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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은 두 봉(峰)이 있다. [제1편]
2023년 02월 20일
○ “백두산(白頭山)”은, 한반도(韓半島)의 영산(靈山) 즉 ‘신령(神靈)이 깃든 성스러운 산(山)’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한데 뭐가 신령(神靈)스럽다는 것일까? 거대(巨大)한 화산폭발(火山爆發)로 인한 그 모습이 신령스럽다는 것일까? 만년설(萬年雪 : 氷河)이 쌓여있어 누구도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것에 경외(敬畏) 때문일까?
「백두산(白頭山)」에 대해서 “역사통설(歷史通說)”【세간(世間)에 알려진 일반적(一般的)인 역사해설(歷史解說)】논자(論者) 들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
《함경남도·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높이 2,744m【중국측 발표는 2,749.6m】이다. 활화산(活火山)으로 북위 41°31′∼42°28′, 동경 127°9′∼128°55′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약 8,000㎢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산의 북쪽으로는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두산(白頭山)]》라고 하였다.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에 따르면 : 「불함산(不咸山)·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이며, 「백산(白山)·사태산(徒太山)·도태산(徒太山)·태황산(太皇山)·태백산(太白山)·태산(太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서는 ‘가이민상견아린산(歌爾民商堅阿隣山)’이라고 하였다고 전(傳)해지고 있다.
(1) 山海經 大荒北經과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기를 : 《大 荒 之 中 有 山 名 不 咸 在 肅 慎 氏 之 國 : 대황(大荒)의 가운데 불함산(不咸山)이 있으며 숙신씨(肅愼氏) 나라가 있다. 淮 南 子 墬 形 篇 有 肅 慎 民, 周 書 王 會 篇 云 :稷 慎 大 麈. 孔 晁 注 云 :稷 慎, 肅 慎 也. : 회남자(淮南子) 지형(墬形) 편에 숙신민(肅愼民)이 있다. 주서(周書) 왕회(王會) 편에서 이르기를, 직신(稷愼)은 대주(大麈)이다. 공조(孔晁)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직신(稷愼) 곧 숙신(肅愼)이다.》하였다.
➊ 산해경(山海經) 海外西經 :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伐帝,于此取之.〉하였고, 〈大荒北經: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이라고 하였으니, “숙신국(肅愼國)이나 불함산(不咸山)”은, “서(西)쪽과 북(北)쪽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고,
➋ 회남자전(淮南子傳) 왈(曰) : 《팔극(八極) 중에 “西北方曰不周之山, 曰幽都之門”이라고 하였으니 “불주산(不周山)은 총령(葱嶺), 곤륜(崑崙)이요, 유도(幽都)는 유주(幽州)이니 서북방(西北方) 땅에 있었다는 것이며, ”凡海外三十六國, 自西北至西南方, 有肅愼民“이라 하였으니, “숙신민(肅愼民)은 서북(西北)에서 서남방(西南方)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위의 글 ‘➊+➋’에 의하면 : 『‘불함산(不咸山)’은 북(北)쪽과 서(西)쪽의 대황(大荒)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이고,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서북(西北)쪽과 서남(西南)쪽 사이’의 땅에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상고시대(上古時代) 기록(記錄) 중에서 중요(重要)한 지리적(地理的) 조건(條件)이 된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제국주의(帝國主義) 사학자(史學者)들【특히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참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까지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인위적(人爲的)으로 조작(造作)할 수 없다.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 또한 마찬가지다. 금방(今方) 탄로(綻露) 날 수밖에 없다.
➤ 이러한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의 말씀에 따르면 : “불함산(不咸山)은, 오늘의 한반도(韓半島) 백두산(白頭山)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서(西)쪽이나 북(北)쪽이 될 수 없고, 서북(西北)에서 서남(西南)쪽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卽)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전(淮南子傳)이 한반도(韓半島)를 중심(中心)으로 기록(記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정도(程度)도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사가(史家)들은 “머저리 중의 머저리들이다”
(2) 魏書 : 《勿 吉 國 南 有 徒 太 山 魏 言 太 白. : 물길국(勿吉國) 남(南)쪽에 ‘사태산(徙太山)’이 있다. 위(魏)【元魏=北魏】나라 말로 태백(太白)를 말함이다.》
(3) 北史 : 《靺 鞨 國 南 有 從 太 山 者 華 言 太 皇 : 말갈국(靺鞨國)의 남(南)쪽에 ‘태산(太山)’이 있는데, 화(華)【화하(華夏)】말로 태황(太皇)이다.》
(4) 新唐書 : 《靺鞨居肅慎地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亦曰徒太山與髙麗接 : 말갈(靺鞨)이 있는 곳은 숙신(肅愼)의 땅이다. 속말말갈(粟末靺鞨)들이 사는 곳은 최 남쪽 태백산(太白山)이 닿는 곳에 있는데, 또 사태산(徙太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高麗)와 접해 있다.》
《渤海大氏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奥婁河樹壁自固 : 발해(渤海) 대씨(大氏)가 요수를 건너(度) 태백산(太白山)의 동북(東北)쪽 오루하(奧婁河)의 막다른 곳에 나무성채와 벽을 단단히 쌓고 보전하였다.》
(5) 通典 : 《挹婁即古肅慎其國在不咸山北 : 읍루(挹婁) 곧 옛 숙신(肅愼)인데 그 나라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6) 太平寰宇記 : 《挹婁國在不咸山北夫餘北千里.[案通考云在夫餘東北千里] : 읍루국(挹婁國)은 불함산(不咸山)의 북(北)쪽에 있는데 부여(夫余) 북쪽 천리(千里)에 있다 [통고(通考)에 따르면, 부여(夫余)의 동북(東北) 천리(千里)에 있다고 하였다]》
(7) 契丹國志 :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乃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 : 장백산(長白山)은 냉산(冷山) 동남(東南) 천여(千餘) 리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그곳에 살고 있어 그 산(山)의 금수(禽獸)들은 모두 백색이다.》라고 하였다.
➤ ‘글란국지(契丹國志)’에 따르면 : 〈냉산(冷山) 동남(東南) 천여(千餘) 리에 “장백산(長白山)”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장백산(長白山) 서북방(西北方) 천여(千餘) 리에 “냉산(冷山)”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현재(現在)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에서 서북방(西北方) 일천(一千)여 리(餘里) 되는 곳에 “냉산(冷山)”이라는 산(山)은 없다. ➨ 이는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北坊)에 있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이 아니라는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다.
‘송(宋)’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 의하면 : 「冷山去燕山三千里,去金國所都二百餘里,皆不毛之地. : “냉산(冷山)”은 연산(燕山)에서 삼천리(三千里) 떨어져 있으며, 금(金)나라 소도(所都)까지 이백(二百) 여리(餘里)를 가는데, 모두 불모(不毛)의 땅(地)이다.」하였으니, ‘냉산(冷山)’은 ‘연산(燕山)’으로부터 3,000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인데, 그게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 위의 ‘글란국지(契丹國志)’에 따르면 : “냉산(冷山) 동남(東南) 1천여 리에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하였는데, 여기서 냉산(冷山)은 ‘벨루하산【벨루하산(Belukha,Mt)】’의 서봉(西峯)인 ‘휘등산(輝騰山)=우의봉(友誼峰)【4,374 또는 4,440m : 原意, 冷山】을 “냉산(冷山)”이라고 했다는 설(說)에 따르면 : 장백산(長白山)은, 항애산(杭愛山)의 주봉(主峯)인 악특강등격리봉【鄂特岡騰格里峰 : 4,031m : 산정(山頂)에는 만년설(萬年雪)이 쌓여있다고 한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고(典故)는,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자료(資料)가 너무 빈약(貧弱)하다. 즉 벨루하산【벨루하산(Belukha,Mt)】의 서봉(西峯)인 ‘휘등산(輝騰山)=우의봉(友誼峰)【4,374 또는 4,440m】’이 “냉산(冷山)”이라는 근거(根據)가 너무 부족(不足)하다. 즉(卽) 21세기(世紀) ‘위키백과’에서만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동(東) 측의 더 높은 ‘별노합산(別盧哈山)=주봉(主峯)’은 뭐냐? 설명(說明)이 없다.
또 항애산(抗愛山)의 주봉(主峯)인 악특강등격리봉【鄂特岡騰格里峰 : 4,031m】의 산정(山頂)에 만년설(萬年雪)이 쌓여있다고 하였지, 그곳에 80리에 달하는 천지(天地)가 있다고 하지 않았다. 물론(勿論) 이곳에도 산정호수(山頂湖水)는 있다고 한다.
(8) 金史 : 《女 真 地 有 長 白 山 : 여진(女眞) 땅에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㑹 寧 府 㑹 寧 縣 有 長 白 山 : 회령부(會寧府) 회령현(會寧縣)에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9) 明一統志 : 《長白山在故㑹寧府南六十里横亘千里高二十里其巔有潭周八十里 : 장백산(長白山)은 옛 회령부(會寧府) 남(南)쪽 60리에 있다. 횡(橫)【동서(東西)】으로 천리(千里)에 뻗쳐있는데, 높이는 20리이며, 산꼭대기에는 주위가 80리에 이르는 못(潭)이 있다.》
(10) 滿洲源流考) :《上諭長白山係本朝祖宗發祥之地.案長白山在吉林烏拉城東南横亘千餘里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巔有潭為鴨緑混同愛嘑三江之源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亦名徒太山亦名太末山其名長白山則自金始也 : 임금의 말씀에 따르면(上諭) : 장백산(長白山)은 본조(本朝)【금(金)】조종(祖宗)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상고해보면 장백산(長白山)은 길림(吉林), 오랍성(烏拉城)의 동남(東南)에 횡(橫)【동서(東西)】으로 천리(千里)에 뻗쳤으며, 동(東)쪽으로 녕고탑(寧古塔), 서(西)쪽으로 봉천부(奉天府)의 여러 산(山) 모두가 줄기로 뻗어있다. 이 산(山) 산꼭대기(巓)에는 못(潭)이 있으며,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애호강(愛嘑江)등 세 강의 발원지(發源地)이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며, 또한 태백산(太白山)이며, 또 백산(白山)이며, 또 사태산(徙太山)이며, 또 태말산(太末山)이다. 장백산(長白山)이라는 그 이름은 금(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두 개(個)의 봉우리가 있다.
○ 그러함에도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하나의 봉우리가 아닌 두 개(個)의 산(山)이 있어, 북(北)쪽에는 백두산(白頭山)이 있고, 동(東)쪽 또는 남(南)에는 장백산(長白山)이 있어, 두 산(山)은 서로 가깝지만 떨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 특히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인조(仁祖) 조와 숙종(肅宗) 조”에 이러한 기록(記錄)이 집중(集中)되어 있고, 사대부가(士大夫家)들의 문집(文集)에도 특정(特定) 인물(人物)들의 기록(記錄)에 집중(集中)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特異)하다.
➤➤➤ 더불어 우리 카페(Cafe)에서 확정(確定), 주장(主張)하고 있는 〈금산(金山)=알타이산(Altay,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의 지세(地勢),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매우 유사(類似)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卽),
(11) 朝鮮王朝實錄 仁祖 2년, 甲子 9월 28일(기묘) [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 咸鏡監司李昌庭馳啓曰 : ‘함경감사 이창정’의 치계(馳啟)에서 이르기를 :
《己卯/ 咸鏡監司李昌庭馳啓曰 : "臣巡到三水, 審視關防形勢, 則白頭、長白兩山, 皆在眼前。 問于父老則 ‘白頭去我境, 僅四五日程, 長白則尤近。; 함경 감사 이창정(李昌庭)이 치계(馳啟) 하기를 : 신(臣)이 순행(巡行)차 삼수(三水)에 도착하여 관방(關防)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백두(白頭)·장백(長白)”의 두 산(山)이 모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로(父老)에서 물어보니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지경(地境)에서 거리가 겨우 4∼5 일정(日程)이고, 장백산(長白山)은 더욱 가깝습니다. 舊有胡人部落古未坪、韓民坪, 自戊午年盡爲奴酋所捲歸, 兩山以南, 今無所住之胡。: 예전에는 호인(胡人)들의 부락(部落)으로 고미평(古未坪)과 한민평(韓民坪)이 있었는데 무오년부터 모두 노추(老酋)가 데리고 돌아갔으므로, 지금은 두 산(山)의 남(南)쪽에 거주하는 호인(胡人)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自白頭至奴穴, 僅十三日程, 以賊路觀之, 則西水羅之路, 距雲寵、惠山, 僅四五日程, 馬竹嶺之距仁遮, 亦僅六七日程; 雪雲嶺之距茄乙坡, 三四日程; 五萬嶺路之距別害, 四五日程; 如朱雪、烏蹄等部落, 則依舊居住於白頭山之北, 距我邊不遠。 如是而我境沿邊各堡, 無一可恃之處 : 백두산(白頭山)에서 오랑캐의 소굴까지가 겨우 13 일정(日程)인데, 적로(賊路)를 살펴보건대 서수라(西水羅)의 길에서 운총(雲寵)·혜산(惠山)까지가 겨우 4∼5 일정(日程), 마죽령(馬竹嶺)에서 인차(仁遮)까지가 또한 겨우 6∼7 일정(日程), 설운령(雪雲嶺)에서 가을파(茄乙坡)까지가 3∼4 일정(日程), 오만령(五萬嶺) 길에서 별해(別害)까지가 4∼5 일정(日程)이었으며, 주설(朱雪)·오제(烏蹄) 등 부락은, 옛날 그대로 백두산(白頭山) 북(北)쪽에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 변방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데도 우리나라 국경 연변(沿邊)의 각보(各堡)는 하나도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중략(中略).》하였다.
위의 글 중에서 핵심적(核心的)인 내용(內容)은,
➊ 《臣巡到三水,審視關防形勢,則白頭,長白兩山,皆在眼前.問于父老則,白頭去我境,僅四五日程,長白則尤近 : 함경감사(咸鏡監司) 이창정(李昌庭)의 치계(馳啟)에 따르면 :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하나의 산(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個)의 산(山)을 각각(各各) 말하는 것으로, 그 하나는 백두산(白頭山)이요, 또 하나는 장백산(長白山)인데, 장백산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가깝고, 백두산은 4-5 일정(日程)에 있다는 것이다”》‘함경감사(咸鏡監司) 이창정(李昌庭)’이 직접 보았고, 가깝고 먼 것에 대해서는 토착민(土着民)들의 증언(證言)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➋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장백산(長白山)”이요, 백두산(白頭山)은, 조금 멀리 4-5 일정(日程)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면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은, 크게는 하나의 산(山)이지만 두 개의 큰 봉우리가 있어, 하나는 장백산(長白山)이요, 또 하나는 백두산(白頭山)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12) 朝鮮王朝實錄 肅宗 18년 임신[1692, 강희 31] 2월 17일(정유) : 우의정 민암(閔黯)과 예조판서 유명현(柳命賢)이 사신을 맞이할 방도에 대해 아뢰다.
《右議政閔黯,禮曺判書柳命賢請對白上曰 : 金翊漢賫去五使路程記,北路惠山以後,自雲寵至吉州,定以十站矣 : 우의정 민암(閔黯)과 예조판서 유명현(柳命賢)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익한(金翊漢)이 가지고 간 다섯 사신(使臣)의 노정기(路程記)에, 북쪽 길의 혜산(惠山) 이후를 운총(雲寵)에서 길주(吉州)까지의 10참(站)으로 정했었는데 卽見咸鏡監司狀啓 : 自惠山由栢德嶺,過蘆隱東山至茂山,不過三四日程.而路不甚險,且處於白頭之南長白之北,正是豆滿上流,旣有此捷路,不必由雲寵,以抵絶遠之吉州. : 즉(卽) 지금 함경감사(咸鏡監司)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 혜산(惠山)에서 백덕령(栢德嶺)을 경유(經由)해서 노은동산(蘆隱東山)을 지나 무산(茂山)으로 가면, 3, 4일의 일정에 지나지 않고, 길도 그다지 험하지 않으며, 또한 백두산(白頭山) 남(南)쪽이 되고, 장백산(長白山) 북(北)쪽이 되어 바로 두만강(豆滿江)의 상류가 되니, 이미 이처럼 빠른 길이 있으므로 운총(雲寵)을 경유해서 동떨어지게 먼 길주(吉州)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 위의 글 역시(亦是) (11) 과 똑같은 경우(境遇)로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 장백산(長白山)의 북(北)쪽“이란 말은, 「”백두산(白頭山)은 멀리 있고, 장백산(長白山)은 아경(我境)에서 더 가깝게 있으며,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사이를 흐르는 하천(河川)이 바로 “두만강(頭滿江)”이다.」라는 설명(說明)이다.
● 결국(結局) 「“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이 따로따로 있어, 두 개(個)의 큰 봉우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13) 朝鮮王朝實錄 肅宗 38년 임진[1712, 강희 51] 3월 4일(丁亥) : 당상들이 청의 차관 목극등(穆克登)을 빈접(賓接)하는 일에 대해 품정하다>
《且白頭長白兩山間,有甫多會山分水嶺,今行似當由此路.中略. :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두 산 사이에 보다회산(甫多會山)의 분수령(分水嶺)이 있는데, 이번 행로(行路)는 이 길을 경유해야 할 듯하니, 중략(中略).》하였다.
➤ 위의 글 역시 ‘(11)+(12)’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사이에 보다회산(甫多會山)의 분수령(分水嶺)이 있어 이곳으로 갈 것 같다”는 설명(說明)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글 설명(說明)은 ‘(11)+(12)’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具體化)한 것 같은데, 『북쪽에 있는 “백두산(白頭山)”과 남쪽의 “장백산(長白山)” 사이에 “보다회산(甫多會山)”의 분수령(分水嶺)이 있다.』라는 뜻이자. 『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은 하나의 산(山)이 아니라 별도(別途) 두 개(個)의 봉우리가 있어 서로 다르게 불렀다는 것이다.』
(14) 朝鮮王朝實錄 成宗 12년 신축 [1481, 성화 17] 10월 17일(무오)
《臣以古今天下之勢言之,九州之內,固中國帝王之所理也,四海之外,西域則葱嶺流沙幾三萬里,北方則沙漠不毛,窮荒無際,東夷則扶桑日本,環海爲國,南蠻則占城眞臘,溪洞瘴厲,此自古不通乎中國者也,西曰巴蜀、劒閣之路,秦始開之,南曰儋耳瓊崖之地,漢始郡之.東北關外曰,營州、遼東、遼西之地也,西北關右曰,凉州河西五郡是也,此至後世,通乎中國者也. :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中國) 제왕(帝王)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유사(流沙) 약 3만 리나 되며, 북(北)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부상(扶桑). 일본(日本)으로써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 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처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요동(遼東)·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惟我大東,居遼水之東,長白之南,三方負海,一隅連陸,幅員之廣,幾於萬里. : 생각건대 우리나라 대동(大東)은, 요수(遼水)의 동(東)쪽 장백산(長白山)의 남(南)쪽에 살고 있으니, 3방이 바다를 짊어지고, 한쪽 모퉁이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땅의 넓이가 넓어, 수만리(數萬里)나 됩니다.》하였다.
➤ 《東夷則扶桑日本,環海爲國 : 동이(東夷)는 부상(扶桑). 일본(日本)으로써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惟我大東,居遼水之東,長白之南,三方負海,一隅連陸,幅員之廣,幾於萬里 : 우리나라 대동(大東)은, 요수(遼水)의 동(東)쪽 장백산(長白山)의 남(南)쪽에 살고 있으니, 3방이 바다를 짊어지고, 한쪽 모퉁이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땅의 넓이가 넓어, 수만리(數萬里)나 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➊ ‘동북(東北)’이란, ‘어디에서 본 동북(東北)이냐?’ 하는 문제(問題) 제기(提起)이며, ➋ 요수(遼水)의 동(東)쪽, 장백산(長白山)의 남(南)쪽이 얼마나 큰 땅이기에 수만리(數萬里)가 된다는 건가? ➌ 이건 오늘날의 ‘요수(遼水)와 장백산(長白山)이 아니었다는 증거(證據)다.’
(15) 朝鮮王朝實錄 正祖 9년 을사 [1785, 건륭 50] 4월 19일(무술) : 사은사 서장관 이정운의 별단
《臣於路次,逢欽差使人探問,則內閣侍讀學士尹贊圖,奉命往祭北海廟堂及盛京福昭陵,興京永泰陵.北海廟堂,在於長白山,以淸朝發祥之地,倉建廟堂云 : 신이 길에서 흠차사신(欽差使臣)을 만나서 탐문하였더니, 내각(內閣) 시독학사(侍讀學士) 윤찬도(尹贊圖)가 어명을 받들고 북해 묘당(北海廟堂)과 성경복소릉(盛京福昭陵)· 흥경영태릉(興京永泰陵)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북해(北海) 묘당(廟堂)은 장백산(長白山)에 있는데, 청조(淸朝)의 발상지(發祥地)이기 때문에 묘당(廟堂)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➊ 장백산(長白山)에 묘당(廟堂)을 세웠는데, 그게 “북해묘당(北海廟堂)”이란 말은, 「오늘날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청(淸)”에서 : 장백산(長白山)은, 동(東)쪽에서도 극동(極東)에 있는 산(山)이기 때문에 “북해(北海)의 묘당(廟堂)”이 될 수 없다.
➋ ‘청조(淸朝)의 발상지(發祥地)’가 ‘장백산(長白山)’이었다고 한다면 : 이는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의 장백산(長白山)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장백산(長白山)이 아니라는 증거(證據)다.
즉(卽), “청조(淸朝)”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장백산(長白山)이 있었다는 명확(明確)한 근거(根據)다. 그래야 ‘북해(北海) 묘당(廟堂)’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장백산(長白山) 지대(地帶)”를 가리켜 “북해(北海)”라고 하여 “장백산(長白山)에 북해(北海) 묘당(廟堂)”을 건립(建立)했다고 하면 : “청조(淸朝)나 사가(史家)들은 ‘머저리 중의 머저리, 멍청이 중의 멍청이들’로 역사(歷史)에 길이 빛낼 일이다.”
왜냐하면 “청조(淸朝)”에서 볼 때 오늘날의 ‘장백산(長白山) 묘당(廟堂)’은 ‘동해(東海) 묘당(廟堂)’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북해(北海) 묘당(廟堂)’이 될 수 있겠는가!
(16) 朝鮮王朝實錄 正祖 11년 정미 [1787, 건륭 52] 2월 25일(계해) : 동지 서장관 이면긍이 황제의 근황 등에 대해 별단을 올리다
《皇帝命內閣,纂皇淸開國方略, 追述創業顚末, 而卷帙頗多, 今已累年, 尙未脫藁 : 황제께서 내각(內閣)에 명하여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을 찬술하여 창업(創業)의 전말(顚末)을 추술(追述)하게 하였는데, 권질(卷帙)이 아주 많아서 지금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껏 탈고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故文字, 雖未得見, 其第一卷曰發祥世紀, 槪紀沙漠肇起時事。 其言曰: "長白山高二百餘里, 綿亘千餘里, 山之上有潭, 曰闥門。: 그래서 그 문자는 비록 얻어보지 못하였으나, 그 제1권은 ‘발상세기(發祥世紀)’라 하며 대강 사막(沙漠)에서 처음 일어나던 때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높이가 2백여 리며 1천여 리를 뻗쳐있으며, 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이름을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중략(中略).》
➤ ‘청(淸)’의 선대(先代)는, 「“여진(女眞=女直)”이며, “말갈(靺鞨)”이며, “물길(勿吉)”이며, “읍루(挹婁)”이며, “숙신(肅愼)”이다.」 대부분(大部分)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이 똑같다. 문제(問題)는 이들 숙신씨(肅愼氏)가 ‘동북방(東北方) 모퉁이에 있었는가?’ ‘서북방(西北方) 땅에 있었는가?’ 하는 점인데,
➊ 산해경(山海經)은 : 〈서(西)쪽과 북(北) 사이에 있었다.〉하였고, ➋ 회남자(淮南子)에서도 이르기를 : 〈숙신민(肅愼民)은 서북(西北)과 서남(西南)사이에 있었다.〉하였으니, ‘동북방(東北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이 “숙신씨(肅愼氏)의 나라다”
이건 대륙사(大陸史) 최고(最高)의 기록(記錄)이라는 수천(數千) 년 전(前) 기록(記錄)인 “산해경(山海經)”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또한 회남왕(淮南王) 유안(劉晏)이 수천(數千)의 학자(學者)들을 초빙(招聘)하여 편찬(編纂)했다는 “회남자(淮南子)”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숙신씨(肅愼氏) 나라 또는 숙신민(肅愼民)들은 북(北)쪽에서 서(西)쪽 사이의 대황(大荒) 땅의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북(北)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➌ 또 ’청(淸)의 발상세기(發祥世紀)‘에서는 〈“청(淸)”은, “처음 사막(沙漠)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記錄)하였다.”〉고 하였는데,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이 극도(極度)로 파괴(破壞)된 21세기 오늘에도 동북방(東北方) 땅에는 존재(存在)하지 않으며『사막지대(沙漠地帶)는 오직 서북방(西北方) 땅에만 존재(存在)하고 있을 뿐이다.』
’발상지(發祥地)‘란 : “역사상(歷史上) 큰 의의(意義)가 있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난 땅이나, 나라를 처음 열은 인물(人物)이 태어난 땅” 등을 말하는 것인바, “청(淸)은, 처음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흥기(興起)했다.”는 말이 정확(正確)한 것이다.
➍ 이에 따르면 “청(淸)의 발상지(發祥地)는 서북방(西北方)의 사막지대(沙漠地帶)이니, 그 북방지대(北方地帶)가 북해(北海)가 되며, 묘당(廟堂)을 세운 곳이 장백산(長白山)이고, 북해묘당(北海廟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건 ‘청조(淸朝)’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북해묘당(北海廟堂)’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별노합산(別盧哈山)”이다. 즉 〈금산(金山)=알타이산(Altay,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이다.
〈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은, 두 개(個)의 봉(峰)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별노합산【別盧哈山 : 동(東)벨루하봉 : 4,506m】이요, 또 하나의 봉(峰)은 우의봉【友誼峰 : 輝騰山 : 冷山 : 서(西)벨루하봉 : 4,374m】을 말하는 것이다. 그 외(外)에도 규둔봉【奎屯峰 4,082m】등이 있다.
➤ 즉(卽) 별노합산【別盧哈山 : 벨루하산(Belukha,Mt) : 4,506m】은, 2개의 큰 봉(峰)이 있는데, ➊ 동(東)쪽에는 최고봉(最高峰)인 별노합산【別盧哈山 : 벨루하산(Belukha,Mt) : 4506m】이 솟아있고, ➋ 서(西)쪽에는 ‘휘등산(輝騰山)=우의봉(友誼峰)【4,374:4440m : 原意, 冷山】이 솟아있다. 이밖에 또 규둔봉(奎屯峰 4,082m)등이 있다.
이런 산(山)에 묘당(廟堂)을 세웠다면 당연(當然)히 “북해(北海) 묘당(廟堂)”이 될 것임은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 《‘장백산(長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은, 두 개(個)의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며, 두 개(個)의 산(山)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위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중에서도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숙종실록(肅宗實錄)’에서 집중적(集中的)으로 기록(記錄)되어 말해주고 있다.
○ 이러한 옛 기록(記錄)에 후대(後代)인들인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로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만이 우리들의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만족(滿足)하며, 신령(神靈)스러운 경외(敬畏)를 느끼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일까!
이렇게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냉전체제(冷戰體制)하에서 태어난 ‘반(半) 식민지(植民地) 신생국(新生國)’일 뿐으로 조상(祖上)도, 조국(祖國)도 없는 나라일 뿐이다.”』라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그 땅’은, ‘그 땅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白頭山) 역시(亦是) 그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반도(半島) 땅이 ‘조국(祖國)의 산천(山川)’이라고 말할 것인가?
우린 뭔가? 뭐가 조국(祖國)의 산천(山川)인가? 조국(祖國)이란 말 그대로 조상(祖上) 대대(代代)로 살아온 그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오늘 우리들의 ‘조국(祖國)의 산천(山川)’은 어디에 있는가? 무겁고 참 답답한 이야기다. [제2편으로 계속(繼續)]
2023년 02월 20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