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경연(經筵)에서 왕과 신하들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등의 고전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토론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되어 경연에 참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경연에서 오고간 대화나 있었던 일을 ‘경연일기(經筵日記)’라는 글로 남기는 일도 흔히 있었다. 다수의 경연일기가 각자의 문집에 실려서 오늘날에 전한다. 그런데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의 경연일기는 남다른 면이 있다. 다른 경연일기들은 성리학의 거대 담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데 비해, 미암의 경연일기에는 고전의 자구(字句)에 토를 어떻게 다는 것이 좋은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선조 외의 다른 왕 때에도, 그리고 유희춘 외의 다른 경연관이 경연에 참여했을 때에도 고전 해석을 둘러싼 자질구레한 토론은 꽤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빼고 큼직한 주제에 대한 멋들어진 이야기만 경연일기에 실은 데 비해, 유희춘은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시시콜콜하게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희춘의 이러한 철저한 기록벽(記錄癖)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의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 고전 해석을 둘러싸고 어떤 고민과 토론을 했는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 중 흥미로운 몇 대목을 살펴보자. 1567년 11월 5일 유희춘은 선조와 『대학(大學)』을 강독하다가 ‘此謂修身在正其心’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겼다. 유희춘은 이것을 ‘이 닐온 몸 修호미 그 마음 正호매 이시니라’(이것이 이른바 몸을 수행함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로 풀어 읽었고, 선조는 ‘… 그 마음 正호매 이슈미니라’(…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것이다.)로 풀어 읽었다. 유희춘은 다음해 2월 24일 고백하기를, 당시에는 자기가 분간을 하지 못했으나 물러나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의 풀이는 어설픈 것이었고 임금의 풀이가 정밀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미세한 차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此謂’가 있으므로 선조처럼 풀이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경서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구결을 어떻게 달 것인가 하는, 어찌 보면 작은 문제를 놓고 당시 지식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1570년 8월 20일의 『대학혹문』 제9장 강독 때는 ‘先君子之言曰有諸己不必求諸人 以爲求諸人而無諸己 則不可也’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이때는 유희춘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以爲(~라고 여기다)’가 ‘求諸人而無諸己’ 전체에 걸린다고 보았으나 유도(柳濤)만은 ‘以爲’가 ‘求諸人’까지만 걸린다고 보아 ‘남에게 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에게 없으면 안 된다.’라고 풀이하였다. 유도는 일찍이 유희춘으로부터 이러한 해석을 배웠었다. 선조가 유성룡(柳成龍), 오상(吳祥) 등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유도의 의견에 찬동하고 선조도 이에 동조하면서 유희춘이 경적(經籍)을 널리 보아 아는 것이 많다고 칭찬하였다. 9월 5일 유도가 유희춘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유희춘은 선조의 칭찬에 대해 감격해한다. 선조는 고전의 해석, 특히 자구(字句)의 정밀한 해석과 관련하여 경연관들 중에서도 유희춘을 특히 신임한 듯하다. 1571년 11월 29일 『중용혹문』 제12장 강독을 할 때 경연관이 강석(講釋)을 부정확하게 하자 선조가 일일이 바로잡았는데, ‘則’을 ‘~하면’으로 풀이하고 ‘初’를 ‘원간(워낙)’으로 풀이하는 등 모두 유희춘이 과거에 풀이하여 가르쳐 주었던 것과 일치하였다. 유희춘은 선조가 자신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면서 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고 감격해 마지 않는다. 유희춘이 이렇게 선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경적(經籍)을 많이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적을 많이 읽은 사람이야 당시 많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소학(小學)이라고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문자학, 음운학, 훈고학에 대해 유희춘은 유달리 신경을 쓰고 중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획 하나, 한자의 독음 하나 소홀히 넘기지 않고 꼼꼼히 따지고 점검하는 스타일이었다. 유희춘이 그런 성향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런 자잘한 문제에까지 종종 이르곤 했다. 1570년 11월 17일 오건(吳健)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던 중, 퇴계 이황이 ‘격물(格物)’의 뜻이 ‘물(物)에 격하다’인 줄 알았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물이 격하다’로 해석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오건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유희춘은 퇴계의 깨달음에 대해 반가워한다. 유희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선조도 고전을 읽을 때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히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자기가 잘못 해석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잡았다. 1573년 3월 17일 경연에서는 선조가 ‘경(逕)’을 ‘지나다’로 풀이하였다가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고 ‘길’로 고치는 장면이 나온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대한 해석에 신중을 기하는 선조도 선조이지만, 이런 작은 일까지 일기에 기록한 유희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때로는 유희춘의 잘못을 선조가 지적하여 바로잡기도 한다. 1570년 7월 21일에는 『대학혹문(大學或問)』의 「격물치지(格物致知)」장을 읽으면서 ‘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積累多後 自當脫然有貫通處(오늘 하나를 궁리하고 내일 하나를 궁리하여 많이 쌓이면 저절로 시원하게 꿰뚫어 알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와 ‘理會得多 自當豁然有箇覺處(이해가 많이 쌓이면 저절로 시원하게 깨닫는 일이 있게 된다.)’라는 두 대목에서 ‘自當’을 유희춘은 ‘스스로’라고 풀이했는데 선조는 ‘自然히’라고 풀이하였고, 유희춘은 즉시 수긍하였다. 1576년 7월 22일에는 선조가 유희춘이 지은 『대학석소(大學釋疏)』와 『유합(類合)』에 대해 정밀하고 깊이가 있다고 칭찬하면서도, 『유합』의 글자 뜻풀이에 가끔 사투리를 쓴 것이 있다고 따끔한 지적을 한다. 유희춘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그곳 사투리가 섞여 있었을 법하다. 유희춘의 꼼꼼한 성격의 발현은 고전의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구두점, 성점(聲點), 한자의 독음, 책 간행시의 오자(誤字) 등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1572년 9월 4일에는 『서경(書經)』 「고요(皐陶)」편을 강독할 때 유희춘은 ‘저(底)’에 점이 찍혀 있으니 ‘치(致)’의 뜻으로 풀이해야 함을 지적한다. 1574년 4월 25일에는 선조가 ‘왜(歪)’자의 뜻을 김응남에게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자 유희춘이 "기울어져 바르지 못하다는 뜻이고 음은 와(喎)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나 유희춘 스스로 또는 선조가 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의구심을 품은 듯하다. 다음 날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가져와서 확인한 결과 이 글자의 음이 ‘왜’임을 알게 된다.
1573년 3월 17일에는 유희춘이 『내훈(內訓)』의 인출본(印出本)이 정밀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책임자를 적절히 처벌하고 인쇄에 쓰는 먹을 바꿀 것을 건의한다. 또한 권2 첫머리의, 부부의 분(分)을 논하는 대목에 ‘或歐或詈乃其分也’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분(分)’자가 빠졌고 그 밖에도 고쳐야 할 데가 있으니 궁내로 들어간 15벌을 도로 달라고 한다. 선조는 이미 궁인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냥 두고 새로 찍을 것만 고치자고 하나, 유희춘은 안 된다고 하면서 궁내에 들어간 책들을 다시 내어달라고 한사코 주장한다. 필자는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한문 텍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 꼼꼼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던 적이 가끔 있다. 하나의 한자를 문맥과 상관없이 일관되게 번역하는 사례가 그 답답한 것들 중 하나이다. 예컨대 ‘유(猶)’는 ‘여전히, 아직도’로 번역해야 할 경우도 있고 ‘오히려, 의외로, 예상과 달리’로 번역하는 게 적절할 때도 있고, ‘그래도, 그렇기는 해도(앞의 말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로 풀이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거의 항상 ‘오히려’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유희춘도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지녔던 모양이다. 1574년 12월 6일 ‘유구우(猶求友)’를 풀이하다가 유희춘은 "유(猶)자를 우리말로 풀이할 때 흔히들 ‘오히려’라고 하는데 ‘그래도’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말하고 선조도 이에 동의한다. 한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문맥에 맞게 어떻게 풀이하는 게 좋을까 오랫동안 깊이 고민한 사람이기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희춘의 이런 꼼꼼한 성격 덕분에 『선조실록』도 나올 수 있었고 당시 지식인들이 고전을 해석하면서 고민했던 것들도 오늘날의 우리가 알 수 있게 되었다. 고전 해석에 관한 고민이 시대를 뛰어넘어 먼 조상과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에 공유될 수 있음에 경이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