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광장 옆 산책로, 전봉준(全琫準) 장군 동상.
전봉준 장군 동상 옆면에서 뒷면으로 이어진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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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선생추념기(全琫準先生追念記)
백성(百姓)은 하늘이라 예부터 천명(天命)의 조짐이 민의(民意)에 비치었으므로 성군(聖君)은
창생(蒼生)의 소망(所望)을 헤아려 치국(治國)의 도(道)를 삼아온 것이다.
저 조선말엽(朝鮮末葉)에 왜적(倭賊)이 참람(僭濫)히 사직(社稷)을 넘보고 탐학(貪虐)한 간신
(奸臣)들은 성총(聖聰)을 가린 채 가렴주구(苛斂誅求)만을 일삼으니 종사(宗社)는 뿌리째
뽑히고 생민(生民)은 도탄(塗炭)에 해매였다. 이 때에 하늘이 낸 구국치민(救國治民)의 지도자
(指導者)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 선생(先生) 이었다.
선생의 초명(初名)은 영준(泳準) 호(號)는 해몽(海夢) 본관(本貫)은 천안(天安) 창혁(彰赫)의
아들로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장안리(長安里)에서 훈장(訓長)을 하던 향반(鄕班)이었는데 평소(平素)에 치세(治世)에 뜻이 있었던바 포악무도(暴惡無道)한 고부군수(高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을 징치(懲治)하고자 정익서(鄭益瑞) 김도삼(金道三) 등 일천여명(一千餘名)
으로 관아(官衙)를 공격(攻擊)하니 이것이 1894년 정월 십일의 갑오혁명(甲午革命) 이었다.
그 뒤 백산호남창의소(白山湖南倡義所)에서 손화중(孫華中) 김개남(金開男) 김덕명(金德明)
등과 일만 여명(一萬 餘名)으로 남도(南道)를 휩쓸고 전주(全州)에 입성(入城) 성상(聖上)의
윤유(允兪)로 반봉건(半封建) 민주혁명(民主革命)을 성취(成就)한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지니 집강소(執綱所)을 전도(全道)에 두고 민주서정(民主庶政)을 펴갈 무렵 왜적
(倭賊)이 국권(國權)을 천자(擅恣 멋대로)하여 위망(危亡)이 경각(頃刻)에 이르므로 분연
(奮然)히 이십일만여 명(二十一萬餘 名)의 호남(湖南) 호서(湖西) 구국창의군(救國倡義軍)을
이끌고 축멸왜귀(逐滅倭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성전(聖戰)에서 역투(力鬪)하였으나 왜군
(倭軍)의 정예병(精銳兵)에 밀려 충청(忠淸) 전라(全羅)의 산야(山野)를 피로 물들이고 이듬해
삼월(三月) 형장(刑場)의 이슬이 되니 향년(享年) 사십 삼세(四十三歲) 이었다.
선생은 갔으나 그의 거룩한 위국단침(爲國丹忱)은 겨레의 핏속에 영원(永遠)히 살아 나라를
구하는 길을 일깨워 줄 것이다.
한국청년회의소(韓國靑年會議所) 제삼십차(第三十次) 전국회원대회(全國會員大會)를 기념
(記念)하여 회원(會員)들의 정성(精誠)을 모아 동상(銅像)을 세워 도민(道民)에게 드린다.
서기 1981년 10월 3일
야린(野麟) 배 형 식(裵亨植) 제작(製作)
청원(靑原) 이 상 비(李相斐) 찬(撰)
소남(素南) 이 규 진(李圭鎭) 서(書)
전주청년회의소(全州靑年會議所)·풍강청년회의소(豊岡靑年會議所) 건립(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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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1855(철종 6)∼1895(고종 32)]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實證)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覺醒)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進展)에 원동력이 되었다.
덕진공원은 1978년 4월, 4만5천 평의 규모로 조성된 도시공원이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전주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팔달로(八達路) 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곳 덕진 연못의 역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는데 전주 땅의 완산부
(完山府)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은 것으로, 전주가 삼면(三面)이 둘러싸인
분지이나 북쪽만 열려 있어 땅의 기운이 낮아 제방(堤防)으로 이를 막아 지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만들었다.
전주 동쪽의 건지산(乾止山)과 서쪽의 가련산(可連山)사이가 허(虛)하여 이를 잇는 곳에다
풍수지리를 따라 덕진제(德津堤)라는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원은 둑이 있다 보니 고려시대당시 만들어진 자연호수로 전체 공원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연못의 형태는 연못 중앙에 위치한 현수교(懸垂橋)를 중심으로 보트장과 연꽃으로
동서를 가르고 있으며 연못의 주위에는 수양버들과 벚꽃나무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덕진 연못의 풍광(風光) 중에서 압권(壓卷)은 무엇보다도 연꽃이라 할 수 있다.
전주에서는 예로부터 ‘부성삼화(府城三花)’하는 말이 전해 온다.
말 그대로 예전에 전주가 전주부성(全州府城)이었던 시절에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하였던
세 곳을 말하는데 동고산(東古山=僧岩山)의 진달래, 다가산(多佳山)의 입하화(立夏花=여름의
시작 무렵 피는 이팝나무)와 함께 덕진 연못의 연화(蓮花)를 말한다.
덕진공원의 연꽃은 매년 7~8월경 절정을 이루는데 연화정(蓮花亭)과 현수교가 어우러져 전주
팔경(八景)의 하나인 ‘덕진채련(德津採蓮)’이라고 하여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 냈다.
‘덕진채련(德津採蓮)’은 완산(完山) 팔경의 하나로서, “풍월정(風月亭)에 앉아 저녁노을과
달빛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면(湖面)의 피리 소리 실은 어화(漁火)에 젖은 채 맞은 편
승금정을 내려다보는 덕진 연못의 풍경”을 말한다.
덕진공원에 가면 호수와 푸른 잎사귀들과 크고 작은 연꽃들을 머금고 있는 바람을 만날 수
있다. 어느 계절에 찾아도 운치 있는 곳이지만 봄부터 여름까지 유독 빼어난 경치를 자랑
한다.
어둠이 내린 덕진공원은 더욱 낭만적으로 변신한다. 분수(噴水) 퍼포먼스와 영상에 음악이
더해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음악분수쇼’가 열린다. 음악이 흐르면 오색조명을 받은
분수가 꽃처럼 피어나는 분수쇼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사랑 고백이나 생일 축하 등을
할 수 있는 ‘이벤트데이’행사도 진행한다.
예전부터 전주사람들은 단오(端午)때가 되면 이곳에 모여들어 창포물에다 머리감기,
그네뛰기 등 단오풍습을 즐기었는데 지금도 덕진공원에서는 연인(戀人), 가족을 비롯한
시민들이 함께 만나 평안과 건강, 나아가 이번 해에도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다양한 민속
행사 단오축제마당이 펼쳐진다. 매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약 50만 명 이상에 이를 정도로
이곳은 한옥마을과 더불어 전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