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독립운동가들의 ‘금고’ 달걀 장사로 시작 아시아 바다 주름잡아
최대 무역왕 불세출 최봉준 (하)
고정일 소설가
▲ 블라디보스토크와 가장 가까운 항구였던 함경도 성진항.
최봉준은 유창한 러시아말과 소년 시절부터 닦아온 기량과 두뇌, 그 두 가지
요소를 아우르는 넓은 품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는 야린스키가 남겨 준 처세정신 10조와 재산을 밑천으로 차츰 큰
장사꾼으로 성장해 갔다. 최봉준이 맨 먼저 손댄 것은 러시아 농가에서 사들인 달걀을 함경도에 가져와 파는 일이었다. 이미 러시아
사람들은 이른바 개량종 양계법에 따라 달걀을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그 달걀은 많은 노동자 유민들의 비상식량이기도 했으며, 또
달걀을 함경도까지 그대로 가지고 나가면 그 이익이 두 배가 넘었다. 달걀 판매로 차츰 기반을 닦은 최봉준은 1890년대 후반,
명성황후가 친러파 정객들과 어울려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즈음에 이르러서는 달걀장사가 아닌 소장사로서 돈을 불려
나갔다. 마침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최봉준이 자리를 잡은 곳은 고향 함경도
성진(현 김책시)이었다. 그는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홍콩·상하이·일본까지 활동무대로 삼았다.
러시아·일본·중국에서 각종 수입품, 특별히 비단이며 광목·석유를 들여와 함경도 일대는 물론 부산에서 동해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지배하는 거상이 되어 갔다. 광목이니 석유니 하는 것은 구색 맞춰서 하던 장사였고, 최봉준 야망의 진면목은
그보다 훨씬 큰 활동무대, 드넓은 아시아에 있었다. 그는 거대한 화물선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부산과
인천·마카오·홍콩·상하이·대만·일본·블라디보스토크까지 취항하면서 온 바다를 주름잡고 다녔다. 드디어 국제적 해운왕으로 불리는
최봉준. 얼른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120년 전인 그 무렵만 해도 화륜선(火輪船) 한 척이면 하늘을 흔들 만큼의 재력을
상징했다. 그때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던 국유 화물선은 겨우 세 척. 그것도 고장 나서 제대로 운항을 못해 팔아버린 형편이었는데,
최봉준은 자기 소유 화물선을 당당하게 국제항로에 취항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성진항에 조선 최초 무역센터
최
봉준은 1906년 4월 일본에서 1400t짜리 화륜선 후시미마루(伏見丸)를 사들였다. 이 후시미마루는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동양의
바다를 주름잡은 일본 군함 가운데 거함으로 손꼽혔다. 아직 가시지 않은 화약 냄새를 풍기며 유유히 파도를 헤치고 다니던 그
웅자는 참으로 대단했다. 최봉준은 그 군함을 사들여 자가용 수송선으로 썼다. 지금도 1400t짜리 선박이라면 그리 만만치
않을진대, 하물며 이 땅에 겨우 철도가 놓이기 시작한 100여년 전에야 어떠했을까. 최봉준은 1400t짜리 배를 사들여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해 북부 해안에서부터 러시아 연안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 운항을 했다. 최봉준은 준창호를
경영하는 한편 후시미마루로 다달이 1000여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수출했다. 소 한 마리당 40원으로 쳐 연평균 생우 수출량만도
50만원을 넘어선다. 1년에 생우 수출고 50만원을 올린 최봉준. 그는 소장사만 한 것이 아니라 광목과, 또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을 취급해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해마다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흘러나가는 계절노동자가 몇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 또한 최봉준의 배를 타고 건너갔으니 원산과 성진은 물론이요, 블라디보스토크와 조선 사이 모든 수출입을 최봉준이 독점했던
셈이다.
우리나라 최대 우(牛)시장이던 경상도 안동이나 경기도 수원, 또 충청도 홍성의 우시장 한 장거리에
모인 소는 기껏해야 500여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시장 부근의 들판까지 완전히 누렇게 덮였다. 농촌에서는 소 한
마리를 흥정해 매매하는 일이 최대의 자금 융통이었고, 소를 사고파는 것은 그 집 재산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소를
최봉준은 원산과 성진항에 앉아 혼자서 사고판 것이 매달 1000마리가 넘었다. 그것도 그 자리에서 한두 마리씩 파는 게 아니라
소를 몽땅 배에 싣고 러시아 땅까지 가서 팔았으니, 엄청난 이익을 남겼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최봉준은 억만장자의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최봉준이 사업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그의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점이다. 그가 살길을 찾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러시아로 건너간 것이 12세 때요,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
45세였으니, 무려 30여년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셈이 된다. 그는 황금 같은 젊은 날 내내 고향을 그리워했다. 조국에
돌아온 뒤에는 고향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썼으며 조선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몇천만금을
거머쥐고 금의환향한 그였지만 새로 둥지를 튼 성진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남녀노소를 떠나 성심껏 허리 굽혀 인사했으며 늘
따듯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이것은 ‘부자가 된 뒤에도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최봉준이 지닌 상인정신의 드러남이었다. 재물의
가치는 재물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이를 유통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찾게 되는 만족감에 있음을 몸소 실천한 최봉준은 부자가
되어서도 그 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최봉준의 일이라면 조선 사람 누구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도와주려 나섰다.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다
▲ 최봉준 어린 시절의 또래 아이들.
최봉준은 대사업가이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마음속으로 통곡하며 시베리아에
한국민회(韓國民會)를 조직, 재정적 후원을 맡았다. 그의 남다른 기백과 대인다운 면모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 비용을 모두 대주고 유족의 생계비를
남모르게 후원한 일에서도 뚜렷하게 빛난다. 안중근은 의거 뒤 자신은 대한의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대한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 이토를
처형했으니 전쟁포로로 취급해 줄 것을 당당히 주장했고, 관선변호사인 일본인 미즈노(水野吉太郞)마저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한 일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했다. 최봉준은 이 재판의 변호사 비용
거액을 거침없이 선뜻 내놓았을 뿐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들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복면을 한 사나이가 뛰어들었다. 최봉준은 직감으로 여느 강도가 아님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성재 선생께서….”
“얼마가 필요한가?”
최
봉준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놀란 것은 오히려 복면한 사나이 쪽이었다. 고향 청년으로 일찍이 항일운동에 나선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가 보낸 그 사나이는 감격해 그 자리에 무릎 꿇고 복면을 벗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된 앳된 얼굴이었다. 그는
흥분과 감동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최봉준 머릿속에 청년 이동휘의 다부진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해 고향 함경도 단천
출신이라며 그가 찾아와 인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약관의 나이로 항일전선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이는 준재였다. 성재 이동휘는 뒷날
상하이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내각에서 국무총리를 맡는다. 최봉준은 금고를 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돈다발을 꺼내 젊은이 앞으로
밀어놓았다. 젊은이의 볼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없었다.
“조선의 국권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나. 성재 선생께 독립 군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주시도록 말씀 드리게.”
해조신문 창간
최
봉준은 1908년 ‘해조신문’을 창간, 항일정신과 민족정기를 드높여 나갔다. ‘해조신문’은 그해 2월 26일 창간호를 내어
해외에서 처음으로 조선말로 발행된 일간신문으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 신문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원산 사이를 오가던 최봉준이 발행인·사장을 맡고 ‘이날에 목 놓아 우노라(是日也放聲大哭)’는
명문으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직을 물러난 장지연(張志淵)을 주필로 초빙해 항일애국 논설을 집필하게
했다. 발간사에서 ‘일반 국민의 보통 지식을 계발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완전하게 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밝힌 것처럼
애국독립투쟁을 고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보급도 비단 러시아 영내뿐 아니라 서울(京城)·원산·인천·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고
선편으로 원산항을 거쳐 국내 방방곡곡으로 배포했다. ‘해조신문’은 조선 민족의 잠을 깨우는 논설, 국내외 소식, 교민사회의 동향,
계몽기사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매호마다 격렬한 항일구국 논설을 실어 애국지사의 피를 들끓게 하고 일본제국 통감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해조신문’이 국내에 흘러들어와 조선 민중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자 이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1908년 4월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뜯어고쳐 국내 판매를 금지하고 ‘해조신문’을 압수했다. 그 뒤 ‘해조신문’은 발매반포금지 횟수가 17회,
압수된 부수가 1569부에 이르렀다. 이렇듯 국내 보급이 어려워지고 일제가 사장 최봉준에게 폐간을 강요하며 그의 사업체에 온갖
압력을 가하자 1908년 5월 26일자 제75호를 끝으로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폐간하고 만다.
바다를 품은 城을 쌓다
▲ 평안북도 정주의 우시장.
1899
년 완성된 성진항의 최봉준 대양관(大洋館)은 그즈음 세운 조선의 건축물 가운데 최초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했으며
러시아인·일본인·중국인 모두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에는 2층 양관을 지을 수 있는 목수나 미장이가 없어서 일본에서
목공·석공·벽돌공 100여명을 불러들였고 벽돌까지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져다 썼다. 2층 60여칸이요, 또 그 밖으로 둘러친
회랑(回廊) 상점이 100여칸, 그 회랑 가운데에 다시 철고(鐵庫)를 지어 60여칸에 이르니 건물의 총 칸수는 220칸이 넘었다.
그것도 산비탈에 세워 놓은 여느 별장이 아니라 성진항 외국인 조계 안에 당당하게 바다를 품어 안듯이 우뚝 세운 하나의 웅장한
성이었다.
대양관 기공식이 있던 날, 친구 한익성은 웬만큼 돈도 벌었고 이렇게 거대한 건물도 마련했으니 이제 편히 지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권했다. 최봉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
늘의 사업은 분명 내가 일구어낸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으므로 나 하나 편하겠다고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나.
사업가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더 무거운 법이네. 내가 없어져 회사가 잘못되면 내 회사에 투자한 많은 투자자와 고객, 또 수많은
고용원들은 어찌 되겠나. 나는 이들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내가 태어난 조국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네.”
최봉준의 재산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맨손으로 억만금 재산을 일구어냈으면서도 늘 돈이란 뜬구름이듯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해 왔던 신화적 인물답게 몇 갈래로 전해 온다.
첫째는 교육사업 투자이다. 최봉준은 1906년 엄청난 재산을 블라디보스토크의 계동(啓東)학교 설립에 쾌척했다. 그전에도 연해주 한인촌에 학교를 여럿 세우고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
재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냐. 돈이 있어야 인재를 만들 수 있지. 사람은 배워야 깨달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이 바로 힘인 거야. 힘
없이 어떻게 나라를 지탱해 나갈 것이며 부강함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둘째는 언론사업 투자이다. 그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
‘해조신문’을 창간하고 블라디보스토크 한국민회의 기관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운영자금을 대주었다. 최봉준의 언론관은 조선
민족의 지식계발이요, 국권회복이요, 독립쟁취였다.
그리고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의 활동비와 군자금
후원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아낌없이 돈을 내놓았다. 늘 돈이란 버는 것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해 왔던 최봉준.
그는 인간의 목숨 또한 유한함을 늘 마음에 새기며 언제나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애썼다.
아아! 조국의 독립을 가슴에 품고
“부
는 마음을 자연에 적응시키는 일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근면에만 있지 않으며, 절약에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자연의 순리에서 찾아야 한다. 바른 마음으로 적합한 시기, 옳은 일, 옳은 장소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를 오래 지닐 수
있다.”
최봉준은 부(富)에 대해 늘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감옥을 들락거리는 재벌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최
봉준은 1910년 8월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李相卨)·유인석(柳麟錫)·김학만(金學萬) 등이 시베리아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들을 모아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의 선언서에 서명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열강의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극동정책 실시를 호소하는 데 적극 동참,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고려족 중앙총회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조선 독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1917년 9월 11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최봉준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참으로 의미 깊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
선 젊은이들은 이 땅의 자연적 약속을 깨우치고 역사적 사명에 눈을 떠야 한다. 지금껏 작은 이익에 집착, 서로 헐뜯는 기질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망하게 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 백성이 살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옳게 깨달아야 한다. 조선은
오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반도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 전체의 무궁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귀고리다. 신이 아시아를,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조선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레이스로 삼면이 둘러싸인 칠보이고
자수정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깎여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보석 같은 나라 조선이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잊어버린 바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깨달아, 그 가치를 발휘하고 지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다와 더불어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러싸인 조선 젊은이들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조선을 바다에 우뚝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사람만이 오늘의 조선을 구해 낼 수 있다. 남방 대양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국민 의기를 드높이고 국가경제를 일으켜, 조선 민족의
성실함과 총명함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 조선을 세계 으뜸 나라로 세워나가자.”
고정일
1940
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첫댓글 저도 돈버는 재주가 탁월했다면 정의로운일에 쓰고싶네요ㅠㅠ
현 재벌신화는 아무것도 아니란. . .
꼴갑재벌들아!! 최봉주선생의 발가락 때만큼만이라도 닮아 보아라!!
맞는 말씀입니다^^감사
저 글을 쓴 분.... 불굴혼 박정희......이 저서는 맴에 참 안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