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에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5)
이튿날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요1:43)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49-51)
요한복음을 간단하게 보면 안 됩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를 읽으면서도 살아계시고 임마누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의식해야 하지만
요한복음은 더 엄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안에 하나님을 향해 계시던 바로 그 말씀(호 로고스)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있게 하시고 계속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2,000년 전에만 나타나심이 아니라 그를 경외하고 영접함으로 대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지금도 그 분은 그의 영과 생명으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로 그 분이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고 그 분 앞에 마음을 낮추십시오.
‘오! 주님 이렇게 추한 제게 임하셨습니까? 아니 한 번도 떠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계셨습니까? 주님을 잊어버리고 허둥대며 사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을 놓쳐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황급하게 돌아 온 예수님의
부모들처럼 저희 또한 늘 그러합니다. 언제나 주님은 주님의 집에 거하시듯이
우리를 주님의 거처를 삼으시고 항상 계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을 천 번 만 번 생각하다가 겨우 주님의 이름을 한번만 불러도
눈물겹도록 반겨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외치십시오.
이렇게 중요한 요한복음 1장에 이튿날, 또 이튿날 그리고 이튿날 하면서
발전적인 로드맵을 기록하심은 그 안에 하나님의 큰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나야 나’하시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나는 빛이야,
생명의 떡이야, 나는 길이야, 진리이며 생명이야’(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시는 창조의 근본이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29-51절 사이에는 주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다음에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그 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계시의 단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튿날, 또 이튿날, 그리고 이튿날...
자칫하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보면 ‘나는 세례요한처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 분의 길을 평탄케 하고, 그 분을 이스라엘에 드러낸 사명을 감당한
사람일 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실제적인 증인은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우리의 신앙이나 사명의 모델이 결코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 정신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의 성정마저 그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요1:29절을 보면 처음 이튿날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아사셀이셨습니다(레16장)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영문 밖 골고다 언덕 십자가로 가셔서 한 마리의
대속의 양처럼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몽땅 처리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므로
하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히9장) 하나님은 오늘도 그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간과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십니다. 지금도 그 분의 대속의 효력은 계속 됩니다.
흡사 우리의 죄짐을 그 분이 계속 지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단번에 이루신 구속사역의 효력이 살아계신 그 분과 그 분의 말씀에
의해 그 효력이 계속 적용되고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만’ 하실 때까지 누구에게도 이 대속의 은혜는 계속 적용됩니다.
다만 그 분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을 내다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한 세례요한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요한처럼 증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다시 오십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시길 사모하고 기다리세요’
하고 말입니다. 꼭 세례요한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35절의 ‘이튿날’에는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하루 만에 그의 증거는 발전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계4장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서 하늘을 열고, 5장에서는 인봉된 책을 여시고 네 영물과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광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사역을 성공하고, 하늘에 오르셔서 그 분이 하늘을 다스리시고 만백성의
구원과 심판을 주장하시는 왕 중의 왕으로 등극하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과 복이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부터 내려옵니다.
따라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고백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고백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그와 함께
거하므로 주의 제자들이 됩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와 보라’(come and see)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와 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여러분이 어디까지
그 분을 좇아가든지 그것이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하실 일은 세례요한의 계시와 사명은 여기서 멈춘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예수를 증거할 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을 배웁니다. 그야말로 그 분의 제자들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그들의 증거는 세례요한의 증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형 베드로를 만난 안드레의 고백이 당장 달라집니다.
그 간증은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입니다(요1:41) 세례요한과는 엄청나게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처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 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분을 믿으십시오’라고 하는 증거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안드레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디 쪽입니까?
그 다음에 43절을 보면 또 ‘이튿날’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와보라’ 하시던 말씀을 바꾸어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와보라’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나를 좇으라’는 이 두 마디의 말씀을 오늘 우리 함께 깊이 묵상해 보십시다.
어디까지 가야하며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마지막 이튿날에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요1:48) 나다나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요1:49)이라는 고백을 받으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그 이상의 계시를 우리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1:51)하는데 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 신앙의 눈은 순전히 여러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척도와 그 계시의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제가 이 정도 밖에 설명할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다만 ‘이튿날, 이튿날, 그리고 이튿날’은 6일이 아니고 단 3일만입니다.
3일전 곧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과 십자가 뒤의 그리스도의 신분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격차를 비교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와 보라 하시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어디까지 따라가십니까? 그 차원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하는 말씀이 가까이 다가 올 것입니다.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은 3일이며 바로 뒤의 요2장에서 그 사흘 후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돌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2:19)고
말씀하시는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이제 이튿날, 이튿날 또 이튿날의 의미가 이해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 어휘와 글자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비록 부족한 표현이지만 성령께서 보충하고 완성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다만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13:8)는 사실과 그리고 그 분은 태초 안에 계시던
말씀(호 로고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사명에 따라 그 분을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은혜와 분량을 생각해 보고
성경이 약속한 복에 더 가까이 나아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