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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1일 [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오 28,16-20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이유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과 승천은 그 사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서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승천하는 삶이 아니면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하고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 자녀가 되어 이웃들도 가르침과 세례로
그렇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사제란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CCC, 1589)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할 때 알게 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진리’입니다.
어떤 자녀도 이 은총과 진리를 통해 태어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그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그 부모가 알려주는 진리를 닮게 됩니다.
율법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건 사제직은 중간에서 남편에게 받아 자녀의 지위를 높여주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그해에는 워낙 농사가 잘되어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자기 사과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임금님을 만나려는 농부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나름대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왔습니다.
그러나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농부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던 왕비가 이것을 목격합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금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님 옆에서 직접 깎아 드렸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러운 왕비가 깎아 주는 사과를 맛보고 매우 흡족해하였습니다.
왕비는 그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가난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여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자기 것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도 사랑해서 평생 가진 것을 다 팔아가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이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는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 잘해 주기 위해 아들에게 잘못 하는 것 같은 며느리를 못살게 굽니다.
며느리는 자살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더는 안 보겠다며 떠나갑니다.
어머니는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합니다.
어머니는 과연 사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어쩔 수 없이 모기입니다.
내가 무언가 내어준다 생각해도 그것을 통해 나의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이는 상대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부담스럽게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제직만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하는 삶’입니다.
교리서는 “십자가가 승천의 시작”(662)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인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다가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신 안에 잉태하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모님을 통해 성령이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에게 가득 찹니다.
성령을 중개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곧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는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1일 [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행전 1,1-11
에페소 1,17-23
마태오 28,16-20
살아 움직이는 희망의 복음
가끔씩 초대를 받아 '한 말씀' 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본당에서 단체장이나 교육 분과 담당을 역임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 말씀'(주제 강의)은 피정이나 연수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요.
참석자들의 기대치에 최대한 부응하기 위해서 '말씀 좋은' 강사를 찾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초청받는 강사 입장에서도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남 앞에 선다는 것 그 자체가 큰 부담입니다.
'이토록 영적으로 불안정한 내가, 어떻게 영성생활의 쇄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주어진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나인데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다니 참으로 웃기는구나'
등의 반성을 합니다.
때로 재미있게 한다고 '오버'라도 하는 날이면 밤잠을 설쳐가면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왜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지껄였을까'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제 마음은 많은 경우 회색빛입니다.
제대로 된 복음 선포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언행일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자신이 먼저 살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복음 선포는 힘도 없을뿐더러 설득력도 없습니다.
말씀 선포자는 자신부터 먼저 진지하고 성실하게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철저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온 몸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선포한 말씀이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승천대축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시는데, 다름 아닌 복음 선포에 매진해달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때로 말씀 선포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지못해 사람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가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 만무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 선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준비가 소홀했다든지, 기술이 부족했다든지 등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원인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자주 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전도 사업은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복음은 스트레스로 다가올 뿐입니다.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도구 삼아 나 자신을 전하려는 경향이 많았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나 자신'이 사라져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기보다는 그분께서 하시도록 그분 영역을 우리 안에 마련할 때 비로소 참된 복음 선포가 가능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저희 수도원에서는 매일 복음나누기가 생활화돼 있습니다.
가끔씩 행사가 있어 복음나누기를 빼먹기라도 하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끼니는 걸러도 괜찮은데, 복음묵상을 빼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뻔한 내용 가지고,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 분위기 안에서, 매일 보는 똑같은 얼굴들과, 매일 나눌 것이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풍요로워지는 복음입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욱 심오해지는 복음입니다.
마음만 열면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수도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저희 수련자 형제들은 복음 안에서 삶의 지침을 찾습니다.
복음을 통해 생활의 이정표를 세웁니다.
복음나누기를 통해 희망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합니다.
결국 복음은 저희 같은 구도자들에게 있어 밥보다 중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늘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복음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진리들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잘 내려옵니다.
그러나 가슴까지 내려온 복음이 다리까지, 손끝까지 내려오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복음이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복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복음, 행동을 촉구하는 복음, 우리 매일 삶의 에너지가 되고 고단위 비타민이 되는 복음이 되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승천 대축일>
(2023. 5. 21.)(마태 28,16-20)
<승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사도 1,9-12).”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루카 24,50), 사도행전에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고,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12).
두 기록을 합하면,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근처에 있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1Km 정도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근처’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라는 말은, 그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증언했습니다(사도 7,56).>
어떻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도’ 바라보아라.”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하늘도 바라보아야 하고 땅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늘만’ 보고 땅을 안 본다면, 그것은 ‘이웃 사랑 없는’ 신앙이 되어버리는데, 신앙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땅만 보고 하늘을 안 본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이웃 사랑만 중시하는 일이 되는데, 사랑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신앙 없는 사랑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인 종교입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실천되고, 사랑은 신앙으로 완성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 라고 표현했는데, ‘예수님의 승천’을 하늘이라는 특정 공간으로 가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요한 1,2)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루카 17,21).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를 ‘우리 마음속’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마르 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시며,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믿고, 세속의 명예, 권력, 재물 같은 것만 찾는 것은 아무 권한도 없는 것들에게 자기 인생과 목숨을 맡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기 때문에, 구원의 반대쪽, 즉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한’은,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은, 당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고, 모두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그런데 말만 잘하는 것으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이고,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 승천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서 승천하는 일의 시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