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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교환방(Sharing Room) 스크랩 문화생활 히스 레저, 그리고 신이 질투한 배우들...
단하나 추천 0 조회 158 08.02.22 10: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월 22일, 뜻 밖의 할리우드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열연했던 배우 히스 레저의 사망 소식이었다.

 

Heath Andrew Ledger

1979.4.4 ~ 2008.1.22

 

그는 최근 영화 <배트맨 비긴즈2 -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수면 장애를 앓아와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추측만 난무할 뿐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인 아직 모른다고 한다. 아직 만 서른이 되기 전에 요절한 그는 그 짧은 생애동안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승에서의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호주 출신의 히스 레저는 2000년 영화 <패트리어트 : 늪속의 여우>에서 극 중 멜 깁슨의 아들로 출연하면서 그 존재를 알렸고, 할 베리 주연의 <몬스터 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기사 윌리엄>에서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출중한 연기를 선보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당해 영화 <카사노바>에서 전설적인 인물 카사노바로도 열연했다. 이러한 열연으로 또 한 명의 훌륭한 배우가 나오는가하는 세간의 기대를 그는 끝내 저버리고 그렇게 젊은 생을 마쳤다.

 

요절夭折, 신神의 질투...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다는 뜻의 '요절'은 보통 서른 전후에 세상을 등진 이들에게 붙이는 수식이다. 흔히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이들이 일찍 생을 마치는 것을 보며 신이 그 재주를 높이사서 데려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의 심리는 능력을 아낀다기보다는 일종의 질투인듯 보인다. 뛰어난 이들의 짧은 생애는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의 입장으로써는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의 질투로 요절한 그 시대의 배우들이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의 뇌리에 제일로 아로새겨진 이미지는 바로 할리우드의 배우 제임스 딘의 모습일 것이다.

 

James Bryon Dean

1931.2.8 ~ 1955.9.30

 

2년의 배우 활동, 단 세 편의 영화. 제임스 딘의 이야기이다. 그는 2년의 시간동안 단 세 편의 영화로 불멸의 생을 얻었다.

 

제임스 딘이 주연을 맡은 세 편의 영화 이전에도 물론 그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단역에 그쳤다. 그는 애초부터 신성이 될 준비가 된 배우였다. 그는 말론 브란도를 비롯한 숱한 할리우드 '메소드 액터'들의 산실인 뉴욕의 '액터즈 스튜디오'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연극을 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50년대 초반, 당대 최고의 청춘배우로 자리매김한 말론 브란도와 두 영화를 같이 한 엘리아 카잔 감독이 그에게 영화 <에덴의 동쪽> 주연을 제의한 것이다.

 

그의 생전에 개봉한 영화는 <이유없는 반항> 한 편뿐이었다. <에덴의 동쪽>과 <자이언트>는 그의 사 후에 개봉했다. 그는 <이유없는 반항>에서 새로운 반항기질의 청춘을 연기함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인생에 걸맞지 않게 담겨있던 복잡한 내면의 고뇌를 날려버리기 위한 레이스 끝에 너무 일찍 저버렸다. 그러나 또한 그 덕에 불멸의 청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세간의 말은 세상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한편 최초의 아이돌 스타로 불리는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 또한 신의 질투를 받았다. 흑백 무성영화 시대의 인물이라 아마 잘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요즘 10대 사이에서는 옷과 모자의 상표로써 쓰이는 그 이름만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Rudolph Valentino

1895.5.6 ~ 1926.8.23

 

이탈리아 출신의 이 라틴계 배우는 얼마남지 않았던 무성영화 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꽃이었다. 중성적 이미지의 그는 그 만의 댄디 스타일로 미국 전체를 휩쓸었다. 18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에서 도미한 그는 카페의 댄서로 그 이력에 첫발을 내딛는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탱고 댄서였던 만큼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모습과 움직임이 남에게 돋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숱한 영화의 단역을 맡다가 드디어 그의 진가를 알아본 무성 영화시대의 거장 렉스 잉그럼의 눈에 들어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주연은 아니지만 큰 역할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춘희>와 <셰익>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당대의 섹스심볼로 급부상했다. 짙은 눈화장과 손목시계 그리고 치절하고 섬세한 몸짓, 깔끔한 피부와 그 용모는 남녀혼합의 새로운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그를 통제하려고 하여 힘들게 했던 철없던 아내와 그를 사랑하는 4만 명의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제작자들의 돈벌이 욕심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야했던 지겨운 연기 스타일도 다 벗어던지고 그는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불멸의 제임스 딘, 환생還生...

 

반항과 고독, 이 두 가지 단어가 어울리는 배우. 제임스 딘 이후 다시 찾아온 고독과 반항의 배우, 리버 피닉스가 90년대 초를 거치며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River Jude Phoenix

1970.8.23 ~ 1993.10.31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소년은 <허공에서의 질주>에서 불안한 청춘의 고등학생으로 커서 마침내 <아이다 호>에서 세상의 모든 길을 맛보는 고독한 길의 감식가로 자랐다. 어떤 관객들은 반항적이고 우울한 모습의 리버 피닉스에게서 제임스 딘의 모습을 보았고, 또 어떤 관객들은 그만의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그는 제임스 딘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청춘의 우상이 되었다. 10대 후반에 이미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의 남우주연상에 이름이 거론된 것은 그가 단순한 아이돌 스타가 아님을 입증한다. 그러한 리버 피닉스는 생의 불꽃을 짧은 순간에 그렇게 강렬하게 피우고는 이내 사라졌다.

 

제임스 딘은 그 특유의 모습으로 동양에도 나타났었다. 일본의 배우 마츠다 유사쿠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松田 優作

1949.9.21 ~ 1989.11.6

 

마츠다 유사쿠는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와 비슷한 청춘을 보냈지만 그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삶을 살면서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가 가정을 가졌고, 나이가 좀 더 들었었다면 어땠을까를 짐작하게 해준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자기억제가 강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호감의 표현과 약점으로 인식될 수도 있는 감정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는 일본에서 배우를 하면서 청춘 반항의 아이콘이 되었다. 끊임없는 자기 억제 속에서 청춘 열정의 분출은 연기를 통해 가능했다. 청춘 시절 그의 연기는 광기였다.

 

그러나 그는 한 차례의 결혼 실패와 또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얻는다. 자기억제와 광기의 사나이는 그렇게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거쳐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마츠다 유사쿠의 모난 면도 가정이라는 것에 의해 깎여나갔다. 그저 활활 타버리다 이내 산화해버릴 것 같았던 청춘 배우는 그렇게 세월의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삶을 알아가던 마츠다 유사쿠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블랙 레인>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의 인기배우인 마이클 더글러스와 앤디 가르시아와의 공연이었다. 그럼에도 할리우드 스타에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그는 보여주었고, 오히려 그가 더욱 돋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1989년 제작된 <블랙 레인>은 마츠다 유사쿠의 유작이 되었고, 그가 영화 마지막에서 미소짓는 장면은 그의 작품 속 마지막 미소가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던...

 

신의 질투는 어느 땅이든 빗겨가는 곳이 없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우리의 곁에도 신의 질투를 받은 배우들이 그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이은주

1980.11.16 ~ 2005.2.22

 

연기를 하던 배우였다. 연기를 알던 배우였다. 그녀는 연기가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저 예쁘기만하면 다 되는, 배우에게 연기력을 요구하지 않고 가수에게 가창력을 요구하지 않는 뭔가 잘못되어가던 세상은 그녀의 실력과 열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우 이은주의 이야기다.

 

생전의 모습보다 죽음의 이유나 그 뒤에 근거없는 무성한 추측들이 난무하는 모습을 보면 참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녀는 연기를 하고 싶었기에 다소 연출자들에 의해 제한된 범위의 연기를 선보인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이따금 그녀의 과감한 연기의 변신은 그녀의 열정을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랬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아쉬움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가보다.

 

영화배우 임성민은 이은주처럼 열정의 결과물을 피워보지 못하고 저버린 또 다른 아쉬움의 인물이다.

 

임성민

1957.4.18 ~ 1995.8.25

 

체육학과 출신에 키 180cm의 훤칠한 미남은 80년대 초부터 영화에 등장했다. 배우 임성민이다. 배우 임성민은 80년대를 풍미한 남성스타이다. 당대의 최고 스타였던 이보희를 비롯 당대 활약하는 인기 여배우와는 대부분 호흡을 맞춰본 그런 배우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80년대 5공 정권 하의 영화란 이른바 3S 정책으로 인해 노출이 돋보이는 애정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임성민이 출연한 영화라고 달리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여배우들이 돋보이게 해주는 배우였고, 더불어 균형잡힌 그의 신체는 같이 소비되었다.

 

그는 그렇게 80년대에 정신없이 소비되었다. 그는 그 스스로 더 나은 연기를 갈망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90년대가 왔다. 그는 지난 세월해보지 못했던 역할에 도전한다. 정사신과 무관한 멜로영화에 도전하기도 했고(영화 <땅 끝에 선 연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근현대사극에 도전하기도 했다(영화 <사의 찬미>). 그리고 그러던 중에 사생활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95년 영화 <애니깽>의 촬영에 들어갔다. 멕시코 로케이션이 대부분인 대작에 국제적 영화제에서 수상한 강수연과의 공연이었다. 그는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하며 찍은 영화의 마무리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네 살짜리 딸을 홀로 남기고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를 비롯하여

이미 작고한지 오래된 배우들을 조명해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필름 속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가슴 속에도 깊이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립고 또 아쉬운 모양입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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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2.24 11:37

    첫댓글 요절한 젊은 배우들이라...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그들의 이미지. 늙어 가는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은 행복한걸까, 불행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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