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강론>(2023. 12. 19. 화)(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ㄴ-17).”
이 말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메시아께서 이제 곧 오신다고 예고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루카복음서에서는
첫 번째 복음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너의 청원을 받아들이셨다.” 라는 뜻인데,
‘즈카르야의 청원’은 무엇이었을까?
뒤의 18절에, 자신은 늙은이고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믿지 못하겠다는
즈카르야의 말이 있기 때문에, ‘즈카르야의 청원’은
아들을 갖게 해 달라는 청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청원’은 ‘메시아 강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을 텐데,
‘메시아 강생’과 ‘이스라엘의 구원’은 즈카르야 혼자만의
소원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너의 청원’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너희의 청원’입니다.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은,
“그의 출생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그는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이제 곧 오실
메시아를 잘 맞이하려면 회개하라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 선포’를 겸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위해서 ‘큰 일’(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일이고,
그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일’(위대한 일)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라는 말은,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힘으로 수련과 수행을 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요한이 한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일입니다.>
17절은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한 것인데, 이미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의 일’을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의 ‘그분’과 ‘주님’은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8-20)”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즈카르야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제가 무엇으로 그것에 관해 알 수
있겠습니까?”이고, 이 말은, “표징도 없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였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루카 1,6),
‘상식의 한계’ 라는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라는
말은,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한 것이고, 천사의 말은 곧 하느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이라는 말은, 즈카르야가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메시아 강생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는 태어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까지입니다(루카 1,57-64).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을 ‘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가 요구한 대로 ‘표징’을 준 일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말을 못하게 된 것’이 표징이 아니라,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아기가 태어난 뒤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표징입니다.>
왜 그런 표징을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임무가 ‘선포’ 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상징적인 경고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선포 자격도 없다는 것, 즉 확실하게 믿음을
가질 때까지는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특히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점 때문에, 그의 사제 직무가
정지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제 자격도 없고
말씀을 선포할 자격도 없습니다.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