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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13. 조선미술가협회
1) 미술도 전력증강에, ‘조선미협’ 보도, 생산에 중점 제작(기사)
조선에 있는 미술가 240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조선미술가협회에서는 결전미술의 정수를 발휘하여 전시하 직역봉공에 매진하기 위하여 전부터 기구 개혁을 준비 중이었는데 지난 21일 오후 부내 태평동체신사업회관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조선군에서 나카가와(中川) 대위, 도우모토(堂本) 총독부 정보과장,쓰다(津田) 총력연맹 선전부장을 비롯하여 협회 축하원 130 여 명이 출석하여 협의한 결과 종래의 이사에 새로이 간사장 1명, 간사 30명을 임명하고 협회의 사무국을 설치하여 회장에는 전 연맹문화부장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 씨가 추천되고 동시에 금년도 제1회 사업으로 총력연맹 후원으로 생산증강에 정진하고 있는 조선 내의 조선소, 광산, 수풍댐, 농촌목재□□장에 화가 5명을 파견하여 증산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총후의 자태를 150여 점의 작품으로 완성하여 5월 초순 미쓰코시(三越)백화점에서 전람회를 개최한다. 더욱 이외에 18년도의 신규 사업으로서 다음의 4항을 결정하여 미술을 통하여 전력증강에 매진하기로 되었다.
1. 반도인 작가에게 일본정신의 정수를 체득케 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한다.
2. 국경경비에 정진하고 있는 황군용사, 경관, 교원, 관리들을 위문하기 위해 만화가를 파견한다.
3. 반도총후미술전람회는 주로 보도미술, 생산미술에 중점을 두어 역작을 모집한다.
4. 회원의 시국인식 앙양을 기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강연회, 좌담회를 개최한다.
<출전 : 「美術도 戰力增强에 ‘朝鮮美協’ 報道, 生産에 重點製作」, '매일신보', 1941년 2월 23일>
14. 단광회
1) 신 양화(洋畵) 단체 단광회(丹光會) 탄생(기사)
조선 양화단의 중진인 문화부 감사요, 선전(鮮展) 참여(조선미술전람회 심사참여작가-역자)인 야마다 신이치 씨를 중심으로 (山田新一) 이번에 새로 미술단체 단광회를 조직하고 오는 4월에 제1회 작품발표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회원은 조선서 모두 중견작가로 활약할 뿐 아니라 내지의 화단에서도 활약하는 신진 기예 21명이 모였다.
그 씨명은 다음과 같다.
김인승(金仁承), 김만형(金晩炯), 손응성(孫應星),심형구(沈亨求), 박영선(朴泳善), 이봉상(李鳳商)
(후략)
<출전 : 「新洋畵團體丹光會誕生」, '매일신보', 1943년 2월 3일>
2) 결전미술의 정수, 금일 단광회전 개막, 수상자 발표(기사)
반도화단의 중진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김인승 씨 등 19명의 화가로 조직된 단광회에서는 결전미술의 정수를 발휘할 역작을 모아 2일부터 7일까지 부내 미쓰코시백화점 전람회장에서 제1회 전람회를개최하기로 되었는데 이에 앞선 1일 전람회 수상자를 다음과 같이 결정, 발표하였다. 특히 이번 전람회장에는 회원의 공동제작으로 징병제시행의 감격을 백호의 화폭에 옮긴 대작 「조선징병제시행」도 전람되는 것으로 일반에 크게 기대되고 있다. (후략)
<출전 : 「決戰美術의 精粹, 今日丹光會展開幕, 受賞者發表」,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
3) ‘조선징병제실시’ 단광회전, 첫날부터 인기 백열(기사)
단광회 제1회 유화전람회는 2일부터 부내 미쓰코시백화점 4층 전람회장에서 개최되었다.
단광회 회원은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김인승 등 반도화단의 중진화가로 조직된 만큼 개장 시간부터 끊임없는 관람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번 출품된 작품은 야마다씨의 「수음(樹陰)」, 단광회상을 받은 사쿠라다 씨의 「언덕이 있는 풍경」등 총수 31점인데 그 중에도 1개월 전부터 전회원이 개병의 기쁨을 백호의화폭에 실은 대작 「조선징병제시행」은 단연 인기를 모아 지원병의 행진, 센닌바리(千人針-역자)를 배경으로 쿠라시게(倉茂) 부장, 마쓰모토(松本) 해군대좌, 가이다(海田) 지원병 훈련소장, 하다(波田) 연맹총장, 고(高) 경기도 도지사, 조선의 이동치호(伊東致昊) 씨 등의 얼굴이 입소되는 반도청년에게 격려하는 구도를 전면에 그려 교묘한 몽타주로 징병의 기쁨을 나타낸 화상은 그 앞에 끊임없는 인파를 이루었다.
동 전람회는 7일까지 계속될 터이고 전람회가 끝나면 「조선징병제시행」은 군사령부에 헌납될 예정이다.
<출전 : 「‘朝鮮徵兵制實施’ 丹光會展, 初日부터 人氣白熱」, '매일신보', 1943년 4월 3일>
4) 징병제실시기념 단광회 합작화, 군에 헌납(기사)
단광회 회원 19명의 합작으로 된 「조선징병제실시기념」이라고 화제를 붙인 폭과 높이가 6척 되는 큰화폭 □개를 14일 단광□□회 대표자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씨가 조선군 애국부를 찾아와 이하라(井原) 애국부장대리, 마츠지(厚地) 대좌를거쳐군에헌납하였다. 이그림은작년5월조선에육군징병제가 실시된다는것이발표되자단광회에서는이광영의제도를기리기위하고자회원19명등이힘을합하여 나라에봉공할수있는길이열리어기쁨에넘친반도의한모습을그린것이다.
그리고이그림은이밖에 여러 그림과 함께 지난 4월에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전람회까지 열어 일반에게 관람시킨 일이
있다.
<출전 : 「‘徵兵制實施記念’ 丹光會合作畵, 軍에 獻納」, '매일신보', 1943년 6월 15일>
15. 전쟁선전전람회
1) 총후미술전람회, 반도화단을 총동원(기사)
반도민중을 철저히 지도하여 이천사백만의 총력을 성전완수에 총동원시키고자 힘쓰고 있는 총독부정보과에서는 조선미술가협회를 후원하여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열고자 준비 중이다. 그 시기는 11월3일부터 8일까지의 6일간인데 이것은 총후반도의 생생한 봉공생활을 묘사한 미술품을 진열하여 민중의시국인식을 계발 지도하기로 되는 것인데 장소는 미쓰코시(三越), 조지야(丁子屋) 양 백화점으로 될 예
정이다.
<출전 : 「銃後美術展覽會半島畵壇을 總動員」, '매일신보', 1942년 9월 23일>
2) 결전미술전람회 목록
회기 3월 10일~24일(15일간)
회장 총독부 미술관
주최 경성일보사
후원 조선군 보도부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미술가협회
양화부(洋畵部)
1. 구호반(救護班) (특선) 경성 조병덕(趙炳悳)
2. 학원 즉 병사(學園卽兵舍) 대구 와타나베 요시오(渡邊義雄)
3. 수송의 정비병(輸送の整備兵) 경성 아오키 히데오(靑木秀雄)
4. 풍릉도 고지 점령(風陵渡高地占領) (조선군 사령관상) 경성 가노 간라이(加納莞蕾)
5. 여공원(女工員) 대구 우도 마사코(有働正子)
6. 북쪽 방어(北の護り) 경성 신키 마사노스케(新木正之介)
7. 밀림의 척후병(密林の斥候兵) 경성 오카지마 마사모토(岡島正元)
8. 가마니 짜기(叺織り) 평북 죽림□엽(竹林□燁, 다케바야시)
9. 아가씨 산업전사(乙女産業戰士) 경성 한홍택(韓弘澤)
10. 중기관총(重機關銃) 경성 하야시 도시오(林敏夫)
11. 봉사 후(奉仕の後) 경성 마쓰바라 겐조(松原健造)
12. □□□□ 경성 기무라(木村□一)
13. 비행기와 □□병(飛行機と□□兵) 경성 후지와라 슌이치(藤原恂一)
14. 퇴비를 만들라(堆肥を作れ) 경기 도요타(豊田□衍)
15. 육박(肉薄) 경성 고봉우경(高峰友慶, 다카미네)63)
16. 배선(配線) (특선) 경성 다카하시 다케시(高橋武)
17. 병사(兵士) 경성 마쓰바라 겐조(松原健造)
18. 출격하는 독수리(出擊する若鷲) 경성 히라누마 에이지(平沼永次)
19. 수류탄 던지는 병사(手榴彈投げる兵) 경성 금본규평(金本奎平)
20. 소년(少年) 경성 박원충국(朴原忠國)64)
21. 병창□서(病窓□書) 경성 사에키 노부코(佐伯ノブ子)
22. 송탄유를 만드는 곳(松炭油を造る所) 경기 마쓰바라 마사히코(松原正彦)
23. 상재전장(常在戰場) 경성 금본정강(金本正康, 가네모토 마사야스)
24. 적전백미(敵前百米) 성 무토 히로유키(武藤弘之)
25. 감청대(監聽隊) 경성 이노우에 히로시(井上傳)
26. 조선소 풍경(造船所風景) 신의주 마사키 스스무(正木進)
27. 경보에 □□□(警報に□える) 인천 양천□평(梁川□平)
28. 학병이 나서는 날(學兵の出る日) 경기 니시하라 히로토미(西原弘富)
29. 흑연 갱도의 전사(黑鉛坑道の戰士) 신의주 우치오 히데후미(內尾秀文)
30. 사진도 가는 조선학도 출진(寫眞も征く朝鮮學徒出陣) (심사원) 경성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31. 가자, 일억 환호의 날까지(やるぞ一億歡呼の日まで) 신의주 우치오 히데후미(內尾秀文)
63) 김우경(金友慶)의 창씨명.
64) 박충국(朴忠國)의 창씨명.
32. 야습(夜襲) 경성 홍천태민(洪川泰民)65)
33. 새벽의 톈진 부근 전투(曉明の天津附近戰鬪) (심사원) 경성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34. 세대의 벚꽃(世代の若櫻) 함남 미야모토 야스오(宮本康夫)
35. 활공복(滑空服) 경성 사토 에이지(佐藤英次)
36. ○○기지를 지킨다(○○基地を守る) 경성 배운성(裵雲成)
37. 공격(攻擊) 경성 안본영배(安本英培, 야스모토)66)
38. 근로봉사(勤勞奉仕) 경성 홍천태민(洪川泰民)
39. 출동(出動) 경성 배운성(裵雲成)
40. 여성의 용장(女性の勇壯) 경성 시미즈 시게히데(淸水茂秀)
41. 내한행동(耐寒行動) 경성 방본덕천(邦本德天, 구니모토)67)
42. 출동(出動) (연맹 홍보부장상) 전주 이토 마사아키(伊東正明)
43. 어린 것의 승리(幼きものの勝利) 경성 유천성연(柳川成淵)
44. 맑은 아침(晴朝) 경성 조남표(趙南杓)
45. 어느 일요일(或る日曜日) 경성 이천정범(利川貞範)
46. 궐기(蹶起) 경성 현충섭(玄忠燮)
47. 전진(前進) 경성 아이자와 노리코(相澤德子)
48. 일하는 포로들(働く俘虜達) (심사원) 경성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49. 적 요새 공격(敵要塞攻擊) 경성 구니모토(國本□光)
50. 다섯 명의 결사대(五人の決死隊) 30부대 쓰카모토 슈사쿠(塚本周作)
51. 남원성 보이다(南苑城見ゆ) (특선) 경성 오카지마 마사모토(岡島正元)
52. 척후(斥候) 경성 미야자키 고로(宮崎五郞)
53. 병사(兵士) 경성 야스카와(安川商穆)
54. 두 명의 병사(二人の兵士) 경성 호리 지에코(堀千枝子)
55. 돌격 전(突擊前) 경성 호리 지에코(堀千枝子)
56. 방과 후 연성(放課後鍊成) 경성 미야자키 고로(宮崎五郞)
57. 부름을 받고 일어서는 날(召され立つ日) 경성 하나호 미치오(花圃美地雄)
58. 금치훈장(金鵄勳章) 전남 미즈하라 기요시(水原淸)
59. 백의남정(白衣南征) 경성 야마다 기미(山田キミ)
60. 기도하다(祈る) 경성 이와키(岩木子□)
61. 아직 한 대도 돌아오지 않다(一機未だ還らず) 경성 오오이(大井手東人)
62. 재기의 날 가깝다(再起の日近し) 경성 아사노 마사오(淺野正夫)
63. 격철(擊てつ) 경성 모리 유키오(森行雄)
65) 홍태민(洪泰民)의 창씨명.
66) 안영배(安英培)의 창씨명.
67) 방덕천(邦德天)의 창씨명.
64. 전선에서 온 편지(前線からの便り) 경성 이자와 겐지(伊澤健治)
65. 적기 격추의 한 순간(敵機擊墜の一瞬) 경성 광원성준(廣原成俊)
66. 맥진(驀進) 경성 이와무라 게이사쿠(岩村耕作)
67. 작은 휴식(小休止) 경성 다카하시 다케시(高橋武)
68. 싸우는 탄광(戰ふ炭曠) 평북 시미즈 히로시(淸水弘)
69. 멸적을 향하여(滅敵に向ふ) 경성 이자와 겐지(伊澤健治)
70. 용사를 생각하다(勇士を憶ふ) 경성 네즈 소이치(根津莊一)
71. 적전상륙(敵前上陸) 경성 성낙인(成樂寅)
72. □군의 □(□君の□) 경성 □전호(□田浩)
73. 수도(首途) (조선미술가협회장상) 경성 하야시 도시오(林敏夫)
74. 복구의 휴식(復仇のいこひ) 경성 고가 구니코(古賀圀子)
75. 학도 출진 풍경(學徒出陣風景) 전남 도리이 노보루(鳥居昇)
76. 경계경보 발령(警戒警報發令) 신의주 마사키 사카시(正木近)
77. 황은(皇恩) 경성 아라야마 유키코(荒山雪子)
78. 수송전사(輸送戰士) 평양 금강광일(金岡光一)
79. 용사를 보내는 집(勇士を送る家) 경기 마쓰바라 마사히코(松原正彦)
80. 결전여성(決戰女性) 경성 히로타(廣田正尙)
81. 단결(團結) 경성 고아이(小合理喜造)
82. 병사(兵士) 경성 이토 에이치(伊藤榮一)
83. 해질녘(夕暮) 경성 금본규평(金本奎平)
84. 산협에 하는 맹격(山峽にする猛擊) 경성 단잔 무네요시(丹山宗義)
85. 해양소년(海洋少年) 경성 우메하라(梅原逢春)
86. 건설(建設) 평북 스즈키(鈴木國郭)
87. 보내라(送れ) 경성 좌□□□(佐□□□)
88. 돌격 전(突擊前) (심사원) 경성 심형구(沈亨求)
89. 적 미의 거점으로 총돌격(敵米の據點へ總突擊) 경성 단잔 무네요시(丹山宗義)
90. 정신(挺身) 경성 기시다(岸田□□)
91. 전기 무르익다(戰機熟す) (경성일보 사장상) 경성 네즈 소이치(根津莊一)
92. 저력을 발휘하라(出せ底力) 경성 나가카와(長川□五)
93. 학병을 보낸다(學兵を送る) 경성 노부하라(延原翊□)
94. 국기를 연마하다(國技に鍊ふ) 경성 나카노(中野□作)
95. 출정 전(出征前) 경성 이□전□(伊□田□)
96. 중기(重機) (특선) 경성 하야카와 쓰요시(早川嚴)
97. 어린이(子供) 전남 야스타케 요시오(安武芳男)
98. 돌격(突擊) 경성 사토 데루오(佐藤照雄)
99. 싸우는 산업전사들(鬪ふ産業戰士達) 경성 후지와라 슌이치(藤原恂一)
100. 활공복 습작(滑空復習作) 경성 사토 데루오(佐藤照雄)
101. 봄날(春日) 경성 고마키 마사미(小牧正美)
102. 쓰러져도 쏜다(倒れても擊つ) 경성 가와하라 다카오(川原隆夫)
103. 신병에게 맡기다(神兵に寄す) 경성 이가국삼랑(李家國三郞)
104. □□□□당당한 위용(□□□□堂堂の威容) 경성 오야마(大山□八)
105. 전차병(戰車兵) 경성 기사다 구마오(岸田態雄)
106. 경기화를 내뿜다(輕機火を吹く) (심사원) 경성 호시노 쓰기히코(星野二彦)
107. 전쾌의 날을 기다리며(全快の日を待ちつつ) 경성 아이자와 노리코(相澤德子)
108. 통신병(通信兵) 경성 무로 미쓰코(室滿子)
109. 눈 속의 대기(雪中の待機) 경성 후지와라 슌이치(藤原恂一)
110. 방독면(防毒面) 인천 홍원홍작(洪原弘作)
111. 시가전(市街戰) 경성 우에무라 아키오(上村明雄)
112. 추격(追擊) 경성 박영선(朴泳善)
113. 학병(學兵) 경성 하야카와(早川□)
114. 어린 충성(幼き忠誠) (심사원) 경성 미키 히로시(三木弘)
115. 일하는 여성(働く女性) 경성 장본동률(張本東律, 하리모토)68)
116. 병사 두 명(兵二人) 경성 사에키 노부코(佐伯ノブ子)
117. 대상단의 태세(大上段の構) (심사원) 경성 히요시 마모루(日吉守)
118. 전야(戰野) (심사원) 경성 심형구(沈亨求)
119. 일하는 여공(働く女工) 경성 다카마쓰 히데오(高松秀雄)
120. 대장의 명령(隊長の命令) 경성 다카마쓰 히데오(高松秀雄)
121. 돌격(突擊) 경성 마쓰바라 히사오(松原壽夫)
122. 결전증산으로(決戰增産へ) 경성 평소형렬(平沼亨烈, 히라누마)
123. 철도 차단전(鐵道遮斷戰) 경성 야마자키 마사오(山崎正男)
124. 보병(步兵) 경성 아사오카 간이치로(朝岡寬一郞)
125. 새벽의 첨병(曉の尖兵) 경성 이가국삼랑(李家國三郞)
126. 지하자원 개발(地下資源開發) 경성 야마자키 마사오(山崎正男)
127. 총후의 기도(銃後の祈り) 경성 정온녀(鄭溫女)
128. 결전의 여공원들(決戰の女工員達) (특선) 평양 야마시타 가즈히코(山下一彦)
129. 몸 던진 남자(捨身の男) 경성 박명철(朴明哲)
130. 와카와시(若鷲) 경성 綿□□史
131. 맥진(驀進) 경성 다카시마 이사오(高島功)
68) 장동률(張東律)의 창씨명.
132. 투혼(鬪魂) 경성 다카시마 이사오(高島功)
133. 적진에 다가서다(敵陣に迫る) 경성 아사오카 간이치로(朝岡寬一郞)
134. 루안으로 루안으로(潞安へ潞安へ) 경성 가노 간라이(加納莞蕾)
135. 학도출진(學徒出陣) 광주 □거석(□居晳)
136. 방독반의 학도(防毒班の學徒) 경성 가와모토 다케요시(川本武吉)
137. □도(□途) 부산 □택준일(□澤俊一)
138. 장고봉 8월 6일 전투기(張鼓峯八月六日の戰鬪記) (심사원) 경성 도오다 가즈오(遠田運雄)
139. 제압(制壓) 경성 고마키 마사미(小牧正美)
140. 공장 풍경(工場風景) 경성 네즈 소이치(根津莊一)
141. 출격명령(出擊命令) (특선) 경성 아사오카 간이치로(朝岡寬一郞)
142. 일등병 김군(一等兵金君) 경성 현충섭(玄忠燮)
143. 숨 막히는 순간(息詰る瞬間) (심사원) 경성 김인승(金仁承)
144. 돌격(突擊) 경성 하야카와(早川□)
145. ○○로 힘차게(○○へマッシグラ) (심사원) 경성 김인승(金仁承)
146. 대기(待機) 경성 가노 간라이(加納莞蕾)
147. 상무(想武) 신의주 마쓰바라(松原□)
148. 적진 가깝다(敵陣近し) 경성 다카하시 다케시(高橋武)
149. 입영깃발(入營旗) 경성 한홍택(韓弘澤)
150. 학도방공(구호반)(學徒防空)(救護班) 경성 도야마 마사하루(遠山正治)
151. 바리케이드에 돌입하는 정신대(バリケードに突入する挺身隊) 경성 하산상복(夏山上福)
152. 학도방공(소독반)(學徒防空(消毒班)) 경성 도야마 마사하루(遠山正治)
153. 문희성 사수(聞喜城死守) 대구 오히라 게이지로(大平敬次郞)
154. 척탄통(擲彈筒) 경성 하야시 도시오(林敏夫)
155. 효암진격(曉暗進擊) 경성 이봉상(李鳳商)
156. 잠깐의 휴식(瞥の憩ひ) 경성 이봉상(李鳳商)
157. 포성(砲の響) 경성 우치다 다카시(內田隆)
158. 학도방공(소화반)(學徒防空(消火班)) 경성 도야마 마사하루(遠山正治)
159. 투혼(중기 포복)(鬪魂(重機匍匐)) (심사원) 경성 호시노 쓰기히코(星野二彦)
160. 밀림을 가다(密林を征く) 경성 다나카 미노루(田中稔)
161. 부인방공원도(婦人防空員圖) 경성 백천덕환(白川德煥, 시라카와)69)
162. □□남에 가다(□□南へ征く) 경성 다나카 미노루(田中稔)
163. 약진(躍進) (특선) 경성 마쓰자키 기미(松崎喜美)
164. 일가 세 명 학병 입영의 날(一家三人學兵入營の日) 경기 모토무라(元村□喜)
69) 조덕환(趙德煥)의 창씨명.
조소부(彫塑部)
1. 공격(攻擊) 경성 이국전(李國銓)
2. 워싱턴으로 가자(ワシントンへ行くぞ) (총독부 정보과장상) 경성 호소카와 준(細川順)
3. 적전(敵前) 경성 호시노 시게미쓰(星野重光)
4. 묵두(黙禱) 경성 평소경기(平沼京基, 히라누마)
5. 성전(聖戰) (심사원) 경성 도바리 유키오(戶張幸男)
6. 결전(決戰) 경성 야마키 시게마스(山木重益)
7. 출진(出陣) 경성 금강남표(金江南杓)70)
8. 근로(勤勞) 경성 사에키 데로카즈(佐伯輝一)
9. 육탄(肉彈) (심사원) 경성 도바리 유키오(戶張幸男)
10. 마검(磨劍) (심사원) 경성 도바리 유키오(戶張幸男)
11. 아버지의 영령에 맹세하다(父の英靈に誓ふ) (경성일보 사장상) 경성 이동효중(伊東孝重, 이토)71)
12. 바다 소년(海の少年) 경성 우메하라(梅原逢春)
13. 정찰(偵察) 경성 사에키 데로카즈(佐伯輝一)
14. 대동아 건설의 울림(大東亞建設の響) (심사원) 경성 금성경승(金城景承, 가네시로)72)
15. 학병진발(學兵進發) (특선) 경성 사에키 데로카즈(佐伯輝一)
16.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海の荒鷲) 경성 히라네 가쓰오(平根勝男)
17. 전우(戰友) (특선) 도쿄 조규봉(曺圭奉)
18. 대공(大空) 경성 관가재홍(管家在弘)
19. 옥쇄(玉碎) (특선) 경성 사나카(佐仲三森)
20. 전□(戰□) 경성 미야시게 교우이치(宮茂恭一)
일본화부(日本畵部)
1. 전쟁터의 형으로부터(戰地の兄より) 경주 박봉수(朴奉洙)
2. 적전 돌격 전(敵前突擊の前) 충남 금산화경(金山華慶)73)
3. 진심의 착유(眞心の窄乳) 경기 핫토리 쥬산(服部壽山)
4.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경성일보 사장상) 경성 요시무라 도요코(吉村豊子)
5. 방독반(防毒班) (특선) 경성 이와미 시즈에(石見靜江)
6. □□에 도전하다(□に征む) 경성 이건영(李建英)
7. 탄광에서 싸우는 사람(炭鑛で戰ふ人) 경성 조복순(曺福淳)
70) 김남표(金南杓)의 창씨명.
71) 윤효중(尹孝重)의 창씨명.
72) 김경승(金景承)의 창씨명.
73) 김화경(金華慶)의 창씨명.
8. 벌재(伐材) 광주 정운면(鄭雲□)
9. 파견(派遣) 경성 연일홍거(延日弘巨)74)
10. 상재전장(常在戰場) (특선) 경성 정종여(鄭鍾汝)
11. 총후의 어린이(銃後の小供) 충남 야스다 지카요시(安田近義)
12. 전야의 여 명(戰野の黎明) 경성 나가야마 가즈오(永山和男)
13. 망원(望遠) 경성 배렴(裵濂)
14. 나라를 지키는 신(國を護る神) 경성 마루야마 기사오(丸山雅生)
15. 진격(進擊) 경성 다키모토 사부로(龍本三郞)
16. 훈련(訓練) (심사원) 경성 이마다 게이이치로(今田慶一郞)
17. 준비(用意) 경성 송본상진(松本相辰, 마쓰모토)
18. 초진(初陳) (심사원) 경성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
19. 산의 결전장(山の決戰場) 경성 가스하라(楠原元壽)
20. 출동(出動) 경성 안도 도시에(安藤敏枝)
21. 적진육박(敵陣肉縛) (조선군 보도부장상) 경성 김기창(金基昶)
22. 자우(滋雨) 전남 김정현(金正炫)
23. 전차대(戰車隊) (특선) 경성 이건영(李建英)
24. 진심(まこころ) 경성 이와미 시즈에(石見靜江)
25. 항마(降魔) 경성 장우성(張遇聖)
26. 일억이여 이때까지다(一億よこの時迄だ) 경성 김시종(金時鍾)
27. 새벽(曉) (심사원) 경성 이상범(李象範)
28. 공작장(工作場) (특선) 경성 목호일수(木戶一秀, 기도)75)
29. 전□□□□(戰□□□□) 경성 이동수용(伊東壽容, 이토)
30. 반도학도 부름받다(半島學徒召さる) 경성 이데 긴지(井手金治)
31. 생산증강(生産增强) 충북 이경호(李景浩)
32. 쳐부수다(擊ちて止まぬ) 경성 이유태(李惟台)
<출전 : 결전미술전람회 목록(사진자료), 경성일보사, 1944년>
74) 정홍거(鄭弘巨)의 창씨명.
75) 박래현(朴崍賢)의 창씨명.
Ⅲ. 문예계의 친일협력 논리와 선전
1. ‘국민문학’·‘국민문화’ 주창
1) 11월 중순 도쿄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한 조선 쪽의 발언집
(1) 이광수(香山光郞), ‘동아정신의 수립’에 관하여
대동아정신은 진리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며, 국제연맹이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인위적인 것이되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대동아정신을 여기에서 수립하는 것이 아니고,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동아정신은 가장 알기 쉽게 말하면, 그 기조를 이루고 진수를 이루는 것으로 자기를 버리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유교에서는 인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청명심(淸明心) -어인자(御仁慈)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를 버리는 마음이야말로 서양사상과 정반대의 사상으로, 가장 알맞은 예는 로마사상과 일본사상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로마사상은 자기를 추구하는 사상으로서 권리사상이 발달했으나, 일본정신에는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개인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은 일본뿐만 아니라 널리 동아 여러민족 간에 사상의 기조가 되어 있는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구미사상이 옮겨 들어와서많은 동아인은 이러한 조상이 전해준 귀중한 정신을 벗어 던지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구미인의 이기주의사상을 배운 것입니다.
구미인은 동아인에게 그 이기주의를 심어 놓고 어떠한 이익을 얻었을까요.
그것은 동아민족을 서로 반목시켜서 분리시키고, 그러는 사이에 그대로 어부지리를 챙겼습니다.
이기주의는 단순히 동아에서는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가 살고 있는 온 세계의 어디에 가도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참다운 도는 자기를 버리는 도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동아의 인의사상은 망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상은 서양사상이 풍미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존이 되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 것입니다.
온 세계에 자비를 설파한 성자는 석가이며 공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비를 정말로 펴나간 분은 천황 한분을 빼고는 달리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이 천황이 자비를 펴나가고 있는 그것에 힘을 바쳐서 익찬해 받드는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인의 생활목표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는 개인주의가 없다. 개인의 인생목표가 없다.
인생목표를 갖고 있는 분은 오직 천황 한 분이 계실 뿐인 것입니다.
일본인은 그렇게 믿기 때문에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석가의 공적(空寂)에 통하고, 공자의 인 사상의 극지라고 믿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을 일본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천황께서는 자비를 펴나가는 것을 황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군께서는 황도, 우리들 신민에게서는 이러한 것이 신도(臣道)인 것입니다.
자기를 바치며 자기를 버리는 이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살아나가는 속에서 가장 품격이높고, 또 가장 완전한 진리에 가까운 길이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들의 목표, 일본인으로서의 우리들 목표는 미, 영과 같이 나라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며, 전 세계인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하여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목적 달성이 우리들의 목적이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우리들 개인이 아니고 천황이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천황을 익찬해 드리면서 죽는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자기를 모두 바친다는 정신이야 말로 대동아정신의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국제적인 회의장으로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혹시 국제예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제적인 의례를 운운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전쟁 중인 것입니다. (박수)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문학자인 것입니다. 양심에 살고 있는 문학자가 구구하고 사소한 일에 구애받아서는 참다운 문학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와서 저는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이 정신이 훌륭해도 이것을 공중에 현현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훌륭한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정신으로 현현하는 데는 국토와 민중이 필요합니다.
이 국토는 즉 아시아이며, 그 민중은 즉 10억의 여러 민족이라고 여깁니다.
이 아시아의 국토를 확보하고, 10억의 민중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전쟁에 쳐 이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중화민국이나 만주국의 여러분, 또 이 자리에 안 계시는 아시아 여러 민족 분들도 우선 이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하나로 뭉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정신을 동아에 실현하고, 대단히살기 좋은 극락과 같은 아시아를 건설하지 않겠습니까. (박수)
<출전 : 香山光郞, 「東亞精神の樹立に就いて」, '大東亞' 1943년 3월호, 48~51쪽>
(2) 유진오(兪鎭午), 대동아정신의 강화와 보급에 관하여
이제 여기에 우리가 대동아정신의 수립과 강화 및 보급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즉 지금까지 대동아정신이 서양의 유물적인 정신에 의해서 흐려졌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그와 같이 흐려졌던 대동아정신의 흐림을 말끔히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온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 정신의 흐림을 닦아낼 것인가, 그것은 아까부터 여러분의 의견 개진이 있은 바와 같이 대동아의문화를 선양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 편에 있어서는 장여(長與)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동양의 고전을 연구하고, 동양고유의 정신을 연구하는 국제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도 매우 필요할 것입니다.
한 편에 있어서는 이 동양의 정신을 현대에 살려서 발전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미, 영의 식민지에 대한우민(愚民)정책 등을 없애나가며, 동아 10억의 민중에게 문화를 철저히 보급시키고 동시에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팔굉일우의 일본의 조국(肇國)정신을 10억의 민중에게 관철시키고, 그러기 위해서 일본어의 보급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박수)
적어도 대동아건설에 있어서는 일본어가 국제어로서 말하여지며, 일본문학이 모범으로 각 나라의 민족에게 연구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박수)
일본정신의 현현의 산 실례로서는 ‘반도’1)의 문화향상의 현 실정에 대해서 한 마디 말씀드리고자 생각합니다.
한 예를 들면 30년 전에 반도의 민중 대부분은 문맹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교육제도의 급격한 확장과 동시에, 이제야 가까운 장래에 의무교육제도의 시행을 보는단계까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어 즉 일본어 해득자의 수를 말씀드리면 전인구의 1할 5푼까지가 이미
1) 조선.
일본어를 해득하고, 취학연령 이상에 대해서 보면 6할 5푼에 도달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박수)
더욱이 반도의 전통적 정신, 전통적인 문화의 아름다움을 앙양한 것은 실지로는 ‘내지’2)의 선각자들인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도문화는 급격하게 융성해져서 1944년도의 징병제도로써 막바지 그 완성에 들어가고자 하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아까 격렬한 신념을 피력하신 향산(香山) 선생의 확신은 그러한 일본정신의 반도에 있어서 강화보급의 30년 간의 결정(結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반도의 살아 있는 예는 그대로는 가지 않겠지만, 동아정신의 강화보급에 대해서의 살아 있는 참고가될 것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박수)
<출전 : 兪鎭午, 「大東亞精神の强化普及」に就いて'大東亞', 1943년 3월호, 51~53쪽>
(3) 박영희(芳村香道), ‘문학에 의한 대동아전 완수방법’에 관하여
어제부터 성전 목적 완수에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에 대해서 열성적인 의견을 피력해 왔으나, 이러한 정열 아래에 이미 우리들의 혼과 혼은 서로 녹아서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살아있는 사실만으로도 대동아의 새로운 힘으로 영, 미의 사상을 쫓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웅대한 대동아문화공영권으로 존귀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협력과 이해와 정열 아래에 사상과 문화는 혼연동화(渾然同化)되어 새로운 추진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기적인 감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감격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것에 의하여 대동아전의 목적완수를 위하여 문학적인 협력은 더욱 더 강력하게 하고자 생각합니다.
이것을 기회로 남방 작가를수시로 우리나라에 초대해서 일본의 진상과 일본정신에 닿게 하며, 문학을 통해서 일본정신을 전하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대동아의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융화가 이루어져서 대동아의 목적완성이 완수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수)
<출전 : 芳村香道, 「‘文學による大東亞戰完遊の方法’に就いて」,'大東亞' 1943년 3월호, 54쪽>
2) 문화로 맺는 대동아, 각광받는 반도대표 결정
날로 처절가열의 양상을 깊이 하는 결전은 오늘 이 순간에도 눈초리를 치켜세우고 동포들이 웃으며죽고자 혈인(血刃)을 휘두르고 총검을 쥐며 숙적 미국과 영국군에 돌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함성은 후방의 귓전을 두들기고 있는 것 같으며 이제야말로 문화인도 “쏘고야 말겠다.”는 열성을 붓에 담아서 대동아건설에 정신(挺身)하고자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 몽고, 중국, 태국, 버마, 인도차이나 등의 문학자가
2) 일본.
한 곳에 모여 공영권 내의 결전태세를 강화하고 문화적인 협력의지를 굳혀서 이겨내기 위한 결의와 실천방책을 흉금을 열어서 검토함과 동시에 ‘내지’3) 각지를 시찰하고 대동아의 맹주인 일본의 참모습을보고 대동아문화인의 정신협력을 추진하고자 하는 제2회 대동아결전문학자대회는 오는 25일부터 10일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되었으나, ‘반도’4)를 대표하여 출석하는 문학자는 총독부의 의향에 따라서 조선문인보국회와 협의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전형 중인 바, 11일 쓰다 가타시(津田剛), 유진오, 유치진, 최재서, 목양(牧洋)5), 금촌용제(金村龍濟)6)의 6씨로 결정, 싸우는 문화조선의 결의표명자로서 대회에 보내기로 되었다.
황도문화 건설로
총련선전부장 쓰다 가타시(津田剛)
대동아의 새로운 문화, 문학의 존재에 대하여 전 회보다 더 깊이 파헤치는 논의가 진행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대동아공영권은 황도정신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황도문화가 어떠한 모양을 갖고 공영권의 각지에서 발현되어 갈 것인가가 근본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우 조선에서 여러 가지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참고가 되도록 하며, 또 황도문화의 입장에서 주장해야 할 여러 가지점이 있는 것이다.
조선문학도 황도문화의 선에 따라서 건설에 매진하고 있음으로 그 실정을 대동아각 영역에 전하여 각 방면의 의견을 듣고자 생각한다.
문학전쟁을 위하여
금촌용제(金村龍濟)7) 씨의 이야기
이번에는 이름부터 “대동아문학결전대회”로 되어 있다. 대동아의 중심인 도쿄 도에서 각국으로부터 원래(遠來)의 문학친우들이 방위설비의 한 자리에 모여서 간담하고 결의하는 것은 창조적 사상전의 일대장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나, 저는 28년 전에 한번 갔을 뿐 12년 간 살아온 도쿄에 6년 만에 가는 것이나 무장된 도쿄 그 자체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대회에서 만날 수 있는 이전의 선배와 친구들과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이야기할 것이고 커다란 포부를 갖고 전의를 새롭게 했으면 하는 것이며, 책임 있는 일을 약속하면서 책임 있는 일을 초래했으면 한다.
첫째는 문학에 있어서 일체의 적성(敵性) 가치관을 박멸하고 일본정신을 중핵으로 한 신동아문학의 건설인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일본대표이나 조선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조선의 황도문학 수립을 위하여 공부해 왔으면 한다.
그리고 저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깊이 배우는 태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고 싶은 것이다.
언어가 불통인 각국대표로부터는 눈알 속의 것을 응시하여 정의(情誼)를 깊게 했으면 한다. 문학전쟁에서 잠자코 죽도록 행하기 위하여 수업을 쌓고 돌아온다면 저 나름대로의역할은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일본.
4) 조선.
5) 이석훈(李石薰)의 창씨명.
6) 김용제(金龍濟)의 창씨명.
7) 김용제(金龍濟)의 창씨명.
일본의 승리
목양(牧洋)8) 씨 이야기
이번 대회는 대동아전쟁 결전의 양상을 반영하여 당연히 그러한 마음가짐이 모든 대표에게 요청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에서 국민문학운동의 제일선에 서는 자의 출석이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저는 다른 동지와 함께 용감하게 이 대회에 출석하고자 하는 것이나,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배워서 장래를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대동아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라고 하는 평소의 신념을피력하고 일본정신을 대동아문학의 정신으로 삼을 것을 기회가 있으면 제창하고자 생각한다.
목숨을 바친다
최재서(崔載瑞) 씨 담
드디어 영광의 징병제가 ‘반도’9)에 실시하게 되어, 반도의 젊은이는 다 함께 대군(大君)의 어전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있다. 이러한 각오는 우리 문화인의 각오이기도 한 것이다. 대동아문화의 융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도 다한 것이 아니며, 이 각오마저도 대동아 각 지역의 문학자들에게 강하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출전 : 「文化で結ぶ大東亞-晴れの半島代表決る」, '京城日報', 1943년 8월 12일>
3) 제2회 대동아문학자결전회의(1943.8.25~27)
(1) 최재서, 결전 조선의 급전환 -징병제의 시행과 문학활동
최재서 씨(조선) 아시다시피 조선에서도 이번 8월 1일부터 징병제 및 해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어서, ‘반도’10)청년도 대동아전쟁의 일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이며 모든 은혜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장정을 일선에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에,세상에 대해서 매우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전쟁을 방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자칫하면 전쟁을 방관하는 것 같은 입장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다만 한심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고통마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둔다면 작년 5월 8일 징병제 개정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온 반도를 뒤덮은 바 감격의 폭풍을 쉽게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드린다면 암운을 꿰뚫고 찬연한 태양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와 같은 청신함이라고 말할까요, 상쾌함이라고 말할까요,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감격을 느낀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병마의 대권은 천황폐하가 통솔하시는 것으로, 병역
8) 이석훈(李石薰)의 창씨명.
9) 조선.
10) 조선.
은 일본국민의 가장 신성한 의무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성한 의무를 짊어지게 되어 빛나는 황군의 일원으로서 참가가 허락된 것은 오로지 일시동인 어심의 발로로서, 내선일체의 대이상은 이것으로써 구체적인 표현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획기적인 제도가 문화, 특히 문학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없을 것이며 조선문학은 ‘내지’11)의 신체제운동 이래, 즉 1939년 가을 이래 의식적으로 또 급속도로 전환의 혁신을 단행해서 오늘날의 국민문학운동으로까지 전개된 것입니다. 그 도중에 저는 두 가지의 커다란 전환점을 찾아 낸 것입니다.
즉 1941년 12월 8일, 선전(宣戰)의 대조(大詔)를 봉대(奉戴)했을 때가 그 첫째의 전환점이며, 1942년 5원 8일 징병제 실시의 발표를 들었을 때가 그 둘째 전환점입니다.
비교적 유럽 문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조선문학이 대동아전쟁 발발과 동시에 자유주의문학과의 결별을 결의한 것이
나 또 이윽고 일본적인 세계관에 들어왔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로 하나하나 그 구체적인 작품을 말씀드리는 것은 사양하겠으나, 확실히 이때부터 조선문학은 전환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덧붙여 심각한 영향을 조선문학에 준 것은 무어라고 해도 징병제의 실시입니다.
그 첫째 영향은 국어문학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문학은 지금까지 언문으로 쓰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언문문학은 194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언문문학이 하루아침에 국어문학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사실상 매우 곤란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그 곤란을 극복해 왔습니다.
두 번째 영향은 그다지 확실한 형태로는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과거 작가의 세계관, 인생관에 철저한 변화를 주었다는 뜻에서, 첫째의 그것보다 더할망정 뒤떨어지지는 않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둘째의 영향이라는 것은 저는 조국관념의 파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선지식계급은 상당히 긴 기간에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불철저한 시간인식 같은 것은 아니며 더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빠져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수레의 축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배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정열로써 전인격적인 전진을 할 수 없다는 그러한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기에 징병제도가 실시되어 자신의 피와 생명으로써 국토를 방위한다는 것이 결코 관념이나 이치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문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문학자들의 가슴 속에 차분하게 조국관념이 끓어오른 것입니다.
그러한 문학자들이 조국관념을 포착했다는 것은장래조선문학이크게발전할기초를이루는것으로서우리들이기뻐해마지않는바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선 문학자들에게 커다란 자신과 흔들림이 없는 신념의 기대하는 바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금일 이후 조선의 중심적인 작가는 그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에 모처럼의 재능을 불후에 맡긴다는것도 없으며, 그 정력을 분산했기 때문에 끝내 아무 것도 해 낼 수 없다는, 종래의 슬퍼해야 할 현상은 이후 단절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징병제가 뜻하는 바는 반도 2천 7백만 명이 내지동포 7천만을 도와서 성전을 최후의 승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현재 전개해 나가고 있는국민문학이라는 것은 조선의 중심작가와 내지의 작가들이 같은 이상과 목표 아래에 대동아건설에 매진
11) 일본.
해 나간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요는 조선인만을 상대로 하는 좁은 문학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2천7백만의 동포를 뛰어 넘어서서, 1억 국민 나아가서 아시아민족 10억의 문학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해두는 바입니다.
<출전 : 崔載瑞, 「決戰朝鮮の急轉換-徵兵制の施行と文學活動」, '文學報國' 제3호,日本文學報國會편, 1943년 9월 10일>
(2) 유진오, 거대한 융화 -결전문학의 이념 확립
유진오 씨(조선) 저는 사실은 금년으로 두 번째 이 대회에 참석하는 사람입니다만, 지금 만 1년 만에‘내지’12)에 와서 몸이 저리도록 느끼고 있는 것은 작년과 금년으로서는 모든 것이 크게 변화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국(戰局)이 마침내 결전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만, 결전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결코 일선의 전투에서 얻는 것만이 있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의 모든 것에서 결전의 긴장감을 차분히 느끼는 것입니다.
아까부터 저는 만주국, 중화민국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미영 격멸의 결전태세는 우리 일본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 동아에서 이미 확립된 것을 알았으나, 그러한 결전태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싸워나가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인 것이며, 정신을 가다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미영의 문학자, 사상가들이 몇 백 년의 오랜 동안에 걸쳐 그들의 정신생활의 근본으로 해 온 바의“자신(我)”과 싸우며, 이것을 완전히 불식해서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받들어 모시는 정신, 커다란 ‘화(和)’의 정신,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일본에서 가장 순정(純正)한 모양으로 유지하며, 최고도로까지 발전을 이루어 나간 동양 본래의 도의 정신에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되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되어 미영 격멸을 위하여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 문학자의 임무는 이미불타고 있는 이러한 정신을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북돋워 나가는 것입니다.
편협한 개인주의의 미영문학을 격멸하고 웅대하고 장려한 동양의 오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하면서도 이러한 때에 우리가 강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나 전쟁을 떠나서 문학도, 문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미영문학자들은 정치와 관계없는 문학, 문화를 설명하면서 우리를 현혹되게 한 것이나, 그것은 잘못이며 위장이라는 것이 전쟁이 결전단계에 돌입해 가면서드디어 노골적이 되어 온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지 않고 무슨 문화, 무슨 문학이 있겠습니까. 이제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문학자는 그가 갖는 모든 것을 통틀어 이 결전에 이기는 쪽으로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결전문학의 목표는 바로 이 한 점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전쟁에, 이것이 결전문학의 이념인 것입니다.
12) 일본.
조선은 옛날부터 대륙의 문화를 그 자체 안에 흡수하고, 나아가서 이것을 내지에 전달하는 말하자면 다리 역할을 해 온 것이나 이제는 거꾸로 황국일본의 일익으로서 일본정신, 일본문화를 아시아의 전지역에 전달하는 사명의 일단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을 매우흔쾌하게, 또한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러한 사명에 대한 최후의 확신을 준 것은 이번 8월부터 드디어 조선에 시행하게 된 징병제도입니다.
징병제도에 의하여 조선의 젊은 청년들은 황군의 일원으로서 결전과 일본국방의 일단을 짊어져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래 조선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종지부가 찍히게 된 것입니다.
‘반도’13) 2천5백만 동포는 이러한 중대한 책임과 영광을 자각하여, 흥분과 감격의 소용돌이에 쌓여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조선의 결전태세도 마지막 마무리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문학자들도 그러한 자각 아래에 일본문학의 일익으로서 결전문학 추진에 정신(挺身)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출전 : 兪鎭午, 「大いなる融和-決戰文學の理念確立」, '文學報國' 제3호,日本文學報國會편, 1943년 9월 10일>
(3) 김용제(金村龍濟), 황민생활의 강화
금촌용제14) 씨(조선) 저는 일본문학의 일환으로서 조선의 국민문학운동에 대해서, 간단하게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940년 10월에 국민문학 충실을 목적으로 조선문학협회라는 것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언어 문제인데 1941년이 되면서 종래의 조선의 문예잡지가 통합되어서, 순전하게 국어에 의한 문학잡지가 발간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국민문학>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오늘날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환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다 해 온 평론가로서는 본 대회에 참석한 최재서 군이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의 최근 평론에 「전환기의 조선문학」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것으로 조선의 최근 문학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평을 매우 활발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조선에 있는 작가로서는 현재 결전하에 있는 일본의 중요한 기관으로서 국민문학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절대적인 성원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또 9월 중에 5, 6명의 조선작가가 군(軍) 방면으로 견학할 예정임으로 그때도 잘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출전 : 金村龍濟, 「皇民生活の强化-國民運動に湧く朝鮮文壇」, '文學報國' 제3호,日本文學報國會편, 1943년 9월 10일>
13) 조선.
14) 김용제(金龍濟)의 창씨명
4) 김용제(金龍濟, 金村龍濟)
(1) 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 -그 이론·구성·실천에 관한 각서
1. 문화 활동의 중요성
문화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나는 그것의 논의 취향을 이것저것 든 뒤에 그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다만 내가 그 문제에 대하여 믿는 사항을 당면하고 있는 조선문화운동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좋은가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따름이다.
문화가 정치를 리드하는가, 또는 정치가 문화를 리드하는가 ― 그와 같은 전제로부터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적어도 오늘날의 정치사상이나 문화문제에서는 인연이 적은 공론이다.
왜냐 하면 정치와 문화는 어느 시대에서도 결코 상반되는 문제가 아니며, 항상 동일한 사조(思潮) 아래에서 건전한 발달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도 문화의 일부이지만 정치는 하나의 권력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문화는 하나의 여론성이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러한 것이 항상 좋은 지도정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지만, 모든 문화나 정치사상의 발달사를 보면 어떤 때에는 이른바 르네상스적이며 “문예사조”적인 것이 정치사상을 리드한 때도 있었으며, 그와 반대로 ‘지나’15) 역사학의 관념처럼 정치사상의 필요에 따라서 문화이념을 리드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완전한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높은 단계에서는 정치와 문화는 근본사상을 같은 것으로 꽃피우게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일본문화의 발휘와 건설은 문화 자체의 국가적인 자각인 탓도 있지만 어느 쪽이 먼저인가 하면, 역시 우리나라의 올바른 정치적인 요구로부터 동기를 부여 받아 온 것처럼 보는 것이 사실일것이며 그렇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강력한 국가적인 문화가 요구해 온 것이다.
그것은 결코 문화가 정치의 노예가 되는 것에서도 아니며, 단지 정치에의 ‘앞잡이’에서도 아닌 것이다.
정치와 문화의 기능 역할은 여러 가지이나 그 국가적인 이념이나 애국적인 목적의식에는 티끌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이 명백하다.
국가를 위하여 올바른 정치에로, 문화가 그것에 올바른 공헌을 하는 것은 문화의 자랑이기도 하며, 조금도 예종(隸從)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가 높은 사상성으로부터 정치이념에의 시사(示唆)가 되며 올바른 비판을 협력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며, 정치가 문화운동을 국가적으로 지도하고 동원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보다 국가적으로 올바른 정치이념이나 문화사상을 확립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이며, 그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일치해야 할 것이다.
‘내지’16)에서는 이미 사변 이전부터 문화인 사이에 시국인식을 갖고 국민문화운동을 실천 해 왔던 것이나, 슬픈 일이지만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극히 최근까지 문화인이 아무리 다른 면에서는국민적인 의무를 다 하고 있다고 해도, 중요한 자신의 기능이며 무기인 문화문제를 가지고 시국에 대응
15) 중국.
16) 일본.
하는 운동은 실제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
그것이 황군위문에 문사(文士)를 파견한다는 행사를 계기로 문단의 전체적인 기운(氣運)이 시국적으로 협력하는 동향(動向)으로 가고 있으며, 이 방면의 문예활동이 활발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기뻐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문단에만 한정하지 않고 연극, 영화, 미술,음악과 같은 모든 예술부문이 참으로 예술적인 양심에서 국가사회에 공헌하고자 하여 자발적으로 모이게 된 것은 참으로 조선문화 사상에 획기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화 활동의 중요성이 오늘날의 사상·감상을 지도, 교화하는 점에서 얼마나 큰 뜻을 갖는가 하는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른바 문예정책이나 문화·예술의 기획이 중앙의 각 관계당국에서 원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하여 국가적인 보조책까지 실행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며, 그 효과란 예상 이상의 수확이 우연한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은 사상문제를 단순한 이론 투쟁으로 해야 할 시대는 아니며, 그것이 곧바로 국가적인 사업의실천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다. 그 때문에 사상인·문화인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할때이며, 일반 민중에게 애국적인 사상·감정을 심어야 할 것이다. 사상을 단순한 이론으로 보고, 어떤 좋지 않는 사상에 대한 좋은 사상으로서 싸우는 것은 물론 해야 할 일이나, 그 때문에 역시 문화적인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또한 효과적인 일인 것이다.
문화 활동에는 두 가지 면이 있어서, 하나는 사상의 이론적인 지도이며, 하나는 그 사상의 근본을 이룬다고 보이는 감정을 정화하고 앙양해 감으로써 사상을 인간적인 것으로까지 파악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정서교육에는 대상이 무한히 많은 “계몽해야 할 민중”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문화인은 사상적인 지도와 함께 직접 민중이 즐기면서 이끌리는 예술적인 기능으로써 그들에게 지도와 계몽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오늘날 문화운동의 새로운 임무가 있으며 그에 대한 적극적인 문화인의 용감한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2. 문화통제의 참다운 뜻
오늘날에는 모든 부문에서 국가적인 “통제”가 실시되고 있다. 우리는 이 “통제”라는 관념의 참뜻을 이해한 뒤에 “문화통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생각으로는 “통제”란 근본적으로 “강제”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국가이념에 대한 “구성”이며 “조직”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지 않는한은 참으로 좋은 뜻의 “통제”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통제”정신은 보다 나은 “창조”에 대한 전제인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요구성이나 주관적(통제되는 자체) 자발성 등으로 완전히 통일된 국가적인 높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것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행위의 세계이며 또한 이상과 희망의 길이기 때문에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통제정신은 본질적으로 강제관념과는 틀린 것이다. 아무리 악한통제의 경우를 가정해도 그것은 좋은 강제보다는 친애적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적극적인 국가의지인 이상 그 국민은 그것에 자발적인 협력을한 뒤에 자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민 개개인의 행불행은 국가의 운명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국가적인 의무를 다 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가장 큰 의무이며 자랑이다.
이러한 경우 나는 “문화통제”의 참뜻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문화통제, 혹은 실시하고자 하는 문화통제는 단순히 나치스의 모방이 아니며, 우리 국정(國情)에 가장 맞는 방법으로 계획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나, 적어도 문화인의 명예를 걸고 문화통제 등 당국의신세를 지는 일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민문화·예술의 새로운 창조인 이상, 그를 위한 구성이나 실천 같은 것을 자발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피아노 수리나 조정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건설적인 하모니를 노래 불러야 할 때인 것이다. 위대한 베토벤적인 기쁜 노작(勞作)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조선에서 일부 문화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참답게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입이나 붓으로는 자타가 공히 “통제”화 되고 있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문화인이 침묵하는 것은 문화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국가사상이나 내선일체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백안시(白眼視)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예술에 관한 통제정책은 오늘날의 조선에서는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실시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약간의 회색분자가 신경과민이 되어 스스로 통제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것은 검열에걸리지않도록완곡한표현으로자신까지기만하고있는데지나지않는다. 그것묵수(黙守)에의한것이거나 또는 문학·예술의 퇴폐적인(잘해서 예술지상주의)의 묘혈(墓穴)에 전락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문화통제는 문화인의 손으로”라는 것이 참으로 실행된다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원고검열제이기 때문에 지금은 소극적인 통제는 되고 있지만 내가 말하는 통제는 하나의 창조를 위한 전제이며, 새로운 문화운동의구성이기 때문에 단순히 “쓰인” 것에 대한 심판이 아니고 쓰고자 하는 -또는 하고자 하는 문화운동에 대한 지도적이고 협력적인 일을 뜻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당면하는 지도적인 과제인 것이다.
3. 언론기관에 대한 요망
조선의 문화기관으로서 여러 가지 부문이 있으나, 나는 여기에서 그 가운데 언론기관만을 문제 삼으려 생각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직접 문제가 되는 것은 신문과 잡지이나, 특히 편집자의 국민문화 상의 편집 방침에 대하여 언급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조선 글에 의한 언론기관은 그 편집방침에서 현저하게 국민문화의 여론을 환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는 하나 기뻐할 현상이다. 그러면서도 오늘날의 현상은 이상적이며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각사의 옥상에는 “내선일체”와 함께 “보도보국”의 슬로건이 걸려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아직 “문장(文章)보국”의 주관적인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도망을 보면 이것은 통신의 근원이 기업적으로 완전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신문도 같은 재료를 같은 문장으로 발표하고 있는 상태로, 이것은 보도보국의 뜻에서 어느 사도 거의 같은 것이다.
신문기관은 물론 보도가 첫째 사명인 줄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특히 조선의 신문역할은 단순한 보국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문화건설이나 , 계몽교화의 사명을 겸하여 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조선 언론기관이 걸어 온 역사를 보면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문 잡지의 제1의적인 편집방침은 “문장보국”에 의한 국민문화의 건설, 국민교화의실천을 자발적인 양심으로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몹시유감스럽게도 신문의 학예란이나 문학잡지 등의 예를 인용하며, 그 편집방침이나 편집자에게 자각을촉구하고자 생각하는 것이다.
현영섭(玄永燮) 씨도 그의 저작 「신생 조선의 출발」속에서, 조선신문의 학예란에 “애국적인” 문학예술에 관한 문장은 거의 한 자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이것은 이미 2년 전에 쓰인 문장이다.
그러나 그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맞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과거의 학예란이라는 것은 민족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의 문예논문으로 전부 메워졌었다는 사실이다.
또는 그러한 정치적인 주장을 문예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발표해 온 것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어떨까?
그들 중 어떤 필자는 지금 침묵을 지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검열권 안에서” 회색적인 완곡한 표현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즘 와서는 학예란은 완전히 저널릭한 색채도, 문화적인 뜻도 완전히 땅에 떨어져 왔다. 그러한 것은 그들이 국민문화나 새로운 건설적인 저널리즘에 대해서둔감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제1감도 제6감도 작용하지 않기 때문일까. 굳이 말한다면 -백안시 때문일까, 무관심 때문일까?
나는 다만 그들 편집자나 그 편집방침에 대해서 맹성을 촉구하는 이상의 결론은사양하고자 한다.
신문 학예란은 모든 의미에서, 모든 독자에 의해서 완전히 흥미도 자극도 없는 사문(死文)의 난으로변하고 말은 현상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문제로서도 자살적인 행위가 아닐까?
시험 삼아서 매일 학예란을 보면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대체로 현실적인 문화·문학·예술의 문제와는 훨씬 인연이 없는 죽은 문장으로 채워지고 있다. 과거의 쟁쟁한 사람들 이름은 가끔밖에 볼 수가 없으며, 그것도 똑같은 자리를 메우는 식인 신변적인 “수필” 뿐이다. 그 외의 톱 논문은 완전히 뜻이 통하지 않는 나쁜 글과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교단 노트”의 나열이다. 그들 필자의 이름은 적어도 “문화인”으로서는 모르는 사람들뿐이며, 그 문장이란 무미건조한 것이며, 그 내용이란 비현실적인 관념의 유희인 것이다.
그것은 거의 오늘날의 문화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잡 글뿐이다.
내 솔직한 의견으로서는 편집자의 고심에 “동정”하는 것이나, 과거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과거와 같은문장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또 새로운 문화문제를 “경원(敬遠)”하지 않기 위하여 이와 같은 골동품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하등(下等)품” 문장을 무명의 낡은 사람에게 구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 때문에 독자와 문화인 사이에서 학예란에 대한 흥미는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 난은 돌아보지도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적어도 학예란을 읽기 위하여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던 독자는 누구나 모두 내지신문을 구독하도록 된 것이다.
다음에는 잡지에 관한 것, 특히 문학잡지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자 한다.
김문집(金文輯) 씨의 공개장에 의하면 (경성일보의 학예란) 그가 “내선일체”의 문예관을 발표했기 때문에 과거의 사상적인 분자의 잔류(殘留)나 편집자 등으로부터 원고를 보이콧 당하여 생활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을 호소하며 대단히 흥분한 문장을 쓰고 있다.
또 최근에는 나의 친구인 어떤 사람이 어떤 대 신문에서 나오고 있는잡지에, 그 잡지사의 기자와 이야기가 정리된 원고에 관한 일이지만, 주임격의 사람에게서 “저 사람은내선일체쟁이”라고 하는 뜻으로, 사정없이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도 듣고 있다. 그것을 만약에 공개적인문제로 삼을 경우,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문화적인 문제가 되는데, 문화인은 대체로 너무나도 신사적이며, 문화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시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이것은 중대한 성질의 일인 것이다.
시험 삼아 문학잡지의 몇 가지 차례를 보면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시국에 관한 문예물 -국민적인문예물은 이상할 만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나도 없다는 풍경이다.
이것은 내지의 문단이나 문예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와 같은 문예물을 쓰는 사람이나 그와 같은 편집자의 주문에 응하여 기꺼이 쓰는 사람이 그다지 없느냐고 하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편집방침이나 편집자의 양심이 의심을 받을 이야기뿐인 것이다.
어떤 문예잡지에서는 새로운 국민적인 아이디어 작품이 중요한 작품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있거나, 또 어떤 잡지에서는 극히 “체면”치레와 같이, 내지 작가의 “전선문학”이 잘게 쪼개져서 1, 2쪽 게재되거나 하고 있으나, 그것을 전 페이지에서 본다면1 퍼센트 쯤 될까 말까 정도인 것이다.
이것은 제1 원작자에 대한 모욕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될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이것은 한 잡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검열만 통과한다면 무엇이라도 좋다고하기보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검열을 무기삼아서 에로티시즘이나 회색의 자유주의에 성벽을 쌓고 새로운 국민적인 문예 발표를 보이콧하라고 하는 실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편집자는 그 잡지를 한 개인의 취미나 한 개인의 문예관만으로, 자신의 주관에 맞는 것만을 게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은 그것이 전부 시국적인 기사로 채워지는 성질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문화의 새로운 조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다고 하는 충고만으로 나는 그 이상의 정치적인 의견을그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으나, 아무튼 국민적인 문화인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는 아닌 것이다.
4. 문화 분야의 새로운 진용
모든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사상·문화건설자는 그 시대의 선구자이며, 그 지도적인 역할을 갖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로맨티시즘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모든 고투(苦鬪)도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커다란 국민문화 -동아건설의 신문화 창조는 결코 쉬운 사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문화적인 양심과 사상적인 신념에서 그것을 확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상, 그것은 곧바로 실천행위를 통하여 구체화의 길로 매진하지 않으면 문화적인 정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문화운동이 나쁜 뜻으로 정치적인 공식주의에 의하여 자살(自殺)당했다는 두가지 전철(前轍)은 밟지 않을 것이다. 정치와 문화와를 분리하지 말고, 문화예술의 기능을 갖고 보다좋게 국가사회에 공헌하는 새로운 방법이나 조직론이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떤 방관적인 문화인은 말했다 -문화인은 시국에 대해서 사상과 행위는 따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론과 실천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고 말한 뜻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행위로서 국민적인 헌금이나 다른 것은 해도 그 사상을 갖는 문화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나아기 싫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문화인과는 문화적인 피투성이의 투쟁을 사양치 않으며 그것을 피할 수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내선일체로 진지한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은 일본정신의 진수를 사상적으로 피와 살이 되게 하여, 전 일본국가의 행복과 번영에 도움이 되게 하고, 그 가운데서 전 조선의 민중의 희망과 행복을 지도하는 문화적인 임무이며 나아가서는 전 동양의 평화와 전 인류에게 공헌하고자 하는 위대한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로맨티스트이다. 그 건설적인 로맨티시즘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현실을 잘 파악하고, 어디든 발판이 되는 대륙의 객관 정세에 순응하고, 앞장서는 참다운 리얼리스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음으로 오늘날의 조선 문화인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행동에 출발하고 있는가를 숫자적으로들어서 독자에게 소개하고, 나아가서 그들 사람들은 어떠한 활동을 하고자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음에 든 이름으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은 조선문단·논단·극단·화단·영화계·음악계에서 유수한 지도자급이며, 그 중심적인 현역 사람들이다.
문단 - 이광수(李光洙), 박영희(朴英熙), 김기진(金基鎭), 김동환(金東煥), 이기영(李箕永), 백철(白鐵), 김억(金億),
김동인(金東仁), 박완희(朴完熙), 송영(宋影), 윤기정(尹基鼎), 김문집(金文輯), 이동규(李東珪), 임학수(林學洙),
윤규섭(尹圭涉), 정비석(鄭飛石), 장혁주(張赫宙), 김용제(金龍濟) 등.
논단 - 장덕수(張德秀), 현영섭(玄永燮), 김한경(金漢卿), 인정식(印貞植), 유억겸(兪億兼), 이홍근(李弘根),
최현배(崔鉉培) 등.
극단 - 안기석(安基錫), 김승구(金承久), 이화삼(李化三), 박학(朴學), 최병한(崔丙漢), 이규희(李圭熹) 등.
화단 - 구본웅(具本雄), 채남인(蔡南仁), 변동욱(卞東煜), 한상건(韓相建) 등.
영화계 - 나웅(羅雄), 주인규(朱仁圭), 서광제(徐光霽), 최승희(崔承喜)(무용과 영화).
음악계 - 현제명(玄濟明), 김관(金管), 김재훈(金載勳), 조영은(曺永恩), 홍영후(洪永厚), 김영길(金永吉),
영전현이랑(永田鉉二郞)17) 등.
이상의 사람들은 현재 나의 기억에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은 이미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 활동무대를 찾고 있다. 여기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을 뿐만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지도적으로 하나의 조직적인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날에는 조선의전 문화운동을 완전히 리드하는 자격과 실력을 갖고 있다.
5. 문화간담회의 제안
내지의 중앙문단·논단에서는 이미 전부터 문화운동이 조직적으로 실천되어 온 것은 앞에서도 말한적이 있다.
모든 운동이 그 운동의 성질에 적합한 조직을 갖는 것은 필요하며 그러한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아
17) 김영길의 창씨명인 나카타 겐지로의 바른 표기는 ‘永田鉉次郞’이다.
니면 그것은 정력의 분산일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나 효과성도 약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에는 앞에 든 사람들도 그 사상적인 욕망은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 문화적인 활동을 할 기회나 기관이없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소극적인 현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나는 여기에서 조직론까지 나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론(小論)을 하나의 제안으로서 보다 현명한 검토를 한 뒤 보다 좋은 조직론이 태어날 것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하나의 정연(整然)한 조직론은 보류해 두고 그 앞에 먼저 문화인 동지가 문화운동에 관해서 서로가 의사를 교환하는 적당한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의미로, 가령 문화 간담회 비슷한 친밀감을 깊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도쿄 같은데서는 그러한 명칭으로 여러 가지 문화단체가 문화협회와 같은 것으로 하나의 조직단체의 명칭이 되어 명실 공히 조직 활동을 하고 있으나, 조선에서도 이와 같은 명칭이 그대로 문화단체의 명칭으로서 장차 태어날 것인지 어떤지는 별도로하고, 나는 보다 더 가벼운 의미로 그러한 조직 활동의 준비로 생각해 본다.
오늘날의 문화운동은 본질적으로 문화주의적인 문화단체만의 운동일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어떤형태를 가진다고 해도, 문화문제는 문화인의 손으로만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되는 것을 전제로, 그 후에 관계 당국으로부터 적당한 원조가 모든 의미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문화의 유기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나 간접적으로는 참다운 관민일치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와같은 정신적인 유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조직적인 방법론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런데 문화간담회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면, 거기에서는 어떠한 것이 간담 또는 협의가 될 수 있을것인가.
내 생각으로서는 목적이 있는 문화이념인 이상 그것은 단순하리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에게 당면한 문화문제를 어떻게 실천화할 것인가 등의 구체적인 기술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같은 “간담 기관”으로 적당하다고 인정된 과제를 각각의 단체나 개인들이 그 기능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지도적인 협의기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화간담회에는 적당한 형태로 문화문제에통하는 당국의 요소와 직접 문화 활동의 지도자급 사람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구성되고 그들의 의사를각자 독자적인 단체로 전달하고, 그 방침에 따라서 운동을 추진하는 것이다.
각각의 분야에는 즉 문예간담회라거나 극단 간담회라거나 기타 문화적 단위의 간담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문화간담회는 총괄적인 상부구성이며, 그 아래에 각 문화적인 독자적인 간담회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중앙에는 이미 하나하나의 문호단체가 만들어져 있으나, 아직 문화 전반에 관한 상부적인 “문화간담회”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으로는 결성이 안 되고 있다. 일본문화협회 등의 조직은 많이 있으나 앞과 같은 의미로서의 조직은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 영역이 좁은 조선에서는 곧바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또한 지금이야말로 숙성하고 있는 시기로 보고 있는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과거 좌익문화운동을 할 때는 있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것의 모방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구성요소에 학무국 언저리의 참가라는 것이며, 활동대상이 전 국가적인 문화건설과 전 국민 대중의 계몽운동이다.
되돌아보면 이와 같은 조직적인 운동이 아직 시기상조일 것인가, 어떤가 하는 실제문제이지만, 내가보는 소견으로서는 너무나 늦었다는 원망은 있어도 조금도 시기상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 삼아 지원병제도의 중대 문제를 보라. 그 제도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확실히 시기상조론도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막상 해 보니까 오히려 늦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는가. 오늘날은 모든 뜻에서 건설의 시대이며 계획의 시대이다.
건설적인 계획에는 언제나 용기와 영단이 필요하다. 통속적으로 “걱정하기보다 낳는 것이 빠르다”는 말이 있으나, 오늘날의 정치가나 문화인은 건설적인 용기와 추진력이 없으면 안 된다.
나는 이 제안이 결코 시기상조도 아니며 초조한 것도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쇠는 뜨거울 때 쳐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문화 활동에의 관심이 불타고 있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관을 설립하지 않고 도대체 어느 시대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충분한 소론에 대해서 현명한 검토를 아낌없이 해 줄 것을 모든 문화인이나 문화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또 하나는 논의하기 위한 논의나 개인적인 영웅심으로, 논박하기 위한 논박을 일체 그만 두고 어떻게 하면 당면하는 조선문화운동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실천적으로 검토해 주시기 바라는 바이다. (끝)
<출전 : 金龍濟, 「朝鮮文化運動の當面の任務-その理論·構成·實踐に關する覺書-」,'東洋之光' 1939년 6월호, 76~85쪽>
5) 김문집(金文輯)
(1) 문화표현의 국어적 추세
최근 조선어 잡지로부터 평론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을 두세 번 받은 적이 있다.
아직 한 번도 그 의뢰에 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의 태만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주문이라고는 늘 생각하
고 있었다.
드디어 올 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는 맡을 것이라고는 1년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언어전환으로의 놀라운 과정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의 이 문화사적 필연성을 실천적으로 인식한 최초의 사람, 이를테면 그 이니셔티브를 잡은 사람이 이 잡지의 주간이다.
좋고 나쁜 것은 별도의 문제인데, 그가 시대의 백지적(白紙的) 순정 촬영자이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래할 문화의 촉각체로서의 저널리즘 본래의 챔피언이라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문화의 시대적 긍정자인 것이다. 주관으로 객관을 규정하려는 돈키호테의 기쁨도 없을 뿐더러 객관으로 주관을 변명하려는 햄릿의 슬픔도 없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두에 실을 원고이니 가능하면 뼈대가 있는 일종의 시대적 문제를 다룬 확실한 것이면 좋겠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참으로 한심하다.
왈, 익명으로도 괜찮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 사람은 의외로 소심하다.
이 소심함이 모처럼의 그의 선천적 총명함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 자리에서 걱정했을 정도였다. 약한자는 대개 잘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데는 서툴다.
그는 그야말로 시대를 느끼기는 하지만 이를 표현하기 위한, 지금 현재 그에겐 배짱이 너무 없는 것 같다. 노고가 부족하다.
아니면 나 자신의 종래의 조선어에 대한 사회적 명성―그것은 저녁 무렵의 생쥐 꼬리 정도의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을
고려한 노파심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느낌은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권두 논문에 대한 주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톱에 실리는 것이니 격식을 갖추어 써 달라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옛 관습(舊套)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증거이다.
격식을 갖춘 논문 중에서 내실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듯이, 이른바 권두 논문 중에 재미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재미있다는 것은 읽은 뒤 몸에 착 달라붙는, 이를테면 그런 느낌을 말하는데, 말하자면 그러한 쾌감의 높이, 혹은 깊이가 그 문장 내지는 논문의 가치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 가치를 감상가들은 매력이라고 한다. 글의 목적이 그 자체의 매력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예컨대 실크해트(silkhat)에 연미복을 입고 치장을 한 괴뢰(傀儡)가 밤늦도록 기다리는 아내의 이부자리에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격식 높은 문장에 작용은커녕 기분이고 뭐고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권두 논문이라는 것을 상당히 많이 써왔다. 특히 신문에 쓰는 논평이라는것은, 예외 없이 톱기사에 실린 나 자신만 하더라도 그런 정형적인 괴뢰 풍정(風情)에는 적어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꼭두각시인형(木偶) 주위의 공기에 참을 수 없었던 슬픈 이야기이지만, 조선에는 아직 본격적인 인텔리겐치아로 조직된 교양사회가 없다.
벌레를 씹은 것 같은, 그 내실은 독도 약도 되지 않는다. 뜻도 모를 이상한 술어(怪術語)를 일견 정연하게 늘어놓으면 그것으로 평론가가 되고 학자가 되고 일류 인텔리겐치아가 된다는 것이 이 도시의 풍속인데, 논쟁자의 무지도문제겠지만 우선 독자의 교양이 참으로 슬프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한탄할 길이 없다. 교양이란 물론 주입식 고등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향수상(享受相)을 가리킨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그의 비판력이자 감상력이다.
조선에는 아직 이렇다 할 정론가(政論家)도 없을뿐더러 문명비평가도 없는데도, 이상하게도 문예평론가라고 자칭하는 부류는 많이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졸자(拙者) 역시 아무래도 거기서 한자리를차지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에는 정계도 교양사회도없는 대신 문단이라는 오두막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오두막집이 또 가관이다. 본격적인 교양사회가 없는 곳에 문단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말이안 되는 소리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시골 동네의 잡화점이나 만물점 같이 이 오두막집에는 갖가지 이색적인 교양의 대의원들이 전 조선에서 파견되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얘기가 재미있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골치 아프게도 문단에서 그들은 가장 역겨운 인종에 속하는데, 대학에서 노트만 작성하고 있던 시골 서생들만 우글우글 모여 있다 보니 그들이 문학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생적으로 음험한 근성을 드러내어 무슨 그룹, 무슨 파라며 서로 볼썽사납게 눈을 흘기면서 세력다툼의 문단정치를 하고 있는 살풍경.
게다가 이런 풍경의 중심인물이 편집자라고 하니 얘기가 슬슬 신화적으로 되어 간다. 대체 편집자란 무엇이더냐! 말할 것도 없이 독자의 대변자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적 저널 기관 안에서 그는 물론 독자의 기계적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봉건적 유몽(留蒙)시대에서는 그는 물론 교사의 알선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조선은 어느 시대에 속할까? 그 어느 시대도 아니고, 게다가 두 시대가 모두 교차하는 과도기적 제3의 신시대이다. 아마 오늘날과 같이 편집자가 보람을 느끼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그정도로 행복한 시대에 살아가면서도 그들 대부분이 불행히도 문학이라는 당치도 않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 특유의 사정으로 인해, 주제도 모르는 신사로 둔갑해 유유히 문단계를 걷고 있는 시골뜨기가 이 얼마나 많단 말이냐.
성인이 되지 않은 문단극장에서 편집자는 무대 뒤에서 익살꾼이 되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겠다.
재능이 있다면 당연히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편집자인 이상 양쪽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대에 충실하고 문단에 공평하고 독자에 친절해야 하는 것은 바로 편집자의 지상명령이다. 그도 인간인 이상 이른바 죽이 잘 맞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른 개인적인 친소(親疎)의 구별은 자연히 생기게 마련이고, 이는 어떤 사회라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편집자인 그에게는 이런 개인적 사정이 원칙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천하의 헌법이다.
요컨대 조선 문단은 자기 자신의 부덕으로 인해 지금 내부에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외과적 병세로 인해 언젠가는 쓰러질 수밖에 없는 우리 문단의 육체일진데, 어째서 제군들은 그런 꼴을 계속 보이고 있단 말인가. 자폭하는 것이라면 나 역시 한 몸이니 동병상련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조(李朝) 후예의 미풍인 것으로 보이는 당파, 음모, 시기와 질투 따위라고 한다면 백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게도 욕심이 있다. 설령 일시적이긴 하지만 전혀 치료할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 나는 지금까지 여러 기회를 통해 그 처방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 벗어라!”라는 것이다. 당파적 무장, 민족적 외투, 먼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 벗어던져라. 꾸밈없이.
순진하게, 허심탄회하게, 그렇다, 오직 알몸만이 강하다는 공간, 실력만이 효과가 있는 시간, 그러한 시공간이라는 이원적 세계에 개성이 개입함으로써 일원화되었을 때, 그때 경성에는 백 개의 문단이 숨을 쉬게될 것이다.
이런 백 개의 숨길이 허공에서 합쳐지는 곳, 거기에 예상치도 못한 조선 문단이 부상할 것이다.
루소의 자연이 낡았다면 좀 더 새롭게 들리는 희랍의 고대를 빌려 말하자.
“너는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돌아갔다. 그렇다면 언어표현의 국어적 변천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문제는 간단하다. 가야금이나 장구를 연주하며 춘향가나 흥타령을 노래하는 것만이 조선인의 면목은 아닐 것이다.
피아노도 좋고 바이올린도 좋고, <아베마리아>나 <리골레토> 또한 좋지 아니한가!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어만이 조선
문인의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영어나 불어도 물론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국어는 좋다는 의미를넘어서 당연한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역사는 적극적이다. 흥하는 것도 적극적이고 망하는것도 적극적이다.
게다가 민중은 정직하다. 망하려는! 조선어 문화를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흥하려고 하는 이 땅의 일문판(和文版) 문화에 기쁨에 찬 수희(隨喜)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자연스런 인정이다.
하물며 우리 자신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병균으로 내부에서 그 문화체(조선어)의 수명을 깎아먹고 있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상으로 나는 주로 문단을 대상으로 하여 논했는데, 문단이란 그 민족의 문화를 고도로 상징하는문화사회이다.
또 하나 사족(蛇足)을 덧붙인다면, 장래에는 물론이지만 현재도 한 달에 잡지 1권 정도를 구매할 수 있는 조선인은 안타깝게도 조선문보다 국문이 훨씬 더 읽기 쉽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때마침― 보신 바와 같은 시세(時勢)문화의 국어적 표현은 이미 결정된 운명으로 보인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시대의 추세이다.
―아무래도 유카타(浴衣) 차림으로 차를 마시면서 하는 얘기가 되고 만 사실은 근래에 들어 격식을갖춘 담화에 지쳤기 때문에 가끔은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한담을 권두에 게재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대로 지면을 채우는 용도로 쓰기를 바라며 보내기로 한다.
<출전 : 金文輯, 「文化表現の國語的趨勢-或日の馬鹿話-」,'靑色紙' 제2권, 제6집, 1939년 9월. 26~29쪽>
6) 김동인(金東仁)
(1) 국민문학과 제재(題材)
선전미(宣傳味)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라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바의 선전력을 국민계몽의 편으로 돌려서 국민으로 하여금 현하 시국을 이해케 하며 나아가서는 시국에 □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것이 시국하의 문학이 가져야 할 임무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없다.
그런 문학을 제작하기 위해서의 제재는 물론 부지기수다. 그런 가운데서 그날 제재가 되었던 중요한 하나는
‘조선사회에는 부분을 제하고 군인생활이 없다. 현재 전쟁 중에 있고 또한 전쟁의 처리로서 신질서를세우려는 소설 제재 중 군인생활이라는 것을 제외하자면 매우 □□하다.’는 문제가 나왔다.
이것을 다시 해설하자면 ‘현하의 우리나라는 도시에서 농촌까지 전쟁의 영향이 안 미친 데가 없다.
전쟁이라 하는 것과 군사행동이라 하는 것은 거대한 현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직접 참여치 못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소설 상의 인물로 하여금 당자(當者)는 현역 군인이요 우인(友人)은 제대 군인, 누이는 전사자의 미망인, 처남은 □□□ 상인(商人) 등등이라 하는 사회를 제재 삼을 수가 없다. 현하 시국에서 평화인만을 골라서 등장시키는 소설을 제재로 하여야겠으니 그 범위가 국한되어 매우 답답하다.
제재에 국한이 있다 하는 것은 그다지 큰 국한이 아니라도 답답한데 현하 사회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전쟁하는사람’을 뽑자니 이것은 □대한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출전 : 金東仁, 「國民文學과 題材」, '매일신보', 1941년 12월 27일>
7) 김종한(金鐘漢)
(1) 단가문외관(短歌門外觀)
나는 단가(短歌)를 좋아한다. 외우(畏友) 이석훈(李石薰) 씨는 하이쿠(俳句)쪽을 좋아하는 듯하며, 분명히 대용품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으나, 문외한(門外漢)으로서의 취미로서는 그래도 좋을것이다.
나는 단가가 좋은 것이다. 두들겨 맞아도, 채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좋은 것이다.
나와 같이 서투른 시를 쓰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어떻든 정열의 객관적인 파악을 할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좋아하는 날이 오면 단가 그 자체도 행복하다기보다 오히려 폐가 될 때가 많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단가가 좋은 것이다. 하이쿠라는 시형(詩型)은 575로 독자를 밀어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없다.
멀리에서 작가가 독자에 냉소를 던진다는 느낌의 시형이다. 물론 하이쿠도 문학인 이상 냉소 같은 것을 하고 있을 까닭은 없다. 결국 시형이 차가운 것일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단가는 친절하다. 하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의 먼 길에 연인이 온다면 아카시(明石)의 문에서 야마토(大和)섬이 보인다는 것과 같다. 이래도 모르겠느냐, 57577, 이래도 말이야, 고하는 것과 같은 친절한 시형인 것이다. 청탁(淸濁)을 아우른 넉넉함이 넘치고 있다. 혁신비평가 오오코시 토오요(大串兎代夫) 같은 이가 뽐내고 있다. 대동아건설에 필요한 일본민족의 친화성이나 포옹력이있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모자란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모자란다18)고 하는 것은, 오랜 동안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었을까.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모자란다고 할 수 있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사기(古事記)·만요(萬葉)·고금(古今)·신고금(新古今)으로부터 도쿠가와(德川)시대를 거쳐 메이지의 단가혁신운동에 이르며, 더욱이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라는 무섭게 여겨지는 선생이 나타나서 철학의 칸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만요가 좋다. 시키(子規)가 항아리에 꽂는 등(藤)꽃송이 짧으면 타타미(疊)위에 자라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처럼 하이쿠에서 깨달은 사생적인 수법 안에 만요의 유동감을 살려 나가고자 한 것처럼 얼마나 재빠르게 하고 있어서 근대적인 것이나,
만요 인(人)과 비교하면, 어쩐지 허리둘레가 작다는 느낌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근대는 종언(終焉)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략)
<출전 : 金鍾漢, 「短歌門外觀」, '綠旗' 1942년 4월호, 89~90쪽>
18) 주제의 구를 표면에 나타내지 않고 은연중에 그것을 풍기는 기법.
(2) 시집 '어머니의 노래'의 ‘맺는 말’
대(竹)로 엮은 커다란 갓을 쓰고, 프란시스 잼을 울릴 것 같은 당나귀에 걸터 앉아서 연중(年中) 끊임없이 제자 집을 역방(歷訪)하고 있었다. 저 유명한 떠돌이 시인 김삿갓의 아류(亞流)였던 것 같았다.
가끔 귀향하면 우뢰와 같은 불평을 남발하고 있었다. 내 외할아버지는 지방에서는 한학자로서 시인으로서 통하고 있었다.
자주 말세야, 말세야 하는 말을 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말세에는 사쿠라투성이인가. 이것은 잇차(一茶)의 구절이나, 내가 잇차의 혈액적인 것을 느끼는 것은 그의 속에 내 외조부를 찾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호는 한서(閑西)였었다.
그렇게 말하면 북조선의 기온에는 어딘가 신슈(信州)에 닮은 점이 있으며, 나의 집도 잘게 가른 논(타고토노 츠키 : 田每의 月) 가운데 낡아 빠진 것이었다.
내 생가는 농사꾼을 하고 있었으나, 6살 될 때 나는 백부 집에 양자로 갔다. 본가에 상속해야 할 남자가 없을 때는 작은 집의 장남이 양자로 가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양부는 엄격한 이성(理性)인이었으나 양모는 아이가 없는 중년부인이면서 편집광(偏執狂)적인 애정의 소유자였다.
그때쯤부터 생모와 양모 사이에는 나를 중심으로 한 애정의 쟁탈전이 펼쳐졌다. 한편에서는 자신이 낳았기 때문에 자기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키우고 있기 때문에 상관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두 사람의 어머니를 가진, 비교적 불행한 어린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애정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성인이 되었다.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것은 조국애(祖國愛)와 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훗날 나는 시골중학을 나와서 상경한 것이지만, 관부연락선 안에서 나는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양자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한 뒤틀림은 조선에 징병제도 실시가 결정되고 일본이 확고한 나의 조국이 된 작년 5월 8일에 비로소 양해한 것이었다.
만요(萬葉)에 이런 노래가 있다. 젖을 먹여 준(다라치네 : 垂乳根: 어머니, 부모)어머니에게 안녕을 하면 아무래도 너도 나도 일이 성사될 것이다.
그런데 도쿄에서 나는 자주 강의를 들으려고 나가지 않는 대학생이 되거나, 어떤 잡지 기자였거나했다.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의 초기 단편과 류큐(琉球) 민예와 유지마 텐진(湯島天神)의 비둘기를 좋아했다.
전쟁이 일어난 뒤부터는 그러한 잘디잔 취미는 날아가 버렸으나 지금도 나쁜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난숙기(爛熟期)로 세련되지 않는 나 같은 것은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그런 시는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었다. 할 수 없이 혼자 몰래 조선말의 시를 쓰고서는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제가 무엇이 되든지 모티브는 항상 영원한 어머니에의 향수였다.
조선시단의 제1인자이었던 정지용 사백(詞伯)이 추천해 주었으므로 이태준 씨가 주재하고 있었던 '문장'에 상당히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6편을 골라서 번역한 것이 (타라치네의 노래)인 것이다. 친구가 읽어보고 “역시 원작 쪽이 아름답네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40의 젊음으로 타계했기 때문에 중학을 갓 나온 나는 한 집안을 관리하면서 시골에 정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가정을 단념하고 상경한 나의 기분에는 아마도 무엇인가 고향에없는 것을 희구해 마지않는 치열(熾烈)함이 도와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예술이나 과학은 초국경적인것이라고 취급했던 시대였으므로, 그러는 가운데에 고향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인들의 의상이나 고층건물이 촌놈인 나를 무아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차차 익숙해지니까, 도쿄이나 근대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느꼈다. 그때쯤부터 나는 지방주의의 건설자, 마우리스 바레스19) 등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 씨에 경복(敬服)하고, 후쿠시 고지로(福士幸次郞) 씨의 품행을 지켜보았다. 독서도 프랑스 작가로부터 러시아나 북유럽의 것으로 이행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나도 여러 가지 조금은 생각하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갔다. 오래간만에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어머니 곁에서 '전쟁과 평화'를 되읽었다.
모리 오가이(森鷗外)를 모범으로 한 2, 3편의 소설도 시작(試作)해 보았다. 어머니의 애정에도 나이에서 오는 침착성이 작용하여 나는 평화스러웠다.
결국 내가 죽을 장소는 경성이 될 것이다. 현재 통합의 결과 남겨진 조선 유일의 문예지잡지 “국민문학”의 편집자인 것이다. 이 시집도 그 회사의 호의에 의하여 간행해주는 것이기는 하나, 하찮은 것이다.
자신의 천성을 인정하지 않는 나는 물론 좋은 문학의 이해자가 되고 좋은 편집자가 되도록 장래의 일터를 찾아내고자 생각하고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나 저 분신(分身)의 나는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인 것 같고, 한때 “신(新)지방주의”다 하는 것 등, 말하자면 마우리스 바레스를 조금 아는 척하는 지정학(地政學)의 정신을 가미한 문화이론을 발표하여 젊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거나, 중년의 사람들로부터는 백안시당한 일도 있다. 그것은 치졸(稚拙)한 나의 시와 함께 나의 청춘을 기념할지도 모른다.
솔직한 이야기, 30이 넘어서 아직 시에만 매달리고 있는 풍경을 나는 그다지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꽤 많은 시인들을 애독해 왔다고 생각하나, 30이나 되려고 하는 내가 지금도 아직 읽는 데 보람을느끼는 것은 만요(萬葉)와 릴케쯤밖에 아니다.
그런데 나루카미노 우타(천둥의 노래)에 모은 7편의 시는 그것을 쓰고 있을 쯤의 “새로운 사시(史詩)의 창조”라는 시론을 되풀이 읽어보니까, 다음과 같은 상쾌한 의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시인들은 인간을, 특별히 영웅을 노래하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란 영웅이 부정되는 시대이며, 근대시란 시의 위대함을 멸시당하는 시사(詩史)였던 것이다. 대동아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흔들리면서, 나는 묘한 것을 생각했다. 옛날 시인들처럼 영웅을 노래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무명의 영웅인 경우도 있다.
때로는 집단인 경우도 있다. 아무튼 히로이즘을 갖고 있지 않는 소재에는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지(一枝)에 대해서”에서는 내선일체에 헌신하는 한 사람의 문화인의, 운명의 인과가 아름답고 슬픔을 비유하려고 했다. “합창에 대해서”에서는 대동아건설에 참여하는조선인의 풍모와 감격을 벽화(壁畵)하고자 했다. “풍속”을 쓴 동기는 경성의 거리에서 묵도(黙禱)하는 집단의 영웅적인 장엄함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징병제도 실시가 발표된 5월 8일에는 “유년(幼年)”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12월 8일을 다시 맞이하면서 “대기(待機)”를 사시(史詩) 않고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무엇을 팔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작시(作詩)의 태도는 하나의 정리된 주장이나 작품행동으로서는 내지에서도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범되는 것이 없어서 외로워 견딜 수가
19) 모리스 바레스, Maurice Barrès, 1862~1923, 프랑스의 국수주의적 작가.
없었다. 만약에 있었다고 해도 일부러 내지에서 와서 조선의 새로운 영웅들을 노래를 해줄 것 같은 호사가(好事家)인 시인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툰 채로 작은 포부를 갖고 노래해 가면 조금은 나라를위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국민적인 이상이나 의욕이라는 것에서 주로 시적으로 느낌을 받는것은 그 “이상”이 아니며, 그것을 수행해 나가기 위하여 피를 흘리는 국민 된 “인간”으로서의 생명력과 진실의 아름다움에 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희구해 마지않는 인간들이 국민으로서의 생명력과 진실은 영원에 이어지는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남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꽤나 원기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조금 더 깊이가 있는 침착성이 생겨서 보다 더 내면적으로 “일본”을 파악하고 싶어졌다. 어떻든 조선이나 조선인이라는 것도 꽤나 변화해 온것 같다. 역사물을 쓰고 있던 만년의 스트린드베르그가 “역사는 신의(神意)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김종한(金鐘漢)
<출전 : 金鐘漢, 「あとがき」, 'たらちねのうた'(詩集), 人文社, 1943년 7월, 40~46쪽>
8) 박영희(朴英熙, 芳村香道)
(1) 감격(수필)
박영희(朴英熙조선문인협회 간사)
우리나라의 현대를 일컬어서 저는 곧바로 과격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요즘 저의 감상의 전부인 것이다. 그러나 전혀 감격을 모르는 시대도 있었다. 따라서 감사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
종교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은 신에게 항상 감사해야 되는 것은 물론이나, 천지만물 또는 인간 동지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감격도 감사도 전연 모르는 한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감격할 일이 있어도 그것이 감격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태양이 따뜻한 광선을 인간에게 주는 것은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대지(大地)가 우리들에게 곡식을 영글게 해주는 것은 우리들의 노동의 결과인 것이다. 심한 가뭄에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비는 아무것도 하늘에 감사해야 할것이 아니며, 땅에 감사할 일도 아니라는 사상인 것이다.
사람들은 유물적 과학만능주의를 제창하고 과학이 인간의 모든 것이며, 이러한 과학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즉 신이라고 믿었으나, 이러한 사상의 발전 결과는 종교를 무시하고 신의 존재를 타파하여, 인간의 정신세계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와 같이 인간이 위대해지면 아무에게도 감사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사물이 다만 평범해서 감격해야 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도덕관념이 일변한 것이다. 위대한 인간은 아무 것에도 구속당할 필요가 없으며, 또 아무 것에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사상으로 말하자면 영웅주의, 유물주의의 혼합형인 것이다.
충효라거나 신의라고 하는 것은 봉건사회의 도덕이며 현대인의 생활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만약에 무엇에 감격하고 감사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음이 심한 것이며, 비과학적이며, 또 몽유병자라고 비난을 했다. 그러한 사상은 서양의 유물주의가 들어 온 뒤의 일로 정말 인간이 생각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는 가장 혈기왕성한 시대를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며, 또 거기에서 저의 정신적 양식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구하면 구할수록 저는 악착같은 현실에 부딪힐 뿐으로서 한 번도 감격이라거나 감사함을 느끼지 않았다.
느끼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랑 삼았다. 그것은 한 시대의 자랑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그때는 감격이거나 감사를 대신하여 사람은 사람과 다투고, 아우는 형을 원망하며, 처는 남편과 헤어지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나무라고, 사람들은 사회를 비난하고, 인민은 국가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는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식자들은 스스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그것을 부르짖으며또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흐려진 밤하늘에서 금성을 찾을 수가 없듯이 그러한 사회에서는 감격이라거나 감사 같은 것을 찾아낼 수는 물론 없다. 감격이 없는 사회에 신은 없으며, 신이 없는 사회에 감사도 없는 것이다.
신이 없는 사회에는 악마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은 매일 감격 속에서 살고 있다. 또 사람들은 감격할 줄을 알게 되도록 된 것이다.
저는 요즘 너무나도 많이 감격해야 할 일을 목도(目睹)하고 또 경험했던 것이었다. 단체에서, 길거리에서, 학교 등에서 보는 것이 모두 감격이다. 저는 이 감격 속에 하루의 자신의 육체적인 피로를 잊고있는 것이다.
이 감격이라는 것은 저 혼자만이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제가 보는 바로서는 상인도, 관리도, 검사도, 경찰관도, 사상가도, 학자도, 예술가도 …… 모두 감격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현대를 일컬어서 감격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사변 이후 국민은 먼저 황군에 감사하고 또 그 고생에 감격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국가에 대해서 충의를 다 할 것을 자각하고 있다. 작년에 저도 전지(戰地) 위문에 가서 군인들의 고생을 보고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후방을 굳게 지키고, 일선에는 또 여러 가지 정성을 보낸다.
군인들은 국민의 이러한 정성에 또한 감격하는 것이다.
감격하면 반듯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감사하면 반듯이 물심양면의 어느 쪽인가에 표현되는 것이다.
감격을 알게 되면 이번에는 너도나도 모두 행동을 시작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감격의 파도에 메어지는 것이다.
사회전체가 감격하고 국가전체가 감격 속에 있다. 사람의 행동을 보고 또 자신의 행동이 남을 감격시키는 것이다.
저는 두 개의 시국단체에 관여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상단체로, 다른 하나는 문학단체인 것이다.
이러한 단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제게 모두 감격스럽게 보인다.
감격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으로는 할 수 없는일을 훌륭하게 해 내고나면 보는 사람들은 감격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훌륭하게 생명을 받쳐서 국가를 위해서 함으로써, 너도나도 하면서 모여드는것을 볼 때, 누구라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에게 효도를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때도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웃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지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지금 국가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제 각각의 입장에서 보국을 맹세하고 있다.
즉 현대는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을 아는 것과 동시에 사람이 해야 할 일에 매진하는 시대여서 시대 그 자체가 이미 감격인 것이다.
개인주의, 공리주의, 유물주의를 뛰어 넘어서 넓은 정신적 영역에서 충효와 정렬(貞烈)과 신의의 새로운 신조가 과학과 함께 인간생활을 가장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데에 우선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출전 : 朴英熙, 「感激」(隨筆), '京城日報', 1940년 1월 1일>
(2) 신체제와 문학
조선문인협회 간사 방촌향도(芳村香道, 朴英熙)
현재 우리나라는 지금 모든 부문에서 신체제 아래에 재출발을 단행하고 있다. 정치, 경제, 철학사상이 그렇고 또 문예도 그렇다.
성전하에서 신체제는 물론 구체제의 것과는 정반대인 것인 동시에 보다 고도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문학은 어떻게 해서 고도문학으로 할 수 있는가.
문학자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정치는 일시적이며 정략적이기 때문이라고한다.
예술가가 인간적이고 진리라는 것, 내적인 것, 영원성이 있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고금을통하여 변함이 없으나, 오랫동안 발전해 온 문학사를 열어 보면, 정치적인 대 이상과 문학적 대 이상을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시대에 따라서는 문예사상이 국민 또는 민족사상을 지도하고, 그것이 확대되어서는 정치적 대변혁을 일으킨 일마저 있었다.
문예를 오로지 오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예의 참다운 가치를 알 수 없겠지만 문예는 각 시대에 따라 그 주체에 대한 가치표준의 차가 있을지언정 결국은 사상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의 사상을 정치는 정책으로 나타내고, 철학은 방법론 중에 그 특색을 나타내나, 문예는 형태 속에 사상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각 시대에 따라 집단적 사상, 사회적 사상, 국민적 사상, 개인주의 사상 등으로 분류할 수가 있으나,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단계는 바로 국민사상의 재건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이중의 뜻에서 타당하다 하나는 난숙기를 . 통과하고 있는 개인주의 문학의 막힘을 시정하고, 둘째는 우리나라 성전완수로 국민적 또는 사상적인 참가이다. 문예와 정치를 구별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가와 문예가와의 인적관계에서 나오는 자존심과 우월감의 차이에서 원인하는 것으로, 결코 국민의 대 이상과 새로운 세기의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우리나라의 성전은 대동아건설을 뜻하며 신체제는 이것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민적인 통제를한층 공고하게 하도록 해야 할 조직적인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것은 한 정치가의 정책도 아니며, 한 정당의 정강도 아니다. 전 국민이 바라고 있는 대 이상과 그 실천의 구체화이며, 이런 뜻으로 문예가는 신체제에 앞서면 앞섰지 뒤가 되는 것은 할 수가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반도에서 부르짖고 있는 국민문학론, 전쟁문학론, 내선일체 문학론의 대두, 조선문인협회의 결성 등에, 즉 신체제 하의 문예운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 이상과 여기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사상을 형태 속에 구현해야 할 문예의 임무는 신체제 하에더 중대하며, 또 현재 문학은 국민사상을 더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구체제 하에서 자유주의, 개인주의, 회의(懷疑)주의 등 일체의 불건전한 사상으로부터 먼저 문학자는 해방되지 않으면안 된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문학자에게 요구하는 하나의 명제이다.
<출전 : 芳村香道, 「新體制と文學」, '綠旗' 1940년 10월호, 23~24쪽>
(3) 다가서는 혼과 혼
만주국, 중화민국, 몽강(蒙疆)의 문학자 및 우리 일본의 문학자들은 자신의 문학을 성전 목적 완수를 위하여 어떻게 도움이 되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열렬한 의견을 피력했으나 이러한 정열 속에 이미 우리의 혼과 혼이 서로 다가서서 함께 돕고 일체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대동아의 새로운 힘이 되어 미국과 영국적인 사상을 쫓아낼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건전하고 웅대한 대동아문예부흥운동의 강한 첫걸음이 발족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의 협력과 이해와 정열 속에 사상과 문화는 혼연히 융합되어 새로운 추진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학을 통하여 대동아전쟁의 목적 완수는 더욱 적극적으로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주국, 중화민국, 몽강의 문학자와 우리들 일본문학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굳은 약속은 세기적인 감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이러한 감격을 영원히 기억에 남김으로써 대동아전의 목적 완수를 위한 문학적인 협력을 더욱 더 강력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감격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본정신을 우리 것만으로 하지 않고 동아 10억의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는 만주국, 중화민국, 몽강 등의 작가 여러분의 붓으로, 혹은 남방작가들의 붓에 의하여, 10억의 민중에게 참다운 일본을 이해시킴으로써 대동아의 대중으로 하여금 대동아전 목적 완수에 마음으로부터의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먼저 남방 작가들을 수시로 우리나라에 초대해서 일본의 참다운 모습과 기품이 높은 일본정신에 닿게 하고, 돌아가서는 각각 문학을 통하여 일본정신을 널리 전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동아 10억의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의 융합을 도모할 수 있다면, 대동아전의 목적의 일부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출전 : 芳村香道, 「相寄る魂と魂」, '京城日報', 1942년 11월 13일>
(4) 국어에 대한 애정 -황민 완성
어떤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그 의사를 자신의 국어로 발표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본능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인 반도인이 ‘국어’20)를 사용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우며 필연적인 것이다.
이제반도의2천4백만동포는황민으로서의영광을입고있으나완전한국어의이해와그것을사용함으로써, 비로소국민적인감정과 생활기초가완성하는것이다. 국어에대한애착은 여기에있는것이다.
말과 문장은 감정을 조직하고 정서를 같은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단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한 뜻으로 반도인의 황민화는 역사적으로 철학적인 방면도 좋으나, 그것보다 현재의 국민적인 생활의 한 가운데
서, 황민적인 감정과 정서의 조직화를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도인의 황민화는 피동적이 아니며, 능동적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의 무한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에는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즉 위대한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위대한 사랑이 구해지는 것이다.
반도인들이 국어로 말하고, 국어로 의사발표를 하는 것은 황민화에의 노력이며, 그에 대한 동경과 애정의 나타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노력함으로써 비로소 그 참다운 맛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론만으로 그 가치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에지나지 않는다.
최근 조선문인협회의 문학부의 각 부회에서 반도작가들은 장래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국어로 발표할것을 결의했다.
이것은 반도작가들의 국어에 대한 애정이며, 황민으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의 국민문학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반도작가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책무가 크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실천하는 사이에 반도의 국민문학의 기초는 더욱 더 견고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출전 : 芳村香道, 「國語への愛情-皇民への完成」, '京城日報', 1942년 11월 25일>
20) 일본어.
9) 백철(白鐵)
(1) 동아의 신문화와 ‘협동’에의 의지
1
나는 지금까지 한 사람의 조선 문화인으로서 사변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조선문단인 중에서 누구보다 먼저 이번 사변을 문화논문의 테마로 살려보고자 시도하거나, 또 그 시론을 두세 개 발표한 사실을 가르치고 말하는것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지속해 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변21)이 일어난 당초에 일부러 지나의 지도를 한 장 책상 위에 준비해 두고 사변이 나날이진전하며, 지리적으로 확장돼 갈 때마다 지도 위에 그만큼의 것을 붉은 선으로 표시하면서 전개해 나가고 있는 동아의 신국면을 끊임없이 생각해 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지나사변을 신문이나 뉴스로 받아서 지도 위에 정리해 가는 중에 처음에는 자신스스로가 숙달한 견해를 갖고 사변을 정리하거나, 한 걸음 나아가서 사변의 전도를 예상해 보기도 했으나, 사변이 점차 확대되어 내 시야를 뛰어 넘게 되니까, 벌써 자신의 견해로서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주사변 같은 것을 보아온 나로서는 마치 사변이 지역적으로 만주사변 정도까지 진행되었을 때까지는, 앞에 겪은 경험으로 지금의 사변을 정리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만주사변보다 2배도 3배도 진척되고, 그 위에 국제적인 복잡한 관계가 미묘하게 움직이게 되니까, 전혀 예상이 되지 않고 완전히 처치 곤란해서 당혹함을 느끼는 꼴이 된 것이다.
마침 이것은 사변이 대단한 확대를 보이면서 한 쪽으로는 건설이 주창되는 시기이므로 건설을 하는것 즉 파괴와 점령 뒤에 그것을 새로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확대되어서 점령을 한 채로 방치한 것으로 도대체 어디부터 정리해야 할 것인가, 건설은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도무지 예상을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재료가 너무 많고 너무 풍부해서 처리에 곤란과 당혹함을느낀 것으로 그 때문에 사변은 일시적으로 위기로 변해서 내 눈에 비쳐 온 것이다.
사변의 처리가 한 때 하나의 위기로서 비쳐왔다는 것은 다만 나와 같은 정치의 메커니즘(기술)을 전연 이해 못하고 있는 문화인만이 느끼는 당혹함인가 하고 생각하면 결코 그런 것 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것으로서 전 국민을 당혹시켰다는 하는 증거에는 이번에 일어난 유럽전란이 하나의 신풍(神風)으로서 국민의 눈에 비친 그 심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신풍은 최근 시정 항간에서 유행하고 있는 하나의 유행어이나, 이 신풍의 의미는 동아의 시국이 중대한 난국에 빠져버린 마침 그때 거기에 잘 맞게 유럽대전이 발발해 주었으므로 하루아침에 동아는 밝은 전개를 해준 것이 다만 현상이 아니고 올바른 신의 도움이라고 하는 뜻이다. 어디 한번 이래서 한숨을 놓았다! 라고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심이 이러한 신풍을 주창하는 국민의 마음에 잠재하고
21) 중일전쟁.
있지는 않은가?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사변처리는 한 때 상당히 불투명한 것으로 일반에게 옮겨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변처리는 이 신풍에 의하여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일까 라고 한다면, 나는 결코 그렇게생각하지 않으며,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그 신풍과 사변처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보는 것이옳을 것이다.
유럽대전과 같은 외적 원인에서 사변처리 과제가 두어지지 않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2
사변이 일시적으로 우리의 눈에 불투명하게 보여서 위기로 비쳐 왔던 것은 사변처리, 동아건설을 눈앞에 두면서 그 건설을 내용적으로 지탱해 나가는 확고한 원동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원동력으로서는 결코 신풍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 위에 근거를 가지는 원리적이고 사상적인 것이다.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변처리의 구체적인 길도 불투명하게 비친 것이며 내가 한 때 사변에의 관심을 단념하고 당혹을 느꼈던 것도 그만큼의 확실한 원리적인 것이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는 재료에 처치 곤란을 느끼고 다만 팔짱을 끼고 방관하고 있는 사이에 사변은 저절로 자신의 위기시대를 지나 어느 사이에 확실한 원리적인 것을 갖고 충실한 것으로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동아의 새로운 질서라고 하는 것이며, 그 새로운 질서는 동아협동체의 이론을 내용으로 한다.
동아의 신질서란 사변에 관심을 갖는 우리가 언젠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접하는 말에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어 왔으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신질서라고 하는 말의 탄생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지금의 지나사변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이 신질서라는 말은 그 전기가 겨우 끝나고 후기가 시작하려고 하는 하나의 전환기에 태어난 말이었던 것이다. 즉 이것으로 사변의 파괴적인 시기는 일단락을 알리고 이제부터는 건설기라고 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시기에 들어간다고 하는 모멘트에서 탄생한 말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멋 떨어진 추억이다.
1938년 10월 26일의 무한(武漢)공략을 완성하고 제국정부는 지나사변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고, 하나의 획기적인 성명을 내외에 표명한 것이다. 그것이 11월 3일의 제국정부의 일중사변처리에 관한 선명(宣明)이었으며, 또 유명한 고노에(近衛)성명이기도 한 것이다.
동아의 새로운 질서란 이 역사적인 성명을 할 때에 탄생한 말인 것이다. 즉 그 말이 유래하는 뜻은지나사변은 결코 근대에 이루어진 식민지 획득의 침략행위는 아닌 것이다. 이번 사변은 영토에 대한욕심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며 현상으로 볼 때 전화(戰火)의 교접은 일시적으로 할 수 없이 취한 수단이었으며, 제국 측의 진의는 동아에 새로운 질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요지를 발표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질서의 건설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면, 그때의 성명 속에 확실한 방향이제시되고 있었다.
고노에 수상의 담화와 같이, “제국이 지나에 바라는 것은 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 임무를 분담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제국은 지나국민이 우리의 진의를 잘 이해함으로써 제국의 협력에 따를것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으로, 또 제국정부의 성명에 있다시피 “지나의 동우구안(同憂具眼)의 인사들과 제휴하여 동아신질서의 건설로 향해서 매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성명은 나중에 그대로 효과를 내어서 실제적으로 건설 작업이 진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지나 측의 ‘동우구안’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등장한 왕조명(汪兆銘) 등의 화평구국(和平救國)의 운동과 상호제휴로 동아신질서를 위하여 협력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 미묘한 정치적인 입장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마음대로감상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매우 흥미를 갖는 것은 이 성명을 계기로 동아협동체론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상적인 근간이 태어나고, 그것을 계기로 오늘날에는 도쿄 방면의 문화인들에 의하여 대단한 열의로 ‘협동’에로의 의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고노에 수상의 성명이 문화인들에게 대단한 지지를 받고, 또 수많은 동아협동체론이나 협동에의 추구가 그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아 온 것과 같다.
지금 동아협동체론은 하나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실은 이 협동체론은 상당히 구체적인 입장까지 들어가서“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서는 일본 국내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중국이 원래 그대로이며, 일본이 원래대로 있어서는 동아협동체라고 하는 전체가 형성될 리가 없습니다. 새로운 전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중국이 변화해야 될 뿐만 아니라 일본도 또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미키 기요시(三木淸) 씨는 왕조명에게 공개장을 쓰고 있으며, 또 한걸음 나아가서는 비판적이고 혁신적인사상체까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동아협동체론이 하루라도 빨리 그러한 사상적인관념에 숙성되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읽어 온 동아신체제론에서는 아직 이것이라고 할 만한 체계적인 사상으로는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이 협동체론에 대해서 무엇인가 통일된 견해를 전개해 볼 자신도 없다.
그래서 내가 ‘협동’에의 의지를 이 글의 제목으로 고른 것은 앞에서 양해 받은 것처럼 사상적인 논제에도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한 감상문을 쓰고 있는 심정이다.
그렇게 말하면 위정자나사상가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내가 ‘협동’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시인의 감상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협동을 현실적인 체계로서 추구하기보다도 협동을 꿈으로서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다.
지나사변, 그것이 어떤 오해에 따르든 지금까지는 불행하게도 교전을 해 온 양국이 그 오해도 풀리고 서로 깊이 이해와 사랑으로 서로 접근하여 제휴하며, 동아에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풍경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일까 하고 나는 생각 해 본다. 그 순간 ‘협동’에 의하여 실현되는 새로운 질서의 동아가 아름다운 평화스러운 천국으로 비쳐 오는 것도 요즘 내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꿈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협동을 생각할 때 나는 ‘협동’에 대해 일종의 향수와 같은 그리움을 느낀다.
사상가들이설파하는 바에 의하면 이 협동론이야말로 유럽에서 전해 내려 온 것이 아니며 동양에서 비로소 태어난사상의 새싹이라고 하나, 향수 속에 생각해 보면 ‘협동’은 나에게 옛날부터 접해 온 친숙함을 느끼게 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협동’에 대해서 감상적인 심정이면서도 무엇인가 사상적인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이렇게 터무니없는 감상에 젖은 뒤부터이다.
협동은 사상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저 성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치적인 연계와 경제적인 결합과 신문화의 창조’라고 하는 세 가지 항목 중에서 마지막의 ‘신문화의 창조’라는 항목에 해당하는 문화적인 것으로서 ‘협동’의 사상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튼 이 ‘협동’으로부터 일부러 정치와 경제를 배제하고 문화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은아니다, ‘협동’은 처음부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협동의 필요와 요구가 더하여 제창된 것일 뿐만 아니라그것이 진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사상이라면 그것은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원리로서 정치에 작용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런 의미로 협동은 당연히 정치와 결합하지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와 떨어져서 문화주의적으로 발전하는 한 동아의 신질서의 제적인 실현을 생각하는 것으로, 또 그러한 현실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사상은 공중에 뜬 죽은 관념외는 없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협동’은 무엇보다도 통일적인 사상이다. 마치 오늘날 신동아의 과제가 통일인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협동’이 통일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협동’이 언제나 ‘통일’의 모양으로 표현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항상 특수한 것으로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내가 이 ‘협동’을 문화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문화인의 입장에서 문화의 영역으로 ‘협동’을 특수한 것으로 추구한다는것이다.
이것은 ‘협동’을 참다운 사상으로서 꽃피우게하기 위해서도 특수적인 영역으로 그것을 포착하여 적용하며 그 사상성을 증명해 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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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에 있어서도 먼저 문화부문에서부터 ‘협동’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 사변 하에서 가장 요청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오늘날 동아건설의 중대한과제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정치가 사변의 수단이 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건설에는 문화가 주된 수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오늘날의 신동아건설을 위해서 일지(日支) 양국의 협동이 시급을 요할 때 성명에 나와 있는 제국정부의 참뜻을 상대방 지나민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정치나 전쟁의 수단으로는 곤란하며, 문화의 힘, 그 동화력, 감화력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생각해서 나는 이제부터 오는 동아의 새로운 ‘협동’ 사상은 새로운 휴머니즘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동아의 신질서를 협동의 사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은무엇보다도 동아의 인류적인 공존의 이상으로부터이며 협동은 하나의 휴머니즘이며 인도주의적인 이상주의 사상인 것이다.
나는 재작년 말 어떤 문예논문에서 이번 사변을 제목으로 등장한 전쟁문학을 접하면서 알게 된 휴머니즘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지적하며 이제부터의 전쟁문학은 휴머니즘일 것이며, 그 휴머니즘은 문단 주조(主潮)가 될 것임을 강조한 일이 있으나, 지금도 전쟁문학을 새로운 동아문화의 하나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부터 전쟁문학이란 다만 이쪽의 독자를 민중적인 감정으로 흥분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되도록이면 그러한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것은 배제하고 하나의 동아민족 전체의 협동적이고 인정적인 것을 포착하여 드러내며 상대인 중국의 독자들도 공감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학 그 휴머니즘을 주조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휴머니즘은 ‘협동’의 중요한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동아의 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신문화의 창조가 시대적인 과제가 되고 ‘협동’에의 의지가 문화인들에게 상당히 전면적으로 움직여 온 때 우연히 내가 이러한 제목으로 감상을 발표하고 있는 것은내가 앞에서 생각해 온 바대로 ‘협동’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휴머니즘을 내용으로 하는 한은 적극적인 관심과 열의로써 그 ‘협동’에의 시대적인 의지에 참가하고자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필자는 문예평론가, 국민신보편집위원)
<출전 : 白鐵, 「東亞の新文化と‘協同’への意志」, '總動員' 1940년 2월호, 86~91쪽>
10) 유진오(兪鎭午)
(1) 시국과 문화인의 임무
1
시국의 진전에 따라서 내선일체의 표어는 이제야 단순한 이상이나 표어라는 영역을 뛰어 넘어 실현을 향한 착실한 큰 걸음을 내딛고 나간 것처럼 느낀다. 원래 이 문제는 크게는 제국 전반의 방향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작게는 조선 2천 3백만 민중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만큼 그 실현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입장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떠한 의견의 상이나 도중에 곤란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여 과제의 실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기본요청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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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시국에 대해서는 우리들 문화인의 임무가 있는데, 문화인은 먼저 첫째로 국민이며, 둘째로 문화인이라고 하는 이중의 지위에 있는 것이므로 그 임무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문화인은 다른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먼저 첫 번 째 국민이므로 시국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책무를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세금을 내고, 황군장병의 봉송영(奉送迎)에 참가하고, 또 생활 및 정신을 바짝 조임으로써 후방을 지키는데 빈틈이 없도록 하는 등 모두 이러한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문화인도 일반 국민도 하등 다른 바가 없다.
그러나 문화인은 단순한 국민이 아니며, 또 문화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국민적인 책무를 다함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문화를 통하여 시국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치 경제인이 경제를 통하여 시국에 참가하는 것처럼 문화인은 그 무기이며 독특한 기능인 문화적인 능력으로써 시국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시국에 직접 참가 -직접 정치행동에 의한 참가를 강조하는 나머지 문화인의 문화적인 활동을 자칫하면 우원시(迂遠視)하고자 하는 풍조가 없지도 않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세상만사 모두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원만하게 운영되는 것이므로 문화인이 문화부문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국민적인 책무를 다한다는 것과 문화적인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립할 수 있는것이며, 또 양립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3
그런데 우리들 조선 문화인은 넓은 뜻의 시국이라는 것 외에 나아가서 내선일체라고 하는 구체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그 임무도 또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선일체는 내체(內體일본)와 무차별 평등 일체화를 종국의 목표로 하고, 이를 위하여 조선인의 국민적인 자각과 문화적인 교양을 내지인과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숭고한 이상으로서 조선 민중이 일치하여 이것에 찬동하고 있는 현상은 극히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우리 문화인에게 주어지고 있는 책무는 무엇일까.
먼저 첫째로 국민적인 자각의 강화문제로 문화인도 또 이것을 위하여 당연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이 문제는 문화영역에 속한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구호와 편달에 그치지 않고 먼저 그 유래를 면밀하게 조사 연구한 후에 적절하고 타당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문화인이라고 할지라도 팔을 끼고 방관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문화인이 그 문화인으로서의 본령(本領)을 발휘하면서 내선일체의 대 과제에 참가할 수 있는것은 그 둘째 요청, 즉 조선인의 문화적인 교양수준을 끌어올리는 사업에 있어서이다.
실제로 우리 조선인은 종래에 이 점에 관하여 그다지 무관심하였다. 병합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어쨌든 우선 문화에서 글자 그대로 내지에 추종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학자든 문사든, 관리든 그들의 교양은 특수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내지의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교양에는 비할 수없을 정도로 졸렬한 것이었다. 갑자기 조선인은 조선인이라는 핸디캡 위에 특수한 대우를 받게 되었는데, 내선일체의 표어가 조선인에게 미치는 핸디캡을 철폐하고 문화적인 교양의 향상을 요구 해 온 것은 조선인에 대한 적절한 일대 경종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 나는 국민적인 자각과 문화적인 교양에서 이미 내지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수준에 도달한 조선인은 추호도 내지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로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나, 이것을 이제 이 이상 말해야 할 논제는 아닌 것이다.
실제문제로 보아도 조선의 무학이나 문맹한 대중의 현상을 하루라도 빨리 향상시키지 않으면, 내선일체의 대업은 머지않아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학이나 문맹인 한은 국민적인 자각의 강화달성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계급의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므로, 하루아침에 그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 있을 수 있으나, 무학인 대중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짧은 시일 동안에 그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말함으로써 조선 문화인의 당면한 과제도 스스로 명백해졌다고 생각한다.
즉 조선의 문화인은 한 편에서는 조선 문화의 최첨단을 내지문화와 마찬가지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하여 정신(挺노력하지 않으면 身) 안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계몽을 위하여 힘을 아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원래 대중계몽이라는 대 사업은 문화인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당국의 교육보급정책과 아울러 비로소 효과를 바랄 수 있는 있는 것으로 이미 당국에서는 이것을 위하여 상당히 강력한 계획도 끝냈으며, 그 실현을 시작했으므로 문화인도 또 그러한 당국의 정책을 때로 돕고 때로는 이끌어감으로써 하루라도 빨리 문맹타파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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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간단하나마 시국에 대한 문화인의 임무로서 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체로 쓴 것이다.
요는 문화인은 국민의 일원이며 또한 문화인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시국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필자는 보성전문학교교수, 조선문인협회간사)
<출전 : 兪鎭午, 「時局と文化人の任務」, '總動員' 1940년 2월호, 79~81쪽>
(2) 대동아정신의 기조
일본(조선)대표 유진오(兪鎭午)
근대전쟁은 무력전이며 경제전이고 정치전인 동시에 문화전, 사상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아무도이의가 없을 것이나, 이러한 것들에 마지막 매듭을 짓는 것은 참으로 문화전이며 사상전이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황군의 빛나는 전과와 활발히 수행해 나가고 있을 경제전이나 정치전에 비교해서 문화전이나 사상전에서는 약간 뒤쳐진 느낌이 있는 것은 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배려가 치우친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대동아정신의 진수가 천명되고, 그 강화 및 보급방도가 논의되며 이에 대한 대동아 여러 지역 문학자의 적극적인 참가 맹세는대동아전 필승을 위한 태세가 마지막 정비를 끝냈다는 의미로서 참으로 의의가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하면 안다”는 말이 있으나, 정략적인 회합에서조차 사람과 사람사이의 혹은 국가와 국가사이의 대립과 충돌은 가끔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문학은 속이지 않는 영혼의 표현이며, 숨겨진 감정의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자는 성실함을 생명으로 한다. 대동아 각 지역의 대표적인 문학자가 한 자리에서 만나, 교환(交驩)하며 흉금을 털어놓고 서로 이야기하며, 마침내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느끼고 있는 것이 이미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낸 이번 대회는 동아의 사상적, 문화적인 전개를 책동하고 있는 적에 대한 강렬한 폭탄이었다.
이러한 커다란 충격 앞에 적국 미영은 모골이 율연(慄然)하여 몸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영의 앞잡이가 되어 쓸데없이 항일에 광분하고 있는 중경(重慶)은 내심으로는 창피해서 깊이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적인 국가다운 대임을 맡게 된 것은 결코 대동아전쟁 또는 지나사변에 즈음 하여 새롭게 된 사실은 아니다. 동아의 나라 중에 서양문화의 장점을 재빨리 들여 온 것은 바로 일본이었으며, 동양정신의 진수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유지하고 오늘날 정력을 다해 타락하고 있는 서양문화를 뒤집어 엎는 저력을 축적해 온 것도 일본이다. 아름다운 일본의 풍물 중에 건강하게 축적해 온 아름다운 동양적인 도의정신은 이제야 대동아 10억의 민중 위에 빛을 밝히려고 하고 있다.
이제야 우리들은 동양의 존귀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정신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동양적인 도덕이며,
세계적으로 으뜸인 까닭을 선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동아에는 빛나는 태양의 승천이 이미 높이솟아오르고 있다!
(필자·조선문인협회간사장, 보성전문학교 법과과장)
<출전 : 兪鎭午, 「大東亞精神の基調」, '讀賣報知'(요미우리호치신문), 1942년 11월 6일>
(3) 문화 또한 전쟁과 함께
지난 1년간의 문화계를 되돌아보고 우선 나의 머리에 떠 오른 일은 문화가 전쟁과 운명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치가 아닌 실감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는 것과 어떻게 해서든 먼저 전쟁에 이기지 않으면 안되는 현 단계에서는 솔직히 문화라는 것이 매우 영향력이 미미하게 되었다는 두 가지이다.
문화가 한 나라의 흥망과 운명을 함께 했다는 것은 이미 누구라도 완전히 아는 일이나, 이제까지는 그 사실이 뜻밖에도 다른 물건처럼 포착되어 온 것은 아닐까, “전쟁에는 졌어도 문화적으로는 이겼다”라고 하는 것 같은 표현에 드러난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국가총력전이며 따라서 전쟁에 지는 것은 단순히 무력적인 패배라거나 일부 지도층의 몰락이거나 하는 지극히 간단히끝나는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님이 이미 명백해진 현재에는 그렇게 안이한 사고방식은 벌써 허용되는것이 아니며, 전쟁에 지는 국가나 민족은 글자 그대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는 비운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전에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거대한 영향에 대해서 운운했으나 이번 전쟁은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고 또한 인간생활상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아니 이미 불러일으켜 나가고 있다. 거기에다가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이라거나 문화적이라고 하는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참으로 인간의 모습 그 자체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시기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전쟁의 한 곳에 집중되어 직접적으로 전력의 증강에 도움이 되는 이외의 모든 것이 제2의적 지위로 회부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원래부터 그것은 문화의 중요한 이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문화의 퇴색을 애석해하는 자의 심정도 아니다.
문화는 의심할 것 없이 인간정신의 가장 존귀해야 할 산물이며, 인간생활의 귀추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무력, 정치력, 경제력과 같이 직접 적의 전력을 좌절시키는 것은 아니다.
지난여름 대동아문학자대회의 분과회의 석상에서 어떤 귀환 작가가 “백만 권의 셰익스피어 전집이 도쿄의 하늘로부터 비가 되어서 내려와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적의 한 방의 폭탄이 떨어져 오면 큰일이다”라고 노호(怒號)한 것은 결코 문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자의 외침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것은 스스로 문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자의 말로서는 일단 자기모순의 여운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또 문화면 . 부진의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오해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문화는 말이며 옷이다.
핵심은 적을 넘어뜨리는 한 동작일 뿐, 다른 것은 모두 그에 이르기 위한 준비이며 보조인것이다.
◇
그러나 이와 같은 현재의 결전 단계에서 문화의 부진 또한 할 수 없다고 체념하는 것은 결코 문화일에 관계하고 있는 자의 무위무책(無爲無策)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며 1억 국민을 빠짐없이 전투에 배치하지 않으면 안 될 오늘날, 문화 일에 관계하고 있는 자도 또 그가 갖고 있는 전부를 통틀어서 이 전쟁에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누구의 머리에도 떠올리는 것은 이른바 문화의 전사로서 문화인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가닥 실천적인 임무이며,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지난 1년간의 조선 문화계도 능력에 맞는 일을 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4월의 조선문인보국회의 성립, 몇 차례에 걸친 문화인의 보도연습 참가, 대동아문학자대회와 만주예문(藝文)연맹에 대표파견, 12월 12일의 조선신궁대전(大前)의 결의선양대회, 기타 츠지(辻) 시전(詩展), 문학전(文學展) 등등 세어 보면 응분의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고 할 수가 있다.
특히 총력연맹의 주선으로 내지의 유력 작가나 편집자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초빙한 것은 훗날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측의 조선에 대한 무이해가 조선의 진로를 막는장애가 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비해서는 연극은 영화의 공급원 등의 외부적인 원인도 있어서, 전쟁전보다 오히려 왕성한 것 같은 현상을 보였다.
이전에는 오락물로 혜택 받지 못했던 농산어촌까지 연극을 가져간 이동극단원의 고생은 고맙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총독상을 내건 제2회 연극경연대회는 참가극단의 숫자와 마음의준비가 작년보다도 한 층 약진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작년대회에서 모처럼 갖고 있었던 기대 -이전의 연극과 신파가 서로 가까워지며 하나의 새로운 국민극의 방향을 만들려고 보인 노력이 또다시 저속과 편승의 방향으로 무너져 가는 듯한 인상을 나는 품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러한 걱정이 한 때의 기우에 끝나면 다행이다.
영화는 “젊은 모습”을 보았던 것뿐이어서 일반적인 것은 말할 수 없으나, 이러한 영화에 의해서 비로소 조선영화가 내지의 각 도시에서 일제히 상영되는 기회도 열렸다고 하니까 이 이후는 더욱 한층 분기해도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획이나 기술이 불충분한 곳에서는 시나리오의 선택이 점점 중요한 뜻을 가지리라고 생각한다.
◇
하나하나의 작가나 작품의 내용에 들어가서 감상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대동아결전의 해를 맞이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은 이제야말로 이 위대한 전쟁의 교훈을 마음에 아로새기고 몸소 참다운 문화전사로서의 자각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여름의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저는 결전문학의 이념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쟁에 바친다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어떤 친구로부터 “그러면 작가는 포스터만 쓰고 있으면 되느냐”하는 반문을 받았다.
그렇다, 필요하면 작가는 포스터의 문안에 그의 전 지능을 기울여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이 선전가의 그것과 다른 까닭은 작가는 인간의 혼을 배경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정신의 귀추를 응시하고 그 궁극의 비밀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는 충동에 쫓겨서 평소 피투성이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 작가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교만한 생각을 떨쳐내면서 엄숙하고 준열한 시련 속의이번 대 전쟁은 작가에게 가장 위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이번 전쟁으로 비로소 몸도 혼도 정화된 것 같은 느낌을 품게 되는 자는 반드시 저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더 진지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더 경건한 태도로 이번 전쟁에 자신을 바쳐야 하는 길을 생각하지 않으면안 된다고 생각한다. (끝)
<출전 : 兪鎭午, 「文化亦戰爭と共に」, '朝日新聞'(아사히신문) 中鮮版, 1943년 1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