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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광야에도 신기루가 있다[廣野亦有蜃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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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단지 바다 위에만 신기루(蜃氣樓)가 있는 줄 알지, 넓은 들판 가운데에도 신기루 현상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
무변(武弁) 출신인 어떤 고관(高官) 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젊었을 적에 육진(六鎭)의 변방 고을을 지키고 있었는데, 언젠가 오랑캐 지역을 바라다 보노라니,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광막한 사막 한가운데에, 그야말로 바다 위에 나타난다는 신기루처럼 누대(樓臺)와 궁실(宮室) 모습이 이따금씩 보이곤 하였다.”
하였는데, 내가 그때 듣고서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를 읽어 보니, “바닷가에서 보면 신기(蜃氣)가 누대(樓臺)의 모양을 만들고, 광야 역시 그곳의 기운이 궁궐의 형상을 이루어 낸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이 허망한 것이 아닌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지역이 협소하여 광야라 할 것이 없는 반면에, 오랑캐 지역은 광막한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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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 제3권 / 관사에 머물다[留館] ○ 갑자년(1804, 순조 4) 1월
5일(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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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옥하관에 머물렀다.
한림 홍오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함[訪洪梧翰林不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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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
우리나라 흑산도(黑山島) 백성으로서 남해에 표류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관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 넷이 있었다. 이날 밤 그들을 불러다가 그 전말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유년 겨울에 물고기를 사기 위해 곡물(穀物) 약간을 배에 싣고 소흑산도에서 대흑산도로 갔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0일 만에 어느 한 항구에 닿으니 마침 어떤 사람이 물 건너편에서 영접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나라 말을 약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 지방을 물었더니, 그곳은 바로 유리국(琉璃國)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관(官)에서 배를 검색하더니 곧 관청에 안접(安接)시키고 의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0월 초에 그들의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를 따라서 배를 출발시켰었는데, 10여 일 만에 또 바람을 만나 표류, 진공사의 배 두 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던 끝에 어느 한 곳에 정박했더니, 언덕 위에 흰옷 입은 사람이 있다가 멀리 바라보더니 곧 달려왔습니다.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이제야 살아날 길이 있구나 하고는, 그를 따라간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 사람이 바삐 돌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 태반이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해 왔다.’ 하기에, 드디어 그와 함께 바삐 배를 옮겨,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렸으니, 정박할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되풀이한 지 4일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달려온 자그마한 배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주(蘇州) 사람으로서 상업(商業)을 하느라, 여기에 이르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그들의 힘을 입어 방옥(房屋)에 안접(安接)되고, 또 쌀을 무역하면서 서로 돕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이 어느 지방이냐고 물었더니, 일록국(日鹿國)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또 길을 떠나 15일 만에 사분지(沙分地)에 닿았으니, 이날은 바로 3월 소회(小晦)였습니다.
또 석 달을 가서 소주(蘇州)에 닿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갔는데 관가(官家)에서 공궤(供饋)해 준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10월 3일 소주에서 출발, 12월 4일 연경에 닿았더니, 예부(禮部)에서 의식을 급여하고 절사(節使)가 올 때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 두 사람은 다른 배에 탔었는데, 여태껏 이르지 않으니, 그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보면, 그들은 천하를 훌륭히 구경했다고 할 만하건만, 무식한 탓에 그것을 만분의 일도 기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표류된 사람의 성명은 즉, 문호겸(文好謙)ㆍ문순득(文順得)ㆍ박양신(朴亮信)ㆍ이백근(李百根)ㆍ이중태(李重泰)ㆍ김옥문(金玉文)인데, 문순득ㆍ김옥문은 여태껏 이르지 아니한 자들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장하게 여겨, 술 한 잔을 가득히 부어 주었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 黑山民俗太蠢蠢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려 / 濱海逐利多困窘
석우풍(石尤風)이 어찌 다니는 사람 사랑할 리 있나 / 石尤何曾愛行人
만경의 사나운 물결 한없이 이네 / 萬頃惡浪吹不盡
일엽편주 아득히 가는 대로 놓아두니 / 一葦茫然縱所之
떠가는 배 문득 허루신과 같구나 / 泛泛忽如噓樓蜃
길은 강절의 하늘 아득한 데로 통하였고 / 道通江浙天浩渺
돛대는 오초의 산 높은 데에 떨어졌네 / 帆落吳楚山嶾嶙
일록국 사람 가죽으로 옷해 입고 / 日鹿國人皮爲衣
가을바람에 새 쫓는 매처럼 용맹스럽네 / 猛如逐雀秋風隼
해동의 여아는 공연히 한이 맺혀 / 海東女兒空結恨
누굴 위해 다시 공후인을 짓는고 / 爲誰更作箜篌引
네 만약 문장의 안목 갖추었다면 / 使汝若具文章眼
닿은 곳마다 시로써 번민 잊을 수 있었을걸 / 觸境有詩能排憫
원하노니 네 고향엘 가거들랑 / 願汝鄕山歸去日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게나 / 安息田家服畦畛
[주-D001] 석우풍(石尤風) :
역풍(逆風)으로 어원은 다음과 같다. 석씨(石氏)의 딸이 우랑(尤郞)에게 시집가 정의가 매우 좋았다. 하루는 그 남편이 장사하러 먼 길을 뜨려 하니, 그녀는 만류했다. 우랑은 듣지 않고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녀는 죽을 임시에, “내 능히 만류하지 못해 이 지경 된 게 한이니, 이제 장사하러 원행하는 이 있으면, 내 마땅히 큰바람을 일으켜서 천하의 부인들을 위해 저지하리라.” 했다. 이 후로 장사치들은 배를 띄울 적에 역풍을 만나면 ‘석우풍’이라 하고 가지 않았다 한다. 《江湖紀聞》
[주-D002] 허루신(噓樓蜃) :
신기루(蜃氣樓)를 말한다. 천기(天氣)가 평온할 때 어른거리는 물체가 더러 사막에 나타나서 물에 반사된다 한다. 그것을 신기루라 하는데, 큰 조개가 토한 기운이라 한다. 여기서는 떠가는 배가 마치 신기루처럼 어른거린다는 뜻이다. 이빈(李頻)의 송허혼시어부윤주시(送許渾侍御赴潤州詩)에도 “祖席離烏府 歸帆轉蜃樓”라 하였다.
[주-D003] 공후인(箜篌引) :
노래 이름으로 고려 때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 여옥(麗玉)이 지었다. 여옥은 그 미친 남편이 물을 마구 건너는 것을 미처 뒤따르지 못하여, 결국 빠져 죽게 되자,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것이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주 장순범 (공역) | 1976
신지도(薪智島) 면적 면적 30.99㎢, 해안선 길이 48.0㎞ 소재지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요약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있는 섬. 동경 126°53′, 북위 34°25′에 위치하며, 완도에서 동쪽으로 5㎞, 고금도에서 남쪽으로 1㎞ 지점에 있다. 면적은 30.99㎢이고, 해안선 길이는 48.0㎞이다. 신지면에는 신지도와 모항도 2개의 유인도가 있는데, 모항도의 인구는 3명에 불과하다. 신지도는 신지면의 주도로, 섬들이 연결되어 형성된 도서이며, 완도와는 2005년 12월에 완공된 신지대교를 통해 연결되었다. 신지도와 고금도 사이에도 2017년에 장보고대교가 준공되었다. 완도군 고금면과 강진군 마량면을 잇는 교량인 고금대교는 2007년 6월 개통되었다. 이에 앞서 완도군의 조약도는 1999년 약산대교(약산 연도교)가 놓이며 고금도와 연결되었기에 3개 섬(고금도&조약도&신지도)은 육지와 연결되게 되었다. 원래 지도(智島)라 칭하였으나 나주목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읍)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하여 나무가 많은 섬이라 하여 신(薪)자를 붙여 신지도라 부르게 되었다. 청산도 만호진이 옮겨오면서 새로운 군주둔지가 되어 ‘신둔지(新屯地)’가 되어 이후 ‘신지’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지질은 중성 및 염기성화산암류,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상산(象山, 325m)·노학봉(老鶴峰, 225m)·범산(虎山, 151m)·기선봉(141m) 등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서남쪽에 소규모의 평지가 있다. 상산의 북쪽 말단부에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노학봉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천들이 흐르며, 하천 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범산과 기선봉 사이에도 취락과 농경지가 있다. 섬의 남쪽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안에는 길이 3.8㎞. 폭 150m의 백사장을 가진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는데 이 곳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섬의 동쪽에는 동고리해수욕장이 있다. 섬의 서북쪽에는 넓은 간석지가 형성되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1월 평균기온 1.9℃, 8월 평균기온 25.1℃, 연강수량 1,282㎜이다.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팽나무 등의 아열대성 식물이 자란다. 삼한시대에 마한에,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통일신라 말기에는 청해부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하였다가 이후 강진현에 이속되었다. 1596년에는 송곡리에 수군방어진을 설치하여 수비케 하였으나 1865년 동학난으로 폐진되었다. 1896년에 완도군이 신설되면서 완도군에 편입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신지면 소속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좋은 말을 길러 조정에 올려 보낸 곳으로 지금도 마장터의 흔적이 있다. 매년 7월에는 조상의 묘소에 나가 벌초를 하고 묘사(墓祀)를 지내며 근친간의 결속과 우의를 다지는 풍습이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3,820명(남 1,905명, 여 1,91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수는 1,844세대이다. 신지면 인구가 3,823명이므로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신지도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면사무소가 있는 대곡리가 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 3.50㎢, 밭 4.80㎢, 임야 17.60㎢, 대지 0.60㎢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배추․참깨 등이 생산된다. 근해에서 멸치류가 가장 많이 잡히고, 조기․가자미․돔․정어리․밴댕이 등도 많이 잡힌다. 섬 주변의 해안에서는 김 양식업이 아주 활발하다. 신지대교를 통해 완도읍 가용리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교육기관으로는 신지초등학교와 신지동초등학교, 완도신지중학교가 있다. 구사당속집 : 제작자 이병원.제작년도 18세기말. 설명 : 구사당 선생속집은 김낙행(金樂行 ; 1708∼1766)의 시문집이다. 김낙행의 후손 김진성(金鎭誠)이 1801년 간행된 원집에서 누락된 시문 및 부록을 수집·편차하여 1893년에 속집으로 간행하였다. 속집 권1은 시·문, 권2∼3은 문, 권4는 부록으로 행장·유사·만사 등이 실려있다 > 고전번역서 > 구사당집 > 구사당속집 제1권 > 서 > 최종정보 구사당속집 제1권 / 서(書) 권강좌에게 답함 을축년(1745, 영조21) 〔答權江左 乙丑〕 [DCI]ITKC_BT_0524A_0100_020_0040_2016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삼가 손수 쓴 편지를 멀리까지 보내어 우환과 불행 중의 처지를 위로해 주시니, 받아 읽고는 감읍하여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로 여러 날이 지났는데, 삼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버이를 모시고 지내시는 기체후가 다시 어떠하신지요? 구구한 저의 마음에 그리움이 절실합니다. 낙행은 불효하고 못난 사람으로 재앙의 기미가 점점 더해 가니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탐라도로 들어가지 않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지 않은 것은 실로 오직 임금께서 내린 은혜이니 삼가 마땅히 감읍해야 합니다. 다만 끝없는 것이 사사로운 정인지라, 늙고 병든 부모가 이역 멀리 떨어져 훗날의 기약을 아득히 정할 수 없고, 섬이 비록 샘물이 달고 토양이 비옥할지라도 필경 바다 가운데에 있어 습한 안개와 바람의 장독(瘴毒)이 있으며, 섬진강과 비교해 보면 당연히 멀리 떨어진 곳이니, 한결같이 염려하고 두려워함이 오직 이뿐입니다. 어찌하고 어찌하겠습니까. 섬에서 돌아온 자가 말하기를, ‘섬진강에서 강진(康津) 치소(治所)까지는 삼백 리 먼 길입니다. 치소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길이 있으니, 남당(南塘)을 경유해서 가면 육십 리 길이 되고, 마도(馬島)와 고금도(古今島)를 경유해서 가면 백 리 가까이 됩니다. 남당 길은 큰 바다이고, 마도 길은 육로로 육칠십 리를 가서, 건너야 할 두 개의 나루가 있으니 합해서 백 리가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귀양살이 여정은 마도 길을 취하였습니다. 신지도(薪智島)는 동서 이십 리, 남북 십 리인데 큰 촌락이 이따금 있고, 현재 머물고 있는 곳도 큰 촌락입니다. - 마을 이름은 동고지이다. - 집은 자못 널찍하여 지낼 만합니다. 그러나 생선이 매우 귀하고 금년은 흉년이 들어 육지와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풍속은 심하게 놀랍거나 다를 것이 없으나, 대개 다 이(利)를 좇고 형세에 아부하는 류인지라, 생계가 군색함은 실로 말할 것도 없고 힘없는 귀양객은 아마 도움 받을 길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오직 두려워할 만한 것은 봄여름 바다 기운과 샘물의 맛일 뿐입니다. 낙행은 애초에 이미 따라 들어가지 못하였고, 지금은 노비를 기다리느라 석전(石田)에 머물고 있는데, 섣달그믐 전쯤에 겨우 섬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행(霽行)은 병의 증세가 해도(海島)에 오래 머물 형편이 못 되어 대인(大人)께서 재촉해 돌아가라 하였으니, 곁에 있는 사람은 오직 광양(光陽)과 하동(河東)에서 온 두세 명의 배우는 자들뿐입니다. 늙으신 어머니는 지난 그믐에 석전(石田)에 도착하였는데, 마음이 안정되기 전에는 고향 땅으로 가려 하지 않으셔서 우선 여기에 임시로 머물면서 봄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한 집안이 셋으로 나뉘고 넷으로 찢어져 경색(景色)이 더욱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괴롭고 괴롭습니다. [주-D001] 우환과 …… 처지 : 김성탁이 나이 62세(1745, 영조21)에 해남현(海南縣) 신지도로 이배된 일을 말한다. “아들 낙행이 두 어버이께서 천 리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을 애통히 여겨 박 부인을 모시고 갔다. 이는 대개 유미암이 북쪽으로 귀양 갈 때 부인이 따라 갔던 일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원계가 또 발하여 이배의 명이 있었다.〔子樂行痛念二親千里相隔, 奉朴夫人往從. 葢據柳眉巖北遷時, 夫人隨往. 因此院啓又發, 有移配之命.〕”라는 말이 있다. 《霽山集 年譜》 [주-D002] 귀양살이 여정 : 본문의 엄정(嚴程)은 기간이 엄격한 여정을 말하는 것으로, 김성탁이 신지도로 이배되는 여정을 가리킨다. [주-D003] 제행(霽行) : 김낙행의 동생 김제행(金霽行, 1716~1792)으로, 자는 계통(季通)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역) | 2015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지리지 > 전라도 > 최종정보 세종 지리지 / 전라도 전라도 [DCI]ITKC_JT_D0_B30_040_000_00010_2005_024_XML DCI복사 URL복사 ◈ 전라도(全羅道) 마도(馬島)가 강진현(康津縣)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 【중선 8척과 군사 5백 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남당 : 현재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포리 마도진 원포 : 현재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강진군의 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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