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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81
2월28일[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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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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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8Z3NOSySWBU
[서울대교구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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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께서 예수님께 다가와 두 아들에 관해 인사청탁을 하는 모습을 묵상할 때마다,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과 흡사한지, 혼자서 막 웃게 됩니다.
가끔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과정에서도 코믹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가끔 여성분들이 성소에 대한 문의 전화를 합니다. 저희는 즉시 정확한 안내를 해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남자 수도원이어서 남성들만 성소 모임이 오실 수 있습니다.”
“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 아들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입회 조건이나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나요? 해외 유학도 보내주시나요?”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습니다. 더 칼같이 선을 그을 수밖에요. “어머님, 죄송합니다만, 아드님 본인보고 직접 전화하라고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을 떠도 아들, 눈을 감아도 아들, 그저 아들 잘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오롯한 일편단심 역시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어머니는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만간 건설하실 왕국은 지상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어머니와 두 사도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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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0SLlrqxY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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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향하는 두 상반된 죽음의 방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 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제자와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하면서도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이 가는 죽음의 방향은 들어 높임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지금 낮아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낮추고 자신을 들어 높이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들어 높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월급의 90%는 기부하고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 계층을 위해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의 삶은 죽음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낮아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시민들을 들어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에 가깝습니다. 이 겸손한 죽음은 오직 대통령이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겸손한 것은 그저 높아지기 위한 비굴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타볼산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높아지셔야 했고 우리도 성체성사로 높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렛대를 이용한 도구에서 다른 것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혼자 떨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 높아졌다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산 성당에 있을 때 김완식 요셉 형제님을 초청하여 사순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무당이었는데 한 천주교 집안에 굿을 해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이가 천재여서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고 대기업에서 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던 중 정신 이상이 되어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는 아이를 사제로 봉헌하기로 했었지만, 아이의 재능 덕택으로 집이 부유해지다 보니 부모님은 옛 약속을 잊고 냉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 명의 대무당이 모여 먼저 자기 집에서 준비 굿을 하였는데 이상하게 그 집으로 보내는 신마다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셋은 그 집에 가서 각자 7일씩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김완식 보살이 7일 동안 굿을 하였지만 어떠한 신도 내리지 않아 코피만 쏟으며 쓰러졌고 나머지 두 무당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나무를 잡고 굿을 하는데 그 나무가 흔들거리고 방울이 울리더니 이상한 영의 기운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고 김 보살은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혼절하여 버렸습니다. 그 집은 성소자가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 집을 성령님이 보호하고 계셨고 그래서 어떤 악령도 얼씬거리지 못했고 무당까지도 그렇게 쓰러뜨리셨던 것입니다. 한 번 성령의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니 몇 달 동안은 신들이 자신 안에도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집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몇 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김 보살이 요셉으로 세례를 받고 남양 성모 성지에서 복사를 서고 있는데 미사 후에 한 예수회 신부가 자신을 부르더니 “혹시 김 보살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그분이 바로 자신이 굿을 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성당에 다니신 부모님 덕택에 병이 낫게 되었고 나중에 예수회에 들어가 그 좋은 머리로 8개 국어를 하며 성경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분명 들어 높임을 받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제가 되어 더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건 분명히 순교가 아닌 자살로 가는 삶입니다. 예수회의 신부가 된 분은 자신이 사제가 된 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임을 잘 알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더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바쳐 다른 이들을 높이려는 순교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시던 죽음의 방향이었습니다. 낮아져서 높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아닌, 높아져서 낮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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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좋은 글을 읽게 됩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과 미소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미소는 많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침묵은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웃으면 웃을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젊어진다고도 합니다. ‘설화(舌禍)’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말실수로 공든 탑을 쉽게 무너트리기도 합니다. 저도 말 때문에 이웃에게 아픔을 줄 때도 있었습니다. 성직자들은 늘 언행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에 대한 험담과 비난은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 하였습니다. 잘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힘들게 느껴지는 문제들도 조금 가벼워지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위로가 되고,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명예, 권력, 재물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탁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열 명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교회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에 익숙해 져 있었습니다. 식사 시간에는 늘 제일 먼저 앞줄에서 식사 배식을 받곤 했습니다. 버스에 탑승 할 때도 늘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을 때도 먼저 방 열쇠를 받곤 했습니다. 버스에서 짐을 내릴 때 가방을 같이 꺼내면 교우들이 ‘신부님은 이런 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대부분 저보다 연세가 많으셨습니다. 예전에 남성 구역 봉사자들과 안면도에 갔을 때의 기억입니다. 예약이 늦어져서 방을 두 개 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독방을 드리고, 우리가 불편해도 같은 방을 사용합시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같이 자겠습니다. 군대에서는 내무반에서 20명 넘게 같이 잤습니다.” 불편할까봐 승용차로 데려다 준다고 했지만 강남 역에서 미사도구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왔습니다.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늘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봅니다.
에덴’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낙원입니다. 사람은 그 낙원에서 살 수 있었는데 교만함과 욕심 때문에 ‘에덴’에서 더 이상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은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에덴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탐욕과 욕망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못 살게 하는 사람들은 늘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며, 양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은 각박하고 힘들어도 늘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을 하십니다. 아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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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 계획을 미리 알고 땅을 사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보를 넘겨주면서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가끔 그런 경우를 봅니다. 봉사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일에는 소홀하면서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친교와 잔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친교와 잔치 이전에 봉사와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출된 공직자에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리는 공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앞서서 자리를 마련하면 조직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비리와 부정은 대부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내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그런 자리를 원하느냐?’ 제자들은 ‘예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10제자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영광의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잿밥에 먼저 마음을 두는 것은,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태도는 제게도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보면서 부임지의 성당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로 외적인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당의 크기를 보았습니다. 신자의 숫자를 보았습니다. 본당의 재정 상태를 보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역에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봉성체를 원하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쉬는 교우들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지난 5년간의 사목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현황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뜻과 세상의 기준으로 가려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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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7-28: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고난을 겪으신다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그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가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에 차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 하셨다. 그분의 참된 제자직이란 참으로 섬기는 직이다. 섬기는 삶으로 봉사직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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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장면을 그립니다. 바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이 예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고집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은 당신에게 닥칠 잔인하고 참혹할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무겁고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들은 복음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옆자리에 앉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들이 마셔야 할 주님의 잔이 어떤 잔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신앙이 아닌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에 다른 제자들은 불쾌해합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사람은 통치자처럼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이가 아니라 더 사랑하고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세속적 성공입니다. 곧 제자들은 종교적 영광의 탈을 쓴 세속적 출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떤 잔을 마시는 것인지, 교회라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한다고, 교회 안에서 세속적 지혜와 세속적 문화를 적용하려고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하느님께 청하는 것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 알면서도 마치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주님께서 아파하고 슬퍼하시는 순간에도 자기밖에 모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무의미한 논쟁을 하며 힘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우리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고, 주님의 뜻에 눈과 귀를 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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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0-23)
이 이야기는, 사도들의 명예욕이나 이해력 부족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는 그 가르침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상황, 즉 시청각 보조교재 같은 것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사도들의 어머니의 등장에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두 사도가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0,35)
두 사도의 요청은, 앞의 19장 28절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두 사도는 ‘기왕이면’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따로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즉 그 세 제자는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자기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왜 베드로 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임명하신 일로 생각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든 두 사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한 것은 ‘명예욕’인데, 다른 사람들보다 두 사도가 더 명예욕이 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전까지는 사도들도 ‘보통 사람들’이었는데,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 강림 후에는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기 전에는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속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특별한 사람으로 성숙해집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이라는 말씀은, 앞의 16장 24절에 있는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너희 자신을 버리고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또는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두 사도의 요청에 대한 승낙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지만, 두 사도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서 결국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당신에게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황이나 주교직을 맡았다고 해서, 또는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세례를 받고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그 자리를 얻고 싶다면 끝까지 충실하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청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실제로 그런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도들이 앉는 자리에 높고 낮은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어떤 서열이나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가 되고, 모든 사람이 다 ‘가장 높은 사람’이 됩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묵시 22,3)>
<다른 열 제자가 두 사도의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24절), 두 사도의 요청이 다른 사도들을 자기들보다 낮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불쾌하게 여긴 것은 속이 좁아서도 아니고, 명예욕 때문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인데, 그런 상황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고 성숙해져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나라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줄 일도,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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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6장 21절부터 20장 34절까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맞으실 비극적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직접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그 가운데 세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에 이어서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예수님께 아들들의 영광을 요청하자,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닌 권세의 남용을 지적하십니다.(20,25 참조)
이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통치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제시하십니다.(20,26 참조) 이 지침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권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드러내는 무능을 보여 주시면서, 대조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사람’, 곧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분이셨고, 많은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20,28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줍니다. 섬기는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우리에게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셨고 우리의 종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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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20,2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실행하셨기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사실 예레미야 예언자나 예수님은 참으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갈수록 거부와 배척을 당하셨음에도 꿋꿋이 인간다운 행동을 하신 외로운 존재이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호소하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본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를 배척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싸구려 가짜 위로를 찾았습니다. 어떤 누구로 대체할 수 없는 오직 그 사람만의 고유한 존재 이유와 의미를 망각하고 단지 듣기 싫고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 그를 싫어하자,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자신의 진심을 알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하기야 우리 역시도 진실한 간언과 충고를 듣기 싫어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닥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만 생뚱맞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에게 남보다 높고 좋은 자리를 부탁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0,22)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하자,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0,2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남보다 더 높은 지위나 학력, 재산이나 신분을 믿고 갑질하지 말라, 는 말로 들려옵니다. 이런 제자들의 철부지 같은 생각을 알아차린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예수님은 스스로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을, 남에게 짐을 지우는 존재가 아니라 남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러 오신 종이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20,28 참조) 우리는 언제쯤 예수님의 높고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주님은 단지 제베데오의 두 아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불편하게 합니다마는 우리는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깊이 듣고 마음에서부터 솟아오른 진솔한 답변을 주님께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신앙의 현실 그리고 상태를 깨닫게 되리라 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이 질문의 의도를 깨닫게 된다면, 분명 우리의 실존과 신앙은 근본부터 달라질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온통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총총거리는 걸음걸이는 아니지만 느리고 더디더라도 좁은 보폭으로나마 곧장 주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의 잔을 함께 마신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과 그로 인한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나누겠다는 의미이며 또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께서 마셨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어쩌면 저는 "무식하기에 용감하다."는 표현처럼, 아니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모른 채'(20,22 참조)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사실 제가 마셔야 할 수도자나 사제로서의 잔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겁 없이 마시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이제야 알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3차례 곧 주님 앞에서 종신서원을 할 때, 부제품을 받을 때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을 때 주님께서 3번이나 제게 물으셨지만, 이 질문의 무게를 깨닫지 못한 채 입술로만, ‘할 수 있습니다.’(22,22)라고 대답했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실제로 3차례나 주님 앞에 부복했고, 이를 통해 주님께서 마신 잔과 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르겠노라고 응답했었습니다. 말인즉 ‘네,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지만 삶을 살면서, 주님 보다 제가 생각한 영광의 주님 이미지와 신상神像이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었기에 온 존재로 응답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도 생활을 통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을 자신에게 묻고 응답해 오면서, 주님을 아는 만큼 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이런 저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저는 수도 생활의 초기보다 더 응답한 만큼 살려고 합니다. 이제 또다시 주님께서 제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도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베드로 사도께서 주님께 드렸던 응답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라고 밖에 응답할 수 없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감히 그 잔을 마실 수도 없고 마실 능력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제가 평소에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라 맥주 한 잔도 거뜬히 마시지 못합니다. 즉 맥주 한 잔도 소위 ‘원샷’ 하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마셨고 제가 마셔야 할 잔 역시도 그렇게 단숨에 마시지 못하리란 걸 이제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육신적 고통의 수용에 있어서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1977년 처음 병으로 쓰러졌을 때, 사지가 다 묶인 채 고통스럽고 외로운 병상에서 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께 드렸던 저의 고백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려는 믿음으로 모든 순간을 살아 있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며 살아왔다고 생각됩니다. 거의 46년 동안 심장박동기에 의지해서 살아왔고, 또 다른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난의 잔을 잘 받아들이며 살아왔습니다. 이게 내 삶이고 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기에 저는 이 잔을 마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잘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현재 제 상태입니다. 이런 육신적인 병으로 인한 술잔을, 고통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아주 소소하고 하찮은 삶의 잔을 마시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에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해졌기에 고통의 잔을 마시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면서 삶의 잔을 마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힘들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큰 고통은 때론 쿨하게 잘 받아들이지만, 요즘 매일 아침 기상하는 순간부터 느끼는 육신적 고통이나 아주 하찮은 불편함을 말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린다고 기도하면서도 참 힙듭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작은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게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다가오는 삶의 잔을 꿀꺽하고 마시지 못한 저의 나약한 모습을 느끼면서 더 힘듭니다.
“주님, 당신은 사랑으로 모든 고난과 고통을 받아들이시고 심지어 고난과 죽음의 잔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저 또한 그런 당신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갖고 일상에서 다가오는 삶의 잔을 잘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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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잔>
마태오 20,17-28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출세와 섬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벗을 채우려고
나를 비우는
채움의 잔
벗을 돋우려고
나를 부수는
돋움의 잔
벗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는
높임의 잔
벗을 비추려고
나를 사르는
비춤의 잔
벗을 품으려고
나를 버리는
품음의 잔
벗을 섬기려고
나를 바치는
섬김의 잔
벗을 살리려고
나를 죽이는
살림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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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학창 시절에 제 가슴을 뛰게 했던 노래였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시작하다가 중간으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멋진 노래입니다. 특히 이 노래를 받치고 있는 기타 연주 소리는 십 대의 저를 푹 빠지게 했습니다. 그때 바라보던 오십 대는 젊은이들의 문화에는 전혀 관심 없고, 술 한 잔 마신 뒤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트로트를 부르는 것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오십 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 대에서 바라본 오십 대의 모습은 잘못 본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도 열정이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요즘 노래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단정 지었습니다. 오십 대는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을 사는 청소년도 저의 청소년 시절과 같은 시각일 것입니다. ‘꼰대’라며 기성세대를 꾸짖으며 ‘우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꼬마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 사탕을 드리면 어떨까요? 더 좋아하십니다. 어른들도 노는 것 좋아하고, 뜨거운 열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대와 차이, 나이의 차이, 사상의 차이 등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다를 것 없다는 시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함께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와 다르게 본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다른 열 제자들의 반응은 불쾌함이었습니다. 이 제자들도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가고 싶은 나라, 누구나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통치자, 고관들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취해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다른 점’만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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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원하느냐?>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길 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미움의 대상이나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속적인 모습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점집을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행동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닥친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기 위한 신앙의 삶인지? 아니면 한몫 얻기 위한 삶인지 성찰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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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좀처럼 길이, 빛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들도 참 보기 힘듭니다. 국내 사정이나 정치사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극한 대결과 분열상태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또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인류는, 역사는 진보하는가? 때로는 회의하기도 합니다. 저절로 묻게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입니다. 강론 제목이자 답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으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이때쯤 맞이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바람을 산으로 바꿔 “요셉수도원에서 36년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암산”이라 주저없이 고백합니다. 산은 한결같은 정주의 상징입니다. 제가 쓴 무수한 시중 불암산이 대상인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시편 121장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 121,1-2)
여기서 오랫동안의 삶을 되돌아 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말그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대로 살아온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18년전 2006년 봄철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해마다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늘 거기 그 자리 그대로의 정주의 불암산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여기 살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적은 있었어도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놀라운 책을 사서 읽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어른과 30대 초반의 손자뻘 후배가 나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대화집입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의 서문 일부를 나눕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정성헌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저는 끝없는 낙관에 놀랍니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이 남았다’면서 저를 다그치시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생기니 앞길이 보입니다. 저는 고작 6년차인데 선생님은 지구 생명 살리기 운동만 60년 하셨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먼저 태어나신 선생님에게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지론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삶이어야 한다” 저에게는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두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에 답을 줍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절박하고 간절한, 한결같은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기도는 하느님 향한 영혼에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 햇빛같은 은총이,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같은 성령이 들어오지 창문없는 방같은 영혼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오래전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
임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 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듭니다. 말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외딴곳을 매일 찾았던 듯 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응이 극히 침착합니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좌절하거나 흥분함이 없이 부인과 문답을 나누셨고,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하느님 향한 신뢰와 희망의 반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도 제자공동체의 유일한 대안이자 처방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임을 천명하십니다.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군림과 세도는 일체 배제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도 같으니 섬김의 종입니다. 이에 영감받은 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학교, 병원, 식당처럼, 주님의 교회나 수도원도 예외없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저는 서비스업의 3대 요건에 늘 유의하곤 합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며 좋아야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서비스업의 삼박자를 갖출 때 손님들도 끊임없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서비스업에 실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우리 요셉수도원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갖췄는가 점검해 보곤 합니다. 일례로 의사가 사람만 좋고 실력이 없어 무능하다면 정말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무장하여 당신의 서비스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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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정 높은 사람은>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오늘 복음의 끝부분은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어제의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죽으러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을 잡으러 들어가는 줄 알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기득권인 데 비해 자기들은 입성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셨음에도 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3년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야말로 구악을 대신하는 새로운 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진정한 리더는 종처럼 조직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일까요? 첫째와 높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까요? 쉽게 얘기해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말함일까요?
사실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도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들도 그러하면 그 섬김을 받는 백성이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높은 자리와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비결로서 서번트리더십과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곧 “우리 가운데에서”라고 생각지 않고 “그들 위에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늘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리 위에 홀로 높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며, 백성을 우리라고 생각지 않고 늘 그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대영광송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대영광송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무도 홀로 거룩하거나 높지 않으며,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형제들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은 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때 높은 사람의 의미도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무리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인 사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물길로 치면 맨 앞에서 물살을 갈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진정 높은 사람은 무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이어야 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첫째인 사람도 무리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맨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수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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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마태20,18ㄷ)
<(1)예언자의 길!>
오늘 복음(마태20,17-28)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출세와 섬김에 관한 말씀'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너무 무지하여 깨닫지를 못합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세 번에 걸쳐 하시는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두 아들의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함께 예고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이 없는 영광과 부활만을 바라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역시 그러한 모습은 아닌지???
예언자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또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독서(예레18,18-20)와 복음은 '그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남유다 왕국의 쇠퇴와 몰락(BC 587년)의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오늘 독서는 그가 걸어간 고난의 길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무시해 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예언직의 사명을 지니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길 또한 고난의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힘을 내어 봅시다! 예언자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 너머에 신앙의 목적인 '이제와 영원한 부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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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오 20,19-20)
<(2)예수님의 눈물!>
우리는 지금 나와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큰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그 사랑에 보다 더 깊이 동참하고자 하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모습을 보면, 그것과는 별개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 모습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20,25-28)
예수님의 눈물!
예레미야 예언자의 눈물!
낙태아들과 죄 없는 아기들의 눈물!
수많은 순교자들의 눈물!
의인들인 참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이 눈물과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면서,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일부 형제자매들이 신부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하지만, 정치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정치입니다.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복음의 기쁨', 20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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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b4J0BX0T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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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8)
삶의 이유와
목적은
사랑과
감사에
있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잃은 십자가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사랑의 여정이
바로 십자가의
여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힘껏 사랑하고
힘껏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소중함을
잘 간직하며
잘 돌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입니다.
사랑을 몰랐기에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서
알게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잃으면
사랑도 잃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합체는
다름아닌
십자가입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일이야말로
최소한의
도리이며
목숨의
사명입니다.
십자가는
목숨의 본분이
사랑임을
뜨겁게
가르칩니다.
사랑의 본분에
충실한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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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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