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을 통한교훈(창세기 26:12-25)24.10.06.주일낮설교
지난주에 이쁜 여자보다
말을 이쁘게 하는 여자자랑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여보 수박 사왔어-반응?
==비싼 딸기를 왜 사왔어-
==딸기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내 맘을 알았지
우리는 다른 삶을 기쁘게 하는 언어를 써야 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나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안에 이미 화가 많이 들어 있어서 늘 화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은 점을 보고 칭찬 하려고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화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만 보고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안에 화를 버리고 주님의 마음인 온유한 마음,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창세기의 두 번째 족장인 이삭입니다.
이삭은 창세기 족장 중에서 가장 많은 180세(아브라함 175세, 야곱 147세, 요셉 110세, 사라 127세, 이스마엘 137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이삭을 일생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우물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다섯 번의 우물을 파면서 믿음의 여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을 이삭의 다섯 우물과 비교해 보시시 바랍니다.
첫 번째 우물은 블레셋 지방에서 판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장 12-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우물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이미 파 놓았던 우물로 이삭이 쓸 수 있도록 다시 복원 한 것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의 결실을 맺었고, 창대하고 왕성하게 되어서 거부가 되었고, 양과 소떼가 심히 많고 종이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12,13,14절)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그런데 거부가 된 기쁨도, 마음의 평안도 잠깐 뿐이었고,
이때부터 이삭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14, 15절을 보겠습니다.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큰 부자가 되자, 본토 주민들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무리를 이끌고 와서 이삭 가족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을 메꾸어 버렸습니다. 물이 없으니 사람과 가축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우물을 찾아 거주하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인이 첫 번째 직면하는 고난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의·식·주의 문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첫 시험도 먹는 문제였고,
광야에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마실 물 때문에,
먹을 음식 때문에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 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첫 번째 훈련입니다.
여러분 혹시 먹고 사는 것 때문에 힘드십니까?
미국의 과학자들이 음식을 어느 정도 섭취하는 것이 생명에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죽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식량만을 주었고, 다른 한 그룹은 먹고 남을만한 풍족한 식량을 주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두 그룹의 평균 수명이 비슷하거나, 풍족한 쪽이 조금 오래 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과식은 안 좋지만 쥐는 필요 이상으로 폭식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유분의 에너지가 건강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그룹은 평균 쥐 수명의 약 2배를 살았습니다. 식량이 남는 쪽은 비슷하게 살거나 조금 더 단명했지만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부족한 식량을 먹는 쥐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사이좋게 지냈지만 풍족하게 먹은 쥐들은 서로 싸우고 물어뜯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실험에서 영감을 받아 건강이 안 좋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절식’을 시켜보았습니다. 환자들은 공복감에 아쉬워했지만 대부분 더 맑은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회복했습니다. 검사결과 실제로 각 장기들의 백혈구 수치가 올라가고 기능이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풍요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필요 이상의 낭비는 삶의 질을 낮추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이 풍족하지 못한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족함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은혜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이 찾아오면,
“아하! 첫 번째 우물이구나” 라고 생각하십시오.
주신 것에 늘 감사하시고, 있는 것을 아껴 쓰시고, 구별하여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시고, 또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여유를 갖추셔서,
첫 번째 생활이 주는 고난의 우물을 거뜬히 넘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우물은 블레셋 지방에서 판 우물 이었습니다.
두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에섹”이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장 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이 우물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이었는데, 다시 파서 우물을 복원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블레셋의 목자들이 또 다시 찾아와 이삭이 거느린 목자들과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투다’라는 뜻을 가진 ‘에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창 26:20)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다투다’라고 하니 양쪽 편이 서로 대등하게 말싸움과 몸싸움으로 다툰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에섹’의 의미는 억압받고, 무례하게 취급당하고, 불공정한 억압으로 강탈당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오는 고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다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시험하는 고난입니다.
이삭이 내린 결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곳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다투다’라는 에섹의 이름 뜻이 무색할 정도로 도망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주님도 자신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손 한번 움직이시는 동작으로 다 쓸어버리실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분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노를 역 이용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참아내실 수 있는 인내로 승화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혼자 계실 때, 혹은 가족 끼리 있을 때 막 누구를 험담하고, 저주하고, 그 사람을 다듬이 돌에 올려놓고 두들기듯이 험한 말을 쏟아 부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항상 나의 인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태클을 걸어옵니다. 분노하게 만들고 다툼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이 때 참아내고, 다툼의 자리를 떠나고, 평화와 인내를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굴욕을 강요하는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저항했습니다.
이삭은 사람과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그가 가족과 목자들과 가축을 데리고 자리를 떠난 것은, 외견상으로는 큰 손해를 입고, 비굴하게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약간 모자라거나 부족하거나, 바보 같거나, 머저리 같은 경우를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발음상 일본어로 알았는데 순수 우리나라 말입니다. 심하게 표현할 때는 “병신 쪼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가장 힘 있고 강한 나라였습니다.
고구려는 소수림 왕, 광개토대 왕, 장수 왕으로 이어지면서 최대의 번영기를 이루었습니다. 그 중에 장수왕은 이름 그대로 장수한 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9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 장수왕에게 “조다”라는 세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 장수왕이 장수 할 뿐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왕위를 내놓지 않음으로 아버지 장수왕보다 먼저 죽음으로 결국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조다” 세자는 아버지 장수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요구할만한 덕목과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효자였고 어진 사람이라 아버지에게 한 번도 선위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정말 아쉬운 경우, 다된 밥도 못 얻어먹는 매우 안타까운 경우를 당한 경우 “조다 세자님 같은 경우를 당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또는 그런 사람에게는 “조다 세자님 같은 사람'이라고 부 르다가 어느 순간에 ‘조다 같은 놈’ 이라는 표현이 되었고 점차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고 급기야 나중에는 앞에 병신도 붙고 해서 오늘날에는 억울한 경우뿐만 아니라, 바보 같고 어리 숙한 경우, 좀 모자라 보인 경우 등을 통틀어서 비속한 표현으로 경음화 현상까지 첨가되어 '병신 쪼다' 또 는 '븅신 쪼다'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많은 “쪼다”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쪼다” 취급을 당하나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잘되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메우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추방을 명합니다.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에게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쪼다” 가 되어 그 땅을 떠납니다.
이삭은 “쪼다”가 될지언정 싸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볼 때 이삭은 “쪼다” 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참고 양보하고 인내하며 기다렸 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쪼다처럼 살 수 있습니까?
시편 35편은 다윗이 자기를 모함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향한 기도시 입니다.
함정을 파고, 불의하게 거짓말을 하고, 조롱하고,
까닭 없이 미워하고, 다윗의 재난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저주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원수를 사랑하라신 주님의 말씀과
상반된 기도를 주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4.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5.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6. 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7.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다윗은 이삭과 달리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대신 싸워 달라고 기도하며 그들에게 저주를 퍼 붓는 기도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결론을 하나님입니다.
다윗도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대신 싸워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을 의지 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결론은 하나님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