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의 두뇌를 ’백지’에 비유하는 이유
태아는 임신 5개월이면 성인의 뇌세포 수와 맞먹는 1천억 개 정도의 세포가 완성된다고 한다. 일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뇌세포를 이미 뱃속에서 갖추고 태어나는 셈이다. 그리고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생긴 수정란은 수정된 그 순간부터 1분에 25만 개라는 엄청난 속도로 배수 분열을 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신경관에서 만들어진 뉴런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뇌의 각 부분으로 이동한다. 5개월 뒤엔 머리의 모양이 대충 만들어지고 눈, 귀, 심지어 손톱과 발톱에 이르는 신체의 각 부분이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아기가 일생 동안 필요한 거의 모든 신경세포를 가지고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때부터 어른처럼 읽거나 쓰거나 말을 하는 아기는 없다.
그 이유에 대해 강남성모병원 신경외과 강준기 교수는 "뇌세포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뇌세포끼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갓 태어난 아기는 자극이나 경험이 부족하여 뇌세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시냅스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갓 태어난 아기의 두뇌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백지에 비유하는 것도 앞으로 아기의 두뇌 안에 담길 내용물이 그만큼 많은 까닭이다. 한편, 뇌세포는 다른 세포와 다르게 한 번 죽으면 그를 대신할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뇌에 염증이 생기거나 외부로부터 상처를 입어 뇌세포의 일부가 훼손되면 다시 재생이 안 돼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 쓰지 않으면 도태되는 ’가지치기’ 법칙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기는 평균 1천억 개 정도의 신경세포와 이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50조 개 이상의 시냅스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두뇌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출생 후 몇 달 이내에 시냅스는 20배가 늘어나 1천조 개 이상이 된다. 아기의 뇌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뇌세포 하나 하나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에서 갈라져 나오는 가지 수가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갓 태어난 아기의 뇌세포 수는 성인과 비슷하지만, 아직 배선망이 잘 짜여지지 않아 두뇌 활동이 상대적으로 연약하다.
한편, 운동 선수가 운동을 그만두면 몸이 굳어져 한창때의 기량을 되찾기 힘든 것처럼 두뇌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소실하고 만다. 많이 사용하는 부위는 그만큼 튼튼해지고, 그렇지 못한 부위는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두뇌의 가지치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나무에 달린 가지라도 태양과 양분, 수분을 많이 머금은 가지가 더 튼튼하게 자라듯 두뇌 역시 많이 자극할수록 더 활발하게 발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기가 타고난 가능성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두뇌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심장 박동이나 허파 호흡과 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두뇌 조직은 신생아가 지니고 태어나는 시냅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수백, 수천만 개의 시냅스는 개별적인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뇌는 말 그대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앞의 모빌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아기가 시간을 두고 계속 시도하는 동안 모빌을 붙잡을 수 있게 되고, 제 앞의 장난감을 능숙하게 집게 되는 이유도 그런 탓이다.
▶ 부모 역할 따라 발달 정도가 달라진다
지난해 말, 국제아동기금(UNICEF)은 세계 아동 현황 보고서를 통해 "국가가 나서서 영유아기 교육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력과 감정 조절, 습관적인 행동, 언어, 인지 등과 같은 뇌의 주요 부분이 생후 3년 동안 거의 모두 발달하고, 그것이 일생 동안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제 국가 차원에서 영유아기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선 1997년 4월 미국 백악관에서도 ’갓난아기의 두뇌 발달과 학습’을 테마로 회의가 열렸다. 국경 없는 국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대적이며, 교육은 유아기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첫돌 전의 아기 때부터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주 안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고가(高價)의 수업료를 부담하고라도 아기를 조기교육 기관에 맡기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대목동병원 신경내과 김용재 교수는 "아기의 두뇌 발달을 위한 행동들이 오히려 아기들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아기 때 최초로 받은 스트레스에 대한 ’경험’은 이후 두뇌 발달에 영향을 끼쳐서 그 피해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아기의 두뇌 자극에 부모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아기들에겐 주변의 모든 환경이 두뇌를 자극할 수 있는 요소가 되며, 월령이 낮을수록 엄마·아빠는 살아 있는 놀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슈퍼 베이비’를 기대하기보다는 아기의 발달 정도에 맞는 환경과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더욱 필요한 때다.
글/ 조재현 기자
취재에 도움주신 분들/ 김용재(이대 목동병원 신경내과 교수), 강준기(강남성모병원 신경외과 교수)
자료제공 : 앙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