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1104. 가난하다는 것과 부자라는 것(240721)
민요세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비자 교리를 받을 때 가르침에 대하여 동의를 하고 세례성사를 받지만 신앙 생활의 과정에서 자신의 바램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의 갭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냉담을 하게 된다.
삶의 어떤 계기에서 간증적인 경험을 했다거나 명석한 논리와 깨달음으로 하늘나라를 인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방법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이라면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 길을 가려고 하겠는가?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하늘나라’라는 관을 가지고서 말이다.
하늘나라를 가는 방법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언어로만 채워져 있다면 따르기가 어렵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 보다 힘들다고 하는 말을 부자는 하늘나라에 절대 못 들어간다 라고 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짙게 받아들인다면 가난에 대한 호의와 부자에 대한 부정이 대립하게 된다. 그러면 누구나 가슴에 간직한 부자가 되는 선호를 깎아내리게 하는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돈을 벌라는 말이야 본을 벌지 말라는 말이야? 하는 혼돈을 불러온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이런 저런 이유로 헌금을 요구한다.
선교를 위해, 가난한 이들을 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돈을 벌어라, 단 정당한 방법을 연구하고 적용해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떨까?
또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경계를 구체화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도록 논리화 하고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 나는 부자이다, 아니면 나는 가난한 자이다 라는 물적이거나 정신적 가난에 대해서도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과부의 헌금은 반면교사는 될지언정 모두 다 바쳐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현실적이지 못하다. 모두에게 그렇게 적용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진리를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