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설정
평생을 중등학교 영어 교사로 살아왔다.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셔서 좋겠습니다. 외국 여행 가시면 편하시겠어요’라면서 부러운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웃음으로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도 않아요. 딱 고등학생 수준이죠’라고 말한다. 고등학생 수준만 되어도 외국 여행이나 일상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은 없겠지만, 평생을 해왔다고 하기엔 스스로 부족함이 느껴진다.
퇴직 후, 번역작업을 시도해보았다. 그래도 평생 영어를 해왔으니, 그리고 대학원 공부할 때 교육학 서적 번역한 경험이 있으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미국의 칼빈신학교에 유학 가 있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책 한 권(200페이지 분량)을 골랐다. 원래는 두어 달 안에 끝낼 요량이었으나 절반도 가지 못해 손을 놓고 말았다. 문장이 너무 길고, 이 분야의 용어에 익숙하지 못하여 고등학생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핑계로 일단 한쪽으로 던져 놓았다.
역시 문제는 한계 설정이다. 나는 중등 영어 교사로 내 한계를 설정해 놓고 편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다른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선배가 있다. 이분은 90년대 초 외국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의 새벽반에 등록하여 꾸준히 공부할 뿐만 아니라 귀에는 항상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이렇게 30년이 지난 지금 영어 실력이 놀라운 수준이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유럽 캠퍼스 투어를 다녀오고(패키지가 아니고 모든 준비를 스스로 해결), 유학 가는 학생들 영어지도를 해줄 수 있을 정도이다.
‘코이’라는 잉어과에 속하는 관상어가 있다. 청소년 대상 특강에서 ‘꿈의 크기에 따라서 자신의 성장크기가 결정된다’는 취지로 강의할 때 자주 예시로 드는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자라는 환경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진다고 한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센티미터, 좀 더 큰 수속관이나 연못에 두면 15-25센티미터,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 물리적인 한계가 성장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고기와 달리 인간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정할 수 있기 때문엘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꿈의 크기를 조금 키울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여 일주일 내내 세상 문화 속에서 살다 온 교회 청소년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쳐 주고 싶은 꿈!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외국이나 국내 이주민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며 선교하고 싶은 꿈! 좋은 글을 써서 이웃과 나누고 싶은 꿈! 이런 꿈들은 젊은 날 방향을 정하고 평생을 노력해도 이루기 쉽지 않을텐데 이 나이에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안한 퇴직 후 삶을 주신 것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함 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이라도 꿈은 크게 실천은 작은 것부터 하는 것이 행복한 노년을 위한 첩경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