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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는 일상으로 보냄 받은 선교사라는 주제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주님께 보냄 받았던 사람 바울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찬양의 예물을 주님께 올려드렸습니다. 다들 정성스럽게 찬양을 준비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감동이었습니다. 그런 감동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한 주 동안 우리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월요일 아침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성도님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는데 왜 누구누구는 이번 주에 교회에 오지 않았을까 혹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왜 누구누구는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을까 혹시 가정에 삶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하다가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 또 만나야 될 사람들 신방 그리고 설교 계획을 살펴보았습니다. 2주 안에 해야 할 설교가 14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읽어야 할 책들과 또 준비해야 할 자료들을 생각해 보니까 만약 미리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참 어렵게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부담감, 염려로 가득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만 잃을까 다른 분들도 이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져야 할 일들이 있고 돌봐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준비해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부담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은혜로 충전해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일상의 문제들을 마주하며 염려로 채워지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서 살고 싶은데 왜 이게 이렇게 어렵습니까?
하나님께 보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 역시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보내심에 순종해서 이방 땅으로 가 복음을 전했지만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서신에서 밝힌 것처럼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서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방금 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시기와 선동으로 인해 그 도시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이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180km 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이었습니다. 아마 걸어서 갔다면 일주일은 좋기 걸렸을 거리입니다. 이고니온은 오늘날 튀르키예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인 코니아입니다. 2011년에 우리 교회에서 성지 순례를 하며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도시 주변에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도 계속 밀밭이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을 주로 하던 고대 사회의 이 이곤이호는 부유할 수밖에 없는 도시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곳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세일즈프트루크의 수도였습니다.
일주일을 걸어 이 낯선 도시에 도착한 두 사도는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 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조금 전에 유대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또 회당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의 큰 무리가 복음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 사람 중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절을 보면요.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계속 복음을 전하자 5절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도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도시로 피했다. 그렇게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듭니다.
왜 바울의 선교 사역은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복음의 열매 뒤에는 늘 핍박과 박해가 따라오는 것일까요?
누가는 왜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전도 열매, 고난 피신 이런 패턴으로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 전도는 뚜렷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현실에서 만난 것은 눈앞에 악한 사람들입니다. 박해하는 권세자들, 통치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의 확장을 막으려는 어둠의 권세, 악한 영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이 둘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하다.
여러분 가족끼리 맞서는 게 정상적입니까?
여기에는 영적 충돌이 있다는 거예요. 복음 때문에 영적 충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오늘 4절을 보면 이고니온 사람들 역시 이 복음 때문에 충돌이 되어서 둘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왜 복음 때문에 충돌합니까?
복음 전도는 단순하게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으면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영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영적 주인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영적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왜 어떤 사람은 끝까지 복음을 거부합니까?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하신 사람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알뱅은 이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합니다.
예정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예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에 예정론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정론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거부해도 결국 구원받게 되고, 버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정됐는데 그 예정에 따라서 결론이 날 텐데 사람이 복음 전한 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그런 결론으로 결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이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겠다 하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영생을 주겠다 하고 결정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이때 그 믿음마저도 선물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공로가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흔들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패되거나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예정론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왜 영적 어려움이 생기는 겁니까?
왜 그런 어려움이 반복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탄 공격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라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에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반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일상에서 영적 싸움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옵니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혹독한 박해나 돌팔매질과 같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이익을 당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가 있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은 아마 우리 일상에서 아주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다 보면 지쳐요.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피하고 싶습니다. 타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영적 싸움은 타협하는 순간 그 영혼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에 대해서 피할 문제가 아니라 의연히 서 있어야 될 문제라는 것을 거기에 있어야 될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반복되는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반복되는 박해와 위협 앞에서 어떻게 대응했다고 합니까?
3절 첫 부분입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하였다. 나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선동하고 위협하는데 즉시 피하지 않고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고니온의 성도들 때문입니다. 이고니온의 성도들은 복음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들입니다. 이 초신자들을 두고 자기들만 피해버리면 그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며 말씀으로 양육하고 영적 무장을 하도록 도왔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반복되는 영적 싸움, 그리고 그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낙심된다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버리거나 도망쳐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을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절 뒷부분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놀라운 그들의 손으로 표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정하여 주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자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두 사도를 통해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짜 진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에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씹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 사역을 회고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일 뿐, 결정적으로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요나는 불순종하고 성의 없는 일꾼이었습니다. 당시 니느웨 성은 3일 길을 걸어야 다 돌아볼 수 있는 큰 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니느웨 성 겨우 하루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것도 니 노예가 망한다. 앞뒤 맥락 없는 그 내용만 전했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요나는 정말로 성의 없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가 외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왕위로부터 제일 작은 자까지 심지어 가축들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전무후무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성의 없는 그 요나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아닙니다. 니느웨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 역사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처럼 신실하게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일어나지만, 때론 요나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억지로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일상의 어려움, 그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그 자리를 지키면 우리가 그 자리에 있으면 우리의 부족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나는 약해도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가정, 어떤 분은 교회, 어떤 분은 직장, 어떤 분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게 하십니다. 그 일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겁니다. 그러나 일은 달라도 하나님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일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 그 자리 그 자리,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4장 5절과 6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고니온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떠난 후 이고니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후 이고니온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외의 기록들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난 속에서 그 자리를 지키며 복음을 전했을 때 이 이고니온는 훗날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고니온에서 숱한 믿음의 거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저스틴과 함께 순교했던 히에라스 감독, 그리고 초대 교회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여제자 테클라가 바로 이 이고니온 출신이었습니다. 이 테클라라는 분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이분은 세상이 보장하는 그런 안락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집안끼리 약속한 귀족 남자와의 약혼도 파혼해버리고 복음 전도자로 살아갑니다. 부모님들이 볼 때는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가족들이 이 딸을 화형에 처하려고 했습니다.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불이 타오르는 그 순간 기적적으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래도 안 되자 나중에는 맹수의 밥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거기서도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은 좀 과장되거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소아시아에 많이 퍼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소아시아에 전해져 오는 이유는 그녀가 소아시아에 끼쳤던 복음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그래서 사탄이 흔들고 있는 거야. 그래서 어려움이 있는 거야.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더 잘 감당해야 해.
이 자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그 자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바울이 그 자리를 지켰을 때 바울의 이 믿음의 바통은 테클라를 통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 싶지만 어려움은 계속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 싸움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통해서도 이런 하나님의 믿음의 경주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난 이후 또다시 새로운 복음의 경주자들이 나타나서 우리의 바통을 이어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과 테클라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실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 예배를 드린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할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도 항상 감사의 이유를 찾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는데 어떻게 감사할까요?
오늘 성경은 반복되는 고난 속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역사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자리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자기 역사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 일상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경주를 감당합시다. 보냄 받은 사람의 얼굴은 안 믿는 자들에게 전도지입니다. 항상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살면 바울을 복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도 복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