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5.22 히말라야 로체 등정.,성공.
김 대장은 1991년 북미 매킨리 등반 중 조난을 당해
동상으로 열 손가락 전부를 잃었으나 시련을 딛고
1995년부터 세계 정상급 봉우리 등정에 나섰다.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고 히말라야 14좌 도전
'불굴의 산악인' '희망의 산악인'으로 불린다.
.
'열 손가락이 없는 산악인' 김홍빈 대장(53.사진)
세계 4위의 고봉인 로체(8516m) 등정에 성공했다.
22일 '희망나눔 2017 한국 로체 원정대'에 따르면
지난 19일 오전 8시(한국시간 오전 11시15분)에
셰르파 2명과 함께 로체 정상에 올라섰다.
김 대장은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등정일을 18일로 잡고 로체 정상 등정에 나섰으나
강풍으로 하루 지난 19일 오전 등정에 성공했다.
이번 등정엔 특별한 동행이 있었다.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장애인 3명
(이진기.나정희.정영웅)이 베이스캠프 동행.
2015.4.27.,네팔 강진 눈사태에
필사적인 탈출로 기적적인 생환.
'7인 로체 원정대'는 무사히 귀국.
'박범신' 작가가 쓴 소설 <촐라체>를 읽다 보면
'촐라체(6440m)는 힘든 산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 트레킹에 참여한다.
...........박범신.,촐라체 소설 줄거리
히말라야 촐라체에서 조난당한.,형제의 갈등과 화해.
2007년 8월부터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연재.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2005년 봄 촐라체 등반에서
겪었던 조난과 생환의 실화를 모티브 삼아 쓴 작품이다.
'죽음의 지대' 촐라체 북벽에서.,6박 7일 조난과 생환.
배다른 두 형제는 어려운 루트를 직접 개척해 오르면서
등반 중 겪는 시련, 시험을 통해 내면도 서서히 변화한다.
...........................................................................
그들이 동상에 손발이 얼어 고통스러운데도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피부에 와닿지 않았던듯..
그러나, 소설의 느낌처럼 준비없이 접근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트레킹. 그 고통은 너무나 크다.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희망원정대 대장이 대표 사례.
히말라야 칼라파타르 및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64m) 트레킹.
2850m 루클라 공항에서 5550m의 칼라파타르 정상까지의 트레킹은
고소증과 육체적 고통과 한계 때문에., 왕복 120km이지만 극한의 고통.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나름대로 국내 산들을 오르며 훈련.
한라산, 지리산, 무등산, 월출산, 달마산, 두륜산, 백두대간 등.
그러나, 트레킹 내내 자신의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닌 사례가 잦다.
"위장장애로 인한 설사가 나고 밥을 잘 못할 만큼 힘들었다."
"속이 아프니 몸의 에너지가 모두 위장에서 소비되는가 봐요."
"누가 공짜로 에베레스트 트레킹 가재도 다신 오고 싶지 않아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꼭 지켜야 할 금기사항이 있다.
우선, 오르는 도중 목욕할 수 없다.
양치질만 허용하고, 세수는 물티슈로 한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한다.
쉴때는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한다. 머리도 감을 수 없다.
열을 빼앗기면 고소증이 쉽게 나타나기 때문.
물론, 술은 마실 수 없다 등 지킬 항목이 많다.
트레킹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고소증.
고소증이란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산소 부족 상태에서 피로, 두통,
복통, 구토, 호흡곤란, 식욕 부진, 무기력, 불면.
고소증이 계속되면 환각증상, 시력장애, 폐부종,
뇌부종까지 발생해 결국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밤에 두통의 고통에 잠을 자지 못하고,
다음날 또 산을 올라야 하는 고통은 크다.
특히 밤에 잠잘 때 두통으로 많이 나타난다.
“낮에 활동할 때에는 모든 신진대사가 활동하기 때문에
어렵게 두뇌에 산소를 공급하지만, 잠을 잘 때에는 대부분
신진대사도 쉬고 필요한 신진대사만 활동을 하기 때문에
산소 공급이 둔화되어 두통이 나타납니다.” - 김태중 교수
...............................고소증....................................
3000m 이상 높이에 오르면 고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도가 높아지면 대기 중 산소가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고도 해발 2500m를 넘으면 산소량이 평지의 73%로 줄어들고,
해발 3000m 고도에서 68%, 해발 4000m고도에서는 60%로 감소.
해발 5000m 고도를 넘으면 평지의 절반 수준인 53%에 불과하다.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산소가 더욱 희박해진다.
공기 중 산소 농도는 20%로 어디나 비슷하지만
고도가 높아지면 기압이 떨어지며 산소량이 급감.
평지에 있다가 갑자기 고지대로 가면 고산증을 피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두통, 메스꺼움, 구토, 가슴 통증, 호흡곤란 등 증상.
고소증은 고도가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사라진다.
고산증을 피하려면 고도를 서서히 높임으로써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면서 천천히 움직여
인체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고산에서는 느긋함을 배워야한다.
남미 안데스 고원에서는 코카인 원료가 되는
코카잎의 즙을 빨아 혈관을 확장시킴으로서
뇌와 장기의 산소를 늘리는 요법을 사용한다.
해발 6000m 이상 고산은 인간에겐 두려움의 존재다.
히말라야 영봉을 오르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
김창호 산악인이 히말라야14좌를 최단 기간에 무산소 등정.
하지만 서성호 대원은 등정후 8050m 캠프에서 운명.
휴식을 취하다가 고소증세로 그대로 숨져 그의 영혼이
안타깝게도 히말라야 영봉에 편안히 잠들길 바랄 뿐이다.
201년 5월 서성호 대원은 19일 오후 9시(현지 시간)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제4캠프를 김창호 대장과 함께
출발 13시간 만인 20일 오전 9시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정.
서성호 대원은 하산을 시작해 오후 8시
원정대의 제4캠프(8,050m)에 돌아왔다.
이후 21일 오전 5시께 잠을 자다 숨진 것.
대한산악연맹은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현지에서는 서 대원이 무산소 등정에 따른
고소증과 탈진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
- 고소병을 적응하려면?
3000m up에서는 매일 밤 300m이상 넘지 않는곳에서 잠잔다.
3000m에서 3600m까지 올랐다면 다음날 하루는 쉬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산병이 오기전에 하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폭풍우에 갇히거나
체력이 고갈되거나 사고를 겪게되면
고산병에 걸릴 확률은 원인에 따라 더욱 증가.
또한 탈수는 고산병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
하루에 3~4 쿼타(Quart)물은 반드시 마셔라.
투명한 소변을 볼수 있도록 충분한 물을 섭취.
고산병에서 최선의 처방은 하산.
900m만 하산해도 나아질 것이다.
고산병 방지를 위해 주로 처방하는 약.,다이아 목스
이뇨제로서 충분한 수분섭취와 함께 복용해야 한다.
등반가 자신이 너무 빨리 오르면 이를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체력과 적응능력 사이의 상관관게는 없다.
그러나, 과로나 건강상태가 나쁘면 보다 더 지치기 쉽다.
최선이 방법은 건강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오르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탄소화물 2000칼로리 만 축적
이는 빙벽등반 2시간 정도를 할 수 있는 열량.
반면, 체지방은 7만5천 칼로리까지 저장이 가능.
이론 상으로는 히말라야 4좌를 횡단하고도
에베레스트를 오를 정도로 축적되는 열량이다.
그러므로 등반가는 체지방을 태우는 훈련이 필요.
평소 체지방 태우는 훈련으로
등반가는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
7000m 고도까지는 연속적인 유산소운동이 가능.
자신의 몸이 체지방을 빠르게 에너지로 분해한다.
반면 8000m부터 과도한 체지방은 몸무게만 늘릴뿐.
무산소 지역이 가까운 고도에서부터는
체지방을 에너지로 분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때는 고소 음식 만 복용해야 생존이 가능.
등반할때 8000m 고봉에 오르려면
고산병, 무산소, 저산소증, 폐수종.
고소증, 체중부과, 고소뇌수종, 등
팀 닥터와 상담해야 응급처치 가능.
8000m급 고봉은 데드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지역.
신이 선택한 사람 만 출입 가능.
고소증에는
계급도 없고
장사도 없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고소증.
육체적 고통과 한계 때문에 극한의 고통이 따른다.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희망원정대 대장.
“1991년 알래스카 매킨리(6194m) 등정 중 정신을 잃었어요.
잘 먹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등반한 게 원인이었죠. 탈진,
피로, 고소증이 겹쳐 조난됐다 16시간 만에 구조됐지요.”
꿈에 나타난 어머니 “너는 오래 산다더라. 걱정하지 마라”
7번 수술 끝에 손목은 살렸지만 손가락은 끝내 죽어 버렸다.
이후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던 장애인.
처음으로 혼자 팬티를 입고 양말을 신었을 때,
혼자 문을 열고 소변을 해결했을 때 펑펑 울었다.
그리고 결심. “이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자!”
2017.3.17 산악인 김홍빈
중증 장애인 3인과 함께
로체 원정대 발대식.
손가락이 없으면, 로프를 잡을 수 없다.
빙벽을 등반할때 피켈을 힘껏 찍을 수도 없다.
손가락을 잃는 것은 ‘산을 그만 오르라’는 사형선고.
히말라야 등정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산악인 김홍빈(53)은 이런 반응에 시큰둥.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손이 없으면 발로 하지요,
뭐. 하체 근육을 키우면 돼요.” - 희망원정대 김 대장 -
'히말라야 14좌' 로체(8516m) 등정을 위해 3월 24일 네팔 행.
2015년 네팔 대지진으로 발길을 돌린 바 있어 재도전.
2017.3. 16 오후 광주시청에서 열린 로체 원정대 발대식.
김 대장은 2006년 가셔브룸Ⅱ(8035m)를 오른 것을 시작으로
에베레스트(8848m),마칼루(8463m) 등 9좌를 등반 5좌만 남았다.
로체, 안나푸르나, 브로드피크, 낭가파르바트, 가셔브룸 등 5 봉우리.
이번 원정도 히말라야 14좌 등정 프로젝트의 일환인 셈.
“중증 장애인 3명이 원정에 참여합니다. 5년 전 구상한 계획.
이제야 실천하게 됐네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도전.
그리고 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입니다.” - 김 대장 -
그와 함께 가는 이진기 대원(49)은 왼쪽 팔이 없고,
정영웅 대원(46)은 오래전 사고로 몸 왼쪽이 마비됐다.
나정희 대원(50)은 상이군경 출신 이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전남 월출산, 제주 한라산 등지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해왔다.
그는 5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에 도전.
8월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다.
“모두 불가능
하다고 여길 때
가능하게 만드는게
진정한 도전 아닐까요?”
그의 삶은 지치지 않는 삶으로 요약된다.
그의 도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
“많은 사람들이 꿈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잖아요.
저는 정말 몸이 고통스러울 때 살아있다는 것을 항상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이 저한테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노력할 수 있는
채찍을 가하지 않았나 싶네요. "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등반을 꿈꾸었기에
오히려 많은 사고를 겪게 되었죠,"
"그것이 경험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등반에
도전하게 된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가’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는.,희망원정대 대장 김홍빈 산악인
사고 전에 3,000m, 5,000m 등 고산의 정상에
한 번도 서지 못했던 그가 장애를 얻고 난 이후,
히말라야 14좌에 도전하면서 꿈을 이뤄가고 있다.
신발끈 매는 것조차 도전인 그에게 ‘산’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올라야 할 꿈.
김홍빈 산악인은 열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
2015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에 도전하는
광주시 의지를 담아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 등정.
2008.12.11 출국해 빈슨 매시프 등정의 대장정에 나선
김홍빈 산악인은 2009.1. 2일 오후3시50분 등정에 성공.
장애인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대기록.
그는 다친 후배들이 꿈을 잃지 않고 재기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존재가 되고자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장애를 가진 후배들을 위해 직접 등산 장비들을 제작하고 있다.
그 역시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꿈을 이뤄낼 수 있었기에,
후배들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실제로 다친 후배들은 그를 보고 장애를 빨리 극복해나가고 있다.
“내 꿈을 가지고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니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이처럼 그의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꿈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것.
...............김홍빈 산악인...................
연합뉴스 -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53)씨가
히말라야 로체에 재도전한다. - 2017년 3월 12일 -
3월 16일 오후 7시 광주시청 중회의실에서 자신이 이끄는
'희망나눔 2017 한국 로체(8천516m) 원정대' 발대식 예정.
1991년 북미 매킨리 등반 중 동상으로 10 손가락을 잃었다.
김홍빈 산악인
1995년부터 세계 정상급 봉우리 등정에 도전에 나서
7대륙 최고봉 완등, 히말라야 14좌 도전을 이어가며
불굴의 산악인, 희망의 산악인으로 불리우는.,김홍빈.
2017.2.10. 김홍빈(53·광주시산악연맹 부회장) 대장이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한국대표 출전, 메달을 노린다.
9일 제 14회 전국장애인동계체육대회’ 알파인스키 남자
알파인 회전 스탠딩 경기도 대표로 출전, 1분51초61 기록.
50대 나이에 두번째 올림픽에 출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 셈.
2015년에는 로체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위한
열 번째 도전에 나섰다가 네팔 대지진 참사로 등반을 포기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정대원과 함께 월출산에서 암벽기초훈련을
한라산에서 설벽훈련을 하는 등 로체 등정 대장정을 준비해왔다.
1991년에 나이 43세 김홍빈 산악인은
북미 최고봉 알래스카 매킨리산에 도전.
텐트에서 잠이 들어 16시간 만에 구조되었다.
구조과정에 동상에 걸려 10개 손가락 모두 잃었다.
그 사고는 그에게 다만 6년 동안의 좌절을 안겼을 뿐.
1997년부터 세계 7대륙 최고봉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저 산을 한번 보십시오.
저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2016년 낭가파르밧.,김홍빈 대장.
신랑 김홍빈 + 신부 방영은.
1991. 5. 22일 이후 며칠간 김홍빈은 북미 최고봉 매킨리
데날리패스(5,700m) 텐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통나무에 묶인채 하산하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1991. 5월, 김홍빈은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에 발탁되어
8월 말 시샤팡마(8,027m)-초오유(8,201m).,등반 계획.
그동안 에베레스트 낭가파르밧 도전은 모두 실패.
이번 만큼은 정상에 올라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선배 산악인으로부터 매킨리 등반 제의.
그에게는 고산등반능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기회.
그러나, 선배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진보적인 등반을 경험할 겸 속전속결의 단독등반을 계획한 것.
그는 경비행기를 타고 해발 2,000m 높이의 설원에 내려
빙하를 거슬러 매킨리시티에 올라설 때까지 좋았던 컨디션.
매킨리시티에서 적어도 이틀 쉬라는 레인지 충고를 따르지 않고
이튿날 헤드월에 짐을 올리고 다음날 데날리빌리지(5,200m)에 도착.
데날리빌리지에 닿았을 때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설동(雪洞)에서 지낼 계획으로 텐트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마침 데날리빌리지에는 한국 등반대가 머물고 있어 첫날은
그들의 텐트에서 보냈고, 한국등반대와 함께 이튿날 정상 공격.
그러나, 바람이 강하고 기온이 떨어져., 포기.
캠프로 내려오자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한국 대원들 간 마찰로 일부는 정상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텐트에 그대로 머물러 홍빈은 동행을 포기.
당초 하루 쉬고 등반하려던 계획을 접고 오후 1시경
다른 한국 팀의 텐트가 있다는 데날리패스로 향했다.
데날리패스 도착 후, 하룻밤 지내고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다리가 풀려 텐트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눈감으면, 꿈속에
빠져들길 수 차례-. 이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 그는
한국 등반대 조난 신고로 레인저들에 의해 구조된 것.
그는 산밑까지 내려오는 사이 치명상을 입었다.
구조대원들은 눈썰매에 묶은채 그를 끌어내렸다.
줄을 풀어달라 외쳤지만, 구조대가 듣기엔 헛소리,
왼쪽 어깨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움직여지지도 않아서 무의식 중에서도
오른손으로 왼팔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
몸이 풀리기는커녕 이제
오른손마저 얼어붙어 왔다.
매킨리시티에서 앵커리지 병원으로 후송된 김홍빈.
10일 뒤 정신을 되찾자 온몸에 온 동상 치료를 위해
따뜻한 물이 담긴 커다란 물통 속으로 자신이 옮겨졌다.
그러나 얼마뒤 그의 양손가락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병원 측은 엉덩이 살을 옮겨 붙이는 등, 무려 7번이나 수술.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10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던 그
한동안 넋 나간 상태로 지냈다. 원망도 많이 했다.
차라리 텐트 속에서 죽도록 놔두지, 기왕 구조하려면
몸이 로프에 조여 피가 통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 등.원망
그의 처지를 안스럽게 여긴 병원 측.
1억5천만원 입원치료비를 받지 않았고,
본인이 원한다면 미국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왔다.
“꼭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돌아와
제발 어미가 지어준 밥을 먹어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소망을 떨칠 수 없었다.
사고 당한지 3달만의 귀국이었다.
비행에 타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1964년 전남 고흥에서.,태어난 그는
대학시절 잘나가는 스포츠맨이었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간 그는
2학년 때 광주전남암벽대회에 출전, 2위에 오를 정도로
등반 기량이 부쩍 향상된 그는 89년 말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
199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도 참가했다. “고산등반을 제대로 하려면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곤 스키도 열심히 탔다.
89년 동계 전국체전에 출전, 노르딕 개인전 2위에 입상하고, 그 해부터
91년 초까지 사격이 동시에 이뤄지는 바이애슬론 부문에서 1,2,3위 차지.
그러나, 매킨리 등반에서 열 손가락을 잃은 냉혹한 현실.
옷을 입는 것은 물론 대소변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겠다 싶어 약국에 다가서길 수십 번.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데는 선후배들의 도움이 컸다.
함께 살며 밥을 먹여주고 그의 대소변도 받아주었다.
선배의 권유로 장애인용 운전면허증을 따내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
전산실 근무, 골프장 포크레인 등 특수장비 운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모든 직업이 오래 가지 못했다.
“특수장비는 잘 다뤘는데 신체적 결함으로 무면허 운전.
이렇게 지낼 바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
"그게 산이었고, 첫 번째 목표가 7대륙 최고봉 등정.”
97년 여름, 멀쩡한 산악인도 해내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아시아), 아콩카구아(6,959m,
매킨리(북미), 킬리만자로(아프리카), 엘브루즈(5,642m.유럽),
칼스텐즈(오세아니아), 빈슨매시프(남극) 등 7대륙 최고봉 등반.
한동안 대부분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빙하를 넘어
설벽을 넘어서면서 보란듯 하나씩 목표달성.
97년 봄 일본 다테야마(3,015m)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엘브루즈를 시작으로, 98년 매킨리까지 4대륙 최고봉 등정.
에베레스트는 걸림돌이었는데 2000년 봄
당시 14좌 등정 레이스를 펼치던 한왕용씨
밀레 홍보부장의 도움으로 마나슬루 원정 참가.
그해 가을에는 동갑내기 김영식씨(대한산악연맹 청소년이사)
도움으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지만 첫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매킨리 사고 때 폐수종과 뇌부종을 함께 앓았어요.
의사가 다시 고산에 가면 죽을 확률 50%라면서 만류.
그런 이유 때문인지 고소 적응속도가 매우 떨어졌어요.
대원 모두 저를 정상에 서게 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하지만 제 욕심만 차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캠프3에서 하산.
이듬해 2002년 매킨리 등정에 성공해 10년 만에 한을 풀었다.
이후 김홍빈은 에베레스트 재도전을 목표로
고소 경험을 쌓기 위해 레닌피크(7,134m.등정),
코스클락(7,028m.등정), 가셔브룸2봉(8,047m.등정)
시샤팡마(8,027m.등정)로 이어지는 고산 등반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김홍빈은 장애인 스키 선수로도 활약했다.
2000년 동계 전국체전 알파인 회전스키 장애인부 2위 입상.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과 2005년 오스트리아
티롤 IPC 유러피언컵 대회 등 9회나 장애인 국제대회에 참가.
.
2006년 국가대표 유니폼을 반납
2007년 봄 성공한 에베레스트 등정.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기까지 도와준 분들
많았어요. 물질적으로 밀어고 건강을 챙겨주시고….
정상에 오를 때 컨디션이 좋았어요. 이것 역시
후배들이 많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김홍빈은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고산 등반에 나설 때마다
배낭 깊숙이 간직하는 고 오희준(10개 고봉 등정)씨의 사진.
두 사람 역시 가셔브룸 원정 때 인연,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면 낭가파르밧과
다울라기리(8,167m)를 같이 등반하기로 약속.
그러나 김홍빈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캠프로 내서자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해발 7,900m 캠프에서
동료 대원과 함께 머물던 오희준씨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었다.
“그래서 지난 가을 다울라기리 원정을 밀어붙였던 거예요.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산이거든요. 요즘 정상에 올라설 때마다
희준이 사진을 꺼내 봐요. 등반할 때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투정도 부리고 대화도 나눠요. 멋진 후배였어요.”
김홍빈 산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