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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건 자유예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잖아요.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엔 거절이 그렇게 어려웠는데 말이지요.
지난달 15일 만난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독어독문과)는 “늙는다는 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72세의 노학자다.
은퇴한 지 어느덧 7년째, 그는 경기도 여주에서 ‘여백서원’이란 이름의 ‘책의 집’을 짓고 농부를 자처하며 살고 있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독어독문)는 2014년 사비를 털어 여백서원을 지었다. 젊은이들이 들러 잠시 숨을 돌리고, 자기를 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다. 서원은 은퇴 이후 그가 살기로 한 삶 그 자체다. 장진영 기자
대한민국 인구의 평균 나이는 43.5세(2021년), 4명 중 1명은 60대 이상이다. 하지만 늙는다는 걸 인정하고, 반기는 이는 없다.
예순을 눈앞에 둔 유명인은 “마흔은 아직 젊다”고 외치고, 노년내과 전문의는 “누구나 천천히 나이 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한여름으로 가는 길목, 72세의 노학자를 찾은 건 그래서다.
늙는다는 건 무엇일까? 어떻게 늙어야 할까?
그리고 늙고 있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늙은 사람’은 많다.
굳이 전영애 교수를 찾아간 건 억척스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얼굴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난 그의 삶이 녹록했을 리 없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위로하던 시절, 살림 밑천과 거리가 먼 학문의 길을 간 여성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런데도 그는 생의 구김이라곤 없었을 것 같은 맑은 얼굴을 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늙은 비결이 궁금했다.
Part1. 눈물 젖은 빵, 천상의 힘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에 나오는 시구다. 전영애 교수는 ‘천상의 힘’을 ‘섭리’로 의역한다. 진정으로 감사하고 섭리까지 헤아려볼 수 있는 힘, 그 힘은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감하게 의역할 수 있는 건, 그 역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봤기 때문이리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태어난 그는 학교에 갔다. “여자가 똑똑하면 시집 못 간다”며 딸은 학교 근처에도 보내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었기에 ‘똑똑한’ 여성의 삶은 맵다 못해 쓰고, 쓰다 못해 매웠다. 고등학교에서 강사를 하며 어렵게 대학원 공부를 이어가던 그를 보고 어느 교수는 “너는 비극의 씨앗”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수의 예언대로 ‘비극’은 곧 찾아왔다. 매일 경찰이 도서관에 난입하던 시절, 그는 늘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 앉아 있는 이들도 있는데, 어디든 앉아 있어야겠단 생각이었다. 그 덕에 그만 수석으로 졸업하고 말았다. 덕분에 운 좋게 무급 조교 자리를 얻었다. 1년만 고생하면 유급 조교가 될 수 있었다. 1년에 한 명 뽑는 유학생에 선발돼 장학금을 받고 독일에도 갈 수 있는 자리였다. 밤마다 교수들의 연구실을 청소하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교수와 조교의 심부름을 다녔다. 하지만 1년 후 그에게 올 줄 알았던 유급 조교 자리는 군을 제대하고 복학한 남학생에게 돌아갔다.
“저는 떠나야 했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석사 논문을 쓰느라 벅차서 강사 일도 그만뒀거든요. 조교가 되는 것이 공부를 계속하는 유일한 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지요.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힌 듯했습니다.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혼을 했다. 초라한 동네 양장점에서 만든,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저지 원피스를 입었다. 열심히 살림을 살았다. 똑똑하지도 못하면서 똑똑한 여자 취급 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끝없이 기울여야 하는 삶이었다. 늘 허전한 마음에 시달리며 5년을 살아낸 어느 날, 그냥 한 번 학교에 가보았다가 두 번째 ‘비극’을 만났다.
“교수 연구실 앞을 배회하다 용기를 내 학과 사무실 앞으로 갔습니다. 문도 두드리지 못한 채 서 있다가 벽보 한 장을 발견했어요.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 모집 공고였지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서류를 만들어 내고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그리고 덜컥 합격해 버렸죠. 학과 유급 조교가 유학길에 오르던 루트인데 말입니다. 제가 붙었으니,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조교는 떨어지고 만 겁니다.”
어디서 살림하던 여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전통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던 관행을 깨버렸다. 그는 “역린이었다”고 했다. 이제 정말로 학교에 나타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던 어느 날, 임신한 것을 알았다. 5년간 몇 차례 유산을 겪은 뒤였다. 학교에서 추천한 조교를 그렇게 요란하게 떨어뜨려 놓곤 정작 출발도 못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출국을 반년 미루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어요. 그리고 두 달 만에 떠나야 했죠. 떠나지 않을 용기도 없었어요. 가족과 함께 유학하는 사치는 상상도 못 할 시절이었습니다. 떠나서는 어떤 때는 아이가 보고 싶어 현기증이 일곤 했습니다. 학위를 받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세 학기를 겨우 마치고 돌아왔죠. 짧은 기간 목숨을 건 듯 읽고, 자료를 모았습니다.”
귀국해서도 길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학교와 내려놓을 수 없는 공부 사이에서 그는 혼자 쭈그리고 앉아 막막하게 읽었고, 손가락이 굳도록 적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보면 캄캄하기만 했던 그 10년이 지금껏 자양분이 됐다”고 말한다.
“살아보니,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가 즉답이 없습니다. 쉬운 답이 있으면 문제가 아니죠.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면, 신기하게도 그 문제를 감당하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괴테가 그렇게 썼던 겁니다. 눈물 젖은 빵이 천상의 힘이라고.”
전영애 교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태어나 "똑똑한 여자는 비극의 씨앗"이란 편견에 맞서며 공부했다. 평생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공부할 자리를 찾아다녔기에 더 단단하고 맑게 살 수 있었다. 장진영 기자
Part2. 고통으로 부서진 가슴들을 노래하라
경북 영주 출신인 그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딸을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의 여유는 있었지만, 단칸방 뒤에 딸린 손바닥만 한 하숙방을 구해 주는 것 이상을 해줄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혈혈단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꼬박 6시간 반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는 “(그때의) 서울은 (지금의) 유럽보다 멀었다”고 회상했다.
365일 삼시세끼 감잣국이 올라오는 하숙밥을 먹으며 공부했지만, 그는 경기여중에 진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대통령의 딸(박근령씨)이 그의 후배였고, 이름만 들으면 아는 장관의 딸이 그의 친구였다. 겨울이면 찬물 빨래를 하느라 튼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다녔다.
“미운 오리 새끼 같았어요. 백조 무리에 낀.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앉아 있거나, 학교 앞 작은 서점에 들렀다 초라한 하숙방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고향 집에서 하숙비 외에 용돈을 조금 보내왔는데, 그걸로 한 권에 200원 남짓하던 문학 전집을 하나씩 사 모으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부족할 것 없이 사는 친구들 틈에서 튼 손을 숨기고 다녔던 10대 소녀의 마음을 위로한 건 문학이었다. 『제인 에어』 『개선문』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백경』 『신곡』 『파우스트』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는 “문학은 이해와 위로”라고 했다. 문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그로서 나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게 여전히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문학은 유효하다. 하지만 문학을 읽는 게 한가롭게 느껴지는 시대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그보다 빠르게 시장은 변한다. 당장의 일자리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데, 100세 시대다. 아무도 아이를 낳지 않아, 연금을 탈 일도 요원해 보인다. 여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셈이 더 복잡해진다. 젊은 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이리라. 하지만 그는 “그래서 문학을 읽어야 한다”며 유대인 시인 이작 카체넬존 얘기를 꺼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유대인 게토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봉기는 진압됐고, 이곳의 유대인은 전멸될 처지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딱 한 사람을 살려내기로 합니다. 누구였을까요? 시인이었습니다.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라고요. 그가 바로 카체넬존입니다.”
사람들은 카체넬존에게 위조된 온두라스 여권을 구해 쥐여준다. 빅텔 수용소로 갈 수 있는 여권이었다. 빅텔 수용소는 독일군 포로와 유대인을 교환하는 수용소였다. 그곳에서 시인은 4행씩 15연으로 된 15편의 시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요행히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되자 깨알 같은 글씨로 시 6부를 적어 여기저기 숨겼다. 얼마 뒤 가짜 여권이 발각돼 시인은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보내졌다. 6부 중 2부가 발견됐다. 한 부는 수용소 전나무 아래서, 또 다른 한 부는 풀려나는 유대인의 가방 손잡이를 뜯은 안쪽에서. 1999년 『유리병 속의 편지』로 국내에도 소개됐다. 번역자는 전영애 교수다. “너 노래하라”라고 시작하는 카체넬존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10주년 때 광주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아우슈비츠 문학 이야기를 해달라고요. 카체넬존 얘기를 하고, 시의 첫 부분을 낭송했죠. 그 뒤 어느 분이 제 연구실을 찾아왔습니다. 그 노래를 마저 듣고 싶다고요. 번역해 두었던 원고를 주었죠. 그분이 출판했습니다.”
그는 “문학은 누군가의 옆에 가만히 서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그의 삶을 체험하다 보면, 남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나 역시 돌아본다. 그는 “아까운 인생 남 쳐다보지 말고, 물건 쳐다보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면서 “그런 마음으로 번역하고, 서원을 지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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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서원 가장 안쪽에는 시정을 지었다. 딱 한 사람이 들어가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크기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기를 돌아다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장진영 기자
Part3.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
100세를 넘어 120세 시대다. 스물은 고작 6분의 1, 마흔도 3분의 1 살았을 뿐이다. 예순이 돼야 비로소 절반에 이른다. 긴 인생,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나이 먹는 법, 잘 늙는 법은 없을까? 전영애 교수는 시구 하나를 보여줬다. 여백서원 뒤쪽으로 난 괴테 오솔길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 바로 그곳에 놓인 시비에 적힌 구절이다.
“‘시간’ 하면 쫓긴다는 생각부터 들지요. 도무지 시간이 없어서일 겁니다. 시간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마모되고 맙니다. 그러지 말고 잠시 숨도 돌리고 자신도 돌아보고 이런저런 생각도 해보라고 여백서원을 지었습니다. 순간순간 찰나야말로 진정한 나의 것이지요. 우리가 경작해야 할 것은 부동산이나 재산이 아니라 바로 시간이에요.”
그가 보기에 우리가 경작하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아서다. 부동산이 오르면 올라서, 떨어지면 떨어져서 괴로운 건 그 속에 나와 남이 섞여 있어서다. 남들은 샀는데 나는 못 사서, 남들은 팔았는데 나는 못 팔아서 괴로운 것이니 말이다. 내 집 값보다 강남 집값이 더 궁금한 것도 그래서다. 그는 “비교하면 백전백패”라고 했다. 나는 혼자인데, 비교 대상은 특정할 수도 없는 다수기 때문이다. 그는 “남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라”고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그렇게 살았다. 그가 자신의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경작했는지는 2011년 받은 ‘괴테 금메달’이 증명한다. 전 세계 괴테 연구자들에겐 노벨상 같은 상을, 아시아 여성으론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에겐 여전히 경작할 시간이 있다. 빚을 끌어다 서원을 짓고, 매일 풀을 뽑으며,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치 않고, 매달 서원을 개방하는 수고로운 삶을 자처하는 것도 자신의 시간을 경작하는 일이리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산을 오릅니다. 산을 오르는 건 힘든 일이죠.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너무 좋습니다.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압니다.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작은 동양 여성이 독일 문학의 큰 선생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이유죠. 서로를 알아보는 겁니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 끝에서 뭘 만났는지 말이죠. 그런 친구가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바른 걸음으로 큰길 가는 이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서, 언제나 박수를 쳐주고 싶어서 이 서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백서원은 책으로 가득 찬 책의 집이다. 3966㎡(1200평) 땅에 지어진 이곳에서 그의 공간은 작은 책상 하나뿐이다. 이것이면 읽고 쓰는 데 충분하다. 장진영 기자
인터뷰가 끝나고 2시간쯤 뒤, 서울에 막 들어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영애 교수였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 제 꿈은 하나였어요. 그냥 한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무슨 수를 쓰지 않아도, 계산하지 않아도, 남을 밀쳐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늙어보니 어떤지 아세요? 그냥 사는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평생 공부할 자리를 찾아 떠돌며 선 채로 읽고 쪼그린 채로 쓰며 살아온 그다. 고단한 젊은 시절 애쓰지 않아도 그냥 살아지는, 편한 삶을 꿈꾸었던 건 그래서일 테다. 하지만 72세의 전영애는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독일 문학이라는 큰 산을 오르며 배운 것들을 조금이라도 나누고자 애쓰고 싶다. 72세의 노학자가 아직도 매일 밤 노트북을 열고 괴테의 책을 번역하는 이유다.
https://www.joongang.co.kr/plus
최승규 한마디
늙는다...늙었다...
남은 시간 많지 않다..
천만에요.???
내게
남은 시간이야 말로 황금 같은 시간 입니다.
분.초. 아껴가면서 삶에 최선을 다 합니다
내몸은 실험 도구 입니다
무엇이나 내몸에 먼저 실험 합니다..
만인의 표본 될수 없는 80대 이지만 .!
내몸에 좋을때..!
타인에게 부탁 드립니다..
내몸에 실험 불편할땐 무조건 ...
페기 입니다
세상에 물질은 널려 있는데 굳이 한가지 그길로만 갈 이유 없읍니다
좋은 결과 도출 될때...
내몸은 기쁨으로 한층더 건강한 몸이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그 후유증 견디는 방법 내게만 있어 무덤덤 하지요
나이를 잊고 삽시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
한그릇 밥 값도 하지 못한다면 그땐 내가 말하겠읍니다
이세상에서 페기하게 되리라 ...라고/
오늘 하루 생명 일지라도
계획은 백년을...
백년계획 선상에서 오늘 이순간도 최선을 다할뿐 ...
내가 늙어다 생각할 틈조차 없음 입니다
첫댓글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