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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바탕 할 양으로 아우성입니다. 그래요. 작년 유럽에서 터진 전쟁의 회오리가 금년에는 중동으로, 이제 아시야 대한민국으로 옮겨 붙으려 합니다. 거참! 아니면 누구 목소리가 큰가, 떠들어보는 겁니까? 지금은 전쟁이 나면 둘 다 망합니다. 그저 바다 건너 가까운 원수 같은 이웃나라만 속으로 좋아 미치고 있을 겁니다. 6.25 때 한번 신나더니 이제 또 하려나보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 좋은 일하며 스스로 망하는 길로 들어서면 안 될 것입니다. 몇 사람 체면 살리려고 전쟁 통으로 빠져 들어가면 그야말로 나라 팔아먹는 일이고 백성들 잡아먹는 일입니다. 정신들 차리면 좋겠습니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 아닙니까? 죽으면 땡이죠.
조금은 겨울 맛이 나네요.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람은 겨울바람 비슷합니다. 며칠 있다가 지나간답니다. 나이 들어가니 추운 게 그다지 반갑지는 않아도 자연 속에 필요한 과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시사철 다 필요하니까 만드셨겠지요. 잘 적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겨울이 점점 옛날 기운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기후변화 탓이겠지요. 천천히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지구를 떠나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여기 밖에는 없으니 두려운 거죠. 살리는 길로 발전해가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건강하게 버텨야지요. ㅎㅎ 건강하게 복된 주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23년 11월 25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19 : 10)
<더 킬러>
세상에는 직업도 참 다양하게 많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교과서의 말이고 현실에는 다소 기피하는 직업도 있기는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편하게 사는 것임에도 몰라줍니다. 아무튼 그보다는 좀 색다른 직업도 있습니다. 이것도 직업인가 싶은 것이지요. 예를 들면 ‘놀음꾼’이나 사기꾼, 또는 도둑도 직업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직업(?)도 있습니다. 바로 살인청부업자입니다.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직업인입니다. 그럼에도 매우 친근감(?)이라고까지는 말하기 곤란해도 안쓰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업은 서늘하지만 동정도 가고 공감도 할 수 있던 사람입니다. 글쎄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까요? ‘레옹’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직업(?)입니다. 그만큼 위험 요소가 많겠지요. 물론 그에 따른 대가가 크기에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그 직업을 수행하려면 일단 몸 관리부터 남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만큼 자신의 목숨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 소속 집단이 해를 당하고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기를 쓰고 찾아내려하고 역시 어떻게든 해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직업을 가질까요? 일단 짧은 시간에 큰돈을 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다는 체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만한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돈이 관건입니다. 따로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몸 하나 단단하면 되지요. 그런데 그 몸이 보통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무술은 모두 섭렵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몸도 준비되어야 하지만 마음도 일반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동정은 금물입니다. 또한 방심은 결코 안 됩니다. 자칫 상대의 처지를 이해해준다든지,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역습을 당합니다.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가차 없이 실행해야 하지요. 순간의 방심이 이승을 떠나게 합니다.
문제는 그런 살벌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개인의 삶이 없을 수는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도 있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위험이 확장됩니다.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면 바로 그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괴롭히는 것이지요. 자신이 당하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까지 덤으로 받습니다. 긴 시간 죄책감으로 시달립니다. 또 다른 복수의 칼을 지니게 됩니다. 이제는 돈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달려듭니다. 이 때 더 위험해집니다. 소위 감정이 개입되면 일을 보다 이성적,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만큼 약점이 노출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의뢰받은 일을 때마다 성공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한 것처럼 혹시라도 실수하여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임무를 위해 관련된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실패 후에는 상대방에게 더욱 큰 경각심을 심어주게 되고 앞으로의 일들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만큼 자신들의 추진하는 계획에 아마도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갈 것입니다. 후폭풍이 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감당하지요? 그러니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한 자에게 그 분풀이를 쏟아냅니다. 기막히게 도주한 당사자보다는 그 관련된 가까운 사람들을 해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연히 나타날 테니 말입니다.
그 비참한 광경을 당한 킬러가 또한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관련자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 분야로는 도사이기에 드디어 알아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찾아서 보복을 시행합니다. ‘계획대로 해. 아무도 믿지 마. 공감은 금물이야!’ 그가 계속 되뇌는 말입니다. 킬러를 위한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저히 개인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임무수행에는 결코 개인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옛 정’은 금물입니다. 특히 ‘돈 받고 하기로 한 일에만 집중해. 그 일로 받는 대가에만 집중해!’ 라는 말에서 보건데 목적은 하나, 돈입니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돈이기 때문입니다.
좀 색다른 이야기입니다. 보통 킬러 영화는 킬러와 그 임무수행에 관련된 사건들을 전개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처음 발단이 그 임무수행에 실패입니다. 찰나의 시간차로 엉뚱한 사람이 희생을 당합니다. 임무수행을 못한 것입니다. 자신은 기막히게 그 자리를 벗어나지만 후폭풍이 무섭게 일어납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당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감정 없이 일하나 싶었는데 무섭게 분노에 휩싸입니다. 킬러 본능을 복수에 대입합니다. 차갑고도 무섭게 처리합니다. 킬러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킬러 자서전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킬로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더 킬러’(The Killer)를 보았습니다.
무슨 포도주를 드시나요?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 송년회를 합니다. 그와 함께 한층 증가하는 소비품이 있습니다. 모임에 의례히 따라다니는 것이 음주입니다. 그렇게도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없어지지 않습니다. 건전한 송년회도 차츰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반반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술 소비량은 세계 어디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의 음주량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먹는 음식인데 뭘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느냐 하겠지만 사실 그 폐해가 적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외국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선교와 더불어 발 벗고 나서서 일으킨 운동이 금주운동 아니겠습니까.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던 것이지요. 가난한 나라 백성이 술독에 빠져 더 어려운 형편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물론 어느 나라에 가도 술은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도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빙자해서 음주를 합리화하려고 하기도 하지요. 술 취하지 말라 하였지, 술 먹지 말라 하였느냐? 하고요.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자리는 최후의 만찬석입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잡혀가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을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6 : 27 - 28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언약을 하십니다. 당신의 피로 세우는 언약입니다. 29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새것’은 곧 새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 하십니다. 물론 그 날 이후 그 당시의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까요. 그런데 새 포도주를 마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자들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포도주가 새 포도주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포도주가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르고 한 나라 안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3 가지 포도주가 나옵니다. 문제는 그것이 말 그대로 포도주인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요 15 :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이 포도나무랍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그 가지랍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했으니 포도주도 포도주로만 볼 것이 아니지요. 포도주는 포도나무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지금 붉은 포도주를 나눠주고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도 성찬식을 하면서 포도주를 배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산답니다. ‘피’가 피가 아니고, ‘포도주’가 포도주가 아님을 짐작해야 합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당신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 7 :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14 :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기 쉬운 말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주는 바로 하나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포도나무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가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당신의 섭섭함을 말씀하십니다. 사 5 :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들 포도가 맺혔으니 들 포도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 나오는 포도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여기서 말씀하시는 포도나무도 포도도 실제 나무와 포도가 아님을 뒤에서 설명해주십니다. 7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나무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포도주도 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들 포도나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고 당연히 그 포도주는 그가 전하는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뜻이지요.
성경을 보면 역사 속에 세 번의 시대가 나타납니다. 세계사 속에는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되면 성경을 따라서 역시 셋으로 구분될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 초림으로 인하여 크게 둘로 나뉩니다. 잘 아는 대로 주전(BC)과 주후(AD)로 나뉘지요. 그리고 어떻게 불릴지 모르겠지만 재림 이후의 시대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면 말세 곧 세상 끝이 두 번 있습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초림 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셨던 때가 ‘세상 끝’이란 말이지요. 그러므로 ‘세상 끝’이 초림 때 이미 한 번은 지나갔고 이제 한 번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세상 끝(말세)을 중심으로 시대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초림 전과 초림 후 곧 재림 전 그리고 나서 재림 후입니다. 이 세 번의 시대에 하나님 백성도 달라집니다. 초림 전에는 잘 아는 대로 혈통을 따른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었습니다. 초림 후에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이 하나님 백성이 됩니다. 요 1 : 12 -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소위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재림 후에는 또 다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먹는 양식도 시대마다 바뀝니다. 예수님 오기 전에는 율법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지요. 그것은 초림으로 오실 메시야가 약속되어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육적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을 예언의 말씀으로 풀어서 증거해준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에게로 와서 그 말씀을 들어야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요 6 :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살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곧 하나님 백성이 먹어야 할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그 말씀을 따른 백성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마지막 때 곧 재림 때는 하나님 백성도 바뀌고 또 다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고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4 : 44 - 4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재림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를 찾으십니다. 마지막 때 복 받을 자가 누구인지 보면 압니다. 계 1 :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이 예언의 말씀”은 곧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말씀을 먹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몰라도 된다는 둥,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둥, 그런 거 배우면 이단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들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마귀 사단의 뜻입니까? 내가 모른다고 다른 사람도 몰라야 합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자기 뜻입니까? 예수님이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하는 영이 같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육으로 사는데도 양식은 필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사는데도 영의 양식이 필수입니다. 영의 양식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영의 양식을 당신의 살로 그리고 포도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 6 :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 반응이 어떻게 나옵니까?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그렇지요.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를 봅니다.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도무지 모를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며 다닐 것입니다. 모르면 자기나 모를 일이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무식함을 전달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하게 전달을 하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도 안 가고 남들도 못 가게 막는 꼴이 되지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양식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먹은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새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의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가 생긴 것이지요. 예수님 때는 바로 이 새 포도주를 먹어야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이전에 먹던 율법은 자연히 묵은 포도주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새 포도주가 생겼으니 더 이상 묵은 포도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묵은 포도주는 다만 예수님께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 역할만 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눅 5 :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새것으로 바꾼다는 일이 언제나 쉽지는 않습니다. 여태 입에 익숙한 것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편하지요.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새 것을 먹자니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왜 남들 안 하는 짓을 하느냐는 둥,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는 둥 간섭을 지나 핍박까지 합니다. 자기네와 다른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대적하게 됩니다. 여태 지켜오던 천동설이 지동설에게 양보해주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때를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왜 때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때에 따른 양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냥 덮어놓고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양식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것은 그 양식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양식을 먹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앞날을 결정합니다. 지금 복음을 먹어야 하는데 율법만 고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에는 예수님에게 가서 그 양식을 먹어야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율법만 고집하고 묵은 포도주만 먹겠다고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을 성경은 강팍하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히 3 : 7 - 8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는 신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오시는 그 분은 신약의 약속 곧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다시 새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 듣고 먹고 살아온 복음은 묵은 포도주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새 포도주를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초림 때 유대인들처럼 묵은 것이 좋다고 고집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들처럼 버림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하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 연륜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예수님 말씀한 대로 외식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강팍하게 하면 그 결과는 버림받는 것입니다. 사실 새 포도주를 먹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이것이 과연 새 포도주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하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 18 : 21 - 22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말하는 것에 증험과 성취함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숨겨진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비유로 드러내십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약속하신 분이 오면 그 비유가 확실하게 풀어집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러므로 비유가 풀어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묵은 포도주인지 새 포도주인지 분별이 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말씀인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계시를 받아야만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군지 계 1 : 1절을 보면 압니다. 그가 밝히 이를 수 있습니다.
창세 때 나타난 뱀이 과연 뱀인지, 생명나무 선악나무가 과연 나무인지,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져야 인자가 온다는데 과연 해 달 별인지, 마지막 때 과연 지구가 불바다가 되고 멸망을 당해야 하는지,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데 과연 구름인지, 666이 바코드인지,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과연 그렇게 생긴 기괴한 짐승인지, 이 비유가 성경과 합하게 풀어지고 있는가, 들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답을 세상에다 풀어놓으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뭐하라고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것으로 풀려고 애를 씁니까?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고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 알고 지켜 하나님이 그렇게도 원하시는 구원과 영생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이만큼 이야기했으면 오늘 주제,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3 가지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있습니다. 여태 모세 율법을 먹고 신앙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구약의 예언을 이루신 실상을 증거해주는 복음입니다. 부활 후에는 예수님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풀어주셨습니다. 눅 24 :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구약성경을 풀어주신 것이 복음이고 새 포도주입니다. 그렇다면 여태 가지고 있던 구약이 묵은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때가 되면 묵은 포도주를 바탕으로 해서 새 포도주를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면 유대인들처럼 버림받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포도주가 더 있습니다. 계 17 :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예,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계 18 : 3절에서는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표현합니다. 짐작하겠지만 마귀와의 음행으로 심판받아야 하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 음행의 포도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사단의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뱀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아담을 미혹했던 거짓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음행의 포도주 곧 사단의 말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담까지도 넘어가게 만든 매우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된 거짓말입니다. 듣기 편하고 재미있고 은혜가 넘치게 들릴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갑니다.
다시 주의를 부탁합니다. 진짜가 진짜 같습니까, 가짜가 진짜 같습니까? 가짜가 훨씬 진짜 같습니다. 그래서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사단이 어디서 활동한다고요? 교회입니다.(살후 2 : 4) 교회에서 설교한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으면 곤란합니다. ‘아멘!’이라고 쉽게 화답하기 전에 검증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음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다시 인용합니다. 신 18 :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성경(구약)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는 새로 주신 언약 곧 신약으로 증거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인지 맞춰보면 알 것입니다. 들어보지도 않고 이러쿵저러쿵 떠든다면 자신의 무식과 교만만 드러내는 꼴입니다.
정리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 말씀이기는 해도 묵은 포도주만 붙잡고 있으면 구원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더욱 주의할 것은 음행의 포도주를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 포도주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마 26 :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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