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마 신부 전기(三)
『경향잡지』 1949년 6월호 제43권 제6호(84〜86쪽)
四, 최도마신부 일생의 편영(片影)
1, 탄생과 학창시대
가 탄생
우리강토에 서양인 선교사로 최초 입국하신 모방신부께서 포교상 본방인 성직자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임을 깨다르시고 장내성있어 보이는 소년 셋을 가리어 중국 「마카오」에 유학시키셨는데(1, 달래 二, 99) 그 중에 하나가 최도마 인 것은(2, 달래 二), 160 우리가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최도마는 아명으로 양업(良業)이라고 불렀다 한다.(3, 남田小史, 146) 그 외에 도마신부의 이름이 그묘석(墓石)에 정구(鼎九)라고 기록되였다 이는 도마신부 친족들이 전하는바이다. 최도마는 一八二一년三월一일에 탄생하셨다고 그 친족들은 전한다.
「모방 신부께서 한국신학생 선택하신 사정에 관한 문헌에 김안드레아 보다 최도마와 최상지거는 더 나히 드러보였다 하였고(4, 고례 二, 11) 마까오 경리부 신부님의 수기(手記)에 한국신학생세명의 초인상을 말하였다는데 十七, 八세나 된 이 학생들은 기특하게도 순진스러워 보이더라 하였다(5, 고례 二, 14). 도마는 충청남도 홍주(형재=청양) 다래꼴 경주최씨촌에서 누대 열심한 가톨릭신자가정에 태여나 고이고이 멌다. 그 가세는 그동리세어 유여한 형편이었다(6, 달래 二), 160. 부친은 방지거(훈)이오 모친은 이마리아이니 즉 내포(內浦)의 종도라 일컫는 이공사가의 가족이다.(7, 달래 二, 164)
도마는 六형제의 장남이다. 이상에 말한바와같이 부모 다 一八三九년박해당시에 위주치명하셨고 부친은 우리가 잘 아는 복자 최방지거 회장님이시다. 그일생은 기해일기(己亥日記)와 복자전기 에 소개된바이오 위에도 부분적 기록하였거니와 여기에 그아드님 신부의 귀국이후 친이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에 계신 「레그레좌」신부께 올린 다음 문헌을 참고 함도 의미있다고 본다.(8, 달래 二, 161)
「우리 부친이 비록 학문이 없어도 묵상할때와 책볼때에 기묘한 도리를 잠잠이 통달하여 심오한 뜻을 알고 혹 일할때나 쉴때나 집에 있을때나 길갈때나 항상 천주성의에 결합하여 성교도리만 생각하고 항상 하는말이 다 어질고 그 열심하므로 모든이의 마음이 감동하며 그 훈회하는 말을 듣는자는 절조 천주사랑하는 마음이 발하여 그 애주애인하는 표양에 간절이 사모하였고 혹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살때에 좋은것을 탐치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장사의 언짢은 물건을 가리어 사니 모든이가 비소하며말하거늘, 부친이 이르되 궂은 물건이라고 아무도 사지아니하면 그 가난하고 불상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리오 하였으며 혹 흉년이나 질병이나 환난을 당할때에는 사람사랑하는 마음이 평상한때보다 더욱 간절하더니 한번은 장마때를 당하여 각처에 오곡이 다 수패의 해를 받어 사방의 인민들이 슬퍼하며 이 흉년에 어떻게 살어날고 하는소리 그치지아니하되 홀로 우리부친은 마음을 평화이하여 모든일이 다 천주의 명을말미암어 나느니 천주께만 확실이 믿으면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며 무엇을 근심하리오 하여 그런 흉년에도 힘써불상한 사람에게 애긍하며 가을에 실과딸때에는 좋은 것으로 가리어 빈궁한 사람에게 잘 주고 신형(神形)의 선공을 각가지로 할때에는 먼저 할것은 먼저하고 후에할것은 후에하며 그 모친에게는 더욱 먼저 효양하고 형제우애하고 아랫사람을 예로써 다스리며 모든이를 다 지위대로 겨섬하고 기해년에 회장소임을 맡아 모든교우를 훈회하더니 서울서 군난이 이러나 각지방이 풍파를당하여도 항상 권면하며 위로하여 일편에로 치명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며 일편에로 가난한 벗을 돌보다가 집에 돌아와 집안사람들을 훈회하여 치명하기를 예비하라 하더니 그날새벽에 포교들이 온줄을 알고 마조나아가본후 물으되
어디서 왔느뇨? 서울서 왔노라.
나 벌서부터 오기를 기다렸더니 어찌하여 더디왔느뇨. 나 가기를 위하여 미리 예비하였으니 청컨대 밝기까지 평안이 쉬다가 밝은후에 한가지로 가자 하니 포교들이 이같이 후대함을 보고 다 이상이여겨 서로 이르되 이사람은 참 성교회사람이라 그 도망할 염여가없다. 밝기까지 평안이 자자. 우리부친은 그동안에 모든교우들을 다리고 다 치명하기로 권면한후 우리모친 이마리아다려 밤을 예비하게하고, 있는바 물건과 의복을 다 포교들에게 나눠주고 일제이 四十명이 떠나갈새 남자는 앞에가고 여인과 아이들은 그뒤에 느러서서가고 포교들은 뒤를 따러가며 모든 외교중에 어떤사람은 불상하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능욕하며 비소하되 부친은 더욱 유덕을 발하여 한가지로 가는 교우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여 이르되
신덕을 견고케하여 용맹한 마음으로 바삐갈지어다. 주의 천신이 금자를 가지고 우리들의 거름을 잼을생각하며 오주예수의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산에 이르심을 생각하라 하여 서울까지 이르도록 항상 이같이 권면함으로 도성에 드러가매 모든 외교인들은 다 비소하여 이르되…
포교들이 즉기 옥에가두고 쇠사슬로 잠근후 이튿날 포장이 먼저 우리부친을 올려 문목하고 엄형하며 배교하기를 강박하니 부친이 대답하되
가엽도소이다. 삿도의 강박하심이여. 비컨대 임금의 신하가되여 충성을 잃어버리면 그죄 만분이나 크거던 하물며 지존무대하신 천주를 배반하면 그죄 어떻게 크겟나이까.
포장이 노하여 곤장(棍杖)으로 백여도를 치니 몸이 온전히 으서지고 터저 피가 흘러 가득하며 다시 옥에가두고… 이에 문목한제 있던 포교들이 사관청에로와 우리부친을 불러 성교책 하나를 주며 이르되
우리들이 너 책보는 소리를 듣고저하니 이 책을 몇장만 보라 함에 즉시 즐기운 마음으로 책을 볼새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온전한 힘으로 맛있게 읽으니 듣는자 다 이상이여겨 이르되
저 이같이 엄형을 받은후에 몸이 지극히 아프렸마는 어떻게 정신을 차려 보는고 하여 다 칭양하였다하더이다…」
부모의 성격을 보아 자손의 됨됨을 흔이 점치는 것이다. 그러나 최도마의 소년시대에관하여 역사는 너무나 침묵을 지키니 유감천만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