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우 스님의 임종게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는 입체적인 화면이 어떤 순간에 불현듯 떠오르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제주도 산방산 앞에서 바닷물이 바로 발아래보이는 바위에 앉아 있다가 홀연히 바위도 사라지고 나도 반쯤은 어디로 가버리고 바닷물만 출렁거렸던 적이 있다. 그 잠깐 동안 고깃배들과 주변의 바위들과 저쪽 중문해수욕장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제주도의 바다를 꺼내는 것은 필자의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제주도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열반에 드신 조선시대의 한 스님이 떠올라서이다.
불교중흥 위해 노력하다
제주도에서 순교한 스님
허깨비같은 인생사 노래
허응(虛應) 보우(普雨) 스님. 마음을 텅비우고 천지만물과 감응하면서 두루두루 지혜와 자비의 비를 내려준 스님이다. 우여곡절의 인연을 따라 스님은 제주도에서 입멸하셨다. 그 때 짓는 게송을 흔히들 임종게로 부른다. 스님의 임종게는 드라마틱하다.
幻人來入幻人鄕 (환인래입환인향)
五十餘年作戱狂 (오십여년작희광)
弄盡人間榮辱事 (농진인간영욕사)
脫僧傀儡上蒼蒼 (탈승괴뢰상창창)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위장잠입하여 /
오십여년 연극배우로 미치광이 배역맡았네 /
인간세계 영욕의 일 실컷 희롱했으니 /
꼭두각시 몸버리고 푸른 우주 허공을 올라가노라
연극배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고 무대 뒤로 들어가는 것처럼 스님은 담담하게 자신의 오십년짜리 연극의 배역을 소화한다. 연극의 끝부분에서는 어이없이 장렬하게 장살당하는 연기까지 소화하면서 연기 투혼을 불사른다.
얼마전 양평 용문사에 들렀다가 은행나무 앞에서 잠시 스님 생각을 했다. 스님이 용문사 마당을 포행할 때 이 은행나무의 크기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은행나무는 용문사를 거쳐간 스님들과 보우 스님도 기억하고 있겠지. 은행나무의 뿌리는 땅으로 깊이 파고들었고 보우 스님의 연기내공의 뿌리는 휴정 스님과 유정 스님에게 이어져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굵직굵직한 배역을 소화하게 한다.
스님의 연극무대는 제법 넓다. 금강산 마하연암에서 제주까지 뛰어다녔으니 자동차도 없고 기차도 없고 쾌속선도 없던 그 시절에 스님이 만보기를 달고 있었더라면 찍힌 숫자가 꽤나 되었을 것이다. 문정왕후가 주연급 조연으로 연극에 등장하면서 봉은사가 잠시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탄핵상소를 올리느라 그 시대에 귀한 종이들이 많이도 소비되었다. 그걸 만류하느라 퇴계 이황 선생도 애를 쓴다.
세월이 조금 흐른 훗날 사명대사는 “우리 시님께서는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가던 분이다”라는 유명한 연극대사를 읊조린다. 최근에는 동국대학교 국문과 김상일 교수님도 이 시를 퍽 좋아하여 멋진 필체로 써서 연구실 책상 유리 밑에 끼워놓고 있다.
금강경에서도 “중생의 삶은 꿈같은 것이고 허깨비 같은 것이고 물거품 같은 것이고 그림자 같은 것이다(如夢幻泡影’)”라고 말하고 있다. 연극으로 풀이해본다면, 절대 연기 자체를 설렁설렁하라는 얘기는 아니고 혼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삶의 배역을 연기하되 자신이 맡고 있는 배역이 고정불변의 실체를 갖고 있다는 집착에서는 벗어나라는 말쯤 될 것이다. 어쩌다보니 법보신문에 연재하는 배역을 두번째 맡게 되었다. 2000년 초반에 배역이 왔을 때 착실하게 연기했더라면 졸업했을 배역을, 연기학점이 모자랐던지 다시 맡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되든 안되든 진지하게 맡은 연극의 대사를 잘 읊조려볼 생각이다. 직접 간접으로 원고독촉 배역을 맡은 훌륭한 배우들이 있어서 이번 연극은 잘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 업력(業力)의 연기를 행원(行願)의 연기로 승화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1230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