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가지를 쳐낸 고목처럼 노년의 삶은 간소하다. 더운 우유 한 잔과 인절미 서너 개면 아침식사가 된다. 우선 식탁이 간편해졌고, 번거롭게 입어야 하는 외출도 멀어진 지 오래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라는 눈총을 받으며 구형 휴대폰을 고수하고 있다. 주인의 심사를 아는 듯, 침묵하는 날이 더 많은 나의 휴대폰, 번잡한 소통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비껴가는 하루해가 겨울 때도 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고, 한 모양으로 지내는 심심한 그 단조로움이 헐렁한 옷처럼 편안하다.
오후가 되면 버릇처럼 식탁에 가 앉는다. 무릎 때문에 좌탁보다는 식탁이 편해서이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처럼 노역에서도 면제되고 사람관계에서도 풀려나 모처럼 한가한 때를 보내고 있다.
사위는 고요한데 이따금씩 몸이 겪는 통증을 느끼며, 아무 하는 일이란 없다. 무사( 일이 없음) 무위다. 중천의 해는 나와 상관없이 뜨고 진다. 지인들의 행보는 활발한데, 나는그렇지 못한 자신이 때로는 딱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서가에서 노자를 꺼내든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 나만 홀로 부족한 듯하다. (....) 우매하고 우매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분명한데 나만 홀로 어둑하구나! (....) 모든 사람은 쓰일 데가 있으나 나 홀로 고루하며 천한 것 같다. 나는 홀로 남과 달라서 만물의 근원인 도를 기르는 것을 귀히 여긴다네.' ㅡ도덕경 20장
세상 사람들은 다 분명한데 나만 홀로 어둑하다니...그 분의 심정을 되짚어보며 만물의 근원인 도에 대해 생각해본다.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요,
약한 것은 도의 쓰임이다.'
예외 없이 우리는 도의 움직임을 따라야 하리.
융은 한때 노자에게 심취했고, 헤르만 헤세는 가장 지혜롭고 가장 않이 내게 위로를 준 분은 노자라고 로망 놀랑에게 써 보냈다. 나도 요즘 그분에게서 많은 지혜와 위안을 받는다.
노자는 젊은 시절, 아내가 친구와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그 자신을 사랑할 때, 그 또한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니 아무런 사심도 품지 않아야 한다며 아내를 놓아주었다. 그는 불륜을 증오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았다. 악은 선의 바깥에 서 있는 이물질이 아니라 선이 분비한 자기의 다른 모습이므로 선의 다른 측면인 '불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선과 불선은 이원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유(있음)의 이중적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 사바고해에 살면서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기보다는 마음을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심을 버리고 불선(좋지 않음)을 용인한 그 분의 도량과 인간적 고뇌를 짚어보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도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노자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시대를 거스르고 동서양이 다르건만 그들의 대응법은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아무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사색과 독서에만 전념할 뿐, 만년에 노자는 <도덕경>을, 몽테뉴는 <수상록>을 각각 한 권씩 남겼다.
대극의 양단을 물리친 동양의 현자와 서양의 철학자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금 '선악불이(선과 악은 둘이 아니다)'를 반추한다. 아직은 어렵지만 대립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요즘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노년의 식탁은 존재를 겨우 지탱해주는 임시 거처, 거기에 앉아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노년은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견디는 일이라고.
첫댓글 A table of old age
절학무우의 도덕경 20장은
만물의 근원인 도를 기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