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박용철의 문학세계]
박용철 시인의 호는 용아이고 전남 광산 출생으로 광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도일하여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졸업했으며,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지만, 그 당시 간토 ) 대지진으로 부득이 귀국하여 연희전문에서 잠시 수학을 하였으나, 수개월 후에 자퇴를 하고 문학에만 전념을 했다
1930년에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여
주간을 맡았고, 이 잡지 1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
표하면서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와 모더니즘의 경박한 기교에 반발하여, 문학의 순수성 추구를 표방했다.
이후로 그는 시 창작보다는 번역에 주력하면서, 평론가로도 활약을 했으며, 실러의 시<헥토르의 이별>, 하이네의 시 <내 눈물에서는> 등을 [시문학]에 번역하여 실었으며, 해외문학파와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서, <인형의 집><바보>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도 번역한 바가 있다.
그의 평론으로는 임화.김기림과 세칭 기교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올해 시단총평>(1935) <기교주의설의 허망>(1936) 등이 있고, 이 밖에도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1931), 그 외 시론의 근원을 보여주는 <시적 변용으로>(1938) 등의 평문이 있으며, 특히 <시적 변용으로>는 시가 단순한 목적이나 기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온갖 체험들을 시인이 자신의 피 속에 용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 시문학파를 당대의 다른 유파와 구별 짓는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시 창작과정에 대한 매우 정치한 론화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1931) [문학](1934) 등을 계속해서 발간하여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서정시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향파의 비순수성과 형식의 난잡성을 배격하여, 예술의 순수성 옹호를 표방한 그의 서정시운동은 우리나라 신시사에 새로운 국면을 이룩하였다. 또'해외문학파'의 동인으로서 <인형의 집>을 비롯하여, <빈의 비극>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을 번역하여 소개했고,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서
신극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 3월에 [시문학]을 창간하고, 그 이듬해인 1931년 10월 [문예월간]을 창간하였는데, [시문학]은 우리 시를 현대시로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되었고, [문예월간]은
해외문학파의 문학운동의 뒷받침이 되어 서구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 의한 번역 활동을 지원하여,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감각 마비 상태에 빠져있던 당시의 문단 정세에서 문학의 자율성 내지 문학의 자주성과, 그리고 문학 본연의 모습을 재생시키는 데 공헌하였는데, 이는 사재를 털어 각종 문예지를 활발히 발간한 점이나, 그의 문학 활동의 일면들을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이었던 그는, 이 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고, 한국현대시의 심미적 수준을 단번에 한 단계 향상을 시킨 선각자이시자
한국현대시의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기신 분으로서, 특히 교과서에도 실렸던 대표적인 시로
각광을 받고 있는 [떠나가는 배J 와 대표적 시론인 <시적 변용을 위하여>는,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에게 두루 읽히며 널리 사랑을 받고 있음도 물론이다.
한국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그는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 [문예월간] 을 창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 하였으며,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 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간 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시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던 이 무렵의 문단은 프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김영랑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으며, 정렬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세계는 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시를 통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곱게 바치려 한 세상은 티끌 없이 영혼이 맑고 향기로운 시혼의 순정세계였다.
더욱이 1933년 12월에 또 하나의 문예지인 [문학]을 발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하고 비평하였으며, 1936년에는 동인 중심의 문학지인 [청색파]를 계획하여 일부 인쇄에 넘기기도 하였으나, 불행히도 건강의 악화로 중단이 되고 말았다.
그는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여 번역에도 손을 대어 많은 시와 수편의 희곡을 번역하였고, 유고집에 수록된 번역 작품은 괴테와 하이네 등 독일 시인의 시편이 70여편, 영미의 시편이 200여편에 달하였으며, 이 밖에도 <색동저고리>라는 제목으로 외국 동요를 100여 편을 번역할 정도로 번역에 대한 왕성한 의욕까지도 보였다.
시적 변용이나기교주의'에 대한 그의 글을 통해 볼 때, 시를 하나의 사상 선전의 목적이나 도구로 이용하려는 애매한 아류를 통박하였고, 시에 있어서 가능한 한 한자를 배제하고 한글로 감정을 표현하려 하였으며, 릴케와 키에르 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애수, 회의, 상징이 주조를 이루어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
의 비평논강> <조선문학의 과소 평가><시적 변용에 대하여> 등을 발표하여,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와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그는 시의 순수성을 표방하고 이에 입각하여 많은 시와 시조를 썼으나, 순수시 운동의 주창자및 이론가로서만 어느 정도 평가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데다, 그나마 후두결핵으로 젊은나이에 타계한 그의 유해가 송정읍 솔머리 향리에 안장된 사후 1년 뒤에서야, 비로소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그의 시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못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연애 / 박용철
어젯날이 채 가지도 않아
또 새로운 날이 부챗살을 피는 나라 오-로-라
언덕에는 꽃이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한다.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박용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 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렷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너.
약한 정 뿌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머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보리라.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 박용철
나는 이제 가네.
눈물 한줄도 아니흘리고 떠나가려네.
어머니 치마로 눈을 가리지 마서요.
너희들도 다 잘잇거라.
새벽빛이 아즉도 히미해서 얼골들이 눈에 서투르오,
다시한번 눈이라도 익여둡시다.
공연히 수선거리지들 마러요.
남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줄도 모르고.
황토 붉은산아 푸른 잔듸밧아 다 잘잇거라.
잔자갈 시냇물도 잘 노라 지나거라.
―가면 아조가나, 잔사정 작별을 내 이리하게!
봉선화야 너는 거년까지 내손가락에 물드리엿지?
순이야, 금이야, 남이야, 빗나든 철의 동모들아,
이제는 동모라는 말조차 써볼데가 업겟고나,
너희들 따―느린 머리를 어듸좀 만저보자.
붉은단기 울넘으로 번득이는 자랑스러움,
거리낄데 하나업시 굴러가든 너이들 우슴,
이것이 어느새 남의일가치 이약이 될줄이야!
손하나 타지안코 산골에 맑은 힌나리ᄭᅩᆺ송이가치,
매인데 굽힐데 업시 자라나든 큰아기시절을
내 이제 뒤으로 머리돌려 앗가워 할줄이야!
눈물은 내서 무엇하늬,
가고야 마는것을! 가면 아조 가랴만은.
남는 너희나 그대로 잇서지다고, 내다시 볼때까지.
아버지 이길은 무슨길이길래,
눈물에 싸여서라도 가고 보내는 마련이래요?
마른닢은 부는바람에 불려야만 되나요?
손에 달코 눈에 익은 모든것을 버리고
아득한 바다에 몸을 띠워야만 새살림길인가요?
갈피업는 걱정 쓸데없는 앙탈을 이냥삼키고,
나는 떠나가네.
싸늘한 두손으로 얼골을 싸만지며.
고향 / 박용철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아 무얼 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안긴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작품세계)
경향파의 비순수성과 형식의 취약성을 배격하고, 예술의
순수성 옹호를 표방한 그의 서정시 운동은 현대시사에 새 국면을 이룩하였다. 경향파 문학에 대항하여 순수 서정시 운동을 전개. 감상적인 가락에 인생의 회의가 그 내용의 주조를 이룸. 독일 시인 하이네와 릴케 작품의 번역 작업에도 열중. 하우스만의 영향을 받아 주지주의적인 평론을 전개하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소재지 : 광주 광산구 소촌
동 363-1. 이 집은 선생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1
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슬레이트 지붕을 19
95년 원래 초가로 복원하였는데,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은 부억이
며 가운데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5칸이며 사당
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
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딸려 있다.
용아 박용철 시인 생가
[박용철 시비]
광주공원 시민동산에 너비 64Cm 높이 1m 35Cm의
화광석에 <떠나가는 배>의 첫 연이 서희환의 글씨로 음각
되어 있는 용아의 시비는 신시60년 기념사업으로 영랑.
용아 시비 건립위원회에서 1970년 12월 19일에 건립했
다.
<기교주의 논쟁>
박용철은 1930년(27세) <시문학> 창간호에 창간 의의에서부터 순수 문학론의 논리를 조금씩 보여 주다가 1931년(28세) <문예월간> 창간호에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형식을 등한시하는 계급 문학을 비판하고, 자신이 세운 비평의 열두 가지 강령에 따라작품의 효과를 분석한 바 있다.
그런데 1935년(32세), 임화는 김기림을 비롯한 모더니스트들, 그리고 박용철이 속한 시문학파 등을 싸잡아 시대현실을 외면한 채 '말초 신경'의 언어를 제작하여 '시적 언어'에 실패한 무리라고 비난한다. 이에 박용철은 <올해 시단 총평>을 통해 김기림의 시<기상도>와 시론 <오전의 시론>을 분석하면서 김기림의 시 정신 결여와 지성 과잉을 지적하고, 동시에 임화의 편견을 적시하면서 과연 그렇게 말하는 임화는 '시적 언어'에 성공했느냐고 묻는다. 김기림과 임화 모두를 비판한 것이다.
임화는 이듬해인 1936년 <기교파와 조선 시단>을 발표
하여 박용철을 비롯한 순수파를 '기교파'라면서 다시 비난
한다. 그러나 박용철은 <기교주의설의 허망>이란 글을 통
해 '기교'란 시의 창작 기술이며 오랜 시 창작과 성숙 과정
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시적 기
교'는 불가피하다는 시론을 펼친다. 이런 일련의 기교주의
논쟁을 통해 박용철은 비평가로서의 위치를 다지게 된다
<시적 변용에 대하여>
박용철의 시론은 1938년(35세) 발표한 <시적 변용에
대하여>에서 좀 더 체계를 갖춘다.
여기서 그는 '변용'이란 시 정신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이고, 그 변용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기다림'이라는 내적 고통과 갈등을 겪는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이를 온갖
수난 끝에 꽃을 피우는 '나무'에 비유하여 '변용과 기다림'의 시론을 채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박용철은 여전히 추상성과 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과학적ㆍ분석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모더니스트나 프로 문학가들을 설득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비평이라기보다는 감상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 순수시를 개척하고 시문학파를 이끌었던
그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만 35세로 요절해버려 그의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린 반면에, 시문학파의 동인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영랑 김윤식은, 이후로도 "모란이 피기까지" 등의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부터 보다 더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정지용은 6.25한국전쟁 시에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한과 은근으로 대표가 되는 우리 문학의 주정적
문학전통과도 일맥상통함을 발견했던 그는, 외국 시를 번역함에 있어서도 언어적인 선택에 대해 더욱 신중을 기했으며, 더욱이 민족어의 발전에도 뜻을 두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면 한자어를 모두 배제하고 주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그의 번역 시 가운데에서 종결어미들을 모두 우리 어투로 바꿔 번역한 것을 통해서 쉽게 단정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문학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당시 독일 낭만주의는 1920년대 자연주의, 예술지상주의, 상징주의 등의 문학 경향이 혼돈을 이루는 가운데 한국 낭만주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가 문학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초기에 그 기틀이 확립된 셈이며, 특히 독일어를 전공한 그는 '하이네'의 시를 번역하며 집중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낭만주의가 독일 정신의 근본 요소이며 생의 원천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유추해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시를 창작하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시론이나 비평도 많이 썼는데, 특이하게도 동시대의 시인들인 김영랑과 정지용이나 신석정 등의 시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유별시리 김기림의 시에 대해선 혹평을 했으며, 특히 김기림의 <기상도>에 대해선 "시인의 경복할 만한 노력과 계획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정신의 연료가 이 거대한 소재를 화합시키는 고열에 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겨우 접합시키는데 그쳤던 것"으로
혹평을 했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평의 공방은 김기림과 박용철의 맞대결이 아니라 박용철과 김기림, 임화의 3파전이 되었고, 김기림과 박용철 사이에 임화가 끼어들어 박용철과 김기림이 아니라, 박용철 대 임화가 되어 크게 공방을 벌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웠기에,
창작이나 시평뿐만 아니라 문예지의 발간을 위해 본가에서 매달 올라오던 200원 중 30원 정도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문예지(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의 발간에 쏟아 부었다고 할 만큼 열정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문예지의 발행은 창작원고의 부족 등으로 인해 순조롭게 이어지지가 않았으며, 이를테면 <시문학>은 3호로 종간이 되었던 데다, 뒤이어서 창간했던 <문예월간> 은 4호로, 나머지 <문학> 도 3호로 종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1930년대를 전후한 순수시운동의 총체적인 기지였던 <시문학> 을 그핵심으로 하여, 식민지 문학시대를 경유한 전후문학 재출발의 모체를 일군 중추적 인물로서, 그야말로 현대시의 출발점을 알리는 순수 시문학의 기치와 그 기폭소리로 한국 시문학사의 의의와 성과를 요약하게 하는 백미적 존재임을 보여주었으며, 한국근대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시문학> <문예월간><문학> 을 통해서도 문예작품 발표의 산파적 자부심과 역량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량들을 거듭 해외문학 전신( 역할에도 주효시킴으로써, 마침내 순수시의 풍부한 음악적.지시적.회화적 요소에서 보여주었던 일련의 작품 속에 내재된 언어적인 조탁으로 매혹하게 하는 등 유기적인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 생성한
자유시의 그 온화한 체온을 느낄 수가 있는데다, 시인으로 출발해 문학비평과 해외 시∙희곡의 번역과, 그리고 극예술
활동에 이르기까지에 있어서 이론.역사.실천의 3방향에
서 까지도 출중한 역량과 조예를 보여주었다.
아울러 그의 시는 김영랑이나 정지용과 비교해볼 때 비록 시어가 그리 맑다거나 밝지는 않지만, 서정시의 바탕에다 사상성이나 민족의식이 깔려져 있으며, 릴케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회의와 상징과 모색 등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하는 평가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삶조차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지용시집> 과 <영랑시집> 을 호화판 장정의 책으로 제작하여 출판을 하였으며, 이하윤의 번역시집까지도 시문학사편으로 간행을 했으나, 정작 살아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지 않은 매우 겸허한 시인이었던 그는, 매사에 빈틈없는 논리적 사고와 냉철한 이성과 내면의 고독이나 비애를 초월하는 올곧은 정신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