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삽교출신
시골 종가집 출신 신앙이 좋은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어머니가 시집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 제사를 추도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신앙생활를 하였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 잘 안 간다고 많이 혼났다.
초등학교 4학년때 산에 있는 가야산 노천 기도원애 갔다.
그런데 비가 왔다. 그당시는 교회 학교 교회 집 이것이 일과였다. 집에서는 공부만 .
고등학교 마치고 어머니가 신학교 가라고 하여서 신학교 가니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만 모여있었다.
자신은 자신은 이 차원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군에갈려고 신문에서 하사관 모집을 보고 군에 지원하였지만 신학교마치고 군목으로 오라고 안된다고 툇자를 맞았다,
신학교 나와 전도사로 일를 시작했으나 새벽기도와 심방이 큰 짐이였다. 평생 이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자 큰 부담으로 몰려왔다.
당시는 차도없고. 감은 숫탉과 같이 신자들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부끄럽게 생각했다.
전도사 생활을 빨리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하러 갔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답을 얻고자 하였다.
사흘만 금식 기도하러 갔다. 여섯 식사를 굶으니까 오직 먹는 것만 생각났다. 이틀째 저녁부터 마음속에서 나와 다른 또 다른 내가 전쟁을 하였다. 금식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만 두라는 객체가 싸워 그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가게앞에가 생라면을 사가지고 와 산에 올라가 널직한 바위에 올라앉아 생라면 맛이 정말 맛이 있었다. 그날은 구름하나없는 보름달이었다. 그리고 가장 비굴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라면맛을 잃고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초라하고 비굴한 자신을 보았다. 꿈도 미래도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꿈도 미래도 업는 자신을 보고 다리뻣고 울다가 지쳐서 잤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어떤 아무것도 없으면 전도사 생활 접겠다고 하엿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짓고 울고 굶으면 된다 아이들이 떼 부리듯이. 그러면서 잣다. 그 밤에 꿈속에서 하나님이 저를 만나주셨다.
그 때 한번 만남을 이제까지 울겨먹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를 쓰셨다.
서울 마포구 신촌성결교회(담임목사 이정익) - 교회 재적교인 약 3천명
장년 출석 3300
청년 출석 370
교회학교 출석 850
1933 년 구마 농부로 태어남. 그리고 양자로 들어갔음. 자녀 교육위해 부산으로 옮겨감.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집을 지으심.
34사단장을 지냈음. 적이 올려다 보이는곳에 사단이 있어서 장병들의 사기가 낮았다. 그래서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군교회를 세웠다.
백골전설교회라 명하였다. 교회를 짓는 동안 200개의 지뢰를 빼냈지만 사고는 한 번도 안났다. 그리고 34.5 미터의 <승리의 십자탑>을 아무 사고 없이 세웠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십자 철탑이 되었다.
그 후 수도경비사에 왔는데 교회가 없어 교회를 세웠다. 조그마한 일로 3성장군으로 갑자기 예편을 하게 되었다. 이의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의연하게 태도를 취한 신앙의 아내가 의연하게 행동을 취해 의연하게 군대를 떠났다. 청와대 불러 들어갔더니 무죄인데 그만두게한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그리고 미얀마 북한공작원의 테러 사건 후 그곳에 가보았더니 처참하였더다. 그 때의 한 사람이 김연희 였다.
김연희를 한국에 데려왔는데 일본일인체하여 뜨거운 거을 잠깐 손에 대자 <앗뜨거>하고 한국말을 하여 본색을 탄로시켰다.
미얀마는 박세직의 말을 따라 이 사건을 저지른 자 둘을 잡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과 국교단교하였다.
88년 올림픽 시작하는 날 태풍이 온다고 일기예보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기도운동을 제안하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권사님은 철야기도를 하였다. 봉화는 한 장로님이 하기로 되어있었다. 이종원씨의 부인이 금식기도를 하여 근무자들이 진지하게 일을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며 일을 하였다. 목사님과 성도들 4000 명이 와서 기도하고, 그다음엔 불자들이 4000 명이 와서 기도하고 그 다음은 천주교 교인들이 와서 기도하였다. 운동권도 잘 협력하였다. 소매치기들도 소매치기 하지 않기로 협약을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소매치기들의 질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운전기사들도 대한민국의 대사로 외국인들을 잘 대해 주었다. 공항직원들은 콘크리트속에 숨겨들여오는 권총을 발견했다.
그리고 성화을 붙이는 마지막 주자를 정하는데 손기정 그리고
15년간 권위적인 남편을 섬기고 살았다. 남편이 집에 오면 밥을 챙겨달라고 하였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 남편은 행복하나 여자들을 마음과 정서가 만족되어야 만족함.
남편들은 다시 태어나도 자기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하나 아내들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남편은 찬바음식 갯가에서 자라 바닷 고기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서울 출신으로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서 5남패 막내로 태어난 남편은 음식을 사서 혼자만 먹었다. 맏으로 태어난 아내.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감춰놓고 혼자 먹었다.
부부가 다른 것은 다른 것일뿐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리다고 생각하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문제다.
그리고 틀린 성격을 가진 것은 축복이다. 생물에서도 잡종강세라고 하듯이 축복이다. 사회도 섞이면 섞일수롤 좋은 것이로 발전한다.
미국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많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발전한다.
다른 것이 큰 축복인 것을 알면 큰 축복을 누린다.
남편은 결단력이 있고 아내는 결단력이 없다.
아내한데 다 쏟아놓고 뒷끝이 없다고 그냥 편히 자버렸다.
남편은 연애할 때는 아내애게 반지많이 사준다고 해주고 해 주지 않았다.
남편은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결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ㅡ여자는 자기 문제를 털어놓는것이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집에서 키워야하기 때문에 항상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남자는 단답식으로 이야기 한다.
운전면허증을 땄는지 이야기이들어보았는데 한참 들어도 결과를 잘 몰랐다. 그리고 시험관 잘못만 이야기만 이야기했다.
남편은 답답해서 <당신 실력이 부족하니 떨어졌다>고 핀잔하였다.
여자는 감정에 동감해기를 바란다. <구나구나>법에 따라 마해주는 것이 해결책이다.
정답만 말해주면 이것이 오답이다.
일제시대 말 20대 후반. 종로3가에서 곡물상을 함. 해방후 한경직 목사님이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움. 90세인 저의 아내가 이북 출신의 신자로 저를 신앙으로 도움.
북에서 빈손으로 남쪽으로 와서 장사를 시작. 큰 돈을 벌려고 하는데 친구가 동태를 외상으로 줄테니 팔으라고 해서
장사를 시작. 동태를 사서 추럭에 실고 팔았다.
48년 12월 22일에 (동지) 동해안을 따라 배로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자정이 넘었는데 태풍이 불었다. 그 때 동해에서 죽게되었다고 생각했다. 선장은 나이 많으신 분으로 바다에 환한 분이었다. 저는 태풍가운데 떼돈을 벌렸고 욕심부렸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게 울진이라는 데에 배가 들어가자 그곳 사람들은 이렇게 태풍이 심한데 살아남은 것에 놀랐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폭풍에서 살리신 것이었다.
그 때에 그 분들이 소주 한병주고 마시고 잘 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새벽찬송이 들려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서울가면 하나님 잘 섬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이 사업을 접고 한경직 목사님 밑에서 주님을 열심히 섬겼다.
한경직 목사님은 군대의 복음화, 학원복음화를 위해 힘썼다. 그리고 복음화 교육을 강조하셨다.
107년된 기드온 협회 운동을 한국에서 시작.
최창근(97) 영락교회 원로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오른팔’이었다. 최 장로는 한
목사가 비전을 수백억원 대의 재정을 투입해 그것을 현실화시킨 주역이다. 1960년대 섬유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최 장로는 한 목사가 제안한 교육사업과 기드온협회, 사랑의쌀나누기운동, 실로암안과병원 설립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13년 1월 8일 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