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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7년 5월 대한조현병학회 주최 극복수기 공모전에서 입선된 가족작품으로 조현병 학회 발행(비매품) 조현병 청년들의 회복이야기 다시 봄날에 수록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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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새가 창공으로 솟아 오르다
설운영(정신건강가족학교장)
작렬하는 다이나믹한 음악소리가 꿈틀거리는 근육과 힘줄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바위같은 꿈틀거리는 몸으로 바벨을 들고 쇠줄을 당기는 역동적인 실루엣들이 움직이는 그리스의 조각상 헤라클래스의 몸짓 같다.
“아빠, 그건 그렇게 하면 안돼요, 이렇게 가슴을 펴고 아랫배에다 힘을 주고 당기세요, 윗몸 일으키기는 복부근육이 금방 회복되기 때문에 잠시 쉬었다가 바로 시작해도 됩니다.“ 헬스장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는 인곤이의 목소리에 나의 온 몸 단백질 세포들이 일시에 긴장하면서 에너지를 토해낸다. 땀이 젖는 줄도 모르고 반복하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이 순간이 정녕 꿈이 아니기를 기원해 본다. 인곤이의 우람한 다리와 떡 벌어진 어깨너머로 어둡고 긴 터널을 건너왔던 회오리가 세차게 불어온다.
18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그것은 도둑같이 왔다. 두터운 커튼이 드리운 침대에 미이라처럼 누워있기를 며칠 째, 그때는 그것이 병인지를 몰랐다. 아프지도 않은데 학교도 안가고 누워 있기만 하는 아이한테 무슨 일이야고 물었으나 말을 하지 않는다.
보일러가 과열되어 터져버릴 것 같은 불안에 숨을 못 쉬겠다는 고통을
호소했고 급기야 아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서울 적십자병원에 가서 심리검사와 정밀진찰을 받았다 의사가 IQ검사결과가 너무 높게 나왔고, 단지 뇌세포 호르몬 전달 물질 중 한 가지가 부족하게 나온다며 우울증을 겸한 조현병(정신분열증)이라고 하며 평생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운명의 여신은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그렇게 우리 앞에 다가왔다.
약을 복용하였으나 눈에 보이는 차도는 없고, 가끔 컵을 벽에 내던지며 고함을 지르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엿보고 있고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며 공포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당황스럽고 안타까웠고 고민스러웠다. 그렇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속수무책이라는 말은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일까, 아이는 대화를 거부했고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혼자안고 가려는 듯이 화석처럼 침대에만 누워서 굳어 갔다. 이 모든 것들은 예약된 신의 저주처럼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하얀 눈바람이 날리는 날, 어느 병원 2층에서 홑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뼈를 삭이는 아픔을 뚫고 우리의 첫 아이 인곤이가 세상 밖으로 여린 꽃망울을 터뜨렸다.
아이가 얼굴이 백설같이 희고 인형처럼 예뻤다. 그래서 온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구경을 올 정도였다. “세상에 어디서 이런 예쁜 아기가 다 있을까,”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정도였다. 투정하고 욕심 많은 둘째 아이와는 달리 배려심 있고 늘 양보하면서 잘 웃는 온순한 아이였다.
그랬던 내 아들이 신의 시샘인가,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고통을 겪으며 천형의 길을 가야하는가, 가슴이 무너져 내리며 타는 듯한 서러움이 밀려들어 왔다. 집 안에서는 암담해서 울고, 밖에서는 또래 아이들이 연초록빛 지저귐으로 밝게 떠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죄인처럼 울고 다녔다.
몇 달째 그러기를 반복하고 고통의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부나비가 촛불 위에서 곡예 하듯이 위태로움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꽃이 피는 것이 보였다. 미세한 몸부림, 그것은 근육 운동이었다.
인곤이가 감내하기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보려는 듯이 방 안에 벤치프레스 의자와 역기를 주문시켜놓고 간간히 혼자 운동한다. 그것은 새 둥지에서 홀로 남은 어린 새가 안간힘을 쓰며 날아보려고 파닥거리는 그 모습이었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 뿐, 몇 번인가 역기를 들다가 놓고 다시 자리에 부스러지듯 눕는다.
아이 하나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심리전문상담소, 최면술 권위자를 찾아서 상담치료를 받고, 심지어 정신치유를 잘한다는 영성단체까지 데리고 가서 정신요법을 받았으나, 이 역시 효과없이 애꿎은 돈만 날린 셈이 되었다.
직장에서 모임이 있어 술이라도 한 잔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가 “자식은 저렇게 누워있는데 술 먹고 놀 생각이 나느냐,”며 비난할 때 마다 비수가 되어 가슴을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못 먹고 있는 아들 생각으로 묵지근하게 아랫배를 짓누르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더 이상 부모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무능함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질타하였다.
“좀 더 굳세게 씩씩하게 키웠더라면….” 모든 것이 못난 아버지 탓인 것 만 같아 허탈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이러한 나날들이 지속되면서 내 마음도 황폐해지고 일에 대한 자신감도 차차 사라졌다.
그러던 중 이제 마지막 구원의 실마리라도 잡아야겠다는 일념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을 찾아다니며 수없이 절을 했다. ‘우리 인곤이 좀 낫게 해달라고 빌었고, 일과가 끝나면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100일 동안 기간을 정하여 산 속에서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렇게 위안을 삼고 휘청거리며 스러져가는 나를 지탱해 나갔다.
1 년이 다 되어갈 무렵 집에서 무력감에 누워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인곤이를 집에만 놔두면 안 되겠어.”라고 했다. ‘어차피 힘들고 시달릴 바에야 아이를 대안학교를 보내 졸업이라도 시켜야지, ‘우리 인곤이는 적응할 거야“ 우리 부부는 아이를 태워 전남 영광 백수 해안가 아늑한 산 밑에 자리 잡은 대안학교인 천도교 재단 영산성지고등학교에 2 학년으로 편입시켰다.
파리하게 서서 떠나는 부모에게 손을 흔드는 인곤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 짙은 서러움이 물씬 베인 황톳길을 밟고 길을 나선다. 며칠 후 아내는 인곤이가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며 칠흑 같은 야밤에 빗속을 뚫고 이곳 과천에서 영광까지 차를 몰고 검은 들소처럼 들이닥쳐 그곳 학교선생들을 놀라게 했었다.
다행히 인곤이는 그곳에서 부담 없는 수업 일정과 선생님들의 따뜻한 보실핌 덕분에 2 년간을 수료하고 졸업식장에서 모범생 상장을 탔다. 부모로서 뿌듯한 감과 더불어 안도감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알아서 자립하리라는 우리 부부의 방심 탓이었을까,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의 불안이 컸던 것일까. 지나가는 시간들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인곤이가 집에 온 후 재발증상이 나타났다. 다시 병원에서 약 처방을 받아 복용시키고, 집단생활에서 규칙적인 생활로 자신감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인천에 있는 2년제 인천 인력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학교 ‘시스템제어’ 학과에 입학을 시켰다.
그곳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일주일에 한번 씩 집에 데려오고 태워주곤 하였다. 다행히 그곳에서도 큰 무리 없이 적응을 하였고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전자공학계통에는 흥미가 없었던 듯 학위는 따지 못했고, 2 년 동안의 기간을 탈 없이 보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집에 돌아온 이후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진 듯이 인근 물류창고에 아르바이트 취업을 하여 3개월 간 다녔고, 그 이후 과천 경마장에서 안내보조원 아르바이트를 약 1년간을 했다.
내 후배가 활동하는 MTB 자전거 동우회에 가입시켜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 다니게 했다. 한동안 즐겨 타더니 다시 슬럼프에 빠져 그만두었다.
당시 동네의원에서 지은 약은 인곤이를 15시간 이상 잠을 자게 할 정도로 침대에서 운신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약은 꾸준히 복용을 했다. 지속적으로 상담을 하였으나 의사는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나빠지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위험하다며 잘 살펴볼 것을 당부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고하고 다가오는 불길한 암시로 받아 들여졌다 .
그러던 어느 날, 인곤이가 집을 나가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다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허공에 울렸다. 급히 달려와서 산발하다시피 풀어헤친 머리로 사색이 된 아내와 함께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동네주변과 과천 일대를 “인곤아, 인곤아,,,”울음섞인 단발마의 비명 소리를 토해내며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다녔으나 인곤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인곤이 못 보았느냐며 눈물조차 말라 붙어버린 얼굴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묻고 또 물었다. 송아지 찾는 어미 소 같은 절규의 울음소리는 검은 관악산 위로 구슬프게 맴돌았다. 밤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타들어가는 울음소리도 잦아들고 무거운 침묵만이 가슴을 짓누를 때, 집에 계신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곤이가 지금 과천교회에 있다고 연락이 왔단다. 교회로 뛰어 가니 목사님이 2층에서 인곤이를 데리고 걸어 내려오셨다. ‘너무 힘들고 괴롭다.“평생 고쳐질 수 없는 병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며, 무작정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어 버리려고 집을 나섰는데 들어간 곳이 하필 교회 건물이었단다. 문득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란다. 마침 그곳에 계신 목사님을 만나 고백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숙제입니다. 실력있는 영혼에게 어려운 숙제가 주어지는 법이니 굽히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인곤이를 데리고 왔다. 그것은 분명 하늘의 도움이었고 신의 인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담하고 가슴이 갈갈이 찢겨지는 통증이 간격없이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밤새도록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발병 5년 째 되는 해에 이곳 동네에서도 인곤이에 대한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면서 우리는 아이를 위해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과감하게 현재 사는 수원으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힘들어하는 아이를 서울성모병원에 2 개월 입원을 시키자 많은 차도가 있었고, 새로 조제해준 약을 꾸준히 복용시켰다.
그 무렵, <생활 속 면역력 키우기는 운동이 제일이다>는 책을 보고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그래, 예전에 인곤이가 시도했던 운동이다. 신체적인 운동이 면역 기능을 강화시켜 주고 사회적 활동과 사교적인 건강성도 유지한다는 믿음을 갖고 우선 아이에게 아빠랑 같이 걷는 운동을 시도하기로 했다.
꼼짝 안하는 아이의 정서적인 면을 자극하기로 했다. ”인곤아, 집 둘레길 산 속에 꿩들이나 고라니가 살고 있는데, 얘네들이 겨울철에는 먹을 것이 없어 울고 있단다. 우리가 먹다 남은 음식을 주면 잘 먹을 거야,“ 하니 같이 가보자고 고개를 끄덕인다. 둘레길 옆 눈 쌓인 산 밑 자락에 먹거리를 뿌려놔 봤다. 그 다음 날 가보니 신기하게 다 먹었다. 주위에 동물들 발자국도 선명하게 찍혀있다. 동물들이 먹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리 일과였다. 그 뒤부터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먹이를 주러 둘레 길을 한 바퀴씩 도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눈 발자국을 보고 어떤 동물이 다녀갔는지 확인하는 기쁨은 우리의 외출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것은 분명히 기적같은 희망이고, 우리에게 비춰진 실낱같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걸으면서 아이에게 운동의 중요성과 헬스운동을 권유했고 가까운 헬스장에 등록한 후 개인지도를 받게 했다. 그곳에서 1 년간을 다니며 운동을 한 후 수원의 헬스장으로 옮겨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게 하였다.
그곳 관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개인지도와 더불어 인성지도까지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고, 하루 8 시간씩 그곳에서 지내면서 집중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직접 관장이 같이 운동하면서 힘든 역경 속에서 운동했던 이야기와 더불어 운동기계 수리하는 법, 손님 접대요령,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필요한 지식 등의 전인교육 방식이었다.
인곤이의 몸이 날이 갈수록 근육으로 뭉쳐지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는 것이 보였다. 친동생처럼 여기고 제자로 키워주기 위한 관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헬스를 시작한 지 4년 째, 이제는 인곤이가 오전에는 볼링장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초보자들 위주로 헬스트레이너로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작년 가을, 환호와 응원이 울리는 안양 보디빌딩협회에서 개최하는 보디빌딩 대회에서 다져진 몸매로 활강하는 독수리가 나래를 펴듯 두 주먹을 치켜세우는 무대 위의 인곤이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인생의 전환기에서 눈부신 빛을 바라보는 듯한 뿌듯함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인동초의 승리감 같은 진한 감동이 파도치듯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우리에겐 17년간의 고행 끝에 이루어낸 경이로운 결실이고, 가능성의 성취였다. 그렇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비탄과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 낸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였다. 대회장 문을 나서면서 “아빠는 아웃사이더고, 인곤이는 인사이더야, 나중에 우승하면 반쪽은 아빠 거니까 잊지 마. 하, 하….” 인곤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오랜 만에 호쾌하게 웃어본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맑았다.
지금도 인곤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으면서 한 달에 한번 씩 성모병원 주치의 박사님의 진료를 받으면서 관리해 나가고 있다.
약의 도움은 정신장애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약만으로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목표를 세워서 이루어 나가려하는 의지가 있어야 비로소 장애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유일하고 고유한 인격체로서, 자신을 회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작년부터 인곤이를 수원시 성인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을 시켰고, 그곳 회원들하고 친분을 쌓아가면서 작년 가을에는 전남 해남까지 센터 회원들하고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여행수기를 쓰기도 했다. 덕분에 아버지인 나도 가족모임에 참여하고 회원 당사자들과 가족 간에 자조(自助)모임을 만들어 서로 소통하며 정신장애 극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인곤이는 이제 생활체육지도사 최고 과정을 밟기 위해서 준비 중이다. 정신건강과 마찬가지로 신체건강도 중요한 만큼 운동 전문점에서 체력단련을 지도해 나가는 것이 인곤이의 꿈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은 악몽의 연속이었고, 흑막의 역사였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가능성은 항상 우리 옆에 있다. 그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도전자,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앞으로도 우리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맑고 투명한 오월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 한 마리 새가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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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처럼님 늘 유익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 같은 당사자가족으로서 가슴이 뭉클 하네요. 그외에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한 힘든 일들도 많았겠지요. 가족의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 지원이 이루워낸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네, 가슴뭉쿨하게 댓글을 달아 주시어 감사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설운영님은 전국최초로 수원에서 정신질환자 가족을 위하여 학교를 만들어 벌싸 1년 6개월째 잘 운영하고 있어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가족학교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