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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창립 100주년을 돌아보며
글쓴이 정근식 / 등록일 2023-04-11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니 아스라하지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 한 조각, 시장에 갔다가 우리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옆 동네 주민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존대어를 쓰기는 했지만, 약간 어색한 말투가 마음에 걸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할아버지께 방금 사용한 호칭과 존대어에 관하여 여쭈었더니, “옛날에는 노소를 불문하고 그 사람들에게는 하대하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0년전, 진주에서 형평사가 창립된 것을 상기하면서 형평운동의 역사를 검토하다가 아뿔사, 나의 고향에서도 강력한 형평운동이 있었으며, 그때의 어색함이 우리 사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신분제의 유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형평사의 외침, 자유와 평등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가 창립되었다. 강상호 등 뜻 있는 사회운동가와 이학찬 등 백정출신 유지들의 합작이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는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의 주지라”는 외침이 장엄하다. 그로부터 약 보름 후에 익산에서 유사한 목표를 가진 동인회가 창립되었다. 그 격문도 대단하다. “생각하여보라, 우리는 그 악마와 같은 각색 계급으로부터 무리한 학대를 받을 때마다 호소할 곳도 없이 부자가 서로 붙들고 모녀가 서로 껴안아 피눈물이 흐르도록 얼마나 울었던가. 우리가 한번 분기하여 이 골수에 맺힌 설움을 씻고 조상의 고혼을 신원하는 동시에 어여쁜 우리 자녀들이 다가오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형평사는 창립 당시에 사칙 제3조로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장려, 상호친목”이라는 네가지 목표를 세웠다. 한편으로는 동학과 천도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3.1운동과 민족언론운동의 맥을 잇는 신분해방과 차별철폐운동이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형평운동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으며, 점차 백정들의 주체성이 강화되었다. 1929년 제7회 전국대회를 알리는 포스터는 조선형평사총본부의 이름으로 “모히라! 자유평등의 기차하에로”를 외치고 있다. 1931년에는 전국에 166개의 형평 분사가 활동할 정도로 대중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신분해방을 내건 형평운동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형평사 창립 직후부터 주변의 일반 농민들로부터 심한 반발이 생겨나 곳곳에서 충돌했다. 1925년에 예천에서 발생한 충돌로 인해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형평운동 내부에서도 본부 소재지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2년만에 본부를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경제적 자강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이었다. 일제 당국은 초창기에는 관망했지만, 조직이 확대되고 사회주의적 영향이나 수평사와의 연대가 모색되는 분위기가 나타나자 통제정책으로 전환했다. 1927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주요 지도자였던 장지필과 조귀용 등을 검거했지만 이들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이었다. 광주경찰서는 1933년 전국 각지의 형평운동 활동가 100여명을 검거했고, 모진 수사 끝에 14명을 공판에 회부했지만, 결국 1936년에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형평사는 이런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35년 4월, 창립 12년만에 대동사로 개칭하여 순치되었고, 그나마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 해체되었다.
새로운 신분의 출현?
해방과 6.25전쟁,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신분차별은 사라졌다. 형평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게 되는 높은 사회이동율을 바탕으로 우리는 말 그대로 성공한 나라를 일구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우려스럽다. 2011년 젊은이들 중 일부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의 3포세대라는 용어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N포세대로 확대되었다. 또한 2015년에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상징되는 자조적 표현이 널리 유포되었다. 부모로부터 재산과 능력을 물려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행복을 좌우한다면, 그것이 옛날의 신분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이런 새로운 신분론이 고착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평운동 100주년, ‘공정사회론’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 엄중하다.
글쓴이 : 정근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