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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에/시에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황구하
행복한 문화나눔터
사색의 향기
제90회 길 따라 떠나는 문학기행
-시인 황구하와 상주
닻줄 풀어 시 물결꽃 피우던
칠월 열엿새
앞사람 그림자
출렁출렁 내게 흘러와
일생에 꼭 한번
푸른 물에 장대붓 적시라 한다
낙강 물굽이 둥둥
배냇짓하는 붉은 달을
띄워놓고서
푸른 물에 장대붓을 적시라 한다
-황구하 시 '낙강범월시를 받다' 전문 -
양의 해를 맞아 새로운 삼백예순다섯 날을 선물처럼 받아들고 잠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한자의 아름다울 미(美)자는 토실토실 살이 오른 커다란 양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움이란 건강함이 제일이지 싶다. '문학'이란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이 피워낸 꽃이다. 그 꽃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은 꽃의 터전을 살피는 아름다운 여행이다.
2015년 첫 기행지로 상주를 떠올리게 된 것은 은연 중에 시집 '물에 뜬 달'의 저자인 황구하 시인이 그곳에 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년 전, 선물 받은 시집 속에 들어 있는 '낙강범월시'에 대한 궁금증도 한몫을 했다. 시집을 건네주며 필경 인사치레로 건네었을 '한 번 놀러오라'던 그 한 마디가 귀에 걸려 있었다.
상주는 삼한시대부터 낙동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산자수려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민심이 순후한 '삼백(三白, 쌀, 목화,누에고치)의 고장이다. 상주를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 유역은 분지와 기름진 평야가 드넓어 예로부터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다. 곡창지대로 물자가 풍부해 성읍국가 시대부터 부족국가가 번성했다. 요즈음의 상주는 누에고치를 대신한 ‘삼백(三白, 쌀·누에·곶감)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더해 자전거 도시로도 이름이 높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공검지(공갈못)는 상주지방 농경문화 발전의 기틀이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설화문학과 구전민요는 상주문학의 뿌리가 되었다. 낙동강을 품은 기름진 들을 지닌 천혜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조화를 이룬 상주는 역사적 전통과 학문적 줄기가 강물처럼 이어져 시절을 불문하고 수많은 훌륭한 문사를 배출하고 빼어난 문학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고려시대 상주문학인으로는 시와 가전체 작품을 남긴 임춘, 죽부인전을 남긴 경학의 대가 이곡, 상주를 소재로 많은 시를 남긴 백운거사 이규보가 있다. 조선시대엔 우복 정경세를 비롯하여 식산 이만부, 명재상 소재 노수신, 문예부흥을 이끈 신잠, 낙강범월시회의 주역이었던 청석 이준, 봉산곡의 우담 채득기, 송강 정철과 함께 가사문학으로 쌍벽을 이룬 매호별곡의 조우인 등이 있다.
현재 활동 중인 상주 출신 문인으로는 '남해금산'의 이성복 시인과 소설가 성석제가 제일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구하 시인을 찾아 길을 놓는 것은 비록 상주 출신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상주를 잘 알고 상주를 사랑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솔하게 시에 천착하는 사람 냄새나는 천상 시인이기 때문이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세상을 주유하다 보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고수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에서 이름을 얻는 일이라는 게 헛묘 하나 짓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묵묵히 초야에 묻혀 자신만의 시세계를 일궈온 시인을 찾아 소개하는 일은 문학기행 길라잡이의 몫이자 보람이기도 하다.
이제는 통증도 제풀에 지쳤는가
어머니 힘없는 손발이 오수에 잠겨있다
가는 숨결 사이, 나는 말없이 앉아서
창문너머 e-편한세상 보람아파트 위로 내리는
저 가을볕 참 쨍하다,쨍하다
실눈 뜨며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 두고 온 자갈밭 콩이라도 거두시나
끝물고추 볕 아깝다 풀어놓으시나
드리운 그림자 초리초리 달고 있는
저 팔뚝 자꾸만 가벼워지는 것 보면
아예 몸까지 벗어 널어놓고 오시나
끄엉 끙, 힘겹게 돌아누우시자
똠방똠방 제 소리를 세다 놀란 링거
한 생의 햇살을 통째로 흔들고 있다
-황구하 시 '가을볕 참 쨍하다' 전문 -
가을볕 쨍한 천년 넘은 영국사 은행나무 아래서 황구하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선물 받은 시집 '물에 뜬 달' 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를 만났다. 참 고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는데 시를 읽으며 한순간, 울컥했다. 시인의 결 고운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 시를 쓰던 황 시인이 만난 쨍한 햇볕은 얼마나 아프게 눈을 찔러왔을까? 그 가슴 저림으로 빚어낸 그녀의 시가 햇살보다 더 눈물나게 쨍하다.
황구하 시인은 1965년 충남 금산군 진산면 부암리에서 아버지 황규진과 어머니 문상매 사이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방학 때마다 집에 내려가면 부모님께 미리 부탁해서 사놓은 한국문학 · 세계문학 시리즈, 철학서적을 읽는 일이 크고도 즐거운 스스로의 방학과제였을 만큼 책읽기를 좋아했다. 몸이 약해서 책 들고 밥을 먹거나 겨울밤 새벽까지 책을 본다고 부모님 걱정을 많이 끼쳤다. 결혼을 하면서 1988년 상주로 삶의 터를 옮겼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아이들 글쓰기 지도교사로 일을 하면서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1998년 상주에서 여성 문인으로 구성된 시 동인 ‘느티나무시’를 결성하여 매월 작품 합평과 시인 탐구, 인문학 독서토론 등을 위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느티나무시'는 지역에서 가장 탄탄한 문학단체로 평을 받고 있다. 동인이면서 한 그루의 느티나무처럼 개성적 작품 천착에 최선을 다하여 올해 동인지 제11집 『안부를 묻다』와 개인 시집 3권을 발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느티나무시’ 모토는 곧 본인의 글쓰기 모토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시에문학회 회원, 느티나무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역의 향토문화와 문학을 아우르는 클로스 오버 글쓰기에 집중하여 ‘시로 거니는 상주’ 테마로 근간 산문집과 제2시집 발간 계획을 가지고 있다.
상주로 떠나기 전 황 시인과 점심 약속을 한 터여서 오전 일찍 출발한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경천대를 목적지로 입력하고 차를 달린지 세 시간여 상주 I.C를 빠져나온 차는 제법 너른들을 지나 경천대 국민관광지 입구에 닿았다. 하늘을 손으로 떠받친 손가락을 형상화 한 다섯 개의 대형 유리조형물이 서 있는 입구를 지나자 폭포가 얼어붙어 빙벽을 이룬 인공폭포 앞에 말을 탄 늠름한 위용의 정기룡 장군 동상이 우리를 반겼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지른 옥주봉, 유유히 흐르는 강물 곁으로 솟아오른 경천대,그리고 노송들 사이로 흰눈을 이고 선 단아한 무우정이 한폭의 그림처럼 어울려 상주의 낙동 제1경으로 꼽힌다. 원래 경천대는 '하늘이 스스로 만든 경치'라고 해서 '자천대(自天臺)'라 했는데 우암 선생이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귀를 바위에 새기면서 '경천대'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경천대 아래엔 오랑캐 때문에 힘겨워하는 조국을 걱정하던 우담 선생이 지었다는 무우정이 있다. 경천대 앞은 물이 깊고 신성하여 용연이라 하여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다.우담 채득기 선생은 경천대로 내려와 칩거하던 중,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한 뒤 봉림대군(효종)을 비롯해 세자·대군을 심양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을 때 대군들과 함께 심양에 왕호(往護)로 갔던 인물이다. 우담이 심양으로 떠나면서 지은 시가가 바로 <봉산곡(鳳山曲)>이다. 옥주봉과 경천대에게 '잘 있으라'고 인사하는 선비의 마음이 참 아름답다. 우담은 환국 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옥주봉 아래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옥주봉 아래 그 집터가 남아있다.
경천대에는 우담 선생 이야기와 함께 정기룡 장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용마가 나왔다는 용소 곁엔 MBC 드라마 <상도>의 촬영지가 있는데, 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수련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발길을 돌려 입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왼쪽으로 커다란 나무 조각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노송, 깎아지른 절벽과 함께 경천대를 빛나게 하던 은모래 강변도 상주보 설치로 인해 사라져서 아쉬운데 경천대의 수려한 경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각품들이 영 생뚱맞아 보인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사랑한 시회의 공간이었던 경천대를 생각하면 입구의 놀이시설과 함께 좀더 사려 깊은 정책과 배려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문을 연 경천대 옆의 상주박물관은 상주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대 사벌국 및 고령가야가 번창했던 상주는 신라시대 9주, 고려시대 8목의 하나였고, 조선시대엔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유서깊고 우수한 전통을 지닌 고장이다. 전시실과 야외시설, 전통의례관과 세미나동을 갖추어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이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총 5개의 파트로 구성된 상설전시실은 상주지역에서 출토, 수집된 토기류,금속류,지의류, 회화류 등 다양한 유믈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 공간엔 석등과 석탑의 부재, 비석 등의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상주엔 상주박물관 외에도 전국 제일의 자전거 도시답게 자전거박물관이 있다. 전통적으로 부농이 많아서 경제적 풍요를 누렸던 상주는 100년 전인 1910년 경부터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상주는 시가지와 농경지가 대부분 평지여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탓에 일찌감치 생활자전거로 자리잡았다.
1925년엔 상주역 개설 기념으로 개최된 조선팔도 전국 자전거 대회는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일대 사건이 되었다. 일본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여주려 기획한 대회였는데 당대 최고의 사이클 선수인 엄복동 선수가 우승을 하고, 상주출신의 박상헌 선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상주의 자전거 보유대수는 85,000여대로 가구당 2대꼴로 전국 2.1%의 10배에 달하는 교통분담율 21%를 자랑하는 명실공히 전국 제일의 자전거 도시다.
경천대에서 멀지 않은 상주시 용마로 415(도남동 산3-4번지)에 2010년 10월에 문을 연 상주자전거박물관이 있다. 2002년 남장동에 개관했던 박물관을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맞추어 자전거문화 발전과 이용활성화를 위해 이전,확장한 것이다. 1층과 2층의 기획전시실 및 상설전시관을 비롯하여 지하1층엔 자전거 대여소까지 구비하여 자전거의 역사와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황구하 시인을 만나 점심식사를 위해 (사)시의전서 전통음식연구회를 찾아 사벌밥상을 주문했다. '시의전서(是議全書)는 조선시대 조리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1800년대 말 조선말기의 작자미상의 조리서다. 한국최초의 비빔밥에 관한 기록과 함께 경북상주의 반가 음식부터 왕실음식까지 422종의 음식을 기록해 놓은 조선판 음식백과라 할 수 있다. 1919년 심환진이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상주 반가의 요리책을 상주군청 폐지에 붓글씨로 베껴둔 필사본이 그의 며느리 홍정 여사에세 전해진 것으로 식혜와 감주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비빔밥, 배추통김치란 용어가 문헌상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다.
(사)시의전서 전통음식연구회는 2012년 3월부터 뜻있는 회원들이'사벌밥상과 두바퀴여행'이란 마을기업을 운영하면서 상주의 옛지명인 '사벌'의 전통 음식을 맛보고, 전통상차림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다. 특히 사벌밥상에선 상주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이용한 뽕잎부빔밥, 무시래기밥, 장국밥 등의 단일메뉴와 전통반상차림을 맛볼 수 있다. 인공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든 전통밥상은 깊은 맛과 정갈한 웰빙밥상이다.
사벌밥상으로 든든히 속을 채운 우리는 '낙강범월시유래비가 서 있는 영남의 으뜸서원인 도남서원을 찾아나섰다. 도남서원 가는 길에 금잔디에 덮인 아담한 사벌왕릉이 눈에 띄었지만 지나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도남서원은 경천대 용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곳 도남서원에는 포은 정몽주, 한원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 황을 향사하고 있으며 소재 노수신, 서애 유성룡,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을 추향하고 있다. 특히 이 도남서원은 영남의 수석서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서원으로 영남학파의 산실이라 할 만하다.
중국의 낙양은 낙수( 洛水)라는 강을 끼고 있고 상산(商山)이라는 산을 두고 있는 곳이다. 낙수에서 낙서가 나왔고 상산은 상산사호가 은거했던 곳이다. 상주 역시 낙양이라는 옛 명칭을 지녔고 상산과 낙수를 끼고 있는 도시이다. 상주의 낙강엔 도남서원이 있고 상산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있다. 도남서원은 성리학의 대를 이어오는 훌륭한 분들을 모두 모셔놓고 그들을 모델로 삼아 공부한 곳이며, 상산은 갑장산의 남쪽에 해당하는 청리면과 지천 일대로 월간 이 전, 창석 이 준, 우복 정경세, 남계 강응철 등 4분을 상산사호라 칭했다.
'낙강범월'이란 낙동강에서 범월농월(泛舟弄月)하면서 시회를 연 행사를 말하는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 백운 이규보가 처음 낙강에서 시회를 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낙강에서의 시회 행사가 잦아졌는데, 특히 임술년(1622년)에 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회를 가진 행사는 상주 낙강범월의 시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날의 행사를 주선한 인물이 창석 이 준인데 그는 <천계임술추칠월기망낙강범월명첩>이라는 첩을 만들고, 서문에서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계속 열고 그때마다 남긴 시를 기록하여 도남서원에 보관할 것을 부탁하였다. 1770년(경인년)에 행사에서 그동안 도남서원에 보관하여 오던 洛江泛月帖(낙강범월첩)을 합치고,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을 두고 낙강범월은 이어져 1862년 임술년의 계당 유주목에까지 이어졌다.(현재 지역 문학단체에서 이 행사의 계보를 이어 해마다 '낙강시제'를 열고 있다)
소동파의 적벽에서의 범유(泛遊)를 모델로 한 '낙강시회'는 소동파가 신선적인 도가사상이 드러난 적벽부를 남겼듯이 낙강범월시회 자연친화적이고 은일자적하는 도가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임술범월록은 1607년부터 1770년까지 개최된 8차례의 낙강범월시회를 통해 만들어진 상주지역 최초의 공동시집으로 임술년의 시회가 한때의 행사로 끝나지 않고 연속성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도남서원 건너편에 있는 산은 낙강과 접하고 있으면서 기암절벽을 이루어 경치가 빼어나서 옛날부터 이곳은 각종 시회공간이 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주차장 강변엔 '낙강범월시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겨울이라 그런지 도남서원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황구하 시인이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묘재실인 옥연사에서 쓴 '잠시, 환하다'란 시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옥연사 유장각에 보관되어오던 소재 선생 유품들은 종가의 기탁으로 상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빗장 걸린 궤에 갇혀 숨 막혔을 고서들을 비롯해 목판 등 많은 유품들이 잠시나마 바람을 쐬고 빛을 보게 된 감회를 시로 쓴 것이다.
발길 드문 옥연사(玉淵祠) 뜨락
고서들 바람을 쐬고 계신다
거처를 옮기기 위해
숯막 같은 궤에서 나오셨는데
근엄하게 필사된 옷고름 풀어 젖혀
전족을 한 채 잠든 양명도
두 손 묶인 휴정의 목탁소리도
햇귀에 부풀어 오르는 사이
맹자도 두보도 어깰 맞대고
주춧돌 아래 나란히 앉으신다
잇바디 드러내며
꽃잎처럼 몸을 펴는 작은 시첩들
바람은 무슨 힘인가
고요한 숨 저렇게 펄럭이게 하고
이윽히 세상 저편 봄볕을 끌어당긴다
사람 인(人)자 맞배지붕
대숲그늘 걷어내며
옥연사, 환하게 핀다
―황구하, 「잠시, 환하다」전문-
도남서원을 떠나 남장사 가는 길,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서편으로 기울어 있다. 상주 시내에서 황 시인과 작별하고 서둘러 마지막 답사지인 남장사로 차를 달린다. 전국 곶감 생산 1위인 곶감의 도시답게 남장사로 가는 길엔 연시를 매달 고 선 감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사하촌인 남장동은 곶감마을이다. 감나무는 지천이고, 커다란 곶감 건조장마다 곶감 말리는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남장사는 진감국사가 830년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음산 장백사에 머물며 신라 흥덕왕 7년(832)에 무량전을 지으면서 대찰의 면모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1186년에 각원국사가 주석하면서 이름을 남장사로 바꾸었는데, 북장사·갑장사 등 상주지역 4장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척불정책으로 교세가 수그러들었다가 사명대사가 당시 금당이던 보광전에서 수련하면서 선교통합의 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35년에 중창했으나 절 전체의 모습은 비교적 잘 간직해온 천년 고찰이다.
남장사에 이르기 전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돌장승은 ‘못난 것들은 서로 쳐다만 보아도 즐겁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를 떠올리게 할만큼 보기만 해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3호인 이 돌장승은 위엄이 서린 여느 사찰 장승과는 달리 입도 코도 삐뚤어진 해학적인 표정을 하고 있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지만 바쁜 답사길이라 주차장을 지나쳐 남장사까지 차로 올라갔다.
남장사는 크게 극락보전과 보광전 영역으로 나뉘는데 그 중심은 극락보전이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나 정면의 칸 사이가 좀더 넓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비교적 너른 평면 위에 깊숙한 맞배지붕이 위엄을 갖추고 있어 조선 중기 건물의 장중함을 지니고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건칠아미타불좌상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1701년에 그린 감로왕탱을 비롯하여 18~19세기의 불화들이 전각 안을 빛내고 있다.
극락보전의 왼쪽으로 난 운치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삼문을 지나 비로소 원래 본전이었던 보광전을 만나게 된다. 보광전엔 철조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14세기 공민왕 시절에 나옹화상이 조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물 제990호인 비로자나불상 뒤에는 탱화가 아닌 목각탱(木刻幀)이 자리잡아 비로자나불을 빛내고 있다. 금분을 입힌 목각탱은 보물 제9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각의 벽엔 토끼와 거북, 도깨비 얼굴, 이백(李百)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 혜가가 달마대사에게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청하는 모습, 그리고 민화풍의 물고기 같은 재미난 벽화들이 많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눈여겨 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크고 작은 전각들이 오밀조밀 모여 조화를 이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집, 마당에선 눈을 치우느라 스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장사 상수리나무 큰 그늘
넘치고 넘쳐나 물소리에 닿는다
지난 겨울 끝자락 한쪽 팔
폭설에 내려주고도
뻗어나가는 두터운 그늘에 들면
옹이를 열어젖힌
굽은 등걸 속 둥근 물결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깊숙이 감춰두었던 수의(水衣)까지
가느다란 햇살의 손을 빌려
골짜기 골짜기로 보내주었다
눈치 빠른 딱따구리도
따신 햇볕 날개에 퍼 담아
상수리나무 속으로 들앉는다
거기 장수풍뎅이,사슴벌레, 참다람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애기벌레들까지
연방 들락거리며 물소리를 퍼 나른다
저토록 두껍고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태초의 물너울을 키우고 있다니
천년 목숨 지켜낸 남장사
상수리나무숲 바다로 가는 물결을 본다
-황구하, '바다로 가는 나무' 전문-
어느덧 눈을 이고 선 절집의 지붕 위로 산그늘이 내려앉고 골짜기를 타고 올라온 골바람에 손끝이 시리다. 서둘러 동안거에 든 나무들 곁을 지나 일주문을 나서는데 계곡의 물소리 아득하다. 백승훈(수필가. 사색의향기 여행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