전면에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냥 숫자 채워 넣으려 그린 얼굴들이 아니다. 모두 당대 피렌체에서 나름 잘 나간다는 유명인들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메디치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먼저 그림의 정중앙에서 아기 예수의 발을 만지며 경배를 드리는 박사를 보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이 인물이 바로 부친인 조반니 디 비치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코시모다.
그 아래에 꿇어앉은 두 사람이 보인다. 입고 있는 의상으로 보아 역시 동방박사로 보인다. 이들은 코시모의 아들인 피에로와 조반니를 그린 것이다. 즉 이들 세 명의 가문 어른들을 동방박사로 묘사한 것인데 이는 극진한 아부의 냄새가 난다.그림이 그려지던 당시는 이들 세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들의 후계자로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인물은 코시모의 손자이며 피에로의 아들이던 로렌초였다. 그는 할아버지 코시모의 바로 뒤에 멋진 모자와 화려한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의 반대편에 검은 옷이 돋보이는 멋진 청년은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다. 다음 시간에 르네상스의 대가 보티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 젊은 후계들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하게 될 것이다.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부분), 1465, 리카르디 궁 소장.
신흥 가문 메디치 주역들이 등장하는 그림
이 그림은 로렌초에게 바쳐졌다. 이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중개업을 하던 가스파레 델 라마라는 사람이다. 의뢰인인 그가 자신의 얼굴을 빼놓았을 리 없다. 그림 오른편 허물어진 벽 바로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 맨 윗줄 가운데에서 우리를 빤히 보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바로 가스파레다. 그는 자신의 후사를 염려하여 반대편에 자기 아들을 그려 넣었다. 왼편 로마 유적 아래 검은 머리를 하고 우리를 보고 있는 젊은이가 그의 아들이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주역을 맡은 이들이 이 그림 속에 모두 들어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며 무역일을 배웠다. 늘 겸손하고 영리해 사랑받는 젊은이였다. 그는 동로마나 멀리 투르크까지 일을 하러 다녔는데 거기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문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자신의 조상이 이룩했던 위대한 문명이 이 멀리엔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이탈리아에선 완전히 사라진 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 동서 로마를 하나로 합칠 때 그 수도로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리하여 코시모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피렌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다. 우선 그는 미완성이던 두오모 성당의 쿠폴라를 완공하기 위해 뒤에서 브루넬레스키를 적극 지원했고, 도나텔로를 후원해 많은 조각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특히 도나텔로를 아꼈는데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도나텔로와 상의할 일이 있을 때는 약속을 뒤로 미뤘고, 도나텔로가 의뢰인들과 자꾸 마찰을 빚자 직접 생활비를 대주면서 조각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켈로쪼, 프라 안젤리코, 고촐리 등이 그가 후원한 예술가들이었다.
조상들의 위대함에 감동한 코시모
다음 그림은 리카르디 궁 예배당에 그려진 〈동방박사의 행렬〉이라는 그림이다. 고촐리가 그린 이 그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동방박사 축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렌체 공의회에 대한 것이다. 먼저 동방박사 축제에 대해 살펴보자. 이 축제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가장행렬을 즐기는 대규모 행사였는데 전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귀족만을 위한 축제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이 축제를 비롯해 자신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메디치가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귀족 가문들이 음모를 꾸며 코시모를 죽이려 했지만 간신히 도망친 그는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로 올라섰다. 그를 추종하는 열혈 시민들이 일어나 귀족 가문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코시모의 노력으로 1439년에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를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공의회란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종교회의를 말한다. 피렌체 공의회는 코시모 일생의 꿈이 실현되는 장이었다. 동서 로마 황제와 교황을 비롯한 동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피렌체 두오모에 모여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천 년 넘게 갈라졌던 두 세계를 모은다는 건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이때 모인 지도자들은 통합이라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열광과 환희의 순간도 잠시, 몇 년 후 동로마가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피렌체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던 코시모의 꿈도 아쉽게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코시모의 업적은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찬란했던 고대 로마를 이 시대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인문주의 운동을 보다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전 방위적으로 지원하는데, 우선 그는 자신의 별장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열고 학자와 문인,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무런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지난 세기부터 이어진 고대 희귀 서적 수집 운동에도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구한 책을 한곳에 모아 도서관을 열고 자국어로 번역해 일반 시민 모두에게 개방했다. 이러한 활동에 투입된 돈은 어마어마했다. 이처럼 메디치 가문이 독보적인 활약으로 피렌체 곳곳을 꾸미자 시민들의 지지가 모였다.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가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이러한 ‘메세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거리가 늘어나자 공방마다 활기를 띠었고 많은 예술가가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피렌체가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연결된 것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후원자 메디치 가문
코시모는 아들 둘이 있었으나 둘 다 몸이 약해 걱정이었다. 메데치 가문에는 지병으로 통풍이 있었다. 자신이 죽은 후 두 아들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염려한 그는 손자 로렌초에게 가문의 미래를 걸었다. 체계적인 교육으로 로렌초를 가르쳤는데 똑똑하고 씩씩한 손자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뛰어난 자질과 성취를 보였다. 코시모는 사람들 앞에서는 천성이 소탈하고 검소해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막후에서 정치를 할 때에는 치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향후 손자를 위협할 정치세력을 모두 제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을 보였다고 한다.
코시모가 주고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물려받은 피에로는 몸이 아파 늘 누워서 지냈다. 불과 5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일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로마의 유력 가문인 오르시니 가문과 혼인시켜 로마 교황청과의 인맥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향후 로렌초의 아들과 조카가 연이어 교황에 선출되는 배경이 된다.
로렌초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약관 스무 살에 가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뱃심이 있고 영리한 인물이었다. 정치, 외교, 무역일 등 모든 분야에서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없앨 정도로 어려움을 잘 헤쳐나갔다. 그의 길은 어느 정도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건 조부인 코시모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 역시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플라톤 아카데미에 통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많은 고대 저작을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고대 신화의 이야기들을 끊임 없이 발굴해 시와 예술로 세상에 선보였다. 종교계가 이교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것에 대비해 고대 신화와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종교에 종속되었던 예술이 해방되게 되는 것이다.
조부 뜻 이어받은 로렌초
사실 메디치 가문의 후원규모는 한 가문이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 화폐기준으로 1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엄청난 돈을 문화예술에 쏟아 부었을까.
역사는 이들의 이러한 투자가 대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귀족 가문들에 비해 열세였던 메디치가 피렌체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단박에 최고의 가문에 올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후에도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려는 많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힘은 늘 메디치 가문의 배경이 되었다.
두 번째 성과는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활짝 개화하게 되면서 피렌체 예술품을 구입하기 위해 막대한 돈이 피렌체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점이다. 피렌체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메디치 가문이 그 수혜자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후 많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는 물론 토스카나 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왕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다 선조들이 쌓은 공덕의 덕분이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예술가의 대표격인 보티첼리의 그림을 통해 15세기 피렌체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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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대표는 서울시립대 겸임교수 서울대에서 보들레르를 전공했다. 현재 기업인재연구소를 운영하며 기업과 대학을 도와 인재를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다면’ ‘300프로젝트’ ‘아트인문학’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