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영천 이씨 산운마을(의성 금성면)
산운(山雲)마을은 굴착기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경북유교마을사업의 하나로 2003년부터 학록정사(鶴麓精舍)와 운곡당(雲谷堂) 등 전통가옥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마을 앞쪽을 한옥마을로 지정해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인 것. 잘 다듬어진 길과 새롭게 단장한 전통 가옥들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더 없이 좋다. 그러나 ‘개발’이란 명분은 언제나 이중성을 띤다. 뭔가 오롯이 간직되어온 옛 정취가 다소 사그라진 듯한 아쉬움도 준다. 한옥마을 뒤편엔 여느 농촌 풍경과 같다. 노후한 집집마다 논과 밭이 자리하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가끔 보인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이병옥(71)씨 집. 한평생 이 마을을 지켰다는 그에게서 이 마을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산운마을은 보통 산운 1리와 수정1리를 합쳐 부르는데 가구수가 150가구 정도로 꽤 큰 편이다. 이곳은 영천 이씨 집성촌답게 현재도 마을 주민의 과반수가 영천 이씨라고 한다. “6`25 전쟁 전후로 350가구나 살았어요. 당시엔 영천 이씨가 주민의 80%가 넘었죠.”
‘산운’이란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적에 수정계곡 아래 산과 구름이 조화를 이뤄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마을은 금성산을 뒤로, 비봉산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이름처럼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금성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이며 지금은 사화산으로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해 분화구가 내려앉은 칼데라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모양새가 특이하다.
원래 이 마을엔 장씨와 정씨, 구씨, 백씨 등 4개 성씨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아주 신씨가 터를 잡으면서 차츰 4개 성씨는 이 마을에서 떠나기 시작했고 450년 전쯤 영천 이씨가 들어오면서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것.
그때 입향조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이후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면서 양반촌으로 이름을 알린다. 2대째인 이민성(李民宬)은 참의를 지냈는데 중국에서 ‘동방의 이태백’이라 불릴 정도로 시(詩)로 유명했다. 7대손인 이희발(李羲發)은 지금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형조판서를 지냈고 이태직(李泰稙)은 경술국치 때 애국지사로 건국 공훈을 세웠다.
“산운이 영남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4대에 걸쳐 6명이 대과(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죠. 당시 학연과 지연이 없던 상태에서 잇따라 과거시험에 붙다 보니 세간의 주목을 단번에 받게 됐죠.”
이곳 주민들은 벼와 보리, 콩농사 등을 주로 해왔으나 요즘은 사과나 자두, 복숭아 등 과수 쪽으로 많이 재배하고 있다. 이 마을은 생태공원이 생기고 유교마을로 지정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현대화되고 있다. 한없이 조용하던 마을이 찾아오는 이들로 북적인다. 그렇다 보니 이병옥씨는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고 한다. “노후한 한옥들이 고쳐지고 전체적으로 마을이 발전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별로 나쁘지 않죠. 하지만 가끔 관광객들이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몰래 쳐다보거나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등 당황할 때도 있어요.”
마을 앞쪽 한옥마을엔 영천 이씨의 맥이 담긴 전통가옥들이 복원돼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정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와 제375호로 각각 지정된 운곡당과 점우당(漸于堂) 등 옛 전통가옥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40여 채의 가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산운1리 이병건(53) 이장은 “전통마을 지정 전엔 한옥들을 헐거나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며 “이젠 관리도 수월하고 마을이 깨끗해져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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