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8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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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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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YGcUf1s0ok (김진호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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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그릇된 길로 나아갈때 교회가 침묵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의 뒤를 잇는 대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살아생전 엘리야가 보여준 놀라운 예언의 능력과 통찰력,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와 타락, 우상숭배 앞에서 보인 단호한 태도 앞에 백성들은 큰 갈채를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시자 세상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환생했다고 믿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당대 백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는데, 비결은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만이 전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을 가감없이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릇된 길로 접어든 왕실과 고관대작들 앞에 목숨이 두려워 다들 찍소리 못하던 순간에도 엘리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악행을 지적했고 고발했습니다.
엘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봉착해있던 순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듯 합니다. 우상숭배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합 임금과 혼인한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제벨이 들여온 바알 신 숭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왕국의 존립까지 위협받고 있었습다.
마치 타오르는 한줄기 횃불같았던 엘리야 예언자는 유일하신 하느님을 배반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바알신에 푹빠져있던 왕과 왕비 지도층 인사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이란 유일하고 든든한 '빽'을 등에 업고 마치 활화산처럼 활활 뜨겁게 타오르던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멋져보입니다.
어쩔수 없는 한계와 나약함과으로 인해 쉼없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예언자의 몫을 살아내야하는 사목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세상과 교회는 늘 함께 가야 맞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한채 사목자들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오늘 엘리야 예언자는 온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릇된 길로 향해 갈때, 죽음과 공멸로 나아갈때 교회는 침묵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엘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입이요 오른팔로서 거룩한 분노를 분출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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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P-xJiKTp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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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
오늘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니까, 그냥 이 기도만 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알래스칸 맬러뮤트 샐리는 8살입니다. 샐리에게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두 보호자를 물어 손에 상당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샐리 견생 한 번도 털을 깎거나 목욕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또 밥을 먹을 때 먹여주려면 손을 물려고 하고 그렇다고 주인이 사라지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퇴근할 때까지 한 입도 먹지 않습니다.
남자 주인은 이 아이가 자신들보다 서열이 높은 줄 알기에 더 높은 서열의 셰퍼드를 데려와서 서열을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샐리는 이 밖에도 주위 경계가 너무 심하여 음식을 배달시키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하울링을 2~3시간씩 합니다. 새벽에도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형욱 조련사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더니 조심스럽게 샐리는 착한 개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인이 못됐다는 뜻이 됩니다. 주인은 개에게 너무 잘해주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관점에서 잘해줍니다. 자기 손으로 음식을 주려 하고 자기가 빗질을 하며 자기가 목욕시켜주려 합니다.
강 훈련사는 개의 입장이 되어 개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청합니다. 샐리는 4개월 정도 키워주던 주인이 키우는 것을 포기해서 입양한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부모에게 버려진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부모가 목욕과 빗질을 시켜줄 때 살짝 물렸습니다. 알래스칸 맬러뮤트는 물이 묻으면 바로 얼어버리는 추운 곳에 적응되어 있기에 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때 남자 주인은 신문지를 말아 버릇을 고치겠다며 개의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트라우마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빗도 몽둥이로 인식하고 으르렁댔던 것입니다.
샐리를 데려왔을 때 이미 지금의 샐리 나이만큼 먹은 맬러뮤트가 한 마리 더 있었습니다. 둘리였습니다. 둘리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키웠기에 매우 얌전한 개였습니다. 먹이를 줘도 주인 손을 다치지 않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둘리가 먼저 무지개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샐리는 또 친구를 잃었습니다. 주인들은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까지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또 버려지는 게 두려워 계속 하울링을 했던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저녁만이라도 샐리를 거실로 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방침에 잘 따릅니다. 샐리는 거실로 들어와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샐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멋진 집도 아니고 주인과 함께 주인의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자기를 새끼로 여겨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샐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샐리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감을 맛보려 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해주려 해도 상대는 그것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 주는 것에 상대가 만족하기만을 바랍니다. 이러한 강요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샐리가 밥을 먹으면 그냥 주위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내가 음식을 주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을 때까지 개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샐리도 해주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희생, 봉사, 선행 등을 주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실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원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7-9)
‘어미 판다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숲속에 판다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판다는 눈만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산골에 눈이 일주일, 열흘 내리면 판다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무 위에만 있었습니다. 나무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곰을 숲속의 다른 동물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비가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판다는 왜 그렇게 미련해? 왜 밥도 먹지 않고 나무 위에만 있어?” 토끼가 말했습니다. “너는 기껏해야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할 뿐이야. 판다의 마음을 모르면서 판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
토끼가 나비에게 들려준 판다의 이야기는 참 슬펐습니다. 판다가 살던 동굴에는 예쁜 새끼 판다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때문에 사냥꾼들로부터 새끼 판다들이 위험할까 봐 동굴에서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판다들이 며칠째 굶고 있자 어쩔 수 없이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가 급히 동굴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반겨줄 아기 판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어미 판다의 발자국을 거꾸로 따라온 사냥꾼들이 아기 판다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어미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미 아기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나무 위에서 견디고 있었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어미 판다에게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동물은 토끼밖에 없습니다. 토끼는 어미 판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내어놓았습니다. 내 마음을 줄 수 있을 때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들이 주인이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할까요? 어쩌면 허락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주인이 원하는 일입니다. 개들은 그냥 주인이 밥만 주고 옆에 있어 주기만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아버지의 날, 새아빠에게 입양신청서를 내민 9살 의붓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일라의 친아버지는 그녀가 갓난아기 때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날, 그런 마일라에게 든든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해준 웨인에게 마일라의 편지는 이렇습니다.
“아빠가 언제 제 삶에 찾아오셨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전 그저 갓난아기였거든요. 하지만 아빠와 자란 건 기억해요. 늘 보호받고, 안전하게 느끼며 저를 보살펴 주셨죠. 제 친아빠는 그래 주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신께서 아빠를 보내주셨기 때문이에요.
어려움을 겪을 때도 우리 가족과 함께해 주셨고 항상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보호가 필요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경우에도 항상 저와 함께해 주셨죠. 아빠는 항상 본인보다 저와 엄마를 우선시했어요.
아버지의 날은 제게도 매우 특별한 날이에요. 왜냐하면,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아빠에게도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공식적으로 해요. 아빠는 아빠가 될 자격이 있어요. 아빠, 절 입양해 주시겠어요?”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이 말을 깊이 새깁시다.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청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타인이 원하는 것에 관심 두기 전까지는. 마음을 얻는 법은 마음을 주는 것뿐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쳐 주님의 마음을 알아 들일 수 있다면, 주님께서도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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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주님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그 뜻을 모르는 어린이의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리스도께 충실하며 헌신하는 자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다음 세 가지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나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찾고 그다음에 내 원의를 찾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할 때 내가 바라는 것에다 하느님의 뜻을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 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으로 둘째 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요구와 필요에 관한 것에 놀라운 통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여기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요소와 세 가지 시간적인 구분을 말해 주고 있다. 우선,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 현재에 필요한 것으로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을 모두 의미한다. 성체+빵. 그리고 죄의 용서를 구한다. 이것은 나의 과거 생활을 하느님께 고백하여 죄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혹이 올 때 도움을 구한다.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나의 미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보여드리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전 생활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며, 동시에 삼위이신 하느님을 우리의 생활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간구할 때 바로 그것은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성부께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죄의 용서를 청할 때 우리의 구세주이며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미래에 당할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시기를 청할 때, 바로 위로자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께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기도의 후반부는 현재, 과거, 미래를 포함한 나의 전 생애를 하느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이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잘 묵상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고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기도 중의 기도이며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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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해서 ‘내가’ 바치는 기도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아프고, 슬프고, 힘들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의 사정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고 슬프고 힘들어도, 남의 아픔과 슬픔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더라도, 동시에 남을 위해서도, 즉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내가’ 바치는 기도라는 말은, 기도를 남에게 떠넘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내가’ 능동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나 자신’의 일입니다.
1)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그 믿음 없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냥 떼쓰는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도 믿게 되고, 그러면 ‘결과’를 모두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웃 사랑 실천으로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원래 믿음이란,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3)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말로만 바쳐도 되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온 삶’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말만 해서 될 일들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행동 지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란, 주님에게 일을 시키는 ‘지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주님에게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라고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표현으로는 겸손하게 청하는 기도라고 해도, 그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옳지 않은 기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 부탁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신앙인입니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도 협력자로서 함께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복음화’ 활동입니다. (사실상 선교활동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하루라도 더 빨리 오기를 희망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모두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나라가 올 텐데, 그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있을 수 있을까?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될까? (구경꾼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구원은 이곳에서(땅에서) 시작되어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배고픔’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믿고, 이웃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될 뿐입니다. 12절과 14절-15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만, 아버지의 용서를 받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잘 ‘받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겠다는 다짐이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악에 맞서서 싸우겠다는 다짐입니다. 기도는 ‘말’로만 바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청하기만 하고(말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가’ 나의 온 삶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신앙생활의 방향을 정해 주는 ‘삶의 등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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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번 동북부 78차 ME주말에는 여러 지역에서 부부들이 참석했습니다. 뉴욕과 뉴저지에서 오시는 분들은 2시간 거리면 올 수 있었습니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시는 분들은 6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서울에서 하는 교육에 멀리 진도나 부산에서 오는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6시간 넘게 돌아가야 하는 부부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함께 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행복한 것 같았지만 사실 문제는 수면 아래에 있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심한 것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내의 권유에 마지못해 참석한 남편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사랑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심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툼은 부부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 지향을 받게 됩니다. 미사 지향은 크게 2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연미사 지향이 있습니다. 연미사 지향에는 기일을 기억하는 것이 있고, 불쌍한 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고, 연옥 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면서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분들을 위한 생미사 지향이 있습니다. 생미사 지향에는 감사미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청원미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한국 순례단은 공동체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서 미사 지향을 봉헌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 순례단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한국 순례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순례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매일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부,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건강, 승진, 합격을 청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참새는 둥지 하나를 마련하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다람쥐도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낌없이 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합니다. 유혹은 욕망과 욕심이라는 기름을 좋아합니다. 욕망과 욕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유혹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유혹의 불을 꺼트리는 강력한 소화전입니다. 겸손은 유혹이 가장 두려워하는 보호막입니다. 악에서 구하시기를 청합니다. 악이란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란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하느님의 그늘에 머무는 사람은 악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요즘 내가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면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자주 읽는 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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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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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주님의 기도>
이 기도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기도 중에 간구하는 내용 순서를 보면 :
1)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2) 다음 세 가지는 우리의 필요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상의 위치에 놓은 다음에 자신의 필요와 소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생활 속에서 나보다 먼저 하느님의 원의를 찾고 그다음에 자신의 소원을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내가 바라는 것에다 하느님의 뜻을 끌어들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먼저 하느님의 원의가 내 원의보다 우선적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 둘째 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요구와 필요에 관한 부분에서 보면 놀라운 통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와 세 가지 시간적인 구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을 구함 : 이것은 나의 현재 생활을 하느님께 청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2) 죄의 용서를 구함 : 이것은 나의 과거 생활을 하느님께 고백하여 죄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3) 유혹이 올 때에 도움을 구함 : 자연스럽게 살아가기에 방해가 되는 나의 미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상의 짤막한 기도 속에서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보여드리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전 생활을 하느님 앞에 놓는 것이며, 동시에 삼위이신 하느님 전체를 우리 생활 안에 받아들이려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육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간구할 때, 바로 그것은 창조자이시고 생명의 유지자이시며, 아버지되시는 성부께로 우리의 생각을 갖게하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죄의 용서를 간구할 때, 우리 구세주이시요, 구원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하는 것이며, 셋째로, 우리가 미래에 당할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실 것을 기도할 때 바로 위로자이시며, 강하게 하시는 이요, 보호자이신 성령께 우리의 생각을 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주님의 기도 속에서 또 그 후반 부분은 현재, 과거, 미래를 포함한 나의 온 생애를 성 삼위이신 하느님 앞에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전 존재를 나의 생활 모든 영역 안에 받아들이는 것임을 명심하여 정성껏 기도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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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갑조 요한 신부님]
기도할 때의 준비 자세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것의 가장 근원적인 자세는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한자를 제 나름대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용(容)은 얼굴이라는 뜻이고 서(恕)는 용서하다’는 뜻과 또 ‘어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과 어진 마음에 남의 허물을 갖지 않고 놓아 흘려보냄으로써 ‘어짊이 있다.’라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얼굴은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외적 표지인데, 이 마음자리가 소란함에서 고요함으로 옮겨져 무애, 즉 애착이 없으니, 자연히 말하는데 어짊이 있고 보는데 분별하고 따지려는 번잡함이 없는 청정함이 있으니, 말하는 것보다 들음이 먼저일 것이고, 자기 생각을 좇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알고 계신다.’(마태 6,8)는 그 먼저의 주인의 의도로 살고자 함이 기도의 준비라 하겠습니다.
하여 남의 허물이라는 의식이 오히려 자신의 상(想)에 허물 됨을 알고 그 욕됨을 걷어치워 맑음에 있으니, 그 맑은 가난함의 상태에 생각하기도 전에 알고 계시는 분의 의도가 물들여지고 새겨지며 하늘에서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마태 6,10)
그리하여 이러한 영혼의 기도는 바로 하느님의 의도가 잘못인 허물에서 바름의 잘됨으로 그 성질이 변화됨이 바로 하늘에서 용서하고자 함(마태 6,14)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허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사람을 당신 나라에 참여시켜 사랑을 나누게 하시려고 사람들의 마음자리에 당신의 참됨이 깃들게 하고 당신의 얼굴을 갖게 하려고 허물을 흘려보내는 뜻으로 용서의 방식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은 죄로 더럽혀진 것을 씻으시는 십자가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마태 6,9-10)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남의 잘못이 내 마음자리에 여지를 두게 된다면 남아 있는 부분이 나에게는 상처가 되어 허물을 짓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허물이 불편함을 주어서 나름대로 대처방식으로 미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먼저 의도하는 분별심이 ‘일용할’(마태 6,11)이라는 하루만, 순간만, 찰나에 사는 깨어있음의 청정함을 무디게 하고 제 나름의 방식을 갖게 되는, 즉 소유욕을 갖게 되어 어린이와 같은 내어 맡김의 단순성을 잃게 만듭니다.
이 상실함의 허물 자리가 바로 유혹(마태6,13)을 받게 되는 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이 바로 타인이라는 구별지음이 생겨 용서를 하고 싶지 않은 떠벌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떠벌림이 바로 말 많고 생각 많은, 추리가 많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너와 나를 헤아리는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자리에 있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려는 그 눈물겨운 노력은 바로 청하기도 전에 나의 잘못을, 죄과를 말 없음의 방식으로 알고 계시고 들어주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가는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점차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감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닦아가는 행함이요, 요청입니다. 이것이 ‘오게 하시며,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6,10) 하는 청원의 기도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는 방금 말씀드린 이러한 예수님의 청원의 기도를 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기도가 참으로 용서를 입은 자비의 기도이며 허물을 씻음 받은 치유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누구를 닮는가? (마태 6,8), 누구를 닮고 싶은가? 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으셨습니다. 허물 많은 나를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을 닮으라고 나의 허물 안에서 내가 청하기도 전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허물이 당신을 닮는데 오히려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쓸모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상 사랑에 의해 이미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의 편안함을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얼굴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자리로 닦읍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비치는 청정함의 거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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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또 신부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티베트 망명정부 요원 중 18년 동안 중국에서 온갖 고문과 살해 위협을 받으며 옥살이하다 나온 이가 있었습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그에게 감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옥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 고문이나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증오심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곳보다 더 무서운 감옥은 미움이라는 감옥입니다. 우리가 미움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우리의 육체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게 되고 우리는 미움의 사슬에 꽁꽁 묶이게 됩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 미움의 감옥에 나오는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신을 가두는 미움의 감옥에서 나오는 유일한 방법을 용서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용서를 베푸는 것은 용서를 받는 것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만큼 용서를 받게 됩니다. 용서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그 용서의 자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수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유대인 군중들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넘겨준 빌라도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예수님을 저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도 예수님을 미움의 사슬로 미움의 감옥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배반하고 상처 준 이들, 그리고 그들의 죄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육체마저도 자유롭게 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미리 조건 없이 용서하심으로써 마음속에 항상 하느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 우리는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에 함께 바치게 됩니다.
“아버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결국, 예수님의 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가르는 미움의 벽을 헐도록 서로 용서를 베풀 것을 다짐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의 미움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자유로운 하느님의 한 자녀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 속엔 이런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베풂이 곧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저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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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기도>
그분과 나
사이에
흩뿌려놓은
수많은 말들
하나 둘
걷어내고
그분 내 품에
늘 계시듯
나 그분 품에
살며시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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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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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9)
<나의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게 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니,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너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의 기도를 온전하게 바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 끝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6,14-15)
그러니 '용서와 화해'는 '하느님의 언어'이며,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내가 너에게 베푸는 특전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행위'이며, '나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신적 행위'입니다.
요즘 독서를 통해 만나는 그리스도교 초기 두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하느님의 말씀도 결국은 서로 용서하고 화홰하라는 말씀, 곧 하느님과 화해하고, 너와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집회 48,14)
엘리사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들과 그의 업적은 무엇이었을까?
'용서와 화해의 기적',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다시 살아난 '회개의 기적'이 아니었을까?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화답송)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온 마음으로 바치는 의인, 너를 용서하는 의인, 그래서 이제 영원히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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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신입사원 면접 때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합격 당락이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더욱더 신중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이 질문에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운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로 뽑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실력보다 운을 믿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 대해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만이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자기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온전하게 잘 살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운이 엄청나게 나쁜 사람이지만,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서 이만큼이라도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만 바라보려 합니다. 회사로서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불행의 이유만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세상에 혼자만 남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할 때 당시의 사람들은 빈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뜻 없는 말을 계속 되뇌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기도를 길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와 많은 말을 하는 기도 등은 다른 민족 사람들이 하는 기도이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쳐야 하는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해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면서,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닌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내길 기도하면서, 그 영광 안에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만 희망을 두고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커다란 행운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모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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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
어제 착한 자매로부터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비행’이란 경기에이블아트센터에서 제작한, 장애인 작품인 ‘등대가 있는 해안가 마을’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만드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작품이라 집무실 책상위에 놓았고 자매에게 감사인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음악 없어도 그림 자체로 밝고 따뜻해 위로와 평화를 주네요. 참 좋은 선물 감사합니다.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집무실에도 참 잘 어울립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힘입어 다시 새롭게, 희망차게 시작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수도생활에서 기도를 빼면 남는 것은 아무도 것도 없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나는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그러니 삶은 기도입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답도 기도뿐입니다.
기도도 공부해야, 배워야 합니다. 사랑과 똑같습니다. 사랑에는 평생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평생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요즘 내린 단비로 죽어가던 수도원 정원의 잔디가 푸릇푸릇 살아나고 있습니다. 바로 영혼에 단비와 같은 생명의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영혼이 삽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소통의 대화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공기를 숨쉬듯 하느님을 숨쉬며 사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는 함께 갑니다.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사람, 바로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도저히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은 기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자들을 봐도 연노해갈수록 기도도 간절해집니다. 치매 예방에도 기도가 제일입니다. 사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얼굴은 참 정직합니다. 인위적인 성형 수술보다는 항구한 기도와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 수술이 자연스럽고 본연의 참 얼굴이 되게 합니다. 한결같은 기도의 삶에서 인품의 향기와 더불어 매력을 발산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에 드려다 보는 얼굴입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고유의 얼굴입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 꽃과 같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드려다 보듯 하느님 거울에 내 영혼의 얼굴을 드려다 보는 시간이 기도시간이요, 이런 기도와 더불어 정화되고 성화되어 점차 주님을 닮아가면서 본래의 참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1.기도하라.
2.공부하라.
3.일하라.
4.운동하라.
기도중의 기도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배웠듯이 오늘 제1독서의 엘리사도 엘리야 예언자 스승에게 보고 배웠을 기도입니다. 다음 열정적인 고백이 얼마나 엘리야가 주님과 일치된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으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 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 엘리야 스승을 그대로 보고 배운 엘리사였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얼마나 엘리야를 잘 보고 배웠을 기도의 사람 엘리사인지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능력만이 참으로 우리를 천하무적天下無敵의 겸손한 사람, 참사람으로 만듭니다. 추측컨대 우리 예수님도 시공을 초월하여 엘리야를 롤모델로 삼아 기도 공부에 참으로 항구했을 것입니다.오늘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 앞서 기본적 전제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할 때 기도든 말이든 글이든 짧고 순수합니다. 군더더기 말은 저절로 생략됩니다. 때로는 침묵도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쉽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주님의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노하우와 같은 기도의 진수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요약된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참 단순하고 진실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평생 삶이 잘 드러납니다. 이런 주님의 기도가 바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본질적 깊이의 단순하고 절실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1.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2.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3.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모두의 중심이신 초월자 아버지를 모신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가 됩니다. 인류가 한 아버지를 모신 인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세가지 청원이요, 우리 역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세가지 청원과 더불어 온갖 협조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과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게 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에 이어 하루하루 날마다 분투奮鬪의 노력努力이 필수입니다. 이어 우리 일상에서 네가지 기본적 청원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1.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였듯이, 2.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3.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4.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바로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오늘’에 바치는 기도요 오늘 필요한 일용할 양식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주십사 청하는 기도로 우리의 최선을 다한 응답도 필수입니다.
용서받기에 앞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하고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의 청과 더불어 내 자신이 유혹이나 악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본연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혼자 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의 자리는 날마다의 공동미사 전례시간입니다.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일용할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평화를 나눔으로 주님 중심의 일치의 한가족 공동체가 이뤄집니다. 주님의 기도의 실현에 함께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참으로 깨어 온힘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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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Az3-gkwB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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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할머니도
어머니도
나 자신도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이다.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성찰하게 된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생활이다.
기도로
힘을 얻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일상으로
내려앉은
기도이다.
하느님께
속하여 있는
우리들 삶이다.
삶을 봉헌하는
것이 참된
기도이다.
기도는
삶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다.
기도의 의미가
곧 삶의 의미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기도의 삶이다.
삶의 길이
되어주는
기도이다.
기도로
새로워지는
우리자신을
만나게 된다.
기도의
힘이다.
새로워지는
공동체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도가 있다.
우리에게는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하루를
열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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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주님의 기도는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깨닫게합니다.
일상의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 삶을
겸손되이 바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이 기도는
삶의 나눔이며
삶의 봉헌이 되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참된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이란
주님의 간절한
기도처럼
기도의 힘이
매순간 필요한
기도의 여정이
우리의 삶입니다.
기도와 은총
용서와 사랑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주님의 기도안에
모두 담겨있는
복음의 참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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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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