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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엘리사벳(9.23)
성인명 엘리사벳 (Elizabeth)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신약인물, 부인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이자벨, 이자벨라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성 즈카르야(Zacharias)의 아내이자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한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성녀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Aaron)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 즈카르야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났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 즈카르야에게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러 파견된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 천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Maria)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다. 그때 성녀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성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68-79)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루카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찬가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매일 시간 전례(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 아침기도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저녁기도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그리고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5일 목록에서 사제요 예언자이며 성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성 즈카르야와 가장 거룩한 선구자의 어머니인 성녀 엘리사벳에 대해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로 축일을 옮겨 주님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의 부모, 성 즈카르야와 성녀 엘리사벳을 기념한다고 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성녀 엘리사벳은 친척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이며 주님의 어머니를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으로 환영했고, 예언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제 성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의 탄생을 맞아 구원자 하느님을 찬미하며,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다가오실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했다고 기록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이들 부부의 축일을 9월 5일 또는 6월 24일에 기념하고 있다.♣
즈카르야(9.23)
성인명 즈카르야 (Zechariah)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약인물, 예언자, 사제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성 자카리아스(Zacharias, 또는 즈카르야, 자카리아)의 아내이자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한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성녀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Aaron)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 즈카르야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났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 즈카르야에게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러 파견된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 천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Maria)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다. 그때 성녀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성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68-79)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루카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찬가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매일 시간 전례(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 아침기도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저녁기도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그리고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5일 목록에서 사제요 예언자이며 성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성 즈카르야와 가장 거룩한 선구자의 어머니인 성녀 엘리사벳에 대해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3일로 축일을 옮겨 주님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의 부모, 성 즈카르야와 성녀 엘리사벳을 기념한다고 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성녀 엘리사벳은 친척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이며 주님의 어머니를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으로 환영했고, 예언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제 성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의 탄생을 맞아 구원자 하느님을 찬미하며,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다가오실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했다고 기록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이들 부부의 축일을 9월 5일 또는 6월 24일에 기념하고 있다.♣
비오(오상의)(9.23)
성인명 비오(오상의) (Pius)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오상의 성 피우스(또는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 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 했다. 10살 때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 종신 서원을 하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간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고,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 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다시금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했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기꺼이 순명하였다.
격리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 집전과 기도로 시간 대부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이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했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해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적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 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선종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 5월 29일)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뜻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신자들의 영적 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일치하도록 보살핀 그의 성덕을 칭송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