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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 대화
"종교의 절대성과 불교 - 기독교의 대화"
노영찬 (George Mason University 교수)
본지에서는 창간 4주년을 맞이하여 기독교 · 불교의 학자, 성직자들을 통해서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다. 노영찬 교수의 이 글은 대화를 모색하는 첫번째 글이다. – 편집자 주 –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 기독교인 이든지 불교인 이든지 간에, - 은 대개의 경우 진보적이고, 좀더 자유스러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보수적'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시 하고 있다.
기독교나 불교를 막론하고 이러한 '보수적' 교인들이나 지도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교권을 잡고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 특히 불교 - 기독교의 대화는 소수의 학자, 학생들을 중심해서 자유스러운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 그 종교의 주류에서 움직여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심지어는 학문적인 세계에서도 교권의 압력 때문에 불교 - 기독교의 대화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불교 - 기독교 대화를 적대시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화가 자기신상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긴다. 특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불교라는 말만 들어도 자기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신앙의 순수성과 절대성이 다른 종교나 신앙을 배척함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순수성, 절대성이 배타성에 의해서만이 증명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는 서양논리학에 근거를 이루고 있다.
1. '일치성의 법'(the law of identity).
2. '모순이 되지 않아야 하는 법'(the law of non -contradiction). 이러한 법칙에 의하면 예를 들어서 A가A라고 주장하려면 A는 B나 C나 그 어느것도 A 외에는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A가 B나 C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주어지면 여기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중간지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A는 A이고 B는 B이지 A와 B가 같이 나눌수 있는 지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A가 A로 되기 위해서는 B가 아니어야 하며 B가 B로 되기 위해서는 A가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A와 B가 서로 나눌수 있는, 서로 연결될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면 없을수록 A는 A가 되고 B는 B가 되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 비추어 보면 불교가 순수히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 기독교적 이어야 하고 기독교가 순수하고 참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반 불교적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불교 - 기독교의 대화같은 것이 가능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남을 부인해야 한다. "내가 누구나" "내가 무엇이냐"를 찾는 노력이 "내가 무엇이 아니다"하는 부정과 배타의 방법을 통해서 나를 찾는 노력과 일치하게 된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찾을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가 무엇이 아닌가를 통해서만 자기를 알려고 하는 방법은 자기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요즘 일부 기독교,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할려고 한다. '정통'불교니 '정통'기독교 등 ' 정통' 이라는 말을 쓸때, '정통'이란 뜻이 순수하고 참되고 본질적이라는 뜻과 또 한편 역사적으로 바른 전통 즉 Originality를 이어 받고 있다는 두가지 뜻으로 씌어지고있다. '정통'은 이단 사설을 물리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통'을 주장하기 위해서 무엇이 '정통'이 아닌가를 밝히는데 노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통'이 아닌것을 골라 낼려면 자연적으로 배타적이 되어 버린다. 배타적이 되기 때문에 극히 좁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정통'이라는 말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종교가 아닌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서도 무엇이 자기와 같지 않은가에 그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해서 자기는 '정통'이되고 자기와 같지 않을때 '비정통'으로 규정해 버린다.
불교 - 기독교 대화의 장애물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보다도 오히려 불교나 기독교 자체 안에서 자기들 종교에 대한 이해의 불일치로 오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과 대화를 나눌려고 할때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정통성'을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진리는 오히려 대화 가운데서 더 잘 나타날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같은 기독교를 믿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자기이해(self-under standing)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통'이라는 방패 뒤에서 자기들의 신앙이 가장 옳은것이라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정당화의 과정은 역사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이 가장 순수하게 전달되어 왔다고 믿는다. 어느 종교의 어느 종파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종파가 생겨져 나올때는 이구동성으로 '정통'을 들고 나온다. '정통'의 순수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종파를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진리를 '정통'과 일치시켜 버린다. '정통'은 진리요 '비정통'은 진리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정통'과 진리가 일치되어 버릴때 진리는 '정통'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이고 고립적이 된다. 진리를 무엇이라고 또 어떻게 정의 하느냐 하는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서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성격을 규정하기위해서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학문적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상식적 범위에서 '진리'나 '참'이라는 것이 꼭 '정통'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근거가 극히 희박하다는 정도는 쉽게 알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정통'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설령 어떤 종파가 역사적 의미에서 그 종교의 가장 원래적 모습을 계승해 내려온 것이라는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정통성'의 계승이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계승과 꼭 일치 되는것은 아니다.
종교가 배타성을 지니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적진리'를 배타적 논리에 입각한 '종교의 정통성'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정통'과 '진리'가 배타성을 지닐수 밖에 없다는 논리에 충실하게 되고, 배타성이란 종교가 가질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느끼게 된다. 특히 이러한 배타성을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를 포함한 유태교 이슬람교등의 종교에서 그 특색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기독교인들, 특히 소위 말하는 보수파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신관 그 자체가 배타성의 논리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배타성이 유일신관을 지탱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자기종교의 신만이 유일한 신으로 믿으려면 자기종교의 신 외에 모든 다른 신들을 부정 할 수 밖에 없으며, 자기 종교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고집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은 동시에 기독교의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다. 종교의 절대성과 배타성이 일치되어 버릴때, 그 종교의 절대성은 배타성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배타성이 없어질때 그 종교의 절대성이 무너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볼때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의 절대성이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배타성을 동시에 주장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논법에 기초한 서구논리의 전형적인 틀이다.이러한 논리의 체계를 부정하거나 무시해 버릴수가 있을까? 또 이러한 논리의 근거없이 어떻게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주장 할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오늘 서구 논리가 부딪친 어려움과 문제 및 한계성을 볼수 있다. 또한 여기서 논리나 이론의 세계와 실제와 실천의 세계와의 연관성도 찾아 보아야 한다. 종교적 절대성이란 반드시 이론적이나 논리적 절대성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는 반드시 논리나 이론의 체계에 의해서 어떤 진리가 분석되기 보다는 오히려 실천과 경험의 세계를 통해서 어떤 진리가 터득이 될수 있다. 때로는 형식 논리에 맞지 않을지라도 직관이나 체험으로 논리의 형식을 뛰어 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선불교(禪佛敎)에서 보는 바와같이 때로는 논리적 과정이나 합리적 사고 그 자체가 '깨달음'을 도와 주기보다는 오히려 장에물이 될 수도 있는것이 아닌가?
종교적 의미의 절대성이란 논리나 합리에 의해서 증명이 될 수 있는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나는 결코 합리적 사고방식이나 논리적 분석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고, 또 종교의 세계에서는 합리, 이성, 논리등이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것도 아니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가 반드시 합리나 논리의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불교를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이, 실천가들이 논리나 합리, 이성의 힘을 빌려서 자기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설교, 설법등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나 불교를 포함해서, 종교적 진리의 기준(혹은 절대성의 기준)을 형식논리나 합리성이라는 거물망에 의해서만 판단 되어야 한다면 인간이 경험하는 종교적 세계의 특유성을 합리나 이성과 논리의 구조로 대치시키거나, 축소시켜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는 형식논리와 합리나 이성의 차원으로 완전히 전환 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 차원(Religious Dimension)은 다른 차원 즉 이성의차원 논리의차원으로 바뀌거나 축소 될 수 없는(irreduceble) 영역인 것이다.
종교적 차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다른 여러차원들과 따로 독립해서 존재 한다기 보다는 인간생활 전체를 감싸고 통전(inlergnate)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인간 전체를 문제삼는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은 인간의 그 어느 한 특정한 분야로도 변질되거나 바꾸어질 수 없는 특성을 계속 지니고있다.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믿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만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형식논리로서 볼때는 절대성은 배타성을 동반 할 수 밖에는 없겠지만 종교적 의미의 절대성은 논리적 의미의 절대성과는 다를 수 있는것이다. 자기 종교나 신앙의 절대성이나 궁극성이라는 것은 자기신앙과 자기가 가진 종교의 구체적 여건 아래서 확신되어지는 경험이요 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종교를 가진 사람도 그 종교의 독특한 여건에서 얻어진 경험은 역시 궁극적이요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믿는다는 것과 다른종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포용한다는 것이 논리적 차원에서는 상충을 일으키게 되겠지만 종교적 경험이나 실천적 차원에서는 절대성과 포용성이 이자택일로 반드시 나타날 필요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형식논리에만 근거하여서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게 될때 이러한 절대성은 그 절대성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찾기보다는 배타를 통해서 얻어지는 부정적인 의미의 절대성을 찾게 마련이다.
부정과 배타를 통해서 얻어진 절대성을 주장하는 종교가 다른 종교와 대화의 길을 열기는 어렵다. 또한 반면에 자기종교의 절대성이 타종교에 대해서 부정과 배타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절대성은 아직도 그 절대성이 종교적 차원에서 얻어지는 절대성이 아니다. 종교간의 대화가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부인하거나 저해한다는 위협을 느낄 때 그러한 절대성은 참된 의미의 절대성이 아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자기신앙의 깊은 차원에서 궁극적 실제(Ultimete Reality)를 논리나 관념으로 이해한는 것이 아니라 직관이나 경험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자기 종교의 정통적 교리나, 전통까지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궁극적 실제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리나 논리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를 우리는 종으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해 준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8:32) 우리는 불교에서도 불교의 진리를 깨달은 분들은 자유의 경지를 동시에 깨달은 분들임을 원효, 의상, 지눌 같은 위대한 스님들의 생활과 사상속에서 볼 수 있다. 각 종교가 자기의 절대성을 주장할때,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불교가 자기의 절대성을 주장할때, 여기에 물론 논리적 모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교회기구나, 교회역사나, 기독교의 교세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을때 이러한 것은 아직도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절대성은 될 수 없다. 기독교적 절대성이란 기독교 자체가 절대적 종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와 체험과 깨달음의 절대성이다.
불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라는 특정한 종교나, 불교의 어떤 종파나, 종단이 절대적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불교적인 생활과 사고와 명상을 통해서 얻어진 그 ' 깨달음'이 절대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얻어지고 깨달아지는 궁극적 실체는 그것을 얻거나 깨닫거나 경험한 자에게는 절대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궁극적 실제나 혹은 '진리'를 깨닫거나 체험한 사람은 자기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예를 들어서 수학적인 공식이나 합리나 이성적인 설명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객관적 진리)와는 질적으로 전에 다른 차원의 진리를 보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는 그것이 설령 극히 주관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드라도 그것이 경험하는자, 믿는자에게는 절대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 진리의 독특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절대성이란 객관적 척도에 의해서 판정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확신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를 같은 범주에 놓고 판가름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나 종교적 절대성이 과학적 진리나 합리적, 논리적 절대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절대성이나 진리는 과학적 차원의 객관성이나 합리성에서 이해 될 수 있는 절대성은 또한 아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차원이나 신앙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진리나 절대성은 다른 종교의 절대성이나 진리를 부정함으로 자기종교의 절대성이 보존되는 배타적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믿는다고 해서 다른 종교나 다른신앙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논리'요 종교가 지니는 특유한 '논리'라고 까지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은 절대와 상대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와 절대가 만나는 만남이요.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주관이 만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불교 - 기독교의 대화가 수박 겉할기의 표면적인 대화에서 심각한 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포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종교의 절대성을 이해하며, 상대방을 객관화 시키지 않고 상대방의 주관을 주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주관을 잃지 않는 새로운 생각의 바탕(A New Way of thinking)이 마련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대화의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은 아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요. 험한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한국 민족의 역사나 문화를 볼때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만날수 밖에 없는 종교이요 싫든 좋든 이 두 종교는 한국사회를 또 미주에 와 있는 이민 사회를 이끌고 가야 할 두 정신적 지주들이다. 이 양대 종교가 대화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이 두 종교가 새롭게 자기종교를 살펴보는 것이나 불교나 기독교는 대화에 임하기전에 먼저 자기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자기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는 다른종교와의 대화에 임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자기종교의 진리나 가르침이 왜 자기에게 '궁극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지도 물어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종교간의 대화에 결정적인 장애되고 있는 종교의 절대성의 경험적 차원과 논리적 성격을 살펴보므로써 불교 – 기독교의 본격적 대화를 열기위한 하나의 성찰이 되기 바란다.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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