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가족은 아빠의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중국에 가게 됐다.
중국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생겼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분을 중국어로 아주머니라는 뜻의 '아이'라고 불렀다.
나는 아이를 싫어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중국어로 자꾸 말을 걸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계속 권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쿨버스에서 깜빡 잠들어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가게 됐다.
마중 나왔던 아이는 내가 오지 않자 중국어를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사방팔방 나를 찾아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갈수 있었는데, 그때 아이는 나를 챙기지 못한 기사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아낀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아이가 좋아졌다.
나이와 국경을 넘은 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이는 정이 많았다.
그녀는 모든 게 낮선 우리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대했다.
엄마와 아이는 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항상 엄마를 시장에 데려가 함께 장을 봤다.
새해에는 중국의 풍습에 맞춰 밤 12시가 되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우리 가족을 모두 깨운 적도 있다.
이사한 날에는 나쁜 기운을 내쫓고 복을 불러들여야 한다며 빈집에 폭죽을 터트려 줬다.
아이는 귀찮은 내색 없아 동생을 매번 놀이터에 데려가 주고,
우리 남매에게 사랑을 담뿍 나눠 준 참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였다.
아이는 만두를 잘 빚었다.
토요일에는 아이가 싸 준 도시락으로 점심밥을 해결했는데, 단골 메뉴는 만두였다.
옆에서 몇 개 맛본 내가 맛있다고 하면 그다음에는 그릇이 넘칠 만큼 많이 만들어 왔다.
아이가 빚은 부추와 계란이 들어간 만두는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던 아버지도 맛있게 먹었다.
시간이 흘러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자연스럽게 아이와 보내는 시간도 줄었다.
중국어 실력은 조금 나아졌는데, 학교에서 배운 중국어로 말을 걸면 아이는 '아주 총명해'라며 칭찬을 해 줬다.
그 말이 참 좋았다.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에 돌아와 가족이 다같이 전화를 건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이와 헤어진 지 어느덧 17년이 지났다.
내 중국어 실력이 아이와 자연스레 의사소통할 만큼 늘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
또 인자하게 웃으며 아주 총명하다고 말해 줄 것 같다.
그녀는 잘 지내는지, 우리 가족이 그녀를 기억하듯 그녀도 우리 가족을 기억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아마 그녀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부디 그녀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한다. 송아령 서울시 관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