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야구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독서실에서 (본 것이 아니라) 들었던 라디오중계 덕분입니다. 요즘이야 당연히 전구장 중계를 하고, 중계가 없어도 인터넷으로 실시간 화면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주말 낮경기가 아니면 대부분 라디오로 들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니까 뭐 그럴 수 밖에요.
라디오는 경기 상황을 내가 [상상]해야 하는 것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레프트 앞에 안타~입니다 안타!! 2루 주자 3루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레프트 홈으로 송구합니다. 홈으로~홈으로~ 주자 슬라이디이이잉~~~~" <---이런 상황에서 순전히 캐스터의 소리만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해서 무척 궁금하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쫄리는' 맛이 있었죠. 2000년대 초중반에 유행했던 [문자중계]가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네요.
라디오 중계를 듣던 시절의 1번선발은 지금이랑 좀 달랐습니다. 까까머리 중고딩이었으니까 당연히 지금이랑 달랐겠죠. 기본적으로 그때는 야구 보면서 어제 불펜으로 누가 나왔고 마무리가 누구였고, 오늘 불펜 대기하는 사람이 누구고.... 그런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정민철을 제일 좋아했지만, 선발투수였던 그가 14승 7세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우와 멋있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냥 한경기 한경기 승패에 관심이 더 많았고, 그 시절은 더블헤더 1차전 마무리 투수가 2차전에 선발로도 나오던 시대였으니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차라리 그때처럼 투수진 운용이나 선수 기용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면, 그냥 매 순간의 플레이에 집중해 안타나 홈런에는 환호하고 삼진이나 병살에는 아쉬워하면서 3시간의 여가를 그냥 즐기고 끝내는 스타일이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농구나 배구를 볼 때 선수들의 체력을 걱정하거나 A선수 대신 B선수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피곤하게 머리를 굴려보지 않습니다. 그냥 재밌게 보고 즐기고 그걸로 끝입니다. 이기면 좋고, 지면 그냥 ''에이 뭐야' 하고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야구에서는 그게 잘 안 되네요.
삼성팬, LG팬 베프와 함께 같이 독서실에서 이어폰 한쪽씩 나눠끼고 야구중계를 듣던 그 시절이 그냥 문득 그립습니다. 복잡하게 머리 쓰지 않고 그냥 3시간짜리 여가로만 야구를 즐겼던 그때, 그냥 심플하게 이기면 좋고 지면 분하고 거기서 끝이었던 그 시절이 말입니다. 그때는 경기의 상황들에 자꾸 감정을 개입하면서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고, 매일 카페에서 수십개의 글을 읽지 않아도 됐고, 야구 얘기를 하면서 '내 생각이 혹시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았죠. 야구가 그저 야구일 뿐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야구는 그냥 늘 똑같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데, 야구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그것을 보는 내 시각이 바뀌어 괜히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개그맨 남희석씨가 예전에 카페 회원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야구에 인생의 쇼당을 지르지 마라"고요. 가끔은,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깟 야구, 알고 보면 사실 내 삶에서 통째로 덜어내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첫댓글 한화 암흑기 동안 그깟야구라고 생각하면서
꼴지팀이 싫어서 멀리하려고도 했습니다만
요즘처럼 야구가 기다려지는건
아주 오랜만이네요
매게임 살얼음 승부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그래도 그깟야구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기도하지만 그 야구땨문에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있는 것도 사실이겠죠 ^^
항상 좋은글들 감사합니다
좋은글들 감사합니다
그땐 평일 야간 중계없엇죠?
제가 예전에 야구때메 술도 자주 마시고 역도 엄청 하고 스트레스 받는다는 글을 남겼었는데 1번선발님께서 그냥 공놀이자나요 하셨던 댓글이 기억납니다. 그냥 공놀이인데 자꾸 야구가 제 하루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버렸네요ㅜㅠ
700-6979.. 그당시 야구스코어 확인하려고 엄청 눌러댔던 기억이 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