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봉은사 대웅전 앞 (2016. 03. 12)
子曰(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從我於陳蔡者(종아어진채자)
“나를 陳(진)나라와 蔡(채)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이
皆不及門也(개불급문야)로다.”
<지금> 모두 門下(문하)에 있지 않구나.”
德行(덕행)엔 顔淵(안연)閔子騫(민자건)
冉伯牛(염백우) 仲弓(중궁)이요,
덕행에는 안연 ・ 민자건 ・ 염백우 ・ 중궁이었고
言語(언어)엔 宰我(재아)子貢(자공)이요,
언어에는 재아 ・ 자공이었고,
政事(정사)엔 冉有(염유) 季路(계로)요,
정사에는 염유 ・ 계로였고,
文學(문학)엔 子游(자유) 子夏(자하)니라.
문학에는 자유 ・ 자하였다.
-논어 선진 2-
今釋(茶山의 해석)
공자께서는“옛날에 내가 陳(진)나라, 채나라에 있을 때 나를 따라 환난을 겪은 제자들이 아직도 모두 위나라 성문에 이르지 못 했구나”라고 하여, 그때 환난을 당한 제자들이 아직 모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공자님의 제자들은 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덕행이 뛰어나 칭찬을 받았던 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고, 언변이 뛰어나 칭찬을 받았던 자는 재아, 자공이며, 정사에 뛰어났던 사람은 염유, 자로이고, 문학에 뛰어났던 사람은 자유, 자하였다.
〇다산은 “열 사람 모두 字(자)를 쓴 것으로 보아서 공자님의 말이라 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주주》에서 陣(진)나라와 채나라에 수행했던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의혹이 간다. 당시 염유는 季氏(계씨)의 신하로 행하지 않았고《좌전》, 子張(자장)은 수행했는데도 《사기》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공자는 당시 육십일 세였고, 자유와 자하는 공자보다 각각 사십요 세, 사십사 세가 적으니《사기》, 십육 세, 십칠 세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문학으로 칭찬을 받았겠는가?
朱註(朱子의 집주)
① 朱子(朱熹)
孔子 嘗厄於陳蔡之間하실새 弟子 多從之者러니 此時에 皆不在門이라 故로 孔子思之하시니 蓋不忘其相從於患難之中也시니라 弟子因孔子之言하여 記此十人하고 而幷目其所長하여 分爲四科하니 孔子敎人에 各因其材를 於此에 可見이니라
공자께서 일찍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액을 당하실 적에 제자가 많이 따르더니, 지금에는 모두 다 문하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들을 생각하신 것이니, 이는 환난 가운데 서로 따르던 것을 잊지 않으신 것이다.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따라 이 열 사람을 기록함과 더불어 그 장점인 바를 지목해서 나누어 四科(사과)로 만들었으니, 공자께서 사람을 가르침에 각각 그 재능으로 인하였음을 이에서 볼 수 있다.
② 程子(明道)
程子曰 四科는 乃從夫子於陳蔡者爾라 門人之賢者 固不止此하니 曾子傳道而不與焉 故로 知十哲은 世俗論也니라
정자(명도)가 말씀하셨다. 네 과목(四科)은 다만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공자를 따른 자들뿐이다. 문인 중에 어진 자가 진실로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니,曾子(증자)는 道를 전수 했는데도 여기에 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十哲(십철)은 세속의 말임을 알 수 있다.
③ 慶源輔氏
夫子之門에 如此十人者는 固高矣나 然이나 受業身通者 凡七十人이니 則豈獨此十人을 可名爲哲哉리오 故로 程子 引曾子以爲證하시고 而斷十哲爲世俗之論이라하시니 所以敎를 學者 使求於聖人之門은 不止此十人也라
부자(공자)의 문하에 이 열 사람과 같은 자는 진실로 (학문이) 높으나 공부하여 몸으로 통한 자는 무릇 70인이니, 곧 어찌 다만 이 열 사람만을 가히 밝다고 이름 했으리오? 그러므로 정자께서 증자를 이끌어서 증거 삼으시고, 십철을 가른 것은 세속의 의논이 된다고 하시니, 가르친 바를 배운 자가 성인의 문하에서 구한 것은 이 열 사람에 그치지 아니했던 것이다.
④ 新安陳氏
曾子는 晳之子로 是時에 尙少하여 不得與陳蔡之徒라 故로 不在列하고 又如有若은 雖賢이나 亦以不從此行하니 而不在列焉이라
증자는 증석의 아들로 이때에 아직 어려 진채의 무리들과 함께 하지 못했으므로 대열에 있지 않고, 또한 유약 같은 이는 비록 어질었으나 또한 이 행렬을 따라가지 못했으니 대열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⑤ 雲峯胡氏
德行은 卽孟子所謂有成德者요 言語政事文學은 卽孟子所謂有達才者라 然이나 孟子於成德之上에 有如時雨化之者하니 集註所謂顔曾이 是也라 於此에見論語四科는不過門人所記요而孟子五敎는又能發門人之所未發이라
덕행은 곧 맹자가 이른바 덕을 이룬 자(成德者)를 말함이고, 언어 정사 문학은 곧 맹자가 이른바 재질을 통달한 자(達才者)를 말함이라. 그러나 맹자에 덕을 이룬 자의 위에 때로 비가 와서 화하는 것 같은 자가 있으니 집주에 이른바 안회와 증자가 이들이라. 여기에서 논어의 사과(四科)는 문인들이 기록한 바에 지나지 않고, 맹자의 오교는 또한 문인들이 발표하지 못한 바를 능히 발표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참고 : 맹자 盡心章 上 40장, “君子所以敎者 五니 有如時雨 化之者하며 有成德者하며 有達財者하며 有答問者하며 有私淑艾者하니 此五者는 君子之所以敎也니라”)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家苑 註 1>
공자가 주유철환 시 겪었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거론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陳蔡絶糧(진채절량)’이다. 공자는 이 시기를 함께 했던 제자들이 “皆不及門也(개불급문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공자가 말년을 노나라에서 보낼 때라는 관점에서 ‘皆不及門也’를 ‘지금은 모두 문하에 없도다’라고 해석한다. 공자 임종시에 자공이 그 옆을 지킨(자한편 11장 해설 참조) 것으로 보아 이 해석은 적절치 않다.
한편 진채절량의 시기에 공자를 따랐던 열 명의 제자 가운데 진나라나 채나라에서 벼슬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皆不及門也’를 ‘모두 벼슬에 오르지 못했도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門’을 벼슬자리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정확하지 않은데다, 철환주유의 목적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벼슬자리를 구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이 해석도 적합하지 않다.
공자는 자신의 도를 ‘一以貫之(일이관지)’(이인편 15장)라 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사상과 철학이 易(역)의 이치에 기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공자는『주역』두 곳에서 門을 易의 道로 들어가는 ‘門’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계사상전 7장에서 “天地設位(천지설위)어든 而易(이역)이 行乎其中矣(행호기중의)니 成性存存(성성존존)이 道義之門(도의지문)이라(천지가 위를 베풀면 易이 그 가운데서 행해지니 이루어진 성품을 보존하고 또 보존함이 도의의 문이라)”라 하였고, 계사하전 6장에서는 “乾坤(건곤), 其易之門邪(기역지문사 : 건곤은 그 易의 문인저)”라고 하였다. ‘皆不及門也(개불급문야)’의 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당시 공자를 가까이 따랐던 제자들이 최고의 제자들이기는 하나 공자는 제자들이‘成性存存(성성존존)道義之門(도의지문)’이나‘其易之門(기역지문)’의 門에는 이르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공자가 易의 원리를 뜻하는 ‘性(성)과 天道(천도)’를 드물게 말씀하신(공야장편 12장) 이유이다.
또한 안회가 공자에 대해 ‘仰彌高(앙미고), 鑽彌堅(찬미견), 在前在後(재전재후 : 자한편 10장)’라고 표현한 것 역시 스승이 말씀하시는 易의 이치를 꿰뚫지 못한데서 말미암은 말이다.
따라서 ‘皆不及門也(개불급문야)’에는 공자가 제자들 가운데 ‘易의 道에까지 이른 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공자가『논어』곳곳에서 언급한 易의 이치와 맥락을 같이 한다. 두 번 째 문장의 四科 분류는 진채절량의 시기를 함께했던 제자들을 『논어』의 편찬자들이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 즉 제자들이 비록 易의 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각각 한 분야만큼은 탁월함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덕행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와의 응대 수사가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에 뛰어난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덕행, 언어, 정사, 문학 네 가지를 들어 제자들을 나누어 말하였기에 흔히 四科十哲이라고도 한다. 四科라는 말은 후한 때 왕충이 쓴 論衡(논형)의 問孔篇(문공편)과 後漢書(후한서)의 鄭玄傳(정현전)에 나온다. 十哲이란 말은 당나라 때 劉知幾(유지기)가 쓴 최초의 역사 이론서인 史通(사통)의 暗惑篇(암혹편)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자라 일컫는 曾參(증삼)이나 有若(유약) 子張(자장) 등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위의 열 사람을 공문십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家苑 註 2> 주자가 말하는 德行․言語․政事․文學의 의미
德行者 潛心體道 墨契於中 篤志力行 不言而信者也 言語者 善爲辭令者也 政事者 達於爲國治民之事者也 文學者 學於詩書禮樂之文 文而能言其意者也
덕행이란 마음을 푹 잠그고 도를 체득하고 마음 한가운데에 묵묵히 맺어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행하니 말하지 않아도 믿는 것이라. 언어라는 것은 응대하는 말(외교적 수사나 문서를 꾸미는 일)을 잘 하는 것이라. 정사라는 것은 나라를 운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통달하는 것이라.
문학이라는 것은 시서예악의 글을 배우고 꾸며서(文飾문식하여) 그 뜻을 잘 말할 수 있는 것이라.
1, 陣・蔡(진・채) 둘 다 나라 이름. 지금의 하남성, 安徽成(안휘성) 일대. 공자께서 제자를 데리고 列國(열국)을 돌 때 陣(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초나라 사람의 초청을 받았다. 陣(진)나라와 채나라는 초나라가 공자를 重用(중용)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군대를 출동하여 공자를 포위했다. 그래서 양식이 떨어져 며칠 을 굶었다. 초나라의 구원으로 풀리기는 했지만 사제 간에 많은 고생을 했다.
2, 不及門 다산은“공자께서 먼저 위나라에 돌아왔으므로 문인들이 위나라 성문에 이르지 않은 것을 이른다.”라고 했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_()_나무아미타불_()_
-碧 松(智 㒤)-
행복하십시오!
첫댓글 공자님은 복이 많은 분입니다.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많이 두었으니 말입니다. 그 복은 하루 아침에 지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러울 따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