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현스님의 ‘수미산 원정대’ 체험기
2021-07-28 자현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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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에는 화택의 비유가 있다. 여기에는 거대한 불난 집이 등장하는데, 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안에 있는 아이들은 집에 불이 난 줄 모른다. 오늘날의 한국불교 역시 불타는 저택과 유사하다.
전 세계가 명상 열풍에 휩싸여 있는데, 포교의 역량 부재로 명상 종파인 조계종은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조계종은 육조혜능 스님께서 선종(남종선)을 펼치신 조계산을 차용한 종단이다. 즉 조계종은 태생적으로 명상(선)에 특화된 불교인 것이다.
실제로 조계종은 매년 여름과 겨울 안거 때, 2천여 스님들이 선원에서 치열한 정진을 하는 세계불교에서도 내로라하는 올곧은 수행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통만을 고수하다가 시쳇말로 물이 들어왔는데도 배를 출항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때문에 한국불교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처럼, 서서히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이 무렵 포교역량의 재고를 위해 새로운 깃발을 들어 올린 것이, 지난 2월에 발족한 ‘수미산 원정대’이다. 수미산 원정대는, ‘상월결사라는 내적인 수행 실천’에 반향하는 ‘외적인 대승 정신의 신행 운동’이다.
상월결사와 수미산 원정대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변화’와 ‘안으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변화는 기득권이 아닌 소외된 변방에서 피어나는 불꽃이기 쉽다. 이러한 불길이 안으로까지 번지면서 거대한 변화가 촉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월결사와 수미산 원정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보통 기득권은 배가 좌초돼도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변화에 수동적인 경우가 많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재력과 권력이 있는 1등석 승객은 모두 구출되고, 죽는 것은 3등석의 민초들이 아니었던가?!
조선이 폐망하고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IMF가 터졌을 때도 기득권자들은 언제나 비겁했다. 이런 점에서 위로부터의 각성과 혁명인 상월결사와 수미산 원정대의 추동은 크게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불교가 아직 꺼지지 않는 본원의 불씨를 간직한 저력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4월엔가, ‘수미산 원정대의 강의를 해줄 수 없냐’는 연락을 받았었다. 강의료는 없다고 했지만, 수미산 원정대의 목적이 불교의 포교며 그것도 불교인이 아닌 비불교인이나 타 종교인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흔쾌히 수락했다. 나의 서원 역시, 불교인이 아닌 불교의 접점에 있는 분들에 대한 포교이기 때문이다.
7월8일 목요일에 수업 진행차 봉은사로 가게 됐다. 사실 수미산 원정대처럼 청중의 스펙트럼이 넓은 수업은 난이도가 무척 높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수업의 난이도는 대학원이 가장 쉽다. 이들은 학점과 졸업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수업 다음은 대학의 전공수업이고, 교양수업이 대학 수업 중에는 가장 어렵다.
또 대학의 교양수업보다 어려운 것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다. 대학이야 교수에게 학점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교양 강좌는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미산 원정대는 전문가부터 왕초보까지, 말 그대로 알파와 오메가가 동시에 공존하는 최강의 난이도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수업 시간이 저녁 7시30분부터 9시까지다. 이 말인즉슨, 청중이 낮에 일한 피로한 분들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수미산 원정대를 이끌고 온 분들의 난관과 노고가 절로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런 악조건을 관통하는 긍정성은, 이것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의 능동적인 노력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이는 수미산 원정대의 어려움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히든카드라고 하겠다.
<논어>에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말이 있다. ‘근본이 바로 서야 도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수미산 원정대의 높게 올려진 깃발과 자발적인 동참은 올바른 방향을 이미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는 말이 있는데,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올바른 가치를 널리 펴고 크게 알리는 일이 요청된다. 대승불교가 민중에게 쉽고 낮게 다가선 것처럼, 수미산 원정대도 대승의 정신을 계승하며 넓게 펼쳐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속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깃발을 든 것이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면, 이를 완수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반향과 작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떨치고 일어나 수미산 원정대의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 청나라의 팔기군 10만이 명나라의 한족 8000만을 이긴 것이, 어찌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기적이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의 작은 노력이 한국불교의 위대한 터닝포인트이자, 웅비의 기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미래에 부끄럽지 않은 오늘을 위해, 이제 다 같이 힘을 보태 실천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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