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총리, 빈볼 시비 김성근 감독을 말하다
1956년 여름, 화물선에 몸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넌 16명의 야구 선수들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모국대회에 참가하러 온 재일동포 고교야구 선수들이었다.
그렇게 1997년까지 약 620명의 재일동포 고교야구 선수가 어머니의 나라를 찾는다.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 역시 1959년 이 재일동포 야구단 소속으로 조국 땅을 처음 밟는다. 그리고 나이 스물에 아예 한국으로 건너와 귀화한다. 변화와 도전의 아이콘 ‘김성근 야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영구귀국은 야구를 하기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당시 다른 길은 없었다. 철도 일용직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열차 사고로 죽자 당장 끼니부터 걱정할 정도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형과 누나들은 교토의 공사장에서 막일하고 소년 김성근도 중3부터 신문배달과 우유배달을 해야만 하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누구에게도 의존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야구를 놓지 않았다.
배달 때마다 자전거 안장에 앉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하체를 단련했다. 6~7Km 되는 학교까지 야구가방을 둘러메고 발뒤꿈치를 세우며 걸었다. 생활이 모두 훈련과정이었고 그걸 즐거움이라 여겼다. 그는 그렇게 “매 순간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야구를 했다.” 순간이 승부처였고 야구는 운명이었다.
결국 일본 사회의 차별과 가난, 야구에 대한 야망은 그를 조국으로 이끌게 된다. 김성근에게 대한민국은 야구를 계속할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 한국 야구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글러브나 배트 하나 생산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을 비롯해 배수찬씨 등 재일동포 선수단으로 모국을 방문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한국에 정착한다.
이 재일동포야구인의 기술이 한국 야구의 수준을 높이는 자양분이 되었다. 실제로 원로 야구인들은 “1960년대 한국 야구의 도약은 재일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선진 야구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재일동포밖에 없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 야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이제 국민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러나 조국이 이들에게 항상 환호를 보낸 건 아니었다. ‘반쪽바리’라는 치욕적인 말을 듣는 건 다반사였고 1.21사태(김신조 사건) 때는 공안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도 당시 조사를 받았다. 김성근을 둘러싼 거부와 환대라는 이 두 극단의 감정은 지금도 우리 사회 근저에 흐르고 있다.
그렇게 1997년까지 약 620명의 재일동포 고교야구 선수가 어머니의 나라를 찾는다.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 역시 1959년 이 재일동포 야구단 소속으로 조국 땅을 처음 밟는다. 그리고 나이 스물에 아예 한국으로 건너와 귀화한다. 변화와 도전의 아이콘 ‘김성근 야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영구귀국은 야구를 하기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당시 다른 길은 없었다. 철도 일용직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열차 사고로 죽자 당장 끼니부터 걱정할 정도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형과 누나들은 교토의 공사장에서 막일하고 소년 김성근도 중3부터 신문배달과 우유배달을 해야만 하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누구에게도 의존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야구를 놓지 않았다.
배달 때마다 자전거 안장에 앉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하체를 단련했다. 6~7Km 되는 학교까지 야구가방을 둘러메고 발뒤꿈치를 세우며 걸었다. 생활이 모두 훈련과정이었고 그걸 즐거움이라 여겼다. 그는 그렇게 “매 순간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야구를 했다.” 순간이 승부처였고 야구는 운명이었다.
결국 일본 사회의 차별과 가난, 야구에 대한 야망은 그를 조국으로 이끌게 된다. 김성근에게 대한민국은 야구를 계속할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 한국 야구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글러브나 배트 하나 생산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을 비롯해 배수찬씨 등 재일동포 선수단으로 모국을 방문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한국에 정착한다.
이 재일동포야구인의 기술이 한국 야구의 수준을 높이는 자양분이 되었다. 실제로 원로 야구인들은 “1960년대 한국 야구의 도약은 재일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선진 야구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재일동포밖에 없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 야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이제 국민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러나 조국이 이들에게 항상 환호를 보낸 건 아니었다. ‘반쪽바리’라는 치욕적인 말을 듣는 건 다반사였고 1.21사태(김신조 사건) 때는 공안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도 당시 조사를 받았다. 김성근을 둘러싼 거부와 환대라는 이 두 극단의 감정은 지금도 우리 사회 근저에 흐르고 있다.
- 김성근 감독./조선일보DB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조국에서는 ‘반쪽바리’로 불리는 뿌리 뽑힌 삶.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비주류가 할 수 있는 것은 쉼 없는 도전이고 실천이었다.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비주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실천해야 한다. 만년 하위 팀을 전전하며 성과를 내왔던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그래서 치열하고 절실하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에서 자신을 ‘들’풀‘이라고 비유했듯 한국야구계의 처절한 비주류였다. 1965년 마산상고(현 용마고) 사령탑을 시작으로 40년 넘게 지도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12번 해고되었다는 이력은 그의 야구인생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연과 학연으로 돌아가는 한국 야구계에서 그렇게 철저히 추방자로 살았다. 그래도 그는 살아남았고 그래서 강하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프로 야구에서 자본에 흡수되지 않고 구단 프런트에 맞서 선수들을 관리해 왔다.
일흔셋의 나이에 현직 프로야구 감독을 하면서도 KBO에 포획되지 않는 야생마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한 사회 비주류의 도전은 거대한 주류의 구조 안에서 순치되거나 처절한 실패로 끝나기 쉽다. 그러나 고교 입학 때부터 야생야사(野生野死)의 삶을 추구했다는 노 감독의 집념은 아직 진행 중이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보살’이라 불리는 한화 팬들이 “우리도 가을야구를 보고 싶다.”며 ‘김성근 감독 청원’운동을 할 정도로 그에게는 열성팬들이 있다.
매번 꼴찌 팀을 맡아 우승팀의 전력으로 변모시키는 리더십은 경이로울 정도다.
그는 1984년 OB 베어스(두산 전신)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이번 한화 이글스까지 총 21시즌 동안 프로야구팀을 지도했다.
그동안 태평양, 쌍방울과 같은 만년 하위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위기의 LG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2007~2010년에는 SK를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고 3차례 가을야구의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한화는 현재 5할 승률 고지에 오르며 예년과는 다른 끈끈한 야구를 보여주고 있다.
한화는 2009년 이후 6번 시즌 동안 5번 꼴찌를 했던 팀이다. “리빌딩과 성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는 사령탑”이라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반면 ‘재미있는 야구’를 하지 않고 악착같이 ‘이기는 야구’만 한다는 비난이 있다. 승리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다는 의미다. 또 선수 혹사 논란도 도마에 오르곤 한다. “아홉 경기 반 차로 앞설 때, 난 경기 차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매 경기에 충실 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런 평가도 받을 법하다. 지독한 강훈련과 불규칙한 선수기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그는 자신의 야구철학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구단과의 갈등도 피하지 않는다. 프로구단주들 사이에 그가 기피인물로 꼽히는 이유다.
이런 비난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재미있는 야구를 한 감독 중 남은 사람은 없다. 승부가 무서운 걸 모르는 얘기다. 8-0으로 이길 때는 8-0으로 끝내야 한다. 점수를 내주어 8-7로 이기면 투수를 그만큼 많이 써야 한다. 표현이 뭣하지만 ‘확인사살’이라도 해서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 전쟁에 목숨을 걸고 출정한 전사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런 김성근의 야구가 양극단의 여론을 조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한 경기 한 경기 변화하려는 모습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 김성근 감독./조선일보DB
투쟁하고 완성하는 인생 그 자체였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어 오직 삶의 매 순간을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 하는 사람, 그가 바로 김성근이다.
그렇기에 공 하나하나에 혼을 걸고, 직접 배팅 코치가 되어 몇 시간이고 공을 쳐올리는 훈련의 야구를 하며, 감독 중심의 철두철미한 작전의 야구로 승리해야 했다. 그에게 야구는 그런 존재다. 야구는 승리이며 책임이었다. <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